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고통이 쓰나미처럼 다가왔다

**아래 글은 필자가 <리영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버마 프로젝트’  3차 취재,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취재후기입니다. 

이유경 Penseu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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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일제 식민통치’가 떠오르는 이 숫자는 버마 로힝야 무슬림들의 방글라데시 난민사이기도 하다. 1978년 버마 군사 정부가 무슬림 반군 토벌을 내건 ‘킹 드래곤 작전’으로 25만명의 로힝야 무슬림들이 방글라데시로 쫓겨오면서 난민 ‘근대사’는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버마 문제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버마(동부)-타이 국경’의 난민 이야기는 적잖이 들어왔을 것이다. 좀 더 적극적인 이들은 타이 북부 메솟이나 치앙 마이 등을 통해 난민캠프와 관련단체들을 방문한 적이 ‘한두 번 쯤’ 있을 것이고, 보다 더 적극적인 이들은 이들 지역에서 자원활동도 하고 기부도 했을 것이다. 엔지오, 시민단체 그리고 기자들이 ‘북적’대는 그 국경엔 난민들을 이해하려는 현장학습도 상대적으로 분주한 편이다. 혹여 살윈강을 건너 불법월경 후 카렌주 안 난민캠프로 들어가더라도 내전지의 위험도는 약간 높아지지만 여전히 카렌반군들의 해방구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 바자르(Cox’s Bazar) 일대 로힝야 슬럼가 여인들. 1978년 버마정부의 '킹 드래곤' 작전으로 탈출한 약 25만 명 가량이 방글라데시로 피난온 것을 시작으로 수십 년 간 로힝야 난민들의 탈출과 강제 송환이 반복되어 왔다. 강제 송환의 위협에 늘 두려워하는 로힝야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사는 경우가 많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 바자르(Cox’s Bazar) 일대 로힝야 슬럼가 여인들. 1978년 버마정부의 ‘킹 드래곤’ 작전으로 탈출한 약 25만 명 가량이 방글라데시로 피난온 것을 시작으로 수십 년 간 로힝야 난민들의 탈출과 강제 송환이 반복되어 왔다. 강제 송환의 위협에 늘 두려워하는 로힝야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사는 경우가 많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버마-중국 국경은 어떤가. 지리적 접근의 한계로 외지인이 많지 않은 그곳에선 계속되는 교전과 겹겹 피난길에 카친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나마 카친 반군과 카친 엔지오들이 자기 종족난민들을 돌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난민들 대부분이 여전히 자신들의 땅인 카친 주 반군 영토 안에 자리잡고 있다.
버마-인도 국경으로 말하자면 분열을 거듭해온 소규모 아라칸 반군들이(아라칸 주 주류인 라까잉족 중심으로 구성) 둥지 틀고 있지만 게릴라전이 활활 타오르는 지역은 아니다. 국경 바로 넘어 인도 미조람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아라칸해방당(Arakan Liberation Army) 사무총장 카잉 투카는 “1997년 버마군과 ALP 교전 당시 정부군이 13개의 마을에 불을 질러 생겨난 난민들이 국경쪽으로 넘어와 우리가 보호해줬다”고 말했다. 그 시절을 제외하면 대규모 난민 발생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쪽으로 꾸준히 넘어오는 개별 난민들이 이곳을 지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지막 국경 버마-방글라데시 쪽을 보자. 이곳엔 ‘그나마’라고 수식할 만한 게 없다. 20만-50만 가량 추정되는 로힝야 난민들이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빈곤국가 방글라데시에 흩어져 있다. 돌보는 반군이나 조직이 없는 건 물론이고 약 10% 안팎인 3만명의 난민을 제외하면 난민으로 공식 인정받는 절차마저 거부당하고 있다. 등록되지 않아 구호는 민망한 수준이고 식량구호는 쌀 한톨 없다. 고향만 있고 국가는 없는(Stateless) 로힝야들이 빈국의 빈곤지대에서 공식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실. 이건 찬찬히 곱씹어보면 매우 잔인한 설정이다. 그 세월이 36년이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 바자르(Cox’s Bazar) 타운에서 한 릭샤 운전자가 바퀴에 바람을 넣고 있다. 이 일대 릭샤 운전자들 대부분은 로힝야 난민들이다. 당국의 단속이 있을 때마다 릭샤 운전자들이 첫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 바자르(Cox’s Bazar) 타운에서 한 릭샤 운전자가 바퀴에 바람을 넣고 있다. 이 일대 릭샤 운전자들 대부분은 로힝야 난민들이다. 당국의 단속이 있을 때마다 릭샤 운전자들이 첫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Photo © Lee Yu Kyung 2014)

그 동안 유엔의 ‘협조’와 ‘자발적 귀환'(Voluntary Return)이라는 왜곡된 규정하에 방글라데시 당국은 로힝야 난민을 강제 송환해 왔고 그 구실 찾기에 급급했다. 난민 등록을 막은 건 물론 등록된 난민들의 제 3국 정착 프로그램도 중단시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추방당한 이들은 다시 밀항으로 돌아와 더 깊이 숨어드는 게 현실이다. 또 다른 다수는 위험천만한 난민선을 타고 말레이시아로 향하다 바다에 수장되거나 타이를 거쳐 인신매매단의 잔인한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이중 약 2000-2500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내지 못해 타이 고기잡이 배에 현대판 노예로 팔려간 이들이 몇 명쯤 되는지는 아무도 감이 없다.
인종과 종교 그리고 정치적 박해를 피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곳을 찾아 떠난 로힝야 무슬림들의 난민 여정은 이처럼 끝간 데 없이 처절한 생존투쟁이다. 바로 그 여정을 짚어보는 게 이번 3차 취재의 취지였다. 여러해 동안 여러 국적의 보트피플들을 취재하며 나는 한때 그 난민 밀항선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직접 배에 올라 지옥같은 여정을 함께 하는 것 만큼 확실한 취재는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밀항선은 내가 제 3의 관찰자로만 존재할 수 있는 연극무대가 아니었고 투명인간의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공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취재방식에 대한 ‘과도망상’을 벗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현실의 취재에 착수했다. 우선 로힝야 보트난민들이 끊임없이 도착하고 또 떠나는 버마-방글라데시 국경의 콕스 바자르, 테크나프로 향했다.
 
조금 덜 위험한 곳을 향한 처절한 생존 투쟁
3월 2일 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닿은 시각은 현지 시각 밤 9시께였다. 인파가 빼곡한 입국심사장을 보아하니 심사를 마치고 교통체증을 지나 호텔방에 도착하기까지 자정 이전에만 가능하다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그때 이민성 직원이 저만치 선 나를 불렀다. 직업은? 영어선생. 다카에 친구 있지? 물론. 방콕에서 비자 받을 때 제시한 정보와 입을 맞춰 두세 마디 답한 후 바로 통과됐다.
버마-방글라데시 국경의 한 미등록 난민캠프 로힝야 어린이들. 20만-50만 되는 로힝야 난민 중 3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등록 난민이다. 이들에 대한 구호는 당국의 제약으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며 식량구호는 쌀 한 톨 없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버마-방글라데시 국경의 한 미등록 난민캠프 로힝야 어린이들. 20만-50만 되는 로힝야 난민 중 3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등록 난민이다. 이들에 대한 구호는 당국의 제약으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며 식량구호는 쌀 한 톨 없다. (Photo © Lee Yu Kyung 2014)

수도 다카에서는 필요한 인터뷰와 정보를 최대한 빨리 수집한 뒤 버마와 국경이 가까운 동남부로 가야한다. 마음이 급했다. 전체 일정이 늦어진 탓도 있고, 생소한 지역에 빨리 발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치타공, 콕스 바자르 일대, 나프강을 낀 국경 타운 테크나프 그리고 별도 허가가 필요한 치타공 산악지대 등이 최소 취재지다. 특히 콕스 바자르와 테크나프에 산재한 난민취재는 최우선 과제였다. 아라칸 주에서 말레이시아까지, 난민들의 이동로를 더듬고 있는 나로선 그들이 처음 도착해 길게는 수십 년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방글라데시 캠프 상황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도착한 난민들을 통해 강건너 아라칸 주의 최근 상황도 파악해야 했다. 지난 1월 발생한 두쉬야단 학살 생존자를 찾아내는 건 이 최우선 과제 중에서도 넘버 원 과제였다.
거의 대부분 그래왔듯, 난민 캠프 접근은 이곳에서도 막혀 있었다. 지구상 수많은 난민캠프들이 사실상 열린감옥인 경우가 많다. 저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당하고 격리 대상이며 이동의 자유를 제약받고 방문인들과의 면접권도 제약받고 있다.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약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 6월 아라칸 주에서 발생한 로힝야 무슬림과 라까잉 불교도간 폭동사태가 반 로힝야 무슬림 학살로 이어지자 방글라데시 정부는 난민들의 유입을 막는다며 나프강 국경부터 봉쇄했다. 그리고 미등록 난민 캠프에서 구호활동을 펴던 엔지오들에게 ‘구호중단’을 통보하고 캠프에 대한 외부인의 출입도 엄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캠프 방문을 고민하는 내게 캠프안 연락책 중 한 명이 ‘뇌물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쿠투팔롱 지역 정치인 아무개에게 뇌물을 먹이면 “네가 원하는 그림과 스토리를 전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고, 그렇게들 한다고 했다. 차비가 아닌 돈을 주고 취재 대상에 접근하는 건 내 취재 원칙상 수용할 수 없었다. 캠프 방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걸 깨달은 나는 캠프 ‘그림’을 거의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토리’는 포기 대상이 아니었다. 시간은 돈이고, 그런 환경에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리 없다. 빨리 차선책으로.
난민들을 내 숙소로 초대했다. 어차피 난민 캠프에 ‘잠입’하는 방식이라면 스파이들이 노려보는 그 공간에서 자유롭고 깊이 있는 인터뷰는 어렵다.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위험해지는 건 나보다는 인터뷰이들이다. 알아내야 할 ‘콘텐츠’를 최대한 확보한 후 떠나기 직전 ‘그림’을 위한 캠프 방문을 시도하기로 한다. 행혀 쫒겨나거나 문제가 되더라도 콘텐츠는 확보해둔 상황일 테니 그 편이 나았다.
물론 이 차선책에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열악한 환경에 사는 난민들이 자신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묵는 숙소를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그 난민들 이동과정의 안전문제였다. 내 숙소가 있는 콕스바자르 타운과 그들의 난민캠프가 있는 쿠투팔롱 일대는 차량으로 약 한 시간 반 거리다. 그 사이 검문소가 많게는 5개까지 있는 날도 있다고 했다. 그날그날의 운에 따라 걸릴 수도 안 걸릴수도 있단다. 등록 캠프 난민들은 캠프 경비에게 ‘병원 방문’, ‘친척 방문’ 등을 이유로 ‘콕스바자르 타운에 좀 다녀오겠다’며 외출 허가를 받을 수 있기에 유사시 그 허가증이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등록 캠프 난민들에겐 아무런 체계가 없다. 다시 말하면 출입에 ‘자유’가 있지만 자칫 검문에 걸려 ‘불법체류+난민’이 들통나면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벵갈리어가 유창하고 이 두 구간 이동에 능숙한 난민 ‘가이드’를 동반하여 인터뷰이들을 호텔로 모셔오는 형식이 되었다. 천만다행히도 이 지역 검문소들은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까탈스럽게 묻지 않았다. 대략 ‘대표’ 한 명이 유창한 벵갈리어로 상황을 만들면 통과된다. 어차피 외모로는 잘 구분이 되질 않는다. 난민캠프에서 나고 자란 청춘들, 기억없는 시절 부모님 품에 안겨 방글라데시로 건너와 방글라데시의 기억 밖에 없는 난민들 중 일부는 벵갈리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늘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잠재적 위험과 귀찮음을 감수하고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난민들과 난민 ‘가이드’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들 덕분에 두쉬야단 학살 증언자들은 물론 등록캠프와 미등록 캠프 관련 정보를 제법 확보하고 전체 윤곽이 그려지고 나니 취재에 자신감과 동력이 붙었다. 그리고 막판 과제, 포기 직전까지 갔던 캠프 방문은 국경지대 취재를 다 마치고 다카로 돌아가기 직전 실행할 수 있었다. 이 방문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난민들과 상황적 유연성을 발휘해준 모 엔지오 직원 등 여러 사람들의 요령이 복합작용하여 가능했다. 그 과정을 거쳐 발을 들여놓은 한 미등록 캠프에서 나는 아주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낮은 지붕에 너무나 촘촘하게 붙어있는 ‘가옥’들, 이렇게 초라한 난민캠프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안타깝게도 그 모습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캠프안으로 들어선 후 가방속 카메라를 ‘넣다 뺐다’ 숨바꼭질하듯 촬영하다보니 많은 눈들을 의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찍었던, 바깥 세상에 정말 보여주고 싶은 그림들을 놓친 게 여전히 안타깝다.
한편, 콕스 바자르 일대에는 로힝야 난민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들이 알려진 것만 해도 서너 군데다. 예컨대 콕스바자르 한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대략 반 시간 후면 닿는 모헤시 칼리, 거기서 다시 릭샤를 타고 굽이 굽이 반 시간쯤 들어가면 나타나는 깊숙한 깡촌마을에는 1978년 난민으로 쫓겨온 이들부터 지난 2012년 폭동 이후 피난온 이들까지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방글라데시 난민사가 강제 송환으로 얼룩져왔던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로 도착하는 이들이 미등록 캠프로 주섬주섬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차피 구호물자도 없고 되려 정부 정책의 타깃이 될 수 있는 캠프 대신 이런 깡촌으로 ‘사라지는’ 이들도 적잖았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본국송환조치’ 뉴스가 또 다시 흘러나오는 요즘이다. 5월 15일 방글라데시 정부는 유엔난민기구(UNHCR) 다카 국장과의 면담에서 ‘본국송환’ 의제를 꺼내며 UNHCR의 협조를 구했단다.
 
이보다 초라한 캠프를 본 기억이 없다
방글라데시 취재길 또 다른 과제 하나는 앞서 카친주 취재후기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아라칸 반군, 즉 라까잉 무장단체에 대한 것이다. 버마-방글라데시 국경지대 그들의 존재와 활동 여부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에 일말의 실마리를 줄 것이라 믿었다.
카친 주 반군 수도인 라이자에 본부를 둔 아라칸 군(Arakan Army) 대원들이 라이자 시내에서 장을 보고 본부로 돌아가는 길이다. 버만족의 통치(Burmanization)는 물론 '이슬람화'(Islamization)에 대항해서도 맞서겠다는 아라칸 군은 반 로힝야 무슬림 정서와 라까잉 불교민족주의로 무장한 '극우 인종주의' 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속 대원의 군모에 나찌의 심볼 스와스티카가 붙어 있는 건 그의 의도와 어떠하든 아라칸 군의 성격을 일면 말해주고 있다. 또 다른 대원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카친 반군(KIA)의 것이다. 버마의 소수민족단체들은 공식 인정받는 종족, 소위 '에뜨닉'(Ethnic)단체들과의 연대에는 적극적인 면이 있지만, 로힝야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종족과는 거리감을 두고 있다. 그 이면에는 광범위하게 점철된 '반 이슬람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다민족 국가 버마의 민주화 과정과 평등을 향한 투쟁 과정이 자칫 '자민족민주주의'(Ethnocracy)라는 한계에 매몰될 수 있음을 드러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Photo © Lee Yu Kyung 2014)

카친 주 반군 수도인 라이자에 본부를 둔 아라칸 군(Arakan Army) 대원들이 라이자 시내에서 장을 보고 본부로 돌아가는 길이다. 버만족의 통치(Burmanization)는 물론 ‘이슬람화'(Islamization)에 대항해서도 맞서겠다는 아라칸 군은 반 로힝야 무슬림 정서와 라까잉 불교민족주의로 무장한 ‘극우 인종주의’ 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속 대원의 군모에 나찌의 심볼 스와스티카가 붙어 있는 건 그의 의도와 어떠하든 아라칸 군의 성격을 일면 말해주고 있다. 또 다른 대원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카친 반군(KIA)의 것이다. 버마의 소수민족단체들은 공식 인정받는 종족, 소위 ‘에뜨닉'(Ethnic)단체들과의 연대에는 적극적인 면이 있지만, 로힝야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종족과는 거리감을 두고 있다. 그 이면에는 광범위하게 점철된 ‘반 이슬람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다민족 국가 버마의 민주화 과정과 평등을 향한 투쟁 과정이 자칫 ‘자민족민주주의'(Ethnocracy)라는 한계에 매몰될 수 있음을 드러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Photo © Lee Yu Kyung 2014)

카친 주 반군수도 라이자에 본부를 둔 아라칸 군(Arakan Army)의 군 캠프 강당내부로 들어서면 '父國의 수호자들'(Defenders of Our Fatherland)이라는 표어가 정면에 들어온다.(Photo © Lee Yu Kyung 2014)

카친 주 반군수도 라이자에 본부를 둔 아라칸 군(Arakan Army)의 군 캠프 강당내부로 들어서면 ‘父國의 수호자들'(Defenders of Our Fatherland)이라는 표어가 정면에 들어온다.(Photo © Lee Yu Kyung 2014)

역사적으로 버마-방글라데시 국경과, 버마-인도 국경 그리고 3국 국경이 맞물린 트라잉 앵글 지역은 아라칸 반군들과 로힝야 무슬림 반군들의 베이스이자 활동무대였다. 몽골계들이 주류인 인도 북동부, 몽골계 줌마족들의 터전 치타공 산악지대(Chittagong Hill Tracts) 등 이 일대의 인종적 변수까지 고려하면 이 지역의 다이나믹한 환경은 내 호기심을 극대화시켰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가속화된 방글라데시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은 이들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단체들을 무력화시켰고 일부는 인도쪽 국경으로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 무력화된 단체 중 하나인 로힝야연대조직(Rohingya Solidarity Organization, RSO)은 라까잉 단체들이나 우 위라뚜(U Wirathu) 같은 불교극단주의 승려들이 이슬람 혐오 스피치에서 가장 많이 거론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RSO가 여전히 국경 지대에서 ‘활동’한다고 볼 근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방글라데시에서 오래 거주한 바 있고 현재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로힝야 활동가 사덱은 “RSO가 ‘존재’하는 건 맞지만 ‘활동’한다고 볼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중동국가들에 체류하는 RSO 전 간부들이 여전히 조직 이름을 걸고 로힝야 이슈를 ‘팔아’ 중동 무슬림 커뮤니티로부터 자카(Zaka, 기독교의 십일조에 준하는 무슬림들의 사회 헌금)를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무장 반군이었던 아라칸로힝야이슬람전선(Arakan Rohingya Islamic Front, ARIF)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대테러 작전과 국제 정세에 맞물리며2000년대 중반부터 정치 조직으로 전환했다. 아라칸 로힝야민족기구(Arakan Rohingya National Organization, ARNO)가 바로 ARIF를 전신으로 둔 정치 조직이다. 이 조직은 기관지 격인 칼라단 뉴스(Kaladan News)를 통해 언론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볼 때 로힝야 무장단체 혹은 무슬림 무장단체에 대해 필자가 내린 현재까지의 잠정 결론은 일단 두 가지다.
첫째, 로힝야 무장조직이 빠른 시일 내에 재집결, 조직화, 부활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황이 악화 일로로 간다면 로힝야 조직이 아니더라도 초국적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이 이슈를 이용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둘째, 지난 해 발생한 멕틸라 학살에서 보듯 로힝야는 물론 버마 무슬림 전체가 지속적으로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되고 상황이 악화된다면 ‘무슬림 무장단체’의 부상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조심스런 예측이다. 이와 관련 지난 해 말 카친 주에서 ‘힌트’를 접한 바 있다. 카친 반군 고위 사령관 아무개씨는 내게 지난 해 반 무슬림 폭력의 후폭풍 일화를 건넸다. 당시 ‘일단의 무슬림들이 찾아와서 군사 훈련을 받고 싶다’고 접근한 적이 있으며 ‘거절했다’는 것. 이는 마치 라까잉 무장단체인 아라칸 군(Arakan Army)이 여러해 전 ‘군사 훈련을 받고 싶다’는 말로 카친 반군에 접근하여 오늘날 카친 주에 둥지를 틀고 있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한겨레 21> 1012호 관련 기사 참조)
로힝야 보트 난민 어린이가 말레이시아 한 엔지오 단체에 등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UNHCR에 공식 난민으로 등록하는 절차와 기간이 복잡하고 길어짐에 따라 많은 난민들이 엔지오를 통해 우선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고 유사시 그 등록증으로 신분 확인 과정을 거친다. 물론 엔지오 등록증이 신분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로힝야 보트 난민 어린이가 말레이시아 한 엔지오 단체에 등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UNHCR에 공식 난민으로 등록하는 절차와 기간이 복잡하고 길어짐에 따라 많은 난민들이 엔지오를 통해 우선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고 유사시 그 등록증으로 신분 확인 과정을 거친다. 물론 엔지오 등록증이 신분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Photo © Lee Yu Kyung 2014)

그 과정을 거쳐 카친반군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아라칸 군(Arakan Army)은 ‘버만화’와 ‘이슬람화’라는 두 개의 적개심을 표현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로힝야 무슬림에 대한 섬찟한 혐오 발언과 시각, 과거 아라칸 왕국을 모델로 삼고 있는 강렬한 불교민족주의 등을 고려해볼 때 나는 그들이 아라칸 주 ‘국민군대’로 입성하는 날 로힝야 무슬림들의 비명 소리가 더더욱 커질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아라칸 군은 기존 반군 중에서도 불교민족주의의 극단적 신봉자이며 더 나아가 2012년 이래 폭력 사태의 배후로 끊임없이 의심받아온 아라칸 해방당(ALP)과 합병 논의 중이다.
버마-방글라데시 국경에서 관찰한 아라칸 군(AA)은 정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준 자치구역 치타공 산악 지대(CHT)를 발판 삼아 활동의 폭을 넓히는 모양새다. ‘방글라데시 라까잉 족’들도 이 조직에 가담하고 있으며 CHT 정치 조직들과도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연대를 맺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천착해오던 또 하나의 이슈 일명 ‘모델 촌'(Model Village)에 대한 실마리도 포착됐다. ‘나탈라(Natala)’라 불리는 이 모델촌은 90년대 초반부터 킨윤 전 정보국장이 주도하에 추진된 불교도 정착촌을 말한다. 군사정부는 로힝야 무슬림 주류 지역인 마웅도 타운쉽에 40개도 넘는 모델촌을 건설하여 두 커뮤니티간 갈등의 씨앗을 정책적으로 뿌려왔다. 정착촌 건설 당시 수많은 로힝야들이 땅을 빼앗겨 그 시절 방글라데시로 떠난 이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정착촌 건설에 동원된 강제 노동도 로힝야 무슬림들의 몫이었다. 이 정착촌의 마을 이장이나 타운쉽 관료가 모두 불교도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최근 더더욱 위험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12년 이래 ‘벵갈리’에 치를 떠는 방글라데시 라까잉족, 줌마족 불교도들이 이 정착촌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서도 마지막 기사(<한겨레21> 1012호)에 자세히 담았다.
 
‘모델촌’의 음모
“그들이 사는 난민캠프를 보는 순간, 당신이야말로 밀항선에 오르고 싶어질 거다”
지난 해 이맘때 말레이시아에서 로힝야 보트난민을 취재할 당시 인터뷰했던 <아라칸 프로젝트>(Arakan Project) 크리스 리와가 내게 한 말이다. <아라칸 프로젝트>는 아무도 로힝야 문제에 관심을 주지않던 7년 전 이 문제를 집중 조사해온 인권 리서치 단체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지난 해 8월 나는 아라칸 주 시트웨 외곽에 있는 로힝야 피난민(IDPs)캠프와 도심의 무슬림 게토 ‘아웅 밍갈라’ 구역을 취재한 후 리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방글라데시 캠프를 취재한 후에는 리와의 말이 온전하게 다가왔다. 내가 그들이었더라도 배를 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만 남는다면 밀항선은 몇 달의 고통 끝에 적어도 불법 노동자로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이므로.
로힝야 보트 난민 무하마드 라피크(18)가 고무줄 등을 이용하여 자가 재활 치료를 하고 있다. 난민 밀항선과 인신매매캠프에서 무릎 굽은 자세를 강요받은 채 여러 달 보낸 보트 난민들은 말레이시아로 풀려난 이후 대부분 마비 증세를 경험하며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로힝야 보트 난민 무하마드 라피크(18)가 고무줄 등을 이용하여 자가 재활 치료를 하고 있다. 난민 밀항선과 인신매매캠프에서 무릎 굽은 자세를 강요받은 채 여러 달 보낸 보트 난민들은 말레이시아로 풀려난 이후 대부분 마비 증세를 경험하며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 (Photo © Lee Yu Kyung 2014)

다시 말레이시아를 찾았다. 여전히 밀려드는 보트피플들을 만나니 브로커들의 유형과 경로 등이 사소하게 바뀐 점은 있으나 그들이 당했던 고문과 위험천만한 환경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지난 한 해 로힝야 보트 피플 문제가 여러 지면과 방송을 장식하면서 경각심은 생겨났지만 인권 침해를 줄이거나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자국을 거쳐가는 로힝야 인신매매 문제로 골치 아파하던 타이 당국은 몇 차례 단속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이들을 ‘송환’하는 척하면서 또 다른 인신매매 단체에 넘기기까지 한 것 또한 타이 당국의 아찔한 두 얼굴이다.
4월 중순 모든 취재를 마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비록 배에 오르진 않았지만 그들의 발자국을 거칠게 밟고난 후 들어선 내 ‘궁전’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둘러싼 장식은 다름 아닌 UNHCR 엽서들이다. ‘용기’, ‘희망’, ‘존엄’..그리고 사무치는 문장 하나가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난민이 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합니다’ (It takes courage to be a refugee)
* <미얀마(버마) 개혁과 민주화 이행기에 직면한 도전들> 기획 취재와 취재후기 연재를 마칩니다. 취재를 지원해주신 <리영희 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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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그들의 고통이 쓰나미처럼 다가왔다

  1. 자, 우리는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여 나라가 개판입니다.
    그들이 비록 영국에 부역하고 버마족을 탄압하였지만
    “보편적인 인권을 위하여 그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해야 한다.”?

    미얀마의 승려들에게 2016년 대한민국을 보여 주며
    응원을 보내고 싶군요.
    지금까지의 역사와 경험으로 보면
    무슬림이 득세하면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그때 기자는 뭐라 말할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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