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심판의 날 이후

[세계] 레드셔츠 유혈 진압과 탁신 귀국에 대한 국민투표였던 총선… 군부와 기득권층이 선거 결과 또 무시하면 극단적 충돌 뻔해

“2006년 쿠데타 이후 기득권층이 벌인 행태에 대해 절반 이상의 유권자들이 대굴욕을 선사한 것이다.”

7월3일 밤, 총선에서 야당인 푸에아타이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윤곽이 드러나자 티티난 퐁수디락 쭐랄롱꼰대 교수는 촌평의 대가다운 논평을 날렸다. 그는 “이건 기득권층이 거부하지 못할 ‘뉴타일랜드’ 다”라고 덧붙였다.

7월 3일 방콕의 한 투표소. (Photo by Lee Yu Kyung)

투표하러 고향까지 간 사람들

친탁신 성향의 레드셔츠 내 좌파 진영의 짜이 웅파곤 전 쭐랄롱꼰대 교수는 좀더 급진적인 주문을 내놨다. “왕실모독법 위반으로 수감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유혈 사태의 책임자인 아누뽕 빠오찐다 당시 군 총사령관과 아피싯 웨차치와 민주당 총재 및 수텝 통수반 사무총장 등을 처벌하라. 쁘라윳 찬오차 현 군 총사령관도 해고하라.”

총 500석 중 262석을 얻은 푸에아타이당(민주당은 160석)은 쿠데타와 왕정주의자들의 반복된 개입과 당 해산에도 총선 4연승을 이룬 친탁신계 정당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격전지라 관심이 높았던 방콕의 경우 33개 선거구 중 23석이 민주당에 돌아갔지만 좁은 표차를 만들어내며 10석을 얻은 푸에아타이당의 선전은 간과할 수 없는 결과다. 주류 언론은 이번 선거를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을 중심으로 풀어갔지만, 푸에아타이당에 대거 투표한 농민과 빈곤층의 깨어난 정치의식은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다. 타이 고유의 전통 설날인 4월 송끄란 기간이 아니면 볼 수 없던 인구 대이동 현상이 이번 선거 기간에 나타난 것이 대표적이다. 버스 부족으로 선거 당일 오전 수천 명의 발이 묶이기도 했고, 기차 고장으로 귀향하지 못한 유권자들의 눈물이 현지 방송을 탔다.

“오늘은 심판의 날이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다시는 허용치 않겠다는 내 의사를 담아 1번을 찍었다. 탁신의 복귀는 별개 문제다.”

선적회사 대표인 아룬 키엥통(50)의 말처럼, 이번 총선은 두 가지 차원에서 국민투표적 성격이 강했다. 하나는 레드셔츠가 주장하듯 2006년 쿠데타와 지난해 레드셔츠의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벌어진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또 하나는 민주당과 반탁신계가 주장하듯 탁신 복귀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선거 결과로만 보면 과반의 유권자들은 탁신 복귀를 환영하거나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혹은 탁신의 부패보다는 군부와 기득권층의 정치 개입과 91명이 숨진 유혈 진압의 책임을 더 묻고 싶어하는 셈이다.

잉락 시나와트라. 탁신의 여동생이자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푸어타이당의 비례대표 1번 후보인 그녀는 타이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가 될 예정이다 (Photo by Lee Yu Kyung)

“푸에아타이당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민주당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군부도 타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주적 선거 결과를 존중하길 바란다.” ‘탁신이 가급적 귀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부 수다랏(55)의 말도 푸에아타이당이 얻은 반사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잉락 시나와트라 차이 여성총리가 푸어타이 당의 압승이라는 선거 결과 윤곽이 드러난 7월 3일 저녁께 수백개의 국내외 언론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푸에아타이당도 이 부분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당 부총재인 카나왓 와신숭원(49)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막판까지 결정을 못한 시민 중 일부가 지난해 레드셔츠 유혈 진압에 대한 분노로 우리 당을 찍은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방콕은 타이 전역 77개 지방 중 하나일 뿐이며 방콕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방콕이나 지방이나 똑같이 취급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은 ‘반왕정주의’ 카드 꺼낼까

민주당은 탁신 정권의 친빈곤 정책을 베꼈다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에 반탁신 비방전에 집중해, 아피싯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진 총선 패배라는 부메랑을 만났다.

2010년 유혈 사태의 핵심 지역인 랏차쁘라송에서 열린 민주당 집회에서 수텝 통수반 사무총장은 레드셔츠의 폭력성만 부각된 비디오를 대형 스크린으로 반복 재생하며 “이곳에서 누구도 죽지 않았다”거나 “군은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는 등 선동적 주장을 펼쳤다. 아피싯 총재는 마지막 선거유세장에서 “이번 선거는 이 나라에서 탁신이라는 독을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분명한 의사표현에도 이번 선거가 지난 몇 년간 곪아온 타이 정치 분쟁을 종식시킬 것으로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텔레비전 채널 2개와 라디오 방송 수십 개를 소유하고 언론과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타이 군부의 향후 행보는 모든 이들의 관찰 대상이다. “만일 잉락이 타이 군부를 자유롭게 내버려둔다면 군부의 권력은 더 커질 것이고, (2006년 쿠데타 이후 50% 가까이 증가한) 예산도 더 요구할 것이다. 내 견해로는 이 가능성은 적다. 만일 잉락 정부가 군부를 향해 나름의 강력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군부는 잉락 정부에 위협을 가할 것이다.” 타이 군부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치앙마이 파얍대학 폴 챔버 교수는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군부의 향후 대응을 두 가지 가능성으로 분석했다. 폴 교수가 보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군부는 반잉락 세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거리시위를 유도할 것이고, 그런 시위대의 공격으로부터 잉락 정부를 보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친탁신 레드셔츠가 거리로 나와 반탁신 옐로셔츠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군부는 잉락과 레드셔츠 운동을 ‘반왕정주의자’로 몰아가며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다.”

7월3일 오후 푸에아타이당의 총선 압승이 확실해지자 당사로 모여든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실상 돌발 변수가 되기 쉬운 극우 세력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옐로셔츠의 다른 얼굴인 ‘국토보호 시민 볼런티어 네트워크’(일명 ‘멀티컬러셔츠’) 대표 툴시티솜월 박사는 탁신의 재산을 은닉한 혐의로 잉락의 수사를 요구하며 7월12일 ‘반부패위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테러리즘과 왕실모독법 고발 등에 걸려 수감 중인 레드셔츠 지도부이자 푸에아타이당 당선자인 자뚜폰 프롬판의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탁신 사면에 대한 논의가 의회에서 진행된다면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식의 정책은 없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 결과에 따라 모든 이가 똑같이 대우받을 것”이라는 잉락의 반복된 답변에도 탁신의 복귀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의 귀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군부와 왕정주의 진영의 강력한 저항을 유발할 것이다.

“다시 뒤집으면 다음은 내전이다”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서거나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낀 캄보디아와의 국경 분쟁도 향후 배제할 수 없는 위기 변수다. 이 경우에는 타이 군부가 그동안 국내외 비난을 의식해 접어두었던 쿠데타를 정당화할 만큼 강도 높은 ‘비상사태’ 가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득권층이 다시 한번 민주적 절차에 개입해 유권자들의 선택을 뒤집어놓는다면 그다음은 내전이다. 레드셔츠와 푸에아타이당을 지지해온 이들은 지난 5년간 봐온 그런 개입을 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타이 영자 일간지인 <더네이션> 기자 쁘라윗 로자나프룩의 이 말은 타이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다. 타이 사회는 지금 민주적 선거 결과를 수용하는 단순하고도 평화적인 해결책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 사이에서 불안하게 숨 쉬고 있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한겨레21> [2011.07.18 제869호] 게재. 기사 원문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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