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재단_버마프로젝트_취재후기-1>
아래 글은 필자가 <리영희 재단>의 지원으로 진행중인 ‘버마 프로젝트’의 1차 취재 후기입니다. 1차 취재는 버마 서부 아라칸 주 (라까잉 주)와 중북부 만달레이주를 중심으로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26일까지 진행하였습니다. 본 후기는 <리영희 재단> 사이트에 10월 17일자로 우선 게재된 바 있습니다. / 이유경 Penseur21

아웅 밍갈라 (Aung Mingalar)는 아라칸 주 주도(主都) 시뜨웨 시의 마지막 무슬림 구역이다. 이곳에 사는 로힝자 무슬림 주민들은 안팎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으며 체크포인트로 둘러쌓인 구역안에는 보안군이 주둔 중이다. (Photo © Lee Yu Kyung 2013)
5년 전 버마 비자를 받기 위한 나의 직업은 ‘보석 디자이너’였다. 2008년 5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버마 곡창지대인 이라와디 델타를 강타하여 하루아침에 13만명 가량이 사망 실종했음에도 버마 정부는 구호단체와 구호물자까지 막았다. 취재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관영언론을 제외한 언론의 취재는 ‘내란 선동’이거나 ‘안보 위협’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구호단체와 외국언론의 드나듦을 지독하게 통제하던 이가 바로 현 테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이다. 당시 그는 총리였고 국가재난본부 의장이었다.
나는 여권을 교체하고, 친구의 조언에 따라 ‘보석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방콕 주재 버마 대사관에 가서 온갖 ‘돌 얘기’와 ‘사업’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은 뒤 관광비자를 받고 버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에둘러 받은 비자는 일주일 만에 추방당하면서 허무한 딱지로 끝났다. 취재를 완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미행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 이후 만난 취재원들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지구상에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도 나를 적잖이 우울케 했다.
5년 후인 지난 7월 말 취재를 목적으로 ‘정직한 비자’를 받고 버마에 들어간 건 그 자체로 버마 개혁의 효과를 실감한 경험이었다. 변화는 거리에서부터 확연히 다가왔다. 랑군 시내는 급증한 택시로 정체가 빚어졌고, 체감 물가는 최소 두세 배 올라 있었다. 깨진 보도블럭이 언제나 제멋대로 구르던 다운타운에는 매끈한 길 만들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랑군의 88항쟁 기념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고(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랑군과 달리 정부인사를 초청하지 않은 만달레이 88기념 행사는 행사 후 당국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단다), 언론은 그야말로 왕성하게 풀려있었다. 이라와디(Irrawaddy 타이), 미지마(Mizzima 인도,타이), 데모크라틱 보이스 오브 버마(Democratic Voice of Burma, DVB, 노르웨이/타이) 등 대표적 망명 언론들은 진작에 랑군 사무소를 열고 활동 중이다. 현지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 무리지어 나타나는 모습도 대단히 신선해보였다. 그리고 나의 옛친구 치 마웅(가명), 그가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 데 더이상 눈치를 보지 않았다. 치 마웅은 과거 사소한 정보에도 목말라하던 내게 우물같은 존재였다. 5년 전 내가 추방당한 후 그는 타의 반 자의 반 한 달 가량 숨어지내기도 했다.
“그러니까…방글라데시 인구가 넘치기 때문에 이쪽으로 자꾸 넘어온단 말이지.”
5년 만에 함께한 저녁상에서 치 마웅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버마 서부 아라칸 주 로힝야 무슬림들이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라는 얘기를 하는 중이다. 내가 로힝야/무슬림 이슈를 취재하러 왔다고 설명하기도 전에 그가 선수를 쳤다. 치 마웅은 이어 미 시사 주간지 <타임>으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불교 극단주의 운동 ‘969’ 승려 우 위라뚜 (*’우’는 연장자 남성에 대한 존칭의 뜻으로 거의 모든 이름 머리에 붙는다) 가 7월1일 발행본 타임의 표지모델이었다. 치 마웅은 우 위라뚜 사진에 걸린 ‘불교도 테러의 얼굴'(Face of Buddhist Terror)이란 제목이 불교도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갔다며 불쾌해했다. 그 제목이 불교도 전체를 일반화한 게 아님에도 이런 성토를 제기한 이는 치 마웅만이 아니다. 타임지 발행 후 버마는 들썩였다. 위라뚜 추종자들은 물론 정부, 언론, 그리고 일부 시민사회까지 버마 사회 구석구석이 타임지에 반발했다. 결국 타임지는 판매금지됐다. 불교 민족주의의 강고한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버마 종교부 장관 산 신(Sann Sint)은 “우 위라뚜의 설교는 사랑을 가르치고 종교간 상호 이해를 돕는다”고 했고, 대통령실은 “우 위라뚜는 ‘부다의 아들'”이라 짧고 굵게 평했다. 이민부 장관 킨 치는 위라뚜 등 969 승려들이 기안한 ‘불교도 여성 무슬림 남성과 결혼금지’ 제안을 적극 지지했다. ‘종교부’, ‘이민부’ 그리고 ‘대통령실’. 모두 로힝야 그리고 (인종을 초월한) 무슬림 문제와 일차적으로 연계된 정부 부처들이다. 그들이 모두 우 위라뚜와 불교극단주의 운동 969의 손을 들어줬다. 969운동 지지자들은 ‘결혼금지’ 제안을 입법화하기 위해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7월 중순 현재 2백50만명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중북부 지방 촉세(Kyawkse)에서 반(反) 무슬림 팜플렛을 배포한 죄로 25년형을 선고받았던 위라뚜, 개혁에 들어선 버마에서 이제 위라뚜를 가두는 정부는 없다. 개혁의 상징적 그림인 ‘언론 자유’는 ‘(이슬람) 혐오 스피치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현지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벵갈리들은’이라고 주어를 넣는다. ‘벵갈리’는 로힝야 무슬림들을 방글라데시 이민자로 비하하는 표현이자 무슬림 전반에 대한 비하 표현이기도 하다. 평범한 랑군 시민 내 친구 치 마웅도 그 부근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불교민족주의의 강고한 연대
내가 버마에서 확인한 ‘반 이슬람 인종주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서부 아라칸 주는 단연 최악이었고 취재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일례로 시뜨웨에서 나의 한 인터뷰 통역을 맡았던 티다(가명)는 국제엔지오 A에서 B로 활동을 이전하던 구호단체 직원이자 영어선생이다. 그녀는 통역 중 자신이 갖고 있는 로힝야에 대한 혐오감을 자주 집어넣었다. 매번 그녀의 말을 가려내느라 인터뷰하는 나도, 인터뷰이도 시간을 낭비했다. 몇 차례 당부에도 그녀는 ‘실수’를 거듭했다. 결국 나는 랑군에서 이 인터뷰를 재통역, 검증해야 했다. 시뜨웨 시내에서 구할 수 있는 통역은 대체로 그 언저리 누구이거나 현지 기자들이다. 그들 모두 반 로힝야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나는 또한 아라칸 주 주도(主都) 시뜨웨에 살던 무슬림(대부분 로힝야 Rohingya, 일부는 캄만 Kaman)들이 ‘모조리’ 수준으로 사라졌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북적거리는 시뜨웨 시장엔 무슬림과 외모가 유사한 불교도 마라마지(Maramagy)는 있었지만 무슬림은 없었다. 시뜨웨시 남쪽 전망대 바다의 고요와 낭만에 흠취한 주민들 틈에도 무슬림은 없었다. 그들은 시내외곽 피난민(IDPs) 캠프 아니면 도심 게토, 아웅 밍갈라에 갇혀 있었다. 이동의 자유는 진작에 없었고 생계를 유지할 수단도 모두 봉쇄당했다. 완벽한 ‘차별분리정책’이었다. 이 이슈를 계속 추적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달한 현장은 이렇게 또 새로웠다. 마치 사태의 심각성을 처음 깨달은 순진한 기자처럼 나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게는 캠프나 여타 민감지역 취재를 위해 필요한 여행허가서(Travel Authorization, TA)도 없었다. 내 탓은 아니다. 취재비자와 TA를 담당하는 정보부(Ministry of Information) 민쵸 국장에게 나는 세 번이나 신청서류를 보냈고 통화도 세 번 했다. 랑군에 머물며 관련 취재를 하는 동안 TA를 애타게 기다렸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TA 없이 시뜨웨에 갔다가 허탕친 기자들이 있다며 반드시 받아가라고 권고했다. 뿐만 아니라 “TA가 없으면 어떤 구호단체도 당신하고 말을 섞지 않을 것”이라 했다. 지나치게 경직된 권고이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랑군에서 만난 AP 카메라 기자 라울은 “우리도 (난민캠프) 동영상 취재허가를 못받고 있다”며 TA가 쉽지 않을 것이니 주정부 대변인 윈 미양인(Win Myaing) 을 구슬려 보라고 귀띔했다.
8월 9일,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88행사 취재도 마친 후라 시뜨웨로 날아갔다. 그러나 캠프 동행을 약속한 한 엔지오와 윈 미양인을 구슬려 볼 가능성도 그날의 폭력사태로 막혀버렸다. 다행히도 리스트에 담아온 로힝야 활동가 한 명이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다. 랑군에서부터 통화하며 구체적 협의를 하려 했지만 그는 ‘일단 시뜨웨로 와서 연락하라’는 말만 했었다. 내가 확실히 나타난 걸 확인한 후, 그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시내 외곽 피난민(IDPs) 캠프와 이웃한 마을에 사는 그는 다음 날 캠프 입구까지 렌트카로 마중나왔다. 그의 도움으로 전날의 폭력사태와 난민캠프의 전반적 현실을 부족하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그날 내린 장대비도 큰 도움이 됐다. 나와 카메라는 우비 속에 파묻혀 그럭저럭 언론자유를 누렸다.
저녁 6시, 검문소가 닫히기 전에 캠프를 나가야 했다. 비는 그쳤고 검문소는 이제 눈안에 선명하다. 검문소 군인들은 내가 어떻게 안으로 진입했는지 매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종이’, ‘여권’ 등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나는 그날 낮에 ‘TA 소지한 미국 기자 앤드류와 대니가 잠시 다녀갔다’고 들은 기억을 활용했다.
“내 동료 앤드류와 대니가 ‘종이’를 갖고 있는데 먼저 나갔다. 조금만 더 머물다 뒤따라 간다는 게 그만 늦어졌다. 여기 취재비자 있고 체크할 거 있으면 다 해라. 필요하면 정보부 민쵸 국장과 연결시켜 주겠다. 그가 나의 모든 취재 허가 절차를 담당한 인물이니…”
검문소 지기들을 적대시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당당할 필요는 절대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에 ‘절은’ 공권력은 쭈뼛거리는 시민 위에 더 군림하려 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번갈아 나타나며 질문을 해대더니 ‘가도 좋다’고 했다. 그들의 정보책으로 보이는 라까잉족 ‘뚝뚝'(Tuk Tuk, 동남아에 흔한 교통수단) 운전자가 나를 태우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이후 나는 아웅 밍갈라에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피난민 캠프 검문소를 조금 시끄럽게 지나온 탓에 정보가 더더욱 노출되었고 보다 더 신중해야 했다. 아웅 밍갈라는 시뜨웨 시내에 남은 마지막 무슬림 구역이며 체크 포인트와 불교도 마을로 둘러쌓여 있어 구역 안 무슬림 주민들이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 랑군에서 만난 OCHA 버마팀장 올리버 레씨 홀(Oliver Lacey-Hall)은 “아웅 밍갈라가 피난민 캠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고립된’ 인구가 아라칸 주 전역에 35,000명이라 덧붙였다.
지난 5월 말레이시아에서 로힝야 보트 난민을 취재할 때였다. 인터뷰 도중 난민 한 명이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라며 내게 통화를 권한 적이 있다. 전화기 건너편 남성은 시뜨웨 산똘리 마을 출신으로 보두바 캠프에 머무는 난민이라 했다. 보두바 캠프는 8월 9일 2차 폭력사태가 발생한 구역이다. 당시 통화에서 그가 강조했던 게 바로 아웅 밍갈라 상황이었다.
“기자 양반, 시뜨웨 시내에 아웅 밍갈라는 구역이 있소. 피난민 캠프는 부족하나마 구호 식량이라도 받지만 아웅 밍갈라는 모든 게 봉쇄되어 있고 구호물자도 받을 수 없거든. 주민들이 매우 고통받고 있다우.”
그때 이후 아웅 밍갈라는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랑군에서부터 아웅 밍갈라 주민 ㄱ씨와 간간히 통화하며 내부 상황을 들어왔고, 진입 방법을 의논해왔다.
“여기 올 생각 마라. 불가능하고 위험하다.”
그의 첫 반응이 그랬다. 그러다 아웅밍갈라에도(동아시아인과 외모가 유사한) 라까잉족들이 소수 산다는 점, 그들과 힌두교도들은 이동의 자유가 제약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우산을 쓰고 트라쇼(세발 자전거로 된 현지 교통수단)를 타고 들어가 ‘모처’에서 ‘모시’에 정확히 만나는 방안을 상의했다. 그러나 시뜨웨 도착 후 아웅 밍갈라 주변 상황을 감지한 나는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내 취재 욕심으로 밀어붙였다가는 상대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너무 농후해 보이는 구조였다. 이미 5년 전 이런 류의 문제로 죄책감에 시달린 바 있기에 마지노선을 넘지 말자 다짐했다. 그러던 중 유엔인권대사 토마스 콴타나가 시뜨웨를 방문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의 일정에 아웅 밍갈라 방문이 없는지 체크했다.
8월 13일, 아라칸 주 방문 마지막 날 콴타나는 아웅 밍갈라로 들어갔다. 나도 현지 기자단과 함께 콴타나 팀 꽁무니에 따라 붙었다. 들어가서는 그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나까지 콴타나 동정보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눈과 귀에 열심히 주워담고 카메라에 박아넣었다. 아웅 밍갈라는 더도 덜도 아닌 버마판 ‘아파르트헤이트’였다.
버마판 아파르트헤이트
민감한 지역 취재의 어려운 점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접근권'(access)이다. 단언컨대, 버마 개혁의 두드러진 모습인 ‘언론 자유’는 반 로힝야/무슬림 폭동과 관련한 지역에선 ‘뻘소리’였다. 대신 혐오 스피치의 자유가 풍선마냥 떠다녔다. 이런 현실은 2차 취재지역이었던 중북부 멕띨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멕띨라는 지난 3월 말 금은방 무슬림 주인과 불교도 손님간의 언쟁을 시작으로 백여 명의 무슬림이 학살당했던 소도시다.
‘외국언론을 들이지 말라’는 비공식 입막음이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스폐셜 브랜치'(Special Branch)라 불리는 스파이들도 활발했다. 게다가 내가 도착한 날은 토마스 콴타나가 969 회원 등 불교도 군중들로부터 물리적 제지를 당하고 거의 반 강제적으로 도시를 떠난 이틀 뒤였다. 나는 멕띨라 현지 픽서(fixer, 통역과 인터뷰 일정 등 외신 기자의 취재 전반을 돕는 현지 동료)의 강력한 조언에 따라 ‘현지 여성’으로 분했다. 충분히 예상했기에 방콕에서부터 수수한 긴치마를 준비해갔다. 이런 상황일수록 현지 동료의 조언과 현지 정보는 적극 수용하는 게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 이따금 현지 픽서들이 지나치게 소심할 때가 없진 않다. 그런 부분은 그때 그때 조절하면 된다. 나는 현지동료가 제안하는 큰 틀은 존중하는 편이지만, 세세한 취재들은 소극적 만류가 있더라도 내 계획대로 추진하는 편이다. 안 그러면 취재의 강도가 지나치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멕띨라에서는 숙박 문제도 불거졌다. 멕띨라 호텔에 체크인을 하게 되면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갈 것이고 현지인 민박은 불법이다. 픽서가 또 한번 강력히 제안한다. 멕띨라가 아닌 ‘옆 동네’ 가서 묵으라. 놀랍게도 투숙객의 정보를 묻지 않는 호텔이 있다고 했다.
멕띨라에서 취재를 마치고 밤 늦게 도착한 ‘옆동네’ 호텔은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이곳에서 다시 멕띨라로 나와 취재를 이어갔다. 살금살금 다닌 덕에 학살의 목격자, 희생자들을 장시간 깊숙하게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TA를 받고 멕띨라를 취재했던 한 외신기사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 기사의 주인들은 내가 시뜨웨 외곽 피난민 캠프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이용’했던 펜 기자 앤드류와 포토그래퍼 대니였다.
“버마 내 다른 지역 피난민 IDPs 캠프와 달리 멕띨라에서는 가는 곳마다 경찰(일부는 정복, 일부는 사복)들이 따라붙었다. 경찰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된 인터뷰는 어려웠고 이따금 경찰 관료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기까지 했다. 상황이 그렇게 가는 한 취재를 지속한다는 건 의미가 없었다”
8월 24일. 중북부 지방 취재의 베이스로 삼았던 만달레이에서 밤차를 타고 랑군으로 향했다. 그날 밤, 만달레이에서 차로 2-3시간 쯤 걸리는 중북부 자가잉(Sagaing) 지방 탄곤(Htan Gone) 타운쉽에서는 또다시 불교도들의 폭동이 발생했다. 무슬림 가옥 40여 채와 가게들이 불타고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만달레이에 하루만 더 머물렀더라면! 간발의 차로 취재를 놓쳤고 반복되는 광기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폭동의 발단은 일단 ‘전형적’이다. 무슬림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강간하려했다는 ‘소문’. 지난해 아라칸 주 학살의 시작 역시 세 명의 무슬림 남성이 불교도 여성을 강간했다는 관영언론 보도였다.
8월 26일. 비자가 끝났다. 떠나야 한다. 이날 아라칸 주 탄드웨 (Thandwe, 혹은 산도웨이 Sandoway라 불린다) 에서 폭동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정보를 랑군과 만달레이 각각 다른 두 루트로 전해 듣고 있던 참이라 떠나는 맘이 가볍진 않다. 그들은 내게 아라칸 주에 다시 안가냐고 물었다. ‘불법연장체류’는 불가능했다. 아라칸 주는 버스로 닿는 곳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야하고 공항은 여권 정보를 기록하기에 공항 통과자체가 어렵다.
폭동 가능성의 정보는 대략 이랬다. 당시 (8월 중순) 969운동에 열심인 세 명의 탄드웨 주민이 랑군으로부터 1억 쨧(한화 1억원) 가량의 돈을 송금받았다는 것. 8월 26일 탄드웨 불교도들이 불교를 국가종교로 선포하는 행사를 강행하기로 했다는 것. (탄드웨는 969 강성 지역이다.) 그리고 이 행사가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폭동의 가능성이 높고 시뜨웨 아웅 밍갈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1억 짯을 받았다는 세 명의 이름이 전해졌다. 검증할 수 없는,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이 정보를 품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8월 26일 전후로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별일은 한 달 후인 9월 28일부터 발생, 10월 2일까지 이어졌다.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확인된 수치만 5명 사망이지만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이번에는 지역 정치인 무슬림이 운영하는 가게 앞에 한 불교도가 무단주차를 하면서 언쟁이 시작됐다. 마치 금은방 논쟁으로 시작된 멕띨라처럼, 작은 언쟁 직후 수백명의 폭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살상과 방화를 저질렀다. 사망자 중에는 폭도들의 칼에 찔려 사망한 94세 무슬림 할머니 에이 치(Aye Kyi)도 있다. 나머지 사망자들의 나이는 대체로 50-60세다. 94세 노인과 맞딱드렸을, 그리고 거의 의심할 여지 없이 ‘젊은 놈’이었을 그 살인자를 그곳까지 오게 한 광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광기어린 ‘폭동 메카니즘’은 독립적 기구의 특별조사를 요구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폭동이 잠잠해진 10월 2일 밤, 라까잉 극우 정당인 라까잉민족개발당(RNDP) 탄드웨 지부장 툰 탄쵸(Tun Thant Kyaw)가 경찰에 조사받으러 불려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랑군으로부터 ‘송금’받았다고 의심받는 3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버마 개혁이 독립조사를 감당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기에는 버마 사회에 ‘반동분자’ 아니면 ‘침묵분자’가 너무 많다. 강경파, 온건파 등으로 세간에 오르내리는 전혁진 군인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전 학생운동가들의 조직인 ‘평화와 열린사회로 가는 88세대'(88Generation Peace and Open Society, 약칭 ’88세대’) 대변인 격인 코코지는 대표적 반동 분자다. 지난해 6월 1차로 발생한 반 로힝야 무슬림 학살이 끝난 직후 그의 말이 이랬다.
“88세대는 결단코 로힝야를 버마의 인종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조직과 지지자들은 ‘외부 침략자’들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군과 함께 기꺼이 무기를 들것이다.”
대표적 침묵분자는 단연 아웅산 수치다. 아웅산 수치는 ‘반 로힝야/무슬림 폭동’ 문제를 두고 ‘왜 침묵하십니까?’라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질문에 대해 끈질기게 같은 대답을 주고 있다.
“나는 침묵한 적 없다. 당신들이 원하는 말을 못 들었을 뿐이다. 양쪽 다 폭력을 사용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법치(Rule of Law)’를 강조해왔다. 법치가 중요하다.”
‘법치’. 내가 4주간 버마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이 ‘법치’다. 아웅산 수치가 만든 유행어임을 난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도, 그 말을 학습한 이들도 ‘어떤’ 법치냐를 따져묻는 이는 많지 않다. 테인세인 대통령은 두들겨 맞지만 아웅산 수치는 비판의 성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한마디는 국내외 언론에 예외없이 대문짝만하게 실리지만 그 금쪽같은 영향력은 반 무슬림 폭동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 다인종과 다종교로 풍성한 버마가 아니라 찢어진 버마가 계속되는 데 전현직 군인들만 탓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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