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밀호랑이, 살아서 돌아오라

종전 뒤에도 이어지는 타밀 반군 강제 수용과 실종… 비밀에 부쳐진 스리랑카 반군 수용소의 참상을 보다. [2010.10.22 제832호]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불교도가 대부분인 싱할라족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소수 타밀족은 오랜 무력 저항을 해왔다. 긴 내전의 끝, ‘타밀호랑이’ 반군이 진압된 뒤 스리랑카에는 평화가 왔을까? 스리랑카 정부는 안정을 말하지만, 2009년 5월 내전 종료 선언 뒤에도 반군포로, 피난민, 보트피플로 떠도는 타밀족 사람들의 생존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9월3~30일 스리랑카 현지에서 취재한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3회에 걸쳐 르포를 연재한다. 편집자

* 아래 기사는 지면관계상 담지 못한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 필자

» 타밀 반군에 ‘징집’됐다가 전쟁이 끝나자 정부군에 체포돼 반군 포로 수용소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Photo by Yu K. Lee)

“오만따이 검문소에선 더이상 숨길수가 없었다. 한때 나의 동지들이 정부군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5월, 전쟁이 종착지로 향할 무렵 스리랑카 정부군은 전쟁터에서 빠져나온 수십만 난민들 사이에서  타밀호랑이 (LTTE) 반군을 샅샅이 추려냈다. 수간디(35, 가명)도 그렇게 추려졌다. 다수의 반군들이 투항하고 자수했지만 수간디는 ‘나는 투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부군과 동행한 동지들이 누구였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정치국과 정보국 소속 4-5명 섞여 있었다”

수간디도  정치국 소속이었다. 그녀는 반군통치영토, 일명 타밀엘람 (타밀모국이라는)의 거주민에 관한 각종 통계사업과 주민들이 주로 몸담고 있는 농업, 어업 관련데이터 수집을 10여 년간 담당해왔다. 1995년 킬리노치 (타밀엘람수도) 전투에서 다리하나를 잃은 뒤 정치국으로 ‘발령’ 받았고 그 뒤론 줄곧 그쪽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2006년부터 강화된 정부군의 공세가 타밀엘람 목전까지 치고 들어왔다.

“킬리노치가 함락되기 직전 (2009년 1월 초), 보이스오브타이거(VoT, 타밀호랑이 라디오방송국으로 타밀어와 싱할라어 방송을 병행해왔다필자 ) 국장, 자완이 ‘장애인 전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타밀 호랑이 전 대원이 전투에 나선다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그렇게 명령을 하달하러 온 자완 역시 다리 하나를 잃은 장애인 전사였다. 전쟁 막바지 가족들까지 대동하며 ‘모바일’ 방송을 하던 자완은 현재 생사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던 자완의 딸, 삿수딴의 행방도 묘연하다. 당시 삿수딴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6살. 타밀 호랑이는 2006년부터 ‘한 가족 한 타이거’ 징병제를 실시해왔고, 자완은 큰 딸을 ‘해방운동’에 ‘바쳤다’.

그러나 장애인 전사들에게까지 전투를 명령하던 막바지, 반군은 ‘한 가족 두 타이거’ 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 소녀 소녀들까지 징집해갔다. 기본 3개월, 특수훈련까지 총 6개월이던 군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제대로 훈련 받지도, 싸울 의지도 없는 소년, 소녀 병사들이 뒹굴던 전장은 결국 비참한 끝을 봤다.

“우린 (장애인 전사들) 블랙 타이거 – 자살 공격조 – 와 함께 제 2선에 포진해 있었다. 5월 15일부터 전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열해졌다.  1선이 무너지고 나와 팀을 이뤘던 동지마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이송 팀 (타밀 호랑이는 부상입은 동료나 전사자들을 현장에 방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정부군에 의한 시체 훼손이나 부상자 현장사살, 강간의 우려때문이다. – 필자 ) 에 연락했지만 아무도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수간디 자신이 부상 동지를 끌고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지점까지 갔다. 반군 민간인 할 것 없이 부상자들과 시체더미로 넘쳐나는 현장을 담당하던 현장을 담당하는 동료는 수간디에게  그냥  정부군쪽으로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다음 날 수간디는 포탄이 날아드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었지…와뚜와깔루 다리에 도착하니 정부군이 보였다. 그들은 외다리인 나를 보자마자 반군이라고 몰아붙였다. 동행한 난민들이 그냥 부상입은 거라 말해줬고, 나도 계속 부인했다.”

그러나  19일 도착한 오만따이  검문소에서 그녀는 결국 난민들과 분리되어 반군 포로 수용소 (이하반군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오만따이 검문소 스피커는 자수 안내 방송을 계속했다.

“단 하루라도 반군활동을 한 자는 자수 바란다. 이름만 등록하면 보내 주겠다. 길어야 3개월 조사하고 풀어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두려워 자수를 택했다. 다수는 부모들의 설득에 의해서였다. 사하이에 라니(43)의 아들도 그렇게 자수했다. 하지만 아들은 와우니아 팜바이마두 수용소에 1년 반 넘게 수감 중이다. 3개월 안에 풀려난 이는 아무도 없다.

“아들이 (반군에) 징집된 게 2007년 4월이고 다음 해 초 도망쳐 나왔어. 그놈을 숨기느라 지하벙커에서 2년동안 똥 오줌 다 받아냈는데…”

어머니는 결국 눈물 두 줄기를 쏘옥 뽑아내고 말았다.

자수 끝에 수용소로

길어야 3개월이라던 정부가 반군 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한 건 11개월이 지난 올해 4월 10일, 장이앤들을 먼저 내보내면서 부터다. 한달 후에는 565명의 미성년 병사들을 석방했다. 이 미성년들은 처음부터 별도 관리를 받아왔고, 유니세프의 독립적 모니터를 허용하는 등 긍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수간디는 1300명의 장애인 병사와 함께 4월에 풀려났다. 이번에는 그녀의 외다리가 석방에 도움이 되었다.

“석방되기 직전까지 심문당했다.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내 차례가 돌아왔고, 각기 다른 정보국 직원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수간디에 따르면 군은 타밀 호랑이 내부 정보 화일대로 아주 상세히 물었다. 부서이동은 어떻게 했는지, 몇번의 전투를 치뤘는지, 언제 어떤 전투에서 싸웠는지, 몇 시에 전투에 나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까지까지. 수간디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허용되던 샤워 시간을 어기면 여군이 몽둥이로 팔뚝을 세차게 때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구타가 심했던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에겐 심각한 고문은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수감되었던 ‘ㅁ’ 수용소  A 블럭에는 샤워 시설이 없어 군의 인도하에 D 블럭 우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장에 가리개도 없다. 있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고 아무도 손 볼 생각을 안했다”.

석방 후에도 그녀는 자유롭지 않다. 정보국 직원이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집에 없을 때는 가족들에게 행방을 묻기도 한다. 반군 조직에서 익힌 컴퓨터 기술과 행정 능력 덕에 최근 새 일터를 구하고 거주지를 옮긴 그녀에게 군은 ‘재직 증명서’와 거주지 등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 종전 선언 1년 뒤에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는 준전시 같은 검문이 계속된다. (Photo by Yu K. Lee)

샅샅이 추려진 반군들, 체포와 감시는 계속된다

“수용소(detention center) 가 아니다. 전(前) 반군들은 지금 사회복귀훈련 (Rehabilitation Center) 센터에서 교육받고 있다.”

반군 수용소 총 책임자 수단따 라나싱헤 준장은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수용소’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전 반군들과 군인들이 1년 넘게 함께 하며 얼마나 사이가 좋아졌는지 ‘와서보라’ 는 빈말도 했다. 공식적으로도 그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의 책임자다. “반군 활동에 개입한 기간과 개입정도 그리고 사회복귀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나 성과에 따라 석방 순위를 정한다” 는 게 그가 설명하는 석방 기준이다.

수감자들은 ‘애국의례’ 로 아침을 연다. 그들이 거부해 온 싱할라어 국가를 불러야 하고, 부르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한 소년은 국가를 부르지 않아 땡볕에서 무릎끓고 하루종일 벌을 섰고, 또 다른 소년은 국가를 부르는 동안 기침을 했다고 군화발로 채였다” 지난 4월 ‘ㅁ’ 캠프에서 석방된 카란(38, 가명)의 말이다. 캠프안 모든 전달사항은 싱할라어로 이루어진다. 싱할라어를 말하줄 아는 수감자가 소 그룹의 대표노릇을 했고 그를 통해 모든 사항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해체하라는 명령을 못알아듣고 자리에 계속 남아 있던 40대 쯤 되보이는 이가 군화발에 채여  쓰러졌다…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난 해 12월에는 30대 초반의 한 수감자가 몸이 아주 좋지 않아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허가가 안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 사망한 일도 있었다고 카란은 말했다. 수용소 안에는 전문 의사를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반군 중에서 군의관 노릇을 하던 (일부는 진짜 의사) 수감자가 전체 수감자들의 진료를 담당했지만, 의약품이 허술해 가족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잦았다. 반군 수용소에 대한 가족들의 방문은 허용되었지만 교통비 문제로 방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많았다. 10-20분 가량 허용된 면담은 두 세명의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아울러, 당국의 허가를 받은 카톨릭 신부들이 주도하는 일요일 미사가 허용되고 있다.

지난 4월 10일, 다리 하나가 불편한 카란 역시 장애인 석방 당시 풀려났다. 그 한 주 전 4월 2일 그의 캠프에서 차출된 107명의 수감자들이 인근의 한 학교 건물로 먼저 이송되었다.

“거기서 우리가 곧 석방될 거라 들었다. 그러나 한 명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6명은 테러리스트조사국(TID) 에서 데려갔다. 6명 중 한 명은 두눈 장님, 두명은 한눈을 잃었고, 또 다른 한명은 눈 하나와 두 손을, 그리고 한 명은 다리 하나가 없다. 나머지 하나는…기억이 잘 안나는데…그들을 왜, 어디로 데려 갔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 여섯 명이 다른 캠프로 이송되었는지, 강제 실종의 희생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제 실종의 역사가 깊은 스리랑카에서 기록없는 이송은 강제 실종과 법외 사살 우려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카란이 전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 역시 이런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 하루는 3명의 수감자들이 아침 조례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군은 ‘그들은 간밤에 도망갔다’고 말했다는 것.

“캠프는 이중 망으로 철통같이 쌓여 있고, 사방에 무장 군이 배치되어 있다. 도망가면 바로 사살당한다고 처음부터 세뇌 받아왔다. 누구라도 도망갈 환경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카란의 말이다.

강제 실종, 법외 사살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

이 반군 수용소에 대해 인권단체들의 우려는 대단히 높다. 우선, 국제적십자사를 포함 독립적 기구의 방문과 모니터가 전혀 허용되고 있지 않아 수감인원과 감호 상태, 더 나아가 생사 여부에 대한 정보까지 투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지난 9월 ‘법적 구속을 넘어 : 스리랑카의 타밀호랑이 혐의자 대량구금’ 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국제법률가협회 (ICJ)는 이들 수용소를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부운영 집단 수용소’ 라 표현했다.  국제법률가협회는 정부가 공식적 혹은 비공식으로 발표해 온 수감자 인원부터 불규칙한 점을 꼬집었다.

ICJ가 정리한 오락가락 수치를 보자. 수용소 책임 준장이 지난 해 11월 공식적으로 밝힌 ‘10,992명의 투항자’ 와 비공식적으로 밝힌 ‘12,000명 수감자’ 두 개의 버전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유엔대표부는 “12,700명의 반군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반군으로 추려졌다”고 말했다. 이후 언론에는 10,732 라는 숫자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 2월 이래 반군 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된 라나싱헤 준장이 9월 29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수치는 10,970 명이다. 그는 “현재까지 3580명이 석방되어  7390명이 남아 있고, 내일(9월 30일)  400명이 더 석방되면 대략 6900명 가량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다시, 정부소유 일간지 <데일리 뉴스>는 10월 26일자 보도에서 11,696명중 5,819명이 석방되었다는 ‘사회복귀 및 교도소 개혁부’ 장관 구네세카라 (D E W Gunesekara)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렇게 수감자 수치가 둘쭉날쭉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불규칙하게 계속된 추가 검거다 지난 해 중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의 잇단 탈출 드라마가 펼쳐지던 시절  (<한겨레 21> 797 기사 참조) 캠프내에서는  검거 열풍이 불었다고 난민들은 전했다. 아울러,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난민 석방 과정에서 일부 난민들은 재정착지가 아닌 반군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서너달 돈있는 사람들이 캠프를 탈출하고, 군은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대거 잡아갔다. 우선 17 – 25 살 사이의 소년들을 잡아갔고, 하룬가 이틀후에 소녀들을 잡아갔다. 한 가정에서 두 명이상  잡혀간 경우도 있는데 부모들이 통곡 하고 반발하면 한 두명 풀어주기도 했다. 군은 도망치지 않은 젊은이들이 반군이기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 떠나지 못했다는 짐작으로 잡아갔다.”

‘존 4’  피난민 캠프 난민 아노자(20대, 가명)의 증언이다. 그녀는 올해 8월 말께, 정부 에이전트가  (Government Agent  : ‘구청장 되는 공무원으로 중앙정부가 임명필자주) 난민들에게 중간 캠프로 이동해 한 두달 지내면 고향으로 재정착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난민들이 거부한데도 이 점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젊은 아들 딸이 있는 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새로운 캠프로 이동하면 또 등록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반군 추린다는 명목으로 젊은 이들을 또 잡아갈 것 아닌가”

‘존 2’  피난민 캠프에 갇혀 있다 지난 해 8월 가족들이 모두 석방되었던 카란의 경우도 재정착길 향하는 버스에 오르다 다시 붙들려 피난민 캠프에 홀로 남았고 심문과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 연행된 8월 부터 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존 2’ 피난민 캠프내 자리잡은 군 초소로 열 다섯 번 정도 호출받아 불려갔다. 처음 4-5번은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나같은 사례는 많다. 나는 자동자 정비소에서 일했지 반군이 아니었다”

군은 카란에게 반군이 아닌 걸 증명하라 다그치며 크리켓 스틱으로 구타했다. 그 후유증으로 카란은 지금 숨쉬는데 어려움이 크다고 말한다. 카란처럼 심문받던 작은 소년 하나는 눈에 심한 구타를 당하고 병원치료도 허용되지 않아 결국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도 반군 캠프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시력 상실 때문에 불구자들과 풀려났다. 50살 넘은 한 남성은 구타가 심해 기절하기도 했다. 카란은 그가 타밀 호랑이 행정조직에서 월급 받고 일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타밀 호랑이는 자체 법원, 은행, 경찰서 등 여러 기관과 부서를 운영해왔고 그에 딸린 고용인원이 적지 않았 – 필자 주).

한편, 반군이었던 수간디가 석방되는 나기 직전까지 심문을 당했다면, 카란은 그렇게 이송된 반군 캠프에서 별다른 심문이 없었고 대신 ‘중노동’을 했다고 말한다.

“반군이 아님을 증명하라”

반군 수용소의 수감자 수치가 모호한 두번째 이유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대략 10여개로 추정) 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용소로 이송된 수감자들이 적지 않아  ‘반군 수용소’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수감자들은 수감 생활 중간에 ‘사회복귀훈련 센터’ 에 속하지 않는 ‘웰리칸다’나  ‘오만따이’ 혹은 콜롬보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부사 군캠프’ 등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사 캠프를 꾸준히 방문해온 국제적십자사가 그곳으로 이송된 수감자 정보에 따라 실종된 아들을 찾던 부디마 (30대, 가명) 의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고 방문을 도와준 것도 이 점 때문에 가능했다. 부디마의 남편은 그러나 타밀 호랑이 대원이 아닌  타밀구호기구(TRO)의 직원이었다. TRO는 친 반군 타밀 구호기구로 쯔나미 재난 당시와 지난 해 전쟁 막판까지 전장에서 유일하게 구호작업을 했던 구호단체다.

“국제적십자사는 경찰 감호소, 부사 군 캠프를 포함 기존에 우리가 꾸준히 방문해왔던 다양한 형태의 수십개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후 투항한 반군들이 주로 수용되어 있는 ‘투항 캠프’ (‘사회복귀훈련센터’를 말함) 에 대해서는 지난 해 7월 이래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사  스리랑카 대변인 사라신 웨자라트나의 말이다. 국제적십자사는 수용소 방문에 관한 사항을 정부와 양자간의 의제로만 풀 뿐 비밀 정책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구호단체 일꾼도 반군으로 몰려 수감

국제법률가협회를 비롯 인권단체들은 재판도, 뚜렷한 혐의도 없는 이 구금행태가 국제인도주의법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스리랑카 정부군이 생포된 타밀 반군을 알몸으로 벗긴 후 사살하는 비디오와 반군 포로를 고문하다 결국 죽이는 듯한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반군 수감자에 대한 우려는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두 사례는, 병원폭격과 식량 배급줄 폭격 그리고 전쟁 막바지 백기 들고 투항하던 타밀 호랑이 정치국 지도자 나데샨 등 수백 명의 투항자들을 모두 학살 했던 이른 바 ‘백기 투항 학살’ 사례와 더불어 스리랑카 전쟁 범죄의 증거들로 거론되고 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는 또 다른 ‘백기 투항’이 ‘학살’ 이 될 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 30대 남성의 증언이다.

“5월 17일 늦은 오후였다. 총성은 멈춘 듯 했고, 타밀 호랑이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어린이 연장자들과 한 벙커에 있었다. 인근 벙커에 있던 신부님 하나가 ‘정부군을 봤다.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치며 모두들 백기 들고 투항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린 백기를 보이며 벙커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군은 총을 쏘았다. 잠시 후 밖이 조용해진 듯 해서 우린 (어린이, 연로자 포함) 다시 백기를 보이며 랜턴도 들고 군인들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는데 군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등을 돌려 다시 벙커 방향으로 걸어가자 군은 총을 쏘았다. 모두들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고, 벙커로 다시 기어들어 왔다. 다음날 아침 군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병원과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고 백기 투항하는 민간인들까지 학살과 생존의 갈림길을 오가야 했던 이 전쟁터가 과연 재판대에 오를 수 있을까? 굼뜨던 유엔 사무총장의 스리랑카 전범 자문위원회가 이제 막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타밀호랑이’와 ‘전쟁범죄’ 두 단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단어이자 가장 민감한 이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논쟁도 그리고 증언도 강제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쟁범죄를 조사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라는 기구를 구성했지만 이 위원회가 교훈과 화해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스리랑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관련기사: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22.html

* 아래는 전반군 대변인 인터뷰 기사.

인터뷰 : 다야 마스터 (55, 타밀 호랑이 전 대변인)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다야마스터 (전 타밀호랑이 대변인)

본명 벨라이우탐 다야니디. ‘다야 마스터’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타밀 호랑이 대변인을 지냈고, 기자들에게 친근한 인물이었다. 2009년 종전 한달 전인 4월 정부군에 투항한 후 정부소유 방송국 토크쇼에 출연하여 타밀 호랑이 (LTTE) 반군을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 북부 자프나에 사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하였다.

질> 반군 대변인을 하던 당신은 지금 친정부 방송국 (Dan TV) 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가 임명한 건가?

답> 내가 선택한 일이다. ‘친정부’ 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린 북부지역 개발 이슈 등 골고루 다룬다.

질>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답> 자프나에서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인이 자유롭다. 콜롬보 상황은 잘 모른다.

질> 사는 환경은 어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나?

답>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석방된 모든 반군 대원들이 다 자유롭다.

질> 재정착 지역이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 이동의 자유를 완벽히 누린다면서 왜 그런 곳은 둘러보지 않나?

답> 곧 방문할 에정이다. 안다, 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걸.

질> 북부의 군사화, 식민화가 심각하다. 불교도가 없지만 볼교 사원도 짓고 있는데

답> (불교도) 군인들이 있으니 사원을 지을 수도 있지…

질> 반군 대변인까지 지낸 당신은 그렇게 자유로운데, 투항한 반군사병들 다수가 여전히 수감 중이다. 국제적십자사의 접근까지 봉쇄되고 있다.

답> 그건…. 그들도 서서히 석방될 것이라 본다.

질> 재판없이 1년 반 넘게 구금 중이다. 국제인도주의법 위반이다.

답> 코멘트 하고 싶지 않다. 내 신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질> 지난 해 투항할 때 정확한 상황은 뭔가? 일각에선 당신이 그냥 병원에 있었고 그 지역이 군에 함락된 것이라는데

답> 푸투마딸란에 있었고 군이 진격해 왔다. 그리고 내가 투항한 거 맞다.

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건가? 아님 그동안 싸워온 신념과 가치를 다 버린건가?

답> …

질> 일부는 당신을 배신자라고 한다. 투항 직후 정부 운영 방송국 토크쇼에 나와 타밀 호랑이를 비판했는데…

답> 내가 4월에 투항했고, 5월 18일 정치국 지도부도 투항했고 (백기 투항건을 말함) 다른 전투병들도 결국 투항하지 않았나!

질> 타밀 호랑이가 강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뭐가 잘못되기 시작했나?

답> 2005, 2006년부터 무기 공급에 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해군이 영해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인도 정보국의 작업으로 무기를 적절하게 들여오지 못했다.

콜롬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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