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토’ 다시 읽기

이유경 / Penseur21

무슬림 국가 최초의 여성총리.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에 총리직에 올라 지난 해 12월 27일 암살될 때까지 두번이나 총리를 역임했고, 파키스탄 최대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종신 지도자였던 베나지르 부토.  부토가 암살당하자  파키스탄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샤라프 군부 독재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파키스탄 민주주의가 약 열흘 남짓 남겨둔 총선을 통해 조금이나마 복구되는 가 싶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토는 그 선거정국의 단연 주연노릇을 해왔다.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2007년 12월 암살당함)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2007년 12월 암살당함)

암살 약 두 달 전인 10월 18일 부토가  8년 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던 건 1년 반 동안의 미국의 물밑 중재를 통해 무샤라프 정권과의 권력분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무샤라프가 지지기반을 잃어가자 ‘민주’ 코드를 내재한 부토라는 완충장치를 통해 무샤라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부토는 민주주의를, 무샤라프는 테러와의 전쟁을 담당하는, 뭐 그렇고 그런 분담 구조로 테러와의 전쟁을 이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1월 3일 무샤라프 정권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가택연금이 잇따르자 부토는 무샤라프 정권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다시 세웠다. 미국이 ‘중매한’ 무샤라프와 부토의  ‘ 강제 결혼’ (파키스탄에서 횡행하는 결혼형태인) 이 ‘파경’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강제결혼할 뻔하던 신부는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부토가  사망하자, 국제사회와 국내외 언론은 너나 없이 부토를 추모했고 또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그녀를 추켜세웠다. 17일 미 의회는 부토 암살을 가장 강력한 어조로 비난하는 결의안을  ‘413 대 0’이라는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파키스탄 영자지 더 돈(The Dawn) 18일자는 부토의 묘소가 여전히 참배객들로 분주함을 전하고 있다.

단순했다.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인사’.  위험을 감수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귀국한 그녀는 용감했고,  한번의 자살 공격을 만나고도 또 다시 위험을 감수하면서 거리 유세에 나서다 쓰러진 그녀는 ‘민주화 운동의 화신’ 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 관계가 전부 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찬양만 하기에는 찜찜한 이력이 적지 않은데 그녀의 정치 생애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공‘과’를 짚어낸 언론은 드물었다. 알면서도 때가 아니라 판단했을 수도 있고 개중에는 정말 모르는 언론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부토 찬양가’가 말하지 않은 부토

문맹률이 40%를 넘고, 그 중 여성 문맹률은 60%에 육박하는 파키스탄에서,  그야말로  ‘못 읽고 못 배운’ 이들이 거리에 넘쳐나는 파키스탄에서 미국과 영국의 두 명문, 하버드 대와 옥스퍼드대까지 나온 부토는 모국의 ‘학력 평균치’에서 심하게 앞서간 여성이었다.  ‘가난하고 배운 사람 없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와 온 집안식구의 자랑’이었던  ‘과거 한국의 어떤 대학생’ 같은 존재인 셈이다.
아울러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파키스탄 내 주류 정당 중 가장 대중적인 정당이다.  파키스탄 점령 카슈미르의 주도(主都) 무자파라바드에도, 또 다른 점령지이자 카슈미르 분쟁 영토의 일부에 속하는 길깃에도 인민당 지부가 있고, 그 고산 도시 길깃의 자그마한 지부 사무실 안에는 대문짝만한 부토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지지하는 건 바로 저 사진 속 인물이다 ”  당사에서 만났던 한 당간부가 아주 자랑스럽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냉정히 말해,  파키스탄은 여성존중을 일렀다는 코란의 가르침과 아무런 관계없이 여성의 정치 사회적 역할이 크게 제약 받고 억압받아온 자칭 이슬람 공화국이다.  그런 나라에서 부토가 남녀를 불문하고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을 보면, ‘출신’과 ‘간판’을 따지고  ‘집안의 자랑거리’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그 어떤 ‘아시아적’ 관습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파키스탄 전 총리이자 인민당의 창시자인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의 딸이라는 태생적 배경 때문에 여성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정치명문가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부토의 일차적 코드가 되었고 따라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가문정치는 군인정치와 더불어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뚜렷한 한계였다.

파키스탄은 소수 봉건 지주가문이 여전히 돈과 권력을 주무르는 사회다. 한겨레 신문의 한 기사 제목처럼, 부토는 그런 지주 집안의 봉건 공주였다.  그녀의 남편 아시프 자르다리 역시 ‘자르다리’ 지주가문 출신이다.  부토가 제아무리 대중적 지지를 받고 ‘민주적’인들 부패에 있어서 만큼은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건 누구라도 검은 돈과 착취에 의존하여 배를 불려온 그 봉건 제도의 한계를 벗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봉건적 가문정치의 한계는 부토의 사망 후 또렷이 드러났다. 부토의 뒤를 인물은 이제 겨우 대학 1년생인 부토의 아들 빌랄 자르다리이고, ‘미스터 10%’ (환경장관 재임 시절 각종 공사 계약때 수수료 10%를 요구하던 데서 비롯된 별명) 라고 불리며 개인 ‘조직’까지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부토의 남편이  공동의장을 맡았다.  “우리 어머니는 늘 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보복이라고 했다”고 말하는 빌랄은 또  “방학 때는 의장 노릇을 하고 학기중에는 아버지가 당을 돌볼 것”이라는 웃지 못할 기자회견을 열었다. 마크둠 아밈 파힘처럼 나름대로 인민당의 지도부 역할을 맡아온 이들은 ‘부토 지주가문 출신이 아닌’ 이상 당 대표직을 이을 수 없었다. 부토 역시 자신을 종신지도자로 박아 놓고 당내 후계자 하나 키우질 않았다.  부토의 암살 직후 접촉한 파키스탄의 한 야당 정치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부토가  ‘민주인사’ 인 건 맞지만 봉건지주 출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파키스탄 민주주의를 여타 민주국가의 그것과 같은 선상에 놓으면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봉건적 민주주의’의 화신

부토는 또한 가문의 후광, 초엘리트적 배경에 개인적 카리스마까지 얹으며 ‘표퓰리스트’ (‘대중주의’에 영합하는 정치인을 일컫는 말. 때로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그녀의 인기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지지자들에게 잠재적 위험을 안겨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부토가  8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지난 10월 18일 파키스탄 정부는 그녀의 신변안전을 위해 카라치 공항에서 집까지 비행기를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거리로 몰려들 지지자들의 환호속에 차량 퍼레이드를 벌이며 ‘금의환향’ 하는 건,  또 다른 망명 정치인이자 정치적 경쟁자로서 그녀보다 한달 남짓 앞서 귀국한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의 귀국길과 좋은 대비를 이룰 것이 분명했다. 대중적 인기나 지지도가 바닥을 치는 또 다른 정적 무샤라프 정권과는 아주 큰 대조를 이를 것이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퍼레이드는 그녀를 겨냥한 자살폭탄 테러로 139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피의 퍼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조카녀이자 96년 의문을 죽음을 맞이한 부토의 남동생 무르타자의 딸인 파티마 부토는 “원(우)먼 쇼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토는 그들에 대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며 자신의 숙모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중인 파티마 부토는 베나지르 부토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며 비판해온 인물이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베나지르의 남동생 죽음 배후로 파티마와 그녀의 (의붓) 어머니 긴와 부토는 부토의 남편  자르다리를 지목한 바도 있다.

용감했나,  무모했나?

부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과오를 찾는다면 바로 집권시절인  90년대 중반 탈레반을 지원한 게 아닐까 싶다. 학교는커녕 남편 혹은 혈육관계에 있는 남성과의 동행이 아니면 여성은 문  밖에도 나서지 못하게 했고 , 또 집안에 있는 여성들은 문 밖에서도 보이면 안 된다며 집 문에다 대못질을 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 그들이 초고속 성장을 한 배경에는 여권신장을 주창하던 부토 정권의 지원이 있었다.

90년대 중반 파키스탄은 미국이나 여타 다른 인근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 유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아프간에 친 파키스탄 정권을 심으려는 전통적 ‘국익’과는 또 다른 ‘국익’이었다. 그러나 유전 파이프 라인이 통과할 아프간은 이미 대소전쟁과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쑥대밭이었고, 아프간의 불안정은 ‘파이프 정치’의 장애요인이었다.  이 시점에 등장한 것이 바로 탈레반 세력이다.  1994년 말  아프가니스탄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작은 학생 조직으로 출발한 탈레반은 당시 부패하고 폭력적인 무자히딘 군벌들의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였고, ‘순수 이슬람 근본주의’ 를 내세우며 지지세를 조금씩 넓혀갔다. 당시 파키스탄 인민당은 집권을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인 자미앗뚤 울레마 이슬람(JUI)과 연정을 맺고 있었는데,  JUI 최고 지도자 마울라나 파즈루 레흐만이 외교라인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를 통해 부토 정권은 탈레반을 지원했다.

그 지원을 받고 급성장한 탈레반은 소규모의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 학생조직에서 시작하여 2년만에 아프간 수도 카불을 점령해 들어갔고 5년간 아프간을 통치했다.  아프간의 진보적 여성 조직인 아프가니스탄여성혁명조직(RAWA)은 부토의 암살 직후 “파키스탄의 모든 정권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원하고 키워왔다. 부토도 예외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부토 역시 귀국 전 한 언론 과의 인터뷰를 통해 “탈레반 지원을 후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탈레반 지원, 부토의 치명적 과거

부토의 암살 후 한달도 지나지 않은 요즘, 탈레반은 본래 강성 지역인 와지르스탄 (아프간과의 국경접경 지역으로 파키스탄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천국지대다) 을 넘어 북부 폐사와르까지 진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폐샤와르에서 1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라 지역 망갈 바그라 탈레반 사령관은 2월 18일 총선에 나설 후보들을 향해 선거 캠페인 중단을 강요하고 있다. 선거 캠페인이 ‘반이슬람적’이라는 게 그 이유다.   파키스탄 정부의 발표대로, 그리고 미국 중앙 정보국의 뉘앙스대로 만일 부토가 이 탈레반 세력에게 암살당한 게 사실이라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 부토의 이런 행적들에 침묵한 채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싸우는 용감한 여성으로 띄우기만 하는 보도는 좀 편파적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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