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3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하지만 무리한 송환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로힝야 난민 캠프에서는 송환 반대 시위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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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이유경 (프리랜서 기자) 2017년 12월 19일 화요일 시사IN 제535호
지난 11월 23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양국은 로힝야 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합의문에 따르면 송환될 난민들은 각종 증거물을 통해 라까잉주(‘아라칸 주’라고도 함) 거주자였음을 증명하되 지난 해 10월 9일 즉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의 첫 공격 시점 이후 피난민이어야 한다. 이들이 돌아갈 곳은 “임시캠프”다. 미얀마쪽 국경 ‘다르 지 자르(Dar Gyi Zar)’ 마을이 이들의 송환지로 거론되고 있다. 송환된 난민들을 이 마을로 보내기 전에는 통표레트웨이(Taungpyoletwei)와 응아꾸야(Ngakhuya) 두 지역 ‘캠프’에 거주시킨다는 게 미얀마 노동, 이민, 인구부 상임장관 뮌 까잉(Myint Kaing)의 설명이다. 뮌 까잉 장관은 12월 1일 미얀마 국영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두 지역에 “캠프를 건설중”이며 “12월 말부터 송환 난민을 받겠다”고 말했다.
앞서 양국 합의에 따르면 합의일로부터 두 달안에 첫 송환을 시작한다는 방침이 적혀 있다. 합의문에는 “난민탈출 상황이 재발치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합의문이 작성되는 그 시각에도 난민들은 계속 탈출 중이었다. 국제이주기구(IOM) 11월 28일 발표에 따르면 11월 20일부터 7일간 방글라데시에 새로 도착한 난민수는 약 1,800명이다. 석달간 총 624,251명이 도착했다. <로힝야 Vision TV>는 12월 4일 라띠동 타운쉽 (로힝야 무슬림과 라까잉 불교도들이 거의 동수로 이웃하며 살던 타운쉽) 로힝야 아홉 가족이 피난길에 나선다며 구조를 호소하는 내용을 내보냈다. 피난 길에 나선 이들은 “라까잉 불교도들이 마을을 봉쇄해서 살 수가 없다. 지금 피난 하지 않으면 우리 또 다시 공격 받게 될 것이고 죽게 될까봐 두려워 피난길에 오른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마을을 불태우는 미얀마 군과 라까잉 불교도 폭도들을 뒤로한 채 방글라데시로 피난온 알리(가명, 50대)는 로힝야들의 시민권을 박탈한 ‘1982 시민권법’ 적용이전 시민권증인 ‘국민등록카드(National Registration Card, 혹은 “NRC”)’를 갖고 있다. 알리의 여섯 자녀들은 (외국인들에게 발급하는) “임시카드”, 일명 ‘화이트 카드’가 있다. NRC 카드, 화이트 카드 모두 이번 송환 ‘자격’에는 부합되는 증거물이다. 하지만 알리가 묻는다. “왜 우리가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와야 했는지 잘 알지 않는가. 어떻게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나”.
합의 발표 3일후인 11월 26일에는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로힝야 캠프에서는 피켓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의 요구는 단호했다. 시민권 회복, 인권보장, 각종 손실에 대한 보상 그리고 유엔이 안전을 보장해야 된다는 거다.

파키스탄 일간지 돈(Dawn) 1978년 5월 14일자는 당시 나가민(Nagamin) 작전으로 자행된 제1차 로힝야 축출과정에서의 폭력을 목격자 증언으로 담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이번 합의가 국제사회 압력에 직면한 아웅산 수치 정부의 ‘PR 쇼’라 보고 있다. 아웅산 수치는 이미 10월 12일 대국민 연설에서 “과거 두번의 성공적인 난민 송환 경험을 바탕으로 난민송환을 추지하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이 발언 또한 과거 로힝야 난민송환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드러냈다. 그가 “성공적”이라고 표현한 과거 사례는 난민송환 기본 원칙에 위배됐을 뿐 아니라 인도주의적으로 대참사를 나았기 때문이다. 우선, 1978-1979년 1차 송환 사례를 보자.
1978년 4월 당시 네윈 군사정부의 ‘킹 드래곤 작전’ (혹은 ‘나가민 작전’이라고도 함)으로 그해 말까지 약 20만명 이상의 로힝야들이 방글라데시로 내쫓겼다. 5월 14일자 파키스탄 일간지 더 돈(Dawn)은 같은 날 프랑스 <누벨 옵세르바테르>기자 목격담을 인용하여 “버마의 무슬림들 총살당하다 (Burmese Muslims machingunned)”라는 제하의 증언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4월 23일 버마 군인 30명이 방글라데시로 국경을 넘어가는 무슬림(로힝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또 “왼쪽가슴에 부상을 당한 한 여성에 따르면 군인들이 다른 여성의 가슴을 자르고 이내 칼로 찔러 죽였다”는 내용도 담고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과 유사한 방식의 살상이 벌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해 7월 9일 방글라데시와 미얀마(당시 국호 ‘버마’)는 난민송환에 신속히 합의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난민들을 9월 15일부터 3일마다 2천명씩 강제 송환했고 이듬해인 1979년말 대부분이 미얀마로 송환됐다. 당시 방글라데시 정부는 난민송환 전술의 일환으로 로힝야 난민들의 식량 배급량을 줄였다. 이는 곧 아사자까지 유발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당시 방글라데시 구호 및 재활부 장관인 사이드 알리 카스루(Syed Ali Khasru)는 78년 12월 12일 난민구호 코디네이션 회의를 주관하며 이렇게 말했다.
“살집좋고 잘 먹은 난민들 모습 보기 좋지요. 하지만 나는 정치인입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이곳에서) 너무 편하게 만들면 그들은 버마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에 따라 난민들에 대한 식량 배급량은 세계보건기구가 규정한 하루 칼로리량에 미치지 못했다.
가장 취약한 계층이 아이들부터 아사하기 시작했다. 아사자는 계속 늘어 1978년 11월 26일-12월 3일 주간에 이르러서는 1만명당 33명 꼴로 사망했고 그해 5월부터 12월까지 따지면 총 1만명이 사망했다. 이중 70%가 어린이다. 이 사실은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 콕스바자르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의 알란 린드퀴스트(Alan C.Lindquist)가 1979년 6월 발표한 보고서로 알려졌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같은 시기 베트남 보트 피플들이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20만에 달하는 아라칸 무슬림 난민들에 대한 관심은 극도록 적었다”고.

1992년 2월 4일자 . “버마 무슬림”(로힝야를 지칭)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보도. 방글라데시 현지 언론 를 인용한 AFP기사를 재발행했다.
2차 송환 사례인 90년대 상황도 원칙에 위배되긴 마찬가지였다. 1991년 후반부터 이듬해 중반까지 25만에서 30만에 달하는 로힝야 피난민들이 다시 방글라데시로 쏟아졌다. 1992년 2월 4일 방글라데시 현지 언론 <Dainik Bangla Newspaper>를 인용보도한 <AFP>의 “지난 한 주간 버마(라까잉 주)에서 구금중인 무슬림 약 300명이 아사했다” 기사가 <방콕 포스트>에 실렸다. 당시 로힝야들이 직면한 상황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 시기는 1988년 민주항쟁으로 온국민의 저항을 목격한 군부가 인종과 종교간 이간질을 더더욱 가속화하기 시기로 분석된다. 라까잉 주에는 불교도 정착촌인 “모델촌”(현지에선 “나탈라”라고 함)을 건설하면서 군부는 무슬림 인구 감축에 구체적 노력을 보였다. 또, 부띠동 타운쉽(라까잉 주에서 로힝야들이 주로 거주하는 두개의 타운쉽 중 하나)에는 로힝야들의 거주지에 대규모 군부대 시설이 들어서고 병력도 증가했다. 하루아침에 거주지를 뺏긴 로힝야들은 그땅에 들어서는 군기지 건설에 강제 노역으로 동원됐다. 갈취, 구타, 여성 강간사례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 인권운동가인 에디뜨 미란떼의 91년 보고서 ‘우리의 여정’(Our Journey)에는 강제 노역을 피해온 60세 로힝야 난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는 “2-3일에 한번 (강제 노역에) 동원됐고 보수는 없었으며 노동도구도 제공되지 않았고 각자 알아서 가져가야했다”. 또, “물, 식량 제공 전무”했고 “일하다 아프기라도 하면 나무 몽댕이로 구타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90년대 초반 로힝야 난민 사태와 아사자 관련 보도들
강제노역과 각종 인권침해를 피해 온 난민들 송환을 위해 1992년 4월 28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양국은 또 다시 난민송환 문서에 합의했다. 그러나 송환을 거부하는 난민들에게 9월부터 물리력이 동원되기 시작됐다. 송환 문제에 ‘협조’하던 유엔난민기구가 그해 12월부터 협조를 일시 중단한 것도 그때문인데 그러나 이듬해인 93년 5월 유엔난민기구가 난민들을 인터뷰 통해 자발성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방글라데시 정부가 허용함으로써 유엔은 개개입하게 된다. 1994년 8월 이후로는 방글라데시 정부도, 유엔난민기구도 난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인터뷰 절차를 생략하고 ‘대량송환’으로 방향을 틀었고 9월부터는 ‘대량+강제+송환’이 이루어졌다. 이런식의 강제 송환은 1995년 2월까지 계속됐다.
이시기 난민 송환 문제를 자체 조사해온 미국난민협회(USCR)에 따르면 1995년 2월 기준 15만5천명이 송환됐다. 그리고 4천명에서 9만 5천명 사이 넓은 폭으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수만큼의 난민들은 송환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방글라데시 국경지대 곳곳에 로힝야 슬럼가들이 형성된 건 이런 상황에 기인한다. 송환을 거부한 이들은 ‘캠프’라는 공간적 공식성을 거부하고 대신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예컨대, 2014년 필자가 여러 정보원을 묻고 또 물어 배를 타고 찾아갔던 한 ‘깡촌’에는 1978년부터 2012년 폭력사태까지 34년간 탈출한 피난민들이 조용하게 모여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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