전쟁이 끝나자 군정이 들어선 타밀 지역

[세계] 빈손으로 내몰린 피난민 재정착촌, 이동의 자유도 없는 난민캠프…
검문소 군인만 촘촘한 스리랑카 북부를 가다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싱할라족 군인은 점령군이 되어 북부 지방 곳곳에 있다. 마나르 지역 골목에서 검문을 서고 있는 군인들과 이들을 보는 민간인들 (© Lee Yu Kyung 2010)

스리랑카 북부는 군인 천지다. 서부 마나르에서 북부 관문 도시 와우니아를 거쳐 오랜 반군 통치 지역이던 와니 지방까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의 소총(AK47) 밖으로 시야를 던지는 게 불가능하다. 북부 타밀 지역을 이어주는 간선도로(A9) 위 오만타이 검문소에서는 여전히 통행자를 샅샅이 검사하고, 북부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가방을 수색했다. 와우니아 타운에서 오만타이 검문소까지 4km를 이동하는 동안 이미 세 차례 검문을 받은 뒤에도 말이다.

타밀인 밀집 지역인 북부의 ‘군사화’는 종전 이전에 일찌감치 정부군 손에 넘어간 ‘마나르~와우니아’ 80km 도로에 늘어선 군 초소나 마나르 지역에서 본보기로 드러난 바다. 마나르에는 무장한 해군들이 한적한 마을 골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난 터라 골목에 선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불러 세우는 일은 현저히 줄었다.

마나르 와우니아 약 80km 가량 되는 도로 양편으로는 맑은 하늘 아래 심한 벌목현상과 군 초소가 자리잡고 있다 (© Lee Yu Kyung 2010)

“말도 마라. 시내에 한번 나가려면 몇 개 검문소를 거쳐야 했는지….” 마나르의 ㅅ마을 타밀족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리 와’ ‘저리 가’ ‘가방 열어’와 같은 검문소 ‘명령어’만은 싱할라어로 줄줄 읊었다. 반면 싱할라족으로만 구성된 군인들은 타밀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하여, 영문 모르고 검문소에 붙들려도 하소연 한마디 할 수 없던 게 타밀족이 자기 땅에서 겪어온 수십 년의 수모다. 그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사라진 남편, 아들, 그리고 딸의 실종사건은 마을에서 그리 특별한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주류 싱할라족 군인과 소수 타밀족 주민간 말이 통하지 않는 검문소. 그 검문소에 걸려 군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갔고 실종되었다. 사진 속 여인(35세)의 남편 역시 2007년 북부 한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소식이 없다. 경찰서를 비롯 여러 인권단체들에 남편 실종사건을 신고하고 받은 신고서가 그녀의 두 손에 한 가득이다. (© Lee Yu Kyung 2010)

9월 중순께, 피난민(IDPs) 캠프에서 풀려난 이들이 ‘재정착’했다는 마나르 ㅇ마을로 향했다. 주요 검문소는 무사통과했지만 이후에도 군 초소가 시시각각 나타났다. 멀쩡한 건물은 별로 없었다. 다만 화장실 몇 개가 꼿꼿이 서 있거나 총탄 자국이 난 폐허들이 나뭇가지로 덮인 채 남아 있다. 화장실 위치를 보고 ‘여기쯤 집이 있었지’라고 감을 잡는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1990년대 초반 폭격을 맞은 교회는 이제 재건 작업이 한창이다. “교회를 지으려고 해도 정부가 건축자재 반입을 허용하지 않은데다 수리할 만하면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교회 건물에 손대지 못했다고 마을의 신부는 설명했다.

재정착 마을엔 집도 식량도 부족해

전쟁으로 피난 갔다 ‘재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온 주민들에게는 임시 가옥용으로 국제이주기구(IOM)가 양철판과 시멘트를 제공한다. 더운 날은 안에서 견딜 수 없고, 10월에 시작되는 우기에는 물이 차기 쉬운 임시 가옥이다. 최근 한 구호단체가 우기를 앞두고 벽돌 자재를 보급하기 시작했다는데, 우기는 코앞이고 벽돌집은 가물에 콩 나듯 눈에 들어왔다. 이 밖에 유엔고등판무관사무소(UNHCR)가 2만5천루피(약 25만원)의 정착금을 지원하고, 세계식량기구(WFP)는 6개월간 기본적인 식량을 제공한다. 약 1년 전 재정착을 시작한 이 마을 주민들은 그나마 지난 8월까지 WFP의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전쟁 때문에 5년간 농사짓지 못한 땅에 이제 막 씨를 뿌린 뒤 식량 지원이 끝났다. 주민들은 “수확을 하기까지 4개월은 걸리는데 그때까지 먹을 게 없다”고 한숨을 지었다.

전기는 24시간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천주교 단체인 카리타스(Caritas)가 학생이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태양열 랜턴을 일부 제공했다. 물은 우물 물을 끓여 마시지만 “마실 만해서가 아니라 달리 방법이 없어서”라고 주민 란지타(32·가명)는 말한다. 이 마을에는 의료시설이나 의사가 없다. 그 전에 싱할라족 의사가 한 명 있었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잘못 처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그래도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이 마을을 ‘베스트’ 재정착지로 꼽았다. 한 비정부기구(NGO) 직원은 “사나르 지역으로 간 주민들은 임시 가옥의 뼈대와 지붕 정도만 주어진 채 밀림 속에 던져지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재정착 지역의 현장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 산지브(31·가명)가 전하는 현실도 이를 뒷받침했다. 총 150가구가 재정착한 페리아마두, 타제나마두, 팔리아뤼 등지의 주민들은 임시 가옥 자재마저 없는 빈손이라고 산지브는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구호단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8월에 재정착한 이들에게는 화장실이 없고, 9월2일 재정착한 주민들에겐 지붕이 될 만한 덮개 하나만 달랑 주었고….” 말단 공무원 산지브는 답답해했다.

‘구호’와 ‘NGO’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의 알레르기는 참 지독했다. 한 NGO는 단체명 마크가 없는 차량을 이용하도록 권고받았다. 또 다른 NGO는 ㅇ마을에 농사용 펌프를 기부하려 했지만, NGO 차량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 주민들이 와서 펌프를 가져갔다고 전했다.

열악한 재정착지에서 가장 크고 건실하게 서 있는 건물이 바로 군 캠프라는 점은 종전 뒤 스리랑카 북부의 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반군으로 몰려 남편이 수감 중인 라즈니(28·가명)가 고향 복귀의 첫 소감으로 “공포스러웠다”고 속삭인 것도 그런 진실의 단면이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통치 지역이었고, 우린 스리랑카 군인들로 둘러싸인 환경에 익숙지 않아….” 그녀의 이어지는 속삭임이다. 9살 소녀 데보라처럼 반군의 징병제에 끌려간 오빠를 둔 아이에겐 무장 군인이 정부군과 반군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연상시키며 고통을 가중했다.

돌아간 고향에도 편히 머무를 집은 없다. 마나르에 재정착한 주민들이 정부군의 공세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있다. (© Lee Yu Kyung 2010)

재정착에 밀려 더욱 참담한 난민캠프

“마나르 쪽은 아무것도 아니다. 킬리노치, 물라이티브 쪽으로 가봐라. 민간인보다 군인이 훨씬 더 많다. 모든 마을이 군 점령 지대다.” 외부인의 출입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지역을 방문한 타밀민족동맹(TNA) 소속 국회의원 슈레스 프리마찬드란은 전화 인터뷰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지난 9월 기자회견에서 “지난 6월 물라이티브 비수와마두 지역으로 풀려난 255가구 1215명의 주민이 물라이티브 사령관의 불허로 자기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인근 학교 등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물론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은 전혀 닿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가 “올해 말까지 재정착을 완료하겠다”고 말한 게 지난해 중반으로 종전 직후다. 그해 8월부터 난민을 ‘석방’하기 시작했고,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HCA)이 올해 8월3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난민 25만8846명이 석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친적집 혹은 중간 캠프캠프(난민 캠프에서 재정착지로 가면서 거치는 캠프)로 풀려난 이들을 모두 합친 수치다. 그리고 여전히 피난민 캠프에는 난민 3만 명 이상이 남아 있다. 난민에게는 지난해 12월1일부터 제한적으로 이동의 자유가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까지 캠프로 복귀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내 블록(C5)에 같이 머물던 20대 중반의 청년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그 때문에 구타를 당한 뒤 반군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의 병세가 악화돼 와우니아 병원에서 콜롬보로 옮겨드리고 간호하다 늦게 돌아왔다고 한다.”

‘존 4’ 난민캠프에서 열흘간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온 부디마(21·가명)의 목격담이다. 부디마의 말을 더 들어보니 재정착이 진행되면서 피난민 캠프는 찬밥이 된 듯했다. “선생님을 할 만한 사람이 다 풀려난 뒤에도 학교는 운영되지 않는다.# NGO의 급수차가 나눠주던 마실 물이 8월부터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난민들은 캠프 안 펌프물을 마시고 있다. 24시간 들어오던 전기도 8월부터는 하루 5시간이 고작이다.”

전쟁 막판에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라(35)는 캠프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채소가 없어 밥과 ‘달’(남아시아의 주요한 부식인 콩죽 겸 커리)만 먹을 때가 많다. 전에는 비누도 있었는데 그것도 배급이 중단됐고, 커리·고춧가루 등도 지난 석 달간 배급이 전부 중단됐다”고 말했다.

부디마와 사라의 증언은 실제로 OCHA의 6월 보고서와 맞아떨어진다. 보고서는 “마실 물 공급은 7월 말쯤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가 제공하던 피난민 식량이 5월31일 중단됐다” “피난민 지원을 위한 모든 필수품이 요구수준에 심각하게 못 미치고, 피난민 지원단체에 대한 거부도 위험한 수준”이라고 적고 있다.

‘라자팍세 왕국’화되는 스리랑카

30년 전쟁이 종지부를 찍은 지 1년6개월,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 난민의 생존권보다는 타밀 지역의 군사화와 장기집권 음모에 여념이 없다. 스리랑카의 군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종전 뒤 1년간 스리랑카 군의 수가 17만5천여 명에서 23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앞으로 30만 명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북부 지역에는 현재 지역 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어떤 민간 행정도 이행되지 못하는 ‘군사행정부’가 들어서 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계속되는 군사력 증강을 두고 전문가들은 북부 타밀족뿐 아니라 스리랑카 전역의 반대파를 겨냥한 조처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라스 폰세카 전 군 총사령관의 구속은 한 본보기다. 그는 대선에 출마해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도전한 ‘죄’를 지었고, 전범 재판이 열리면 증언하겠다는 발언으로 현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런 와중에 9월8일 스리랑카 의회가 긴급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은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임기 제한 없이 권력을 쥘 수 있는 여건과 모든 독립기구의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콜롬보대학 법학교수 로한 에드리시나는 이렇게 개탄했다. “헌법 개정안을 공지도, 공개 토론도, 국민적 동의도 없이 긴급 법안 형식으로 2~3일 안에 처리해버렸다. 소수자(타밀족과 무슬림)의 권익을 더 악화시킨 터라 민주주의와 인종분쟁 모두의 관점에서 크게 후퇴한 헌법이다.”

스리랑카는 지금 의회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라자팍세 가문의 왕국’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왕국의 북동부 타밀 지역은 패배와 절망감, 그리고 국제사회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서리치고 있다. 남부는 여당의 독재와 야당의 분열로 정국이 마비된 상태다.

마나르·와우니아·와니·콜롬보(스리랑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 아래 인터뷰는 지면 관계상 실리지 못한 부분까지 담았습니다.

타밀 소수정당 대표 인터뷰

“우리 땅을 팔레스타인처럼 만들고 있다”

마노 가네샨(50)은 타밀소수정당인 민주민중전선(Democratic People’s Front) 대표이자 콜롬보의 타밀표를 끌어모으던 정치인이다. ‘화이트 밴 납치’와 실종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해온 인권운동가이기도 한 그를 콜롬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북부 재정착 지역을 방문해봤나.

‘재정착’이 아니라 ‘식민화’만 가속화되고 있다. 싱할라족 군인들을 정착시키고 있고, 불교사원을 짓고 있다.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의 문화·종교·언어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인은 그들의 땅에서 세대를 거듭해 난민으로 사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만들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캔디 (스리랑카 중부)에서 출마하여 의석을 잃었는데,왜 콜롬보에서 출마치 않았나?

전략적 실수였다. 하지만 내가 출마한 지역구에 타밀인들이 많이 살지만 타밀 대표가 없어 간거다. 다른 타밀 정치인들에 비해 제법 많은 표를 얻었지만 당선되기엔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우리 선거운동을 훼방하는 폭력사태가 12번이나 벌어졌다. 전 장관출신 마힌다난다 주먹들 짓이다.

황당한건 콜롬보에서 당선된 당신 형이 여당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그는 당이 공천했고 내 지명도에 힘입어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가 지금 나와 당 그리고 타밀커뮤니티를 배신한 채 정부쪽으로 넘어갔다. 그와는 이제 말도 안한다.

‘화이트 밴 납치’ 는 전쟁 이후 줄었다고 하던데…

없는 건 아니다. 한달에 한 번 정도. 그전에는 하루에 10-15건 정도는 되었다. 전쟁 후 (납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특히 타밀 커뮤니티 내에 ‘패배주의적’ 사고가 있어 반정부 타밀 인사 수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갑자기 마하트마 간디라도 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필요성이 떠오르면 납치도 다시 벌어질 거다.

지난 대선에서 군 총사령관 출신인 사라스 폰세카 후보를 지지했다. 타밀족 수만 명을 학살한 전쟁의 사령관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마힌다 라자팍세(현 대통령)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다른 방안이 없었다. 싱할라의 주류 진영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직접 대선에 출마했다면 몇십만 표 정도 얻었을 것이다. 그게 전부고, 그건 휴지가 되는 표다.

지난 2월 폰세카가 체포당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걸로 안다.

폰세카 사무실에서 토론 중이었는데, 한 장군(소장)이 들어와 “폰세카 선생, 당신을 체포하러 왔소”라고 말했다. 폰세카는 “군이 아니라 경찰에 출두하겠다. 나는 민간인이다”라고 답했지만 그 장군은 무장 군인들을 데려오더니 저항하는 폰세카를 개처럼 끌고 갔다. 싱할라족은 그동안 나를 ‘타밀호랑이’ 분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내 앞에서 타밀호랑이를 끝장내고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영웅’으로 추앙받던 사령관을 동네 개처럼 끌고 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구성한 ‘전범 자문위원회’는 어떻게 보나.

(목소리를 높이며) 신뢰하지 않는다. 몇 달 전 구성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 왜 그렇게 연기하나. 자꾸 연기하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 타밀인은 골목골목을 쑤시며 모든 방법을 강구해봤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 어디 빛줄기는 없는지 찾으며 너무 절박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2009년 상반기)에 국제사회가 보여준 태도는 역겨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적 위원회의 조사가 필요하다. 이 정부가 구성한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를 결코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콜롬보 = 이유경)

관련 기사 <한겨레21> [2010.10.29 제833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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