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거리의 공포

“당신이 취재했던 마을 대표가 죽었어”
무장단체의 공격 속에서 민병대의 폭력까지 더해진 타이 남부 르포

무슬림 분리독립 세력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타이 남부 지역에선 장기간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무슬림이 대다수인 이 지역 주민과 분리독립 세력을 한 축으로 하고 군·경, 민병대, 불교도 주민 등을 다른 축으로 하는 오랜 갈등이 낳고 있는 비극이다. 지난 9월21일 인도네시아 정부의 중재로 타이 정부와 현지 무슬림 지도자들이 마침내 분쟁 종식에 합의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최근 두 달여 타이 남부 상황을 취재해온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현지 분위기를 전해왔다. 편집자

‘낮이나, 밤이나….’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타이군 병사들이 타이 남부 무슬림 거주지��인 빠따니 중심가 야시장을 순찰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낮이나, 밤이나….’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타이군 병사들이 타이 남부 무슬림 거주지역인 빠따니 중심가 야시장을 순찰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잊을 만하면 군검문소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검문하는 병사의 몸짓은 느릿했다. 분위기는 삼엄해도 긴장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타이 남부는 말레이계 무슬림이 95%를 차지한다. 이 일대에서 사상 최초이자 현재로선 유일하게 무슬림 출신으로 주지사에 오른 티랏 민트라삭(56) 얄라 주지사는 “폭력 사건도, 사상자 수도 지난해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며 싱글벙글했다. 그렇게 상황이 좋아졌다면, 이제 계엄령과 긴급조치는 거둬야 하는 것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군부에 달린 문제다.”

30일간 혐의 없이 체포·구금 가능

지난 4년여 동안 타이 남부 국경 3개 주인 나라티왓·얄라·빠따니는 몇천 건의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폭력 사태는 실체도 배후도 모호하다. 3200명가량의 목숨이 스러진 타이 남부에선, 지난 8월 총리 공관까지 점령했던 방콕의 시위대가 누렸던 ‘공권력의 인내심’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탁신 총리 시절 선포된 계엄령(2004년)과 긴급조치(2005년)가, 그러니까 ‘탁신 반대’ 목소리가 주류가 된 지금까지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에 따라 7일간, 긴급조치에 따라 30일간 뚜렷한 혐의 없이 누구라도 체포·구금이 가능하다. 방콕의 비상사태와 타이 남부의 비상사태는 이렇게도 달랐다.

“지난해 중반부터 시작된 대규모 군 병력 투입과 잇따른 연행, 그리고 검문소 설치로 무슬림 무장단체의 공격 빈도는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공격의 ‘질’이 떨어진 건 아니다.” 타이 남부 분쟁을 연구해온 민간 연구단체 ‘딥 사우스 워치’의 시솜폽 짓피롬시(52) 박사는 “오랜 기간 들쭉날쭉해온 무장세력의 공격 횟수가 줄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라고 강조했다.

‘얄라 무슬림 변호사센터’에서 활동가 아딜란 알리 이삭(42)을 만났다. 그는 “보안 당국이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세미나’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보안 당국은 ‘무슬림 무장세력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거나 ‘당신이 분리주의 운동에 연루됐다는 주장이 있어 설명을 들으려 한다’는 문구가 담긴 ‘초대장’을 여러 마을에 뿌리고, 노소에 관계없이 남성 주민들을 불러모아 ‘세미나’를 진행한다. ‘초대장’은 사실상 ‘출두요구서’나 마찬가지다. 정보를 얻는 때도 없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정신교육’을 하고 있는 게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주민 중에 나중에 다시 연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빠따니 시내의 한 구멍가게를 겸한 찻집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물건을 사고 있다. 찻집은 ‘괴한’의 총격이 빈발하는 곳이다.(Photo by Lee Yu Kyung)

빠따니 시내의 한 구멍가게를 겸한 찻집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물건을 사고 있다. 찻집은 ‘괴한’의 총격이 빈발하는 곳이다.(Photo by Lee Yu Kyung)

“뜨랏꿋!” 남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장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말레유(말레이어 방언) 단어다. 그 뜻은 ‘공포’였다. 보안군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과 만연한 공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무장단체의 공격 빈도가 줄었다고 ‘실적’을 내세우는 당국이 잊고 있는 건 ‘인권’이었던 게다.

“리, 당신이 인터뷰했던 그 마을 대표가 얼마 전 괴한의 총격을 받고 죽었어!”

빠따니주 야랑 지구의 달람벨루카 마을 참수 사건을 취재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여 만인 지난 8월8일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달람벨루카 사건의 희생자 마 둘라메(63)는 지난 2004년 1월 이른바 ‘제2세대 분리주의 운동’이 동을 튼 이래 40번째 참수 희생자였다. 사건 발생 열흘 뒤, 이번에는 같은 마을 대표 하마 둘라메(55)가 괴한의 총탄에 스러진 게다. 그는 유혈이 낭자한 참수 현장을 목격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하마 둘라메는 집에서 5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작은 기도방에서 저녁 8시30분께 그날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나오던 중 총탄 세례를 받았단다. 후속 취재를 갈 수밖에 없었다.

불교도와 무슬림 마을 간 분쟁의 골 깊어져

지난 8월 말 찾아간 사건 현장. 28발의 총탄 자국이 박힌 기도방뿐 아니라 그의 집 곳곳이 총탄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작정하고 덤벼든 공격이 분명했다. 그동안 분리주의 세력은 마을 대표 등 당국과 협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겨냥한 공격을 수도 없이 벌여왔다. 언뜻 보기엔 하마 둘라메의 죽음도 그 연장선인 듯했다. 하지만 현장 주변을 둘러볼수록 수상한 기운이 짙어졌다. 궁금증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라티왓 초아이롱 지구의 한 공립학교에서 무슬림 소녀가 불교도인 동급생들과 어울려 수업을 듣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나라티왓 초아이롱 지구의 한 공립학교에서 무슬림 소녀가 불교도인 동급생들과 어울려 수업을 듣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우선 마을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취재 초기부터 옆 마을에서 왔다는 젊은이가 주민들의 인터뷰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마을은 외진 곳이고, 도로는 차량이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다. 사건은 사위가 어둑해진 늦은 시간대에 벌어졌고, 사건 전후로 이 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오토바이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범인은 사건 현장 주변 지리에 밝고, 걸어서 현장에 와 범행을 저지른 뒤 걸어서 현장을 벗어났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해진다. 대다수 주민들이 현지 주둔 ‘국경순찰대’(Border Patrol Police)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얼핏 정규 경찰 같지만 국경순찰대는 1950~6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민병대 조직이다. 이들은 ‘터부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1976년 10월6일 탐마삿 학살*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70~80년대 반공전사로 이름을 날린 ‘빌리지 스카우트’의 형님 격이다. 조직의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져드는 폭력 사태의 주범으로 주민들이 지목하는 건 대부분 어김없이 이런 민병대 조직이다. 종류도 다양한 이들 민병대는 군·경찰과 한 팀을 이뤄 ‘작전’에 투입된다. 최근엔 ‘스스로 방어하자’는 구호 아래 조직된 ‘마을수비대’까지 급증하고 있다. 특히 타이 당국이 불교도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면서, 불교도와 무슬림 마을 간 분쟁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마 둘라메 참수 사건 당일, 마을 청년 무하마드 니웨(23)는 “국경순찰대 차림의 사내 대여섯 명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을 세 차례나 목격했다”며 “첫 번째 마주쳤을 때 눈만 드러나는 모자를 쓴 그들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더라”고 말했다. 상당수 주민들은 마 둘라메가 참수당하기 며칠 전 국경순찰대원 1명이 괴한의 총격으로 숨졌다는 점을 새삼 거론했다. 동료를 잃은 국경순찰대가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했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분리주의 무장단체의 소행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순 없다. 이 지역에선 민병대로 위장한 분리주의 세력이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개인적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

그럼에도 마을 주민들의 ‘의혹’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당국의 안이한 후속 대응 탓이다. 철저한 수사는 고사하고 늑장 출동해서 주검 사진만 찍고 사라진 군·경은 주검 밑에 혹시 숨겨져 있을지 모를 폭발물 탐지조차 하지 않았다. 타이 남부에선 희생자의 주검 밑에 폭탄을 숨겨놓고 2차 공격을 노리거나, 1차 폭탄 공격으로 기자와 경찰 등을 끌어모은 뒤 휴대전화를 이용한 원격조정으로 2차 폭탄 공격을 퍼붓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지난 8월21일 최남단 송아이 콜록 지역에서 기자와 구호요원 2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친 것도, 폭발 소식을 듣고 달려간 현장에서 두 번째 폭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군·경이 그냥 떠난버린 현장에서 주민 10여 명은 공포에 떨며 날이 밝아 주변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때까지 주검을 지켰다.

“개인적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 사건이다. 조사는 그렇게 결론 내려졌다.” 젊은이들의 얼굴이 빼곡히 박힌 ‘블랙리스트’ 수첩을 흔들어대며 파누 오타이랏 파타니 주지사는 차갑게 말을 잘랐다. 군과 정부를 불신하는 남부 무슬림들의 정서는 이런 데서 시작된다. 따지고 보면 군·경과 주민들 사이에 언어 소통조차 원활하지 않은 게 바로 타이 남부의 현실이다.

“집 수색을 하겠다고 일주일에 두세 번 와서는 여기저기 폭탄 탐지기를 들이대고 질문을 해대는데…, 대답을 할 수 있어야지.” 빠따니 코토로노루 마을에서 만난 한 50대 여성은 타이어를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은 전혀 못한다”고 했다. 실제로 남부 3개 주에선 ‘무앙(도심) 지구’에 사는 이들은 타이어를 듣고 말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 여성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 인권운동가 우즈망(26)은 “익숙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집 안에 들어와 수색을 하고 심문을 한다면 주민들의 심리 상태가 어떻겠냐”며 “입은 닫히고 적대감만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군경에 연행돼 고문치사를 당한 이맘 야파 카생의 가족과 이웃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지난 3월 군경에 연행돼 고문치사를 당한 이맘 야파 카생의 가족과 이웃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상황이 이런데도 현지 주둔군 당국은 올해 중점 과제로 ‘민심잡기’를 내세웠다(인터뷰 기사 참조). 이런 군 당국의 설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무슬림 마을에 들어가는 순간 실감할 수 있다. 최근 군인들이 컴퓨터 10대를 기증하고 갔다는 나라티왓 초아이롱 마을의 쌈판위타야 이슬람학교의 위데요 아레위아(61) 교장은 “컴퓨터는 없어도 좋으니, 그저 군인들이 남부에서 떠나줬으면 좋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군경, 총을 쏘며 학교로 들어가다

언어소통이 타이군과 남부 주민 간에 괴리감을 안겨주는 첫 장벽이라면 이따금 터져나오는 대형 사고는 남부 주민들의 마음을 얼음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결정타다. 지난 8월1일 발생한 빠따니주 종교학교 달롯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그 대표적 사례다. 1명이 숨지고 3명이 구속된 달롯 사건은 남부 주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딱바이 학살’**의 악몽을 연상시켰다. 그날 분리주의자 서너 명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딱바이 학살 당시 공이 컸던 민병대 ‘타한 프란’(흔히 ‘레인저스’로 불린다)을 선두로 한 200여 명의 군·경이 총부터 쏘며 학교를 공격해 들어갔다. 목격자들은 “순식간에 학교를 점령한 군·경은 학생 일부를 밖으로 불러모은 뒤 웃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채 장시간 무장세력 색출 작업을 벌였다”고 전했다.

이렇게 타이 남부 주민들의 고충과 당국에 대한 불신이 늘어가는 데는 언론의 직무유기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지난 3월 보안대의 고문치사로 사망한 이맘(이슬람 성직자) 야파 카생(56) 사건 당시 그와 함께 연행됐다 한 달여 만에 풀려난 라유 도코(18)의 진술을 들어보자.

“연행 당일 아침 나라티왓 경찰소로 이송됐는데 뜻밖에도 <채널3> <채널7> 등에서 기자 10여 명이 와 있었다. 약 12cm 정도 길이의 대못과 군화, 파이프 등의 물건도 준비돼 있었다. 경찰은 우리가 ‘RKK’(가장 활동적인 것으로 알려진 분리주의 그룹) 용의자이며, 준비해놓은 물건들은 우리가 테러 활동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설명은 30여 분 동안 이어졌다.”

빠따니주 종교학교 ‘달롯’에서 발생한 군경의 공격은 4년 전 발생했던 ‘딱바이 학살’을 연상시켰다. 이 학교 학생대표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빠따니주 종교학교 ‘달롯’에서 발생한 군경의 공격은 4년 전 발생했던 ‘딱바이 학살’을 연상시켰다. 이 학교 학생대표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그 30여 분 동안 질문 하나 던지는 기자가 없었다. 연행된 7명은 나라티왓 ‘39특수부대 캠프’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라유 도코 역시 뭇매를 맞고 거꾸로 매달린 채 물고문·고추고문(‘가루’가 아니라 잘게 썬 고추를 콧구멍 근처에 비벼대며 고문하는 것)·비닐봉투 뒤집어쓰기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 소년은 살아남았지만 옆방에서 고문을 당했던 이맘 야파(56)는 수감된 지 이틀 만에 숨졌다. 약 한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난 라유 도코를 다시 찾아온 군은 5만바트(약 150만원)를 건넸다. 그리고 “외부에 (고문당한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강요했다. 이 사건은 현재 나라티왓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경찰서에 모였던 10여 명의 기자들이 보안군을 집요하게 추궁해 진실을 파고들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라마단 시작, 폭력 사태 다시 상승 곡선

이슬람의 금식월 라마단이 시작된 9월 초부터 남부 지역의 폭력 사태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독 참수 사건이 많은 빠따니에선 9월8일과 9일 이틀 연속으로 참극이 벌어졌다. ‘싱글벙글’했던 티랏 민트라삭 주지사의 땅 얄라주에서도 9월28일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져 4명의 사상자가 났다. 나라티왓에서는 불교도 부자가 총격으로 숨진 뒤 목이 잘렸는가 하면, 새벽녘 고무농장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노동자와 학생, 교사, 보안대원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희생됐다. 금식월은 끝났다. 라마단 종료 축제가 벌어지는 10월 첫쨋주,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던 타이 남부 젊은이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간이다. 이들 젊은이 가운데 적잖은 수가 보안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타이 남부에 불안한 기운이 퍼지고 있다.

탐마삿 학살* 망명길에 올랐던 군부독재자 타놈의 귀국에 반대해 방콕의 탐맛삭대학에서 열린 학생 시위를 군·경과 우익 민병대가 유혈진압한 사건. 공식 사망자만 48명에 이르렀다. ‘1976년 10월 학살’이라고도 불린다.

딱바이 학살** 2004년 10월 연행된 이웃의 석방을 요구하는 주민 시위에서 84명이 학살된 사건. 7명은 총상으로, 78명은 군트럭에 짐짝처럼 실려가다 질식해 숨졌다.

주둔군 대변인 아크라 팁록 중령

“반군은 독특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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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바르게 작전하면 반군 잡기 힘들다.” 타이 남부 주둔군의 올해 중점 과제는 ‘민심 잡기’다. 그럼에도 현지 주둔군 대변인 아크라 팁록 중령은 ‘예의 바른 작전’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얄라주에 있는 보안작전사령부(Internal Security Operation Command) 제4본부 정보국에서 팁록 중령과 마주 앉았다.

-군·경의 분리주의자 소탕작전은 성공적인가.

=당연하다. 주민들은 더 이상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주민들은 보안군을 더 무서워하던데.

=그렇게 느끼는 이들은 반군의 가족이나 친척·친구들이다.

-지난 5년간 파악한 반군의 실체는 뭔가.

=외국인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자들이다. 일상적인 삶을 살고, 검은 피부에, 말레유(말레이어 방언)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 속에 섞여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종교를 믿고 있어 구별하기 어렵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없나.

=독특한 자들이다. 과거 공산주의 반군과 싸울 때는 유니폼도 입고 눈에 보이는 조직도 있어 싸울 만했다. 하지만 분리주의 반군세력은 다르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 참모총장이 ‘민심잡기’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학교 달롯 사건만 해도 군경이 총격부터 시작했다는데.

=군은 반군을 잡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좀 입혔고, 그래서 사과도 했다. 반군들이 종교학교를 이용하고 있다. 작전 당시 반군이 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그들이야말로 순수한 민간인을 방패로 이용하고 있다. 학교를 파괴하고, 폭탄을 설치하고…. 예의 바르게 작전을 벌이면 반군 잡기가 힘들다.

-민병대나 마을수비대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도 많은데.

=달롯 교장이 그 점을 지적했을 때 군 지휘부는 이를 이해했고 사과했다. 그 사건 이후 무조건 포위한 뒤 체포작전을 벌이지 말고, 혐의자만 체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민병대 문제에 대한 답변은?

=우리는 그들을 단독으로 이용하지 않고 항상 정규군과 함께 팀을 이뤄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그들도 계엄령과 긴급조치에 따라 반군 혐의자를 체포할 권한이 있다.

-탁신 총리 취임 뒤 남부 지역 유혈 사태가 재발했다. 초기 강경 대응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꼭 그런 건 아니다. 피곤하다. 그만하자.

나라티왓·얄라·빠따니·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출처 :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3522.html

(한겨레21 / [2008.10.10 제730호])

* “9월21일 인도네시아 정부의 중재로 타이 정부와 현지 무슬림 지도자들이 마침내 분쟁 종식에 합의했지만..” 이라는 ‘편집자 주’ 기술은 “양측의 대화가 진행 중” 임을 업데이트하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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