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초 사면 법안 반대로 촉발된 타이 반정부시위는 그동안 흩어져있던 왕정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장과 시위전술이 과격해지면서 참여인원은 줄고 있다.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수텝 통수반 전 부총리는 의회해산이나 조기 총선 등 선거민주주의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며 국왕이 임명하는 총리와 임명직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People’s Council)를 주장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2013)
<한겨레 신문> 12월 7일자 토요판 ‘정문태의 제 3의 눈’ 에는 타이 정치 분쟁과 관련 장문의 논평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잉락 대 스텝, 신흥-전통 자본 대혈투>이다. (‘스텝’은 외국이름이기에 ‘정답’이 없다지만 ‘수텝’ (Suthep Thaugsuban) 에 좀 더 가까운 듯) 기사는 타이 현 정치분쟁을 ‘자본 대리전’으로 규정하며 “지난 10년간 누가 정권을 잡았든 정치·경제·사회·교육 어느 한구석도 개혁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정치 혼란의 뿌리는 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대리전이다. 왕실을 비롯한 토호 기득권층을 낀 전통 자본과 베트남전쟁에서 싹튼 자유주의 바람 아래 경제개발을 통해 태어난 신흥 자본의 충돌이다…얼핏 보기엔 타이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시민의 소리가 정치판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속살을 뜯어보면 동원된 이들은 자본대리전의 용병이었을 뿐이다…지난 10년 동안 누가 정권을 잡았든 정치·경제·사회·교육 어느 한구석도 개혁한 적이 없다.”
이 글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자본 대리전’이라는 규정이다. 그런 성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지난 10년간 타이 정치분쟁의 성격을 설명하는 핵심 (혹은 결론적) 정의가 된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 이 해석으로 보자면 다수 민중들이 세월을 타고 진일보해온 정치의식, 각성하고 주체화되는 ‘과정’ (분명히 강조하지만 ‘과정’이다) 등이 모두 “자본대리전에 용병”으로 일축된다. 이는 묘하게도 왕당파 진영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무식한 The uneducated) 친 탁신표들은 탁신돈에 매수된 것’이라는 논리와도 맥이 닿아 있다. 더욱이 탁신 정권이 도입한 ’30밧 의료정책’처럼 과거 상상하기 어려웠던 공공의료정책 역시 ”누가 정권을 잡았던 정치·경제·사회·교육 어느 한구석도 개혁한 적이 없다”는 주장에 묻히고 만다. 30밧 의료정책을 과도하게 내세워 탁신정책 전반을 찬양하는 건 거북하다. 그렇다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의 시니컬한 접근 속에 묻힐 정책도 아니라고 본다. 군부,왕실을 선두로 한 봉건적 지배엘리트들이 빈곤층 다수의 타이 사회를 주물러온 점을 고려하면 그 빈곤층과 일반 대중들이 혜택을 본 30밧 의료정책은 대단히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분명히 해두자. 친 탁신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 프어타이 당은 단언컨대 진보당도 아니고, 체제에 도전하는 혁명성을 지니 당은 더더욱 아니다. 탁신 자체도 다른 진영에 서 있을 뿐 또 다른 왕정주의자(Royalist)임을 여러번 자처했다. (정치적 계산일지 몰라도..) 하여, 이 진영에 대한 환상도 금물이고 비판적 접근은 필수다. 그러나 이 진영 정당들은 최소한 ‘의회 민주주의’ 원칙과 실천에 대한 집착을 보여왔고, 공약 실천면에서는 왕정주의 세력이나 그 세력을 대표하는 민주당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지배 엘리트 계층이 ‘배푸는 은혜를 받아먹고 만족해하는 백성’ 이 아니라 ‘자신들이 투표한 정당이 실천하는 공약으로 혜택을 받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새로운 ‘정치 경험’의 공간을 제공했다. 이 점이 친탁신 진영의 계속된 선거승리를 설명하는 배경이다. ‘자본의 대결투’라는 단순도식으로 보면 정치대중들 사이에 목도되는 이런 세밀하고도 중대한 변화는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동시에 프어타이 당은 2011년 7월 총선으로 집권한 후 한계도 분명히 드러냈다. 여러번의 쿠테타(2006 군사 쿠테타, 2008 헌법 쿠테타 등)로 그들 권력이 뒤집힌 경험때문인지 군부와 왕당파 중심의 사회 기득권세력을 과하게 자극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해왔다.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거칠게 억압하는 왕실 모독법 개혁(혹은 폐지)에 의지가 없고, 군부 예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군부와 타협한 것도, 중산층 표심을 의식한 ‘첫차 세금 환불제’등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한편, 이번 시위사태는 2006년 보다는 2008년을 더 닮았다. (어떤 형식이 되었든) 쿠테타를 유도하는 왕정주의 시위대의 무리한 요구(헌법 7조를 발동 국왕의 총리 임명요청-이점은 2006년에도 제기-과 선거를 전면 거부하고 임명제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People’s Council 구성 등)와 과도한 무력 시위 (2008년 공항 점거 vs. 2013년 정부종합청사 등 주요 공공기관 점거 혹은 점거 시도), 정부가 군에 ‘치안유지’를 요청했지만 비무장을 조건으로 마지못해 그리고 보이지 않게 배치된 상황 , 한 밤 중 괴한의 총격으로 양 진영 충돌 악화 (2008년 9월2일 밤 vs. 2013년 11월 30일 랑캄행대학/라자망갈라 스태디움 부근 폭력) 그리고 왕당파 시위대에 대한 왕실의 간접적 지지표시 (2008년 시리킷 왕비가 왕당파 시위 부상자 치료에 10만 밧 기부하고 시위 중 사망한 앙카나 라다빠뇨윳 장례식에 참석vs. 2013년 시리돈 공주가 부상시위대에게 선물 보낸 점) 등. 이제 양상은 탁신과 프어타이 당의 속내를 훤히 드러냈던 사면 법안 이슈를 넘어선지 오래다.
나는 최근 분쟁이 왕정주의자들의 마지막 (혹은 마지막을 향해가는) 발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잉락 정부는 무력진압을 자제하고 폭력사태를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미지 메이킹’에서 적어도 한 수 위였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대신 시위 주동자 수텝 통수반에게 반역죄 등을 씌워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등 법적 테두리에서 자신의 카드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물론 강력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반대진영’에 선 군부에 대해서는 잉락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군부는 ‘중재자’라는 형식으로 이미 사태에 개입한 꼴이지만 2006년 실패한 쿠테타로부터 교훈을 크게 얻은 바, 상황에 대한 숙고를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년간의 분쟁 과정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젊은 장교들 사이의 ‘분열’도 암흑 속 변수다. 그 분열의 깊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고 고위 장성들 역시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방콕의 공기는 문자 그대로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민주적 선거로 정권을 잡은 친 탁신계 정부 (현재 잉락정부) 가 어떠한 형식으로든 또 다시 권력을 잃게 된다면 그에 대한 저항과 유혈 사태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 점이 2006년과 다른 점이고, 2008년 이후 상황이 보여준 교훈이다. 2008년 12월 2일 ‘헌법 쿠테타’로 친 탁신계 인민당 (PPP)이 권력을 잃은 후 타이사회는 2009-2010년 걸쳐 크나큰 유혈사태를 목격했다. 지난 10년간 계속된 타이 정치분쟁을 구 시대 봉건적 정치 토양이 갈아 엎히는 과정이라 본다면 발아하는 싹 일부는 삽에 찍혀 나갈 것이고 또 다른 싹들은 힘겹게 눈을 내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