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캠프인가 죽음의 수용소인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스리랑카 내전 [2010.02.05 제797호]

지난해 5월 타밀호랑이 반군 항복 뒤에도 타밀족 난민캠프에선 살인·기아·질병 난무…
난민들 외국 탈출 잇따라

내전은 막을 내렸지만, 스리랑카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1월2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부정선거 시비가 일면서 야당 후보인 사라스 폰세카 전 합참의장이 호텔방에서 농성을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새 잊혀진 것은 스리랑카 인구의 15%를 차지하면서도 ‘난민’으로 내몰린 타밀족이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목숨을 건 탈출 끝에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타밀 난민들의 육성을 보내왔다. 편집자

드넓은 벌판은 온통 철조망이다. 그 안에선 총을 든 군인과 경찰 몇천 명이 전투지역처럼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스리랑카 북부 와우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진 드넓은 이들 시설을 당국은 ‘복지마을’이라 부른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그곳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나온 타밀족 주민들을 무작정 붙잡아두고 있는 난민캠프다.

‘어둠을 탓하지 말자. 차라리 촛불을 밝히자.’ 지난해 말 말레이시아 타밀족들이 내전으로 스러져간 스리랑카의 동족들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이하 타밀호랑이) 반군의 패퇴로 26년여 스리랑카 내전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건 지난해 5월19일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등의 자료를 보면, 전쟁 막바지 서너 달 새 발생한 난민만도 30만 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스리랑카 북동부 와우니아·마나르·자프나·트링코말리 등지에 급조된 ‘복지마을’에 분산 수용됐다. 그나마 돕겠다는 국제 인도지원 단체들의 접근마저 차단한 스리랑카 정부가 난민캠프의 시설을 제대로 갖춰놓았을 리 없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철저히 가려졌다. 와우니아 캠프에 수용됐던 카란(65·가명)도 그렇게 ‘숨겨진 난민’이었다.

지난해 5월16일 밤 스리랑카 북서부 난디카달 저수지와 인도양 사이에 낀 좁은 해안가 물리바이칼. 빗발치는 포탄을 피해 카란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집도 자동차도, 평생을 모은 책과 애완견 두 마리까지 모든 걸 남겨두고 서둘러 떠나야 했다. 목적지는 포탄의 출발지, 곧 정부군 진영이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카란는 와우니아 난민캠프의 ‘존 4-27번 텐트’를 배정받았다(‘존 4’는 이후 숱한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A1부터 F9까지 54개 구역으로 확대개편됐단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돈만 있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한 달여가 지난 6월 중순께, 텐트 밖 땡볕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카란에게 낯선 사내가 다가와 은근한 말을 건넸다. ‘정부군 첩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주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며 짐짓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상 그는 비좁은 텐트 안에서 부부 2쌍과 10대 소녀 2명, 그리고 70대 여성 1명 등 14명과 민망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주로 밖에서 잠을 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캠프에서 나눠주는 음식은 입에 댈 수도 없는 수준이었고, 물을 긷거나 화장실을 가려면 새벽부터 줄을 늘어서야 했다”고 말했다.

내전 막바지, 스리랑카 당국은 “정부군 쪽으로 넘어오면, 병원·식량·물·주거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선전방송을 해댔다. 새빨간 거짓이었다. 목숨을 건 피난 끝에 정부군 진영인 와두와칼루에 당도했지만 물도, 식량도, 잠자리도 없었다. 허허벌판에서 비스킷과 죽으로 며칠을 버틴 난민들이 마침내 도착한 난민캠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난민에 대비한 최소한의 물자도 갖추지 않은 터였다. 삶은 전쟁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이가 다가와 같은 말을 속삭이더라. ‘돈만 있으면 난민캠프에서 나갈 수 있다’고. 캠프에 채소를 대던 무슬림 상인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둘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탈출 비용’은 20만루피(약 200만원)로 흥정을 봤다. 그해 6월 말 채소 배달차에 몸을 실었다. 캠프에는 여러 겹으로 검문소가 설치돼 있었지만, 군인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캠프를 나서 2시간여를 달린 트럭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와우니아 시내 부근에 멈춰섰다. 캠프를 탈출한 10여 명의 낯선 이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틀을 그곳에서 숨어지낸 뒤 수도 콜롬보행 기차표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20만루피의 값어치는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6월30일 아침, 카란은 콜롬보에 무사히 도착했다.

스리랑카 내전은 막을 내렸지만, 타밀족에 대한 박해와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타밀호랑이 전사였던 쿠마르는 “언제든 다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왼쪽). 라니와 수단티 자매는 “난민캠프에선 일주일에 대여섯 명씩 죽어나갔다”고 말했다(오른쪽) (Photo by Lee Yu Kyung)

탈출 난민 너무 많아 특수 누리는 브로커들

“아버지 돌아가신 줄 알고 장례식까지 치렀는데….” 외국에 사는 딸과 어렵사리 통화가 됐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딸이 마련한 급전으로 캠프를 빠져나온 지 보름 남짓 만에 그는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콜롬보에선 돈만 있으면 나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어렵지 않았다”며 “여권·비자·항공권 등을 패키지로 준비해놓은 수많은 브로커들이 ‘난민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만연한 부패상이 되레 난민들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스리랑카 타밀족 난민들의 국외 탈출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게 지난해 10월 중순이었다. 11월 중순부터 그들을 찾아나섰다. ‘존 0’부터 ‘존 4’까지, 와우니아 난민캠프의 각기 다른 구역에서 탈출을 감행한 타밀 난민들은 동남아 전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놀랍게도 난민들은 종전 불과 2주째 뒤인 지난해 6월 초부터 캠프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만큼 열악했기 때문이리라.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09년의 끝자락에 한 달여 동안 말레이시아 각지에서 타밀 난민들의 육성을 들어봤다. 더러는 가족이 난민캠프에 남아 있다. 모두들 여전히 불안해했다. 증언은 극히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머물던 캠프에선 일주일에 대여섯 명씩 죽어나갔다.” 온 가족이 전장을 빠져나와 지난해 4월20일부터 와우니아의 이루나찰람(존 3) 캠프에서 생활했다는 수단티(20·가명)와 라니(22·가명)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캠프에 도착하면서부터 설사와 구토 증세를 보였다는 수단티는 새벽부터 줄을 서 오후 늦게서야 의사를 만나는 일을 두어 달 반복해야 했단다. 7월 초 캠프 밖 체티쿨람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볼 수 있는 허가를 받고 밖으로 나온 자매는 그길로 탈출을 감행했단다.

“캠프에선 죽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아”

“6월 중순이었다. 열이 심해 캠프 병원을 찾았다. 나이 지극한 여성이 오후 1시께 쓰러졌는데, 시간이 가면서 몸이 차가워지더니 결국 숨을 거뒀다. 모두들 의사 한번 보려고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게 일상이라, 어느 누구도 쓰러진 여성에게 순서를 양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극이다. 그나마 결핵환자에게 해열제 몇 알 주는 게 고작이었지만….” 라마나탄 캠프(존 2)에서 지난해 11월 초 탈출했다는 제야발란(23·가명)도 비슷한 증언을 내놨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캠프 스피커에서 ‘주검 1구가 있는데, 자기 가족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와서 신원을 확인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곤 했다”고 전했다.

“누구한테도 구걸하며 살아본 적 없다. 존엄을 지켜왔다. 그런데 난민캠프에선 스리랑카 군인들이 식량을 배급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던져버린다. 그들 앞에서 우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여야 했다. 군인과 경찰은 무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이나 하고….”

아난다쿠마라수와미 캠프(존 1)에서 빠져나왔다는 찬드라(40·가명)는 서럽게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5월17일 오전 9시30분께, 그는 마지막 전장 물리바이칼에서 와두와칼루까지 1km 남짓을 지나가면서 주검을 5천 구쯤은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맨발이 주검 속에 빠져드는 아수라의 땅을 딸 부디마(13·가명)의 손을 잡고 헤쳐나왔단다. 마지막 피난길에 헤어진 남편과 또 다른 딸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는 난민캠프에 머무는 동안 각별히 입조심을 했다. 남편이 타밀호랑이 고위 간부였던 탓이다.

난민들은 “캠프에선 누구라도 가족 외에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복을 입은 군경은 물론 사복 차림의 친정부 타밀 민병대원들이 캠프 안을 돌며 난민들의 일상을 감시한 탓이다. 이따금 정부에 투항한 타밀호랑이 출신들이 정부군 복장으로 나타나 난민들 사이에서 반군 출신자를 가려내기도 했단다. 지난해 7월24일 남편과 네 자녀를 데리고 카티르카마르나가르(존 0) 난민캠프를 탈출했다는 사리타(41·가명)는 “지난해 6월 초순 한밤에 군인들이 와서 소년 서른대여섯 명을 한꺼번에 데려갔는데, 내 옆 텐트에 살던 라제스와리(48)·캄다사미(50) 부부의 아들도 잡혀갔다”며 “부부는 자기 아들은 반군이 아니라며 밤낮으로 울먹였지만, 아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도 있다. 갑자기 주검으로 발견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몇십만 명의 난민들이 턱없이 부족한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난민캠프에서 어둠은 위험을 부르기 마련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배식을 하는 곳이나 물탱크 앞에서 줄을 늘어서 있으면 취한 군인들이 술병을 들고 와서는 ‘잠깐 같이 가자’며 팔을 잡아끌기 일쑤였단다. 라마나탄 캠프(존 2)에서 탈출했다는 아라빈단(41·가명)의 증언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다. 그러니까 지난해 5월23일 또는 24일로 기억한다. ‘존 1’과 ‘존 2’를 가르는 작은 냇가에서 주검 6구가 발견됐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기에 가보니, 내 옆 텐트에 살던 소녀도 주검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날 새벽에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는데 결국 그렇게 된 거다.”

애초 마힌다 라자팍세 스리랑카 대통령은 종전 직후 “180일 안에 난민캠프를 폐쇄하고, 수용됐던 난민들을 ‘석방’해 재정착까지 마치도록 하겠다”고 장담한 바 있다. 그의 호언이 거짓으로 드러난 지는 이미 오래다. 타밀 게릴라들이 총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8개월째다. 상황은 나아졌을까? 스리랑카 내부에서 타밀족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한 인권운동가는 지난 1월18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파괴된 고향조차 찾아갈 수 없는 난민들

“구호단체들의 난민캠프 접근은 여전히 어렵다. 난민들의 이동의 자유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반군이 장악했던 지역에 돌아간 귀향 난민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그곳에서 외부 지원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당국은 구호요원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는 걸 가로막기 일쑤다.”

총성은 멈췄다. 타밀 난민에 대한 박해와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전쟁이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전쟁의 땅이다.

쿠알라룸푸르·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출처 :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66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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