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버려야 협상? 원하는 게 투항인가

[2014.01.20 제995호]

[세계] 카친 반군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 “우린 정치 협상 위해 무장투쟁 앞뒤가 틀렸다”

* 필자는 <리영희재단>의 지원으로 지난 10월 26일부터 11월 19일까지 버마 북부 카친주∼중국 접경지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 기간 무장 투쟁을 벌여온 카친족은 1994년 정부군과 휴전협정에 조인한 뒤 17년간 정치협상을 추구해왔으나 2011년 6월 군사 충돌이 재개된 뒤 3년째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버마 정부는 10여개에 이르는 주요 반군조직들과 대부분 휴전에 합의했지만 카친족과의 협상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본 기획 취재는 시사 주간지 <한겨레21> 을 통해 게재될 예정이며 본 사이트에는 지면상 싣지 못한 부분과 사진을 보충하여 게재합니다. / 이유경 Penseur21 

지난 해 (2013) 10월 말, 카친 독립군 (KIA) 병사들이 반군 수도 라이자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정부 통치 구역이자 카친 주 공식 주도(主都) 인  미치나를 거쳐 오는 소수민족 대표단 을  기다리고  있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지난 해 (2013) 10월 말, 카친 독립군 (KIA) 병사들이 반군 수도 라이자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정부 통치 구역이자 카친 주 공식 주도(主都) 인 미치나를 거쳐 오는 소수민족 대표단 을 기다리고 있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카친 주에서 피난민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반군 수도 라이자(Laiza)다. 약 2만 으로 통계되는 피난민 (IDPs)이 거주민 두배를 웃도는 이 소도시에서는 1961년 이래 중앙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여온 카친독립기구 (KIO)가 사실상 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 경찰서, 이민국, 법원 그리고 마약, 인신매매 사범 등을 교화시키는 보호감호소와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라이자 병원까지 모두 ‘KIO정부’ 관할이다. 내전 반세기 동안 반군은 ‘사실상 정부’가 됐다. 반면 군사독재가 주무른 중앙정부는 기능을 상실한 ‘실패한 정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이민국과 다리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카친이민국 건물, 그 건물 옆에서 정복차림의 카친 직원들이 오고가는 이들의 국경 통과증을 점검하는 장면은 실패한 중앙정부를 역설하고 있다.

60%의 버만족 통치에 맞서 자치와 평등을 요구해온 40%의 소수 민족들이 제각기 결성한 무장단체들은 오늘날 버마 국경의 광범위한 영토를 통제하고 있다. 타이와 국경을 맞댄 동부 카렌주처럼 ‘정글’과 ‘살윈강 물살’로 묘사되는 국경이 있는 가하면, 라이자처럼 ‘반군 이민국’이 돋보이는 국경도 있다. 물론, 이민국 북쪽으로 2-3km 쯤 올라가면 바지끝만 접어올리고도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얕은 냇물이 흐른다. 이 ‘냇물국경’은 최근 분쟁의 여파로 증가세인 인신매매 경로가 되고 있다.

G_EthnicConference_LZ_Kachin_131028_0065_SM

지난 해 (2013) 10월 30일부터 카친 반군 수도 라이자에서 4일간 열린 ‘전(全) 소수민족무장단체 회의’ 참가자들을 맞이하러 가는 길. 마중 나가는 카친독립군(KIA) 차량이 지나자 검문소 병사들이 ‘경례’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KIO의 중추적 존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군사부인 카친독립군(KIA)이다. 카친 주 일대와 샨주 북부에 포진하고 있는 KIA는 총 5개 여단(Brigade) 1만여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비슷한 수치의 예비군과 ‘카친 민병대’(Kachin People Militia)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후반 몰락한 버마공산당(CPB) 유물로 국경을 떠도는 AK 47과 ‘KM 22’라 불리는 자체 제작 소총, 사제폭탄 그리고 60mm박격포와 지뢰 등이 KIA의 주요무기다. 현대식 무기를 갖춘 정부군에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악지형을 타는 게릴라전 능한 잇점이 있다. 개혁 이미지가 강한 테인 세인 대통령은 2010년 9월 총리 시절 카친반군을 “뿌리뽑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8년 통과된 신헌법에 따라 모든 소수민족무장단체들을 국경 수비대 (BGF)로 전환시키려는 정부의 계획에 KIO가 반발하며 데드라인을 넘긴 탓이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우리가1994년 정부군과 휴전을 맺고 헌법 기안을 위한 ‘민족회의’(National Convention)에 10여년 참여해 온 건, 그 과정이 자치를 일궈내기 위한 정치협상의 지난한 과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 접경지대에서 펼쳐지는 고지전

KIA 부사령관 군 모 소장(Major Gen. Sulmut Gun Maw) 은 <한겨레21> 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인터뷰 기사 참조) 그러나 14년 걸려 기안한 헌법은 소수민족 자치보다는 버만족 중심의 중앙 집권을 요했다. KIO를 포함한 휴전그룹의 제안은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고 하나의 군대만을 명시한 헌법은 소수민족군대에게 BGF가 되길 강요했다. 금광, 목재, 옥 등 카친 주의 풍부한 자원까지 분쟁을 촉진하는 전조가 됐다. 2011년 6월 9일, 정부군이 카친 동남부 모막 타운쉽을 공격하면서 17년 유지된 휴전은 종잇조각으로 찢겨나갔다, 

11월 중순, 라이자에서 8km 가량 떨어진 라와양(La Wa Yang) 전선으로 향했다. 라와양은KIA 2여단 (2nd Brigade) 관할이지만 현재 ‘수도방위특별사령부’의 이름으로 철통 방어 중이다. 전선은 평지 마을과 이를 둘러싼 여러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져있다. 봉우리대 봉우리, 정부군과 반군이 대치 중인 그 틈새에서 중국업체 하나가 금광채굴사업을 하고 있었다. 중국인 매니저 한명과 현지 직원 세 명 그리고 이따금 벌목을 위해 오고가는 인근 피난민 캠프 난민들과 한 군인 가족 등이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인 전부다.

‘자원있는 곳에 분쟁있다’.  반군 수도  라이자에서  멀지않은 곳에 중국업에들이  금광 채굴 사업을 하고 있다. 카친주는  금광, 목재, 옥 등  천연 자원이 풍부하다.  다수중국업체들이  개발 이익을  보는  가운데  허가권을  내주고  세금을  챙기는 정부군과  반군  모두에게  자원은  전쟁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자원있는 곳에 분쟁있다’. 반군 수도 라이자에서 멀지않은 곳에 중국업에들이 금광 채굴 사업을 하고 있다. 카친주는 금광, 목재, 옥 등 천연 자원이 풍부하다. 다수중국업체들이 개발 이익을 보는 가운데 허가권을 내주고 세금을 챙기는 정부군과 반군 모두에게 자원은 전쟁의 주요한 자금원이 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2012년 12월 중순부터 2013년 1월을 거치며 급물살을 탄 전쟁에서 정부군은 공습까지 감행하며 반군 수도를 집중 압박했다. 1월 18일, 라이자에서 10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라자양 (La Ja Yang) 전선이 육,공군력에 밀려 정부군 손에 넘어갔다. 그제서야 테인 세인 대통령은 ‘라자양 휴전’을 선언했지만 카친입장에서 볼때 의미없는 휴전은 불신만 더 초래했다. 휴전을 비웃듯 전투가 계속된 것도 물론이다. 봉우리와 등성을 오르내리는 게릴라식 지상전은 실상 ‘봉우리 탈환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카야 붐(Hka Ya Bum : ‘ 봉우리라는 )까지 정부군에 함락되었다. 카야 붐이 넘어가면 라이자도 위험해진다고 예견했던 바지만, “공습 때문에 저항이 불가능했다”는 게 전략 사령관 자우 콩 소장 (Maj. Gen. Zau Kawng)의 설명이다. 이어 KIA는 1-2km 가량 떨어진 라와양으로 후퇴, 전선을 재정비했다. 라와양 전선을 기준으로 볼 때 서남 방향으로는 정부군 초소가 들어선 봉우리들이 카친전선을 굽어 보고 있고, 그 대척점인 동부산악에는 수많은 KIA참호가 파여있다.

반군 수도 라이자의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은  참호 투성이다.  올 1월 라자양  전선이  정부군  손에  넘어가면서  카친독립군(KIA)는  라와양으로 후퇴  전선을 재정비하고 교전을 벌였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반군 수도 라이자의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은 참호 투성이다. 올 1월 라자양 전선이 정부군 손에 넘어가면서 카친독립군(KIA)는 라와양으로 후퇴 전선을 재정비하고 교전을 벌였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우리는 사정거리 1-2km 밖에 안되는 60mm 박격포를 하루 10개쯤 쐈는데 버마군은 사정거리 10배는 넘는 120mm 곡사포를 하루 천 개도 더 발사했다. 지난 1월 싸움은 KIA 생활 35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라와양 전선만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며 자우콩 소장이 덧붙였다. 냉정히 말해 더 밀릴 곳은 없어 보였다. 중국 국경이 코앞이라는 사실이 정부군의 공격을 상쇄시킬 뿐, 라이자 타운이 전선이 될 판이다. 실제로 전선에서 10km 안팍에 위치한 라이자는 정부군이 쏘는 120mm곡사포 사정거리안에 있다. 2013년 1월 14일 3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4명이 치명상을 입은 것도 그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군 참모총장 민 아웅 라잉 (Min Aung Hlaing)은 ‘최대한 자제’하다가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라 말했다. 정부 대변인 예 툰 (Ye Htun)은 “우리군의 물량을 실어나르기 위해 군용헬기를 띄웠을 뿐” 이라며 공습에 대한 비판을 일축했다.

반군 수도 라이자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에서 카친독립군 (KIA) 병사들이  이동중이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반군 수도 라이자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에서 카친독립군 (KIA) 병사들이 이동중이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봉우리를 탈환한 정부군도 큰 댓가를 치뤘다. 샨헤럴드에이전시뉴스 (Shan Herald Agency News, SHAN)가 정부군 동북부 사령관 아웅 소 준장 (Brig-Gen. Aung Soe)을 간접인용한 바에 따르면 지난 해 (2012) 9월부터 12월까지 석달 동안 정부군 병사 천여명이 사망했다. 아웅 소 준장은 올 2월 샨주 주도(主都)인 라시오(Lashio) 에서 가진 한 연설에서 “경험부족으로 병사들을 많이 잃었지만 중무기와 공군력의 도움으로 주요 거점을 탈환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묘사였다. 미성년 납치를 포함하여 강제징집으로 40만 대군을 채워 온 버마 군의 국방비는 2011년 현재 국가예산의 23.6%나 된다. KIA 측 사상자 통계는 출처에 따라 폭이 넓다. 내전 재발 후 2012년 9월까지 1년 3개월간 약 700명 사망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KIA 부사령관 군모 소장은 기자에게 367명 사망 700여명 부상이라는 수치를 줬다. 사상자 수치면에서야  정부군보다 적지만 영토를 잃고 10만여 피난민들의 고통받는 현실을 고려하면 카친 족이 치르는 댓가 또한 혹독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은 지난 2년여간 카친 족을 전례없이 단결시키고 있다. 한때 KIO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협박까지 받았던 한 카친 언론인의 표현을 빌자면 KIO는 요즘 “역사상 최고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흩어져 있던 카친 젊은이들도 제발로 반군 영토를 찾고 있다. 지난 11월, 군사 훈련을 포함하여 45일간의 ‘청년교육경제개발과정 (EEDY)’ 훈련을 받던 200명 가량의 젊은이들도 그런 경우다. 훈련 후 전국 각지 일상사로 돌아가지만 유사시 보충 인력으로 투입될 예비군인 셈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카친 젊은이들이 나무로 만든 모형총을 들고 45일간의 ‘청년을 위한 교육경제개발과정 (EEDY)’ 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은 게릴라전에 기반한 기본 군사훈련과 카친역사교육, 영어교육 등을 받는다. 훈련 후 전국 각지 일상사로 돌아가지만 유사시 보충 인력으로 투입될 예비군인 셈이다. 전쟁이 재발하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카친 젊은이들이  반군 영토를 찾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카친 젊은이들이 나무로 만든 모형총을 들고 45일간의 ‘청년을 위한 교육경제개발과정 (EEDY)’ 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은 게릴라전에 기반한 기본 군사훈련과 카친역사교육, 영어교육 등을 받는다. 훈련 후 전국 각지 일상사로 돌아가지만 유사시 보충 인력으로 투입될 예비군인 셈이다. 전쟁이 재발하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카친 젊은이들이 반군 영토를 찾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정부군 사망자 수천명, 카친 난민 10만여명     

라왕양 전선 둘째날, 이른 아침 마쎙 붐(Ma Seng Bum)에 올랐다. 이곳에서 5분 가량 더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버마군 초소가 나온다고 봉우리 대장 카렝 다우 콩(Kareng Dau Kwang) 대위가 귀띔했다. 지상 공격과 함께 봉우리를 하나씩 탈환해가던 1월의 공습은 이 마쎙 붐에서 멈췄다. 이후 마쎙 붐은 수도 방어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서로 목소리가 들릴 만큼 근거리 대치 중인 양측 병사들은 “치킨커리 만들었는데 좀 먹을테냐?” 류의 농담도 주고받는단다.

반군 수도 라이자의 방어선인 라와양의 최전선인 마쎙 붐의  카친독립군(KIA)  병사들. 이곳에서 5분도 안되는지점에는  정부군  초소가  있다.  KIA에 따르면  1월 대전투가  수그러든  이래  2월 4일과  11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정부군 측의  도발이 있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반군 수도 라이자의 방어선인 라와양의 최전선인 마쎙 붐의 카친독립군(KIA) 병사들. 이곳에서 5분도 안되는지점에는 정부군 초소가 있다. KIA에 따르면 1월 대전투가 수그러든 이래 2월 4일과 11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정부군 측의 도발이 있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11월 8일 저녁 8시 35분께 버마군 쪽에서 소총을 몇발 쐈는데 대응하지 않았다” 2여단 6대대 소속 모론 노 아웅(Cap. Moron Naw Aung) 대위는 이 도발이 지난1월 대전투가 잠잠해진 이래 두번째 도발이라 말했다. 첫번째 도발은 2월 4일 오후 1시께 발생했다. KIO와 정부군 협상단이 중국쪽 국경도시 륄리(Ruili)에서 중국 정부의 중재하에 휴전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 1월 교전이 격렬해지면서 버마군의 총탄이 중국 영토 안에 세 발 떨어지자 격노한 중국은 버마정부에 항의한 후 중재에 나섰던 것. 2월 4일 양측은 ‘군사행동 자제’에 우선 합의했다. 이후 교전은 정도면에서는 약화됐지만 협상 테이블과 교전현장은 여전히 따로 가고 있다.

지난 10월 이래 전투가 치열한 3여단 구역 만시 타운쉽 (Mansi Township)을 보자. 10월 8일부터 3일간 카친주 주도(主都) 미치나(Myitkyna)에서 열린 협상에서 정부측은 KIO측에 남부 ‘만시-제 캄’(Mansi-Je Hkam)도로에서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목은 ‘대중 교통’이 무난히 다닐 수 있게 하자는 ‘공익’이었다. 이 도로는 KIA 3여단이 관할하는 카친 남부와 KIA 4여단이 관할하는 샨주 북부의 연결로이기에 카친 측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벌목 반출량이 많고 목재들이 지나는 주요 통로라 KIO측에 통과세를 많이 안겨주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KIO는 정부측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들이 통치하던 인근 마을 열 곳에서도 철수했다 .그 빈자리를 ‘대중 교통’ 대신 정부군 트럭과 물자들이 서서히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내 곧 시작된 정부군 공격은 10월 22일 뭉딩빠에 이어 11월 17일 피난민 캠프가 있는 남림빠까지 이어졌다. 수천명의 피난민과 각종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한겨레21> 911 참조)

반군 수도 라이자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에서 카친독립군 (KIA) 병사들이  이동중이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반군 수도 라이자 방어선인 라와양 전선에서 카친독립군 (KIA) 병사들이 이동중이다. 카친 독립군은 1961년 부터 버마 중앙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94년 정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정치협상에 실패한 17년 휴전은 2011년 6월 정부군의 공격개시를 시작으로 종잇조각이 되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이미 9월부터 버마군이 조금씩 그 부근으로 이동중이었고 10월 8일 미치나 협상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거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협상 전 KIO 대표단에게 그 도로를 내주는 게 위험하다고 브리핑도 해줬다.”

마이자양 3여단 본부에서 만난 여단장 통 라 대령 (Col. Thawng La)은 강변했다. 그의 말은 카친 진영에서도 KIA 현장 사령관들과 KIO협상 대표간에 간극이 없지 않음을 암시했다. 동시에 위험을 알고도 정부측 요구에 응한 카친 쪽 딜레마도 반영되어 있다. 통라 대령조차 정부 요구에 응한 협상단을 비판하거나 실수라고 인정하기 보다는 국제사회가 환영해마지 않는 평화협상 과정에 KIO가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변호했다.

“버마 정부와 군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실험대이기도 했다. 평화 협상자체가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 아닌가?”

통라 대령의 반문이다.

공익내세워 반군 철수 요구한 도로, 정부군 점령 공격에 이용            

라이자 부근 한 피난민 캠프에서 할머니와  손주들이 식사 중이다.  벽에  걸린 사진 속  병사는 전쟁 중  전사한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전쟁으로 카친 주  피난민  수는10만명을 웃돌고  있다. 이중  7만5천명  가량이 유엔과  국제엔지오의  구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반군영토에  머물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라이자 부근 한 피난민 캠프에서 할머니와 손주들이 식사 중이다. 벽에 걸린 사진 속 병사는 전쟁 중 전사한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전쟁으로 카친 주 피난민 수는10만명을 웃돌고 있다. 이중 7만5천명 가량이 유엔과 국제엔지오의 구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반군영토에 머물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2013년 12월 말 현재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지 않은 소수민족무장단체는 KIO와 규모가 작은 팔라웅해방전선(Palaung State Liberation Front, PSLF) 뿐이다. 그러나 휴전에 서명한 10여개 단체들 중 이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정치 협상을 벌이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영국을 방문중이던 테인 세인 대통령은 ”전국 휴전(Nation-wide ceasefire)이 몇 주안에 가능할 것..반세기만에 총성이 완전 멈추는…” 과 같은 듣기좋은 연설을 했다. 카친 남부 교전이 악화되기 시작한 10월 전후로는 ‘전국휴전’(Nation-Wide ceasefire)이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단 듯 보였다. ‘전국휴전’은 사실 KIO만 휴전에 사인하면 거의 성사되는 거라 해도 무리가 아니기에 계속되는 남부교전이 휴전 압박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군사적 열세에 거점을 잃어가는 카친으로서도 분명 휴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17년이라는 휴전기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내전으로 되돌아오고 만 경험때문인지 카친 사회에서는 ‘무늬만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다.

“휴전사인 행사는 이제 그만. 정치협상이 병행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2011년 7월 26일 농사지은 게 아까워 견딜만큼 견디다 고향을 떠났다는 피난민 여성 응쿰자마이 (53) 조차 ‘휴전 우선론’에 반대한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  2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카친 주  피난민  수는10만명을 웃돌고  있다. 7만5천명  가량이 유엔과  국제엔지오의  구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반군영토에  머물고  있다.  이중  절대 다수는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들이다.  카친 엔지오와  카친독립기구(KIO)의  재난구호부인 피난민구호위원회(IRRC, IDPs and Refugee Relief Committee)가 피난민 구호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지난 2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카친 주 피난민 수는10만명을 웃돌고 있다. 7만5천명 가량이 유엔과 국제엔지오의 구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반군영토에 머물고 있다. 이중 절대 다수는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들이다. 카친 엔지오와 카친독립기구(KIO)의 재난구호부인 피난민구호위원회(IRRC, IDPs and Refugee Relief Committee)가 피난민 구호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KIO가 지난10월30일부터 4일간 20개의 무장단체들을 라이자로 초청 ‘전 소수민족 무장단체 회의’를 주최한 것도 이런 고민에서 나온 전략의 일환이다. ‘전국 휴전’에 앞서 소수민족들이 요구해야 할 정치적 의제를 단일화하여 ‘정부 vs.  전 소수민족연합’ 이 협상하자는 것이다. 이 ‘라이자 회의’ 결과 중 단연 주목받는 건 ‘10만명 규모의 연방군 창설안’이다. 자치와 연방제 원칙을 토대로 정부의 국경수비대대 압력에 맞서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연방군’ 안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현재로선 제로다.

‘라이자 회의’ 를 며칠 앞둔 10월 25일 정부협상단이 미얀마평화센터(MPC)를 통해 보낸 제안서에 따르면, ‘정치 협상’은 소수민족군대의 사실상 무장 해제를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다. 라이자 회의 직후인 11월 4일 정부 측과 소수민족대표단이 다시 만난 미치나 협상에서도 정부군 북부사령관 민 소 준장 (Lt-Gen. Myint Soe)과 국경부 장관 텟 나잉 윈 (Lt-Gen. Thet Naing Win) 역시 사실상 ‘무장 해제안’이나 다름없는 반군의 ’무기 반납’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12월 15일, 군 참모총장 민 아웅 라잉(Min Aung Hlaing) 은 카렌 주 군인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또 다시 소수민족무장단체들의 무장해제를 언급했다. 정치적 의제를 갖고 무장투쟁을 벌여온 이들에게 정치협상은 커녕 무장해제를 전제로한 어떤 협상도 진척될 리 만무하다.

10월 30일부터 4일간 열린 ‘全 소수민족무장단체 회의’  참가자들이  전국  각지  국경전선에서  여러  날의  여행을  거쳐 라이자에  도착했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전국휴전’을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소수민족단체들은  라이자회의에서 ‘연방군 창설안’등을  정부에  대한  요구조건으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버마  정부는 사실상  ‘무장 해제’ 를 요구 하고 있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10월 30일부터 4일간 열린 ‘全 소수민족무장단체 회의’ 참가자들이 전국 각지 국경전선에서 여러 날의 여행을 거쳐 라이자에 도착했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전국휴전’을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소수민족단체들은 라이자회의에서 ‘연방군 창설안’등을 정부에 대한 요구조건으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버마 정부는 사실상 ‘무장 해제’ 를 요구 하고 있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휴전기간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총성만 잦아들었을 뿐 더 많은 정부군 초소와 군인들이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했다. 군인들이 종교(기독교)행사장에 침입해서 방해하는가 하면 여성들은 성폭행에 심각하게 노출되었다. 수많은 KIA병사들이 잡혀갔지만 휴전상황이라 KIA가 할 수 있는 대응은 거의 없었다.”

한때 포터로 끌려가기도 했던 라이자 성당 응비 조셉 노 신부(Nbwi Joseph Naw, 57)의 이 증언은 국제사회의 박수만 유도하는 미사어구 ‘휴전’의 위험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제 ‘무장해제’ 카드까지 꺼내들기 시작하는 정부군의 ‘불통협상’에 국제사회가 쏟아붓는 평화협상 비용도 찢어진 휴전 협정서 마냥 의미없는 종잇장으로 날아갈 지 모를 일이다.

라이자·마이자양(버마 카친주)=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취재지원 리영희재단

기사원문 보러 가기 클릭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