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에서 정글로 – 협박, 살인, 강간의 기억을 싣고 –

  • 반 로힝야 폭동 1주년, 반 무슬림 폭동으로 확산되며 난민탈출 봇물
  • 밀수단 낀 탈출, 고문 살인 강간 위협으로 이중 삼중 고통받는 로힝야 난민들
  • ‘타이 군복’, 밀수단에 로힝야 보트난민 인계   

* 아래 기사는  <한겨레21> 967호 (2013.07.01)에 실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원본입니다. 지면 관계상 실리지 못한 부분과 사진 등을 추가하였습니다.   

   – 이유경 penseur21 –

자니 알람은 제대로 걷질 못했다. 25세 , 팔팔해야 할 청년은 이제 막 걸음마 떼는 젖먹이마냥 얕게 부어오른 발을 떼었다 딛기를 반복했다. 이따금 전통 치료사에게서 받는 뱀 기름 마사지를 빼면 이 ‘걸음마 운동’이 그가 할 수 있는 치료의 전부다.

자니도 치료사 구라미아 세이드(60)도 모두 버마(미얀마) 서부 아라칸 주에서 온 로힝야 무슬림 난민들이다. 구라미아는 11년 전에 말레이시아에 왔고, 자니는 1월 말레이시아 서부 해안도시 페낭에 닿았다.

‘’많이 좋아진 거다. 넉달 전 처음 도착했을 때는 전혀 걷질 못했다’’

그의 이웃이자 역시 로힝야 난민인 자마르 우딘(41)의 말이다.

‘’이번 달 (5월) 들어 좀 줄긴 했는데, 지난 달 (4월)까지 거의 매일 수십명씩 도착했다’’.

자마르는 도착한 난민들 상당수가 걷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운동부족때문이다.

난민보트와 오랜 정글 생활 동안 접은 다리 생활의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하는 자니 알람 (25, Jani Alam) 전통 치료사에게서 마사지를 받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난민보트와 오랜 정글 생활 동안 접은 다리 생활의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하는 자니 알람 (25, Jani Alam) 전통 치료사에게서 마사지를 받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자니의 경우, 아라칸주에서 방글라데시로 국경을 넘은 후 밀수선에 오른 게 지난 해 11월초다. 이후 페낭에 도착하기까지 두달 반 넘게 다리 펴 본 기억이 거의 없단다. 상황적 예외가 있긴 하다. 배를 갈아타거나 배에서 픽업 트럭 등으로 갈아탈 때 서서 이동했다. 그리고 밀수선이 타이 해안에 도착한 이후 주로 이용된 픽업 트럭에서는 브로커들이 난민들의 몸을 겹겹히 쌓는 바람에 위아래로 납작 눌려 다녔다.

살고 싶어 탈출했던 몸들은 타이,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출신 브로커들과  갈등의 주 당사자인 라까잉, 로힝야까지 결탁한 인간시장에서 완벽하게 속박되었다. 배에서 트럭으로,  해안에서 정글로, 타이에서 말레이시아로 던져지며 마침내 페낭에 떨궈졌다.

브로커 횡포에 두달동안 짐짝처럼

‘’아주 많은 라까잉 불교도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화살, 장칼 (machete), 장대를 휘두르며 있는대로 파괴하고 방화할때는 가만 있던 나사까 (Nasaka, 아라칸 주에만 있는 버마국경경찰) 는 우리가 불을 끄려하자 발포하기 시작했다. 내 부모님도 그 혼란통에 총 맞고 3일 후 돌아가셨다’’

난민보트와 오랜 정글 생활 동안 접은 다리 생활의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하는 자니 알람 (25, Jani Alam) 이 힘겹게내딛어가며 걷기운동을하고있다 (Photo © Lee Yu Kyung)

난민보트와 오랜 정글 생활 동안 접은 다리 생활의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하는 자니 알람 (25, Jani Alam) 이 힘겹게내딛어가며 걷기운동을하고있다 (Photo © Lee Yu Kyung)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자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 해 6월,  자신이 살던 아라칸 주, 부티동 타운쉽, 소파란 마을에서 발생한 반 로힝야 폭동 상황을  하나씩 풀어갔다. 군, 경찰, 나사까 등 보안 당국이 방화를 진압하려는 무슬림들에게 총을 쐈다는 증언은 휴먼라이츠워치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 <살고 싶으면 기도나 해라>에 줄곧 등장한다. 다만 보고서에서 언급한 보안군의 발포는 아라칸 주 17개 타운쉽으로 확산되어 로힝야 무슬림은 물론 캄만 무슬림 (시민권이 없는 로힝야와 달리 캄만 Kaman버마의 135 인종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까지 희생양이 되었던 10월 2차 폭동상황을 언급한 것이었다. 따라서 추측만 난무하던6월 1차 폭동 당시 보안군 발포증언은 자뭇 새롭다.

10월 발생한 2차 폭동의 희생자인 캄만 난민,  살림 빈 굴반(48)에 따르면 보안군은 방화도 저질렀다. 살림은 폭동의 최진원지였던 쵹퓨 (Kyawk Phu) 를 탈출하고자 수많은 이들이 선착장에 모여들었던10월 23일 오전 9시에서 4시 사이,  버마 군이 선박 6척을 불태웠다고 말했다. 4시경 밀물이 되어서야 캄만 무슬림들은 허둥지둥 배를 나눠타고 시트웨와 세나모 등으로 피신해갈 수 있었단다.

고향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살림 빈 굴반은 그로부터 한 달 후 자신이 소유한 배에 75명의 캄만 동족을 함께 태워 말레이시아로 탈출했다. 살림처럼 아라칸 주에서 바로 출발하여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경우는 자니를 포함하여 방글라데시를 거쳐오는 대부분의 로힝야난민들과 달리 브로커들의 횡포를 경험하지 않았다.

‘’떠난 지 4일 후 인도 해군을 만났다. (인도 영토인 안다만 인근으로 추정됨) 그들은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길도 안내해주고 마실 물도 실어줬다’’

살림 일행은 떠난 지 열흘만인 1월 중순 말레이시아 해안가에 닿았고, 그들을 발견한 말레이시아 해군은 근처 해안도시 랑카위로 데려갔다. 먹거리, 건강검진을 제공받으며  말레이시아 현지 유엔난민고등판무관 (UNHCR)과 인터뷰도 했다. 풀려난 이들은 현재 쿠알라 룸푸르에 머물고 있다.

14세 소년 누를 이슬람은 캄만 무슬림이다. 로힝야와 달리 버마의 135개 인종으로 인정받는 캄만족은 지난 해 2차 종교폭동인 10월 불교광신도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누를은 고향에 어머니를 남겨둔 채 삼촌과 함께 난민보트에 탔다. (Photo © Lee Yu Kyung)

14세 소년 누를 이슬람은 캄만 무슬림이다. 로힝야와 달리 버마의 135개 인종으로 인정받는 캄만족은 지난 해 2차 종교폭동인 10월 불교광신도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누를은 고향에 어머니를 남겨둔 채 삼촌과 함께 난민보트에 탔다. (Photo © Lee Yu Kyung)

한편, 캄만 무슬림까지 공격하는 10월 폭동을 계기로 로힝야 자니는 고향을 떠나기로 맘 먹었다. 게다가 10월부터 3월까지는 뱅갈만 풍랑이 상대적으로 잠잠한 ‘항해 시즌’ 이다. 버마에서 방글라데시로, 그리고 뱅갈만 국제해역으로 어선을 갈아타며 이동했다. 국제해역부터는 화물선 크기의 배에 올랐고 타이 해안에 이르기까지 7일 걸렸다. 하루 평균 2-3명이 죽어나갔다.

UNHCR에 따르면 지난 해 1만 3천명이 로힝야 난민들이 방글라데시에서 난민보트에 올랐고, 올해 들어 5월경까지 약 7천명의 난민들이 추가로 탈출했다. 유례없는 수치다. 유례없는 현상은 탈출 수치만이 아니다. 성인 남자 중심이던 난민보트에 최근 몇 년간  여성, 어린이들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로힝야 난민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25)도, 캄만 난민 누를 이슬람(14)도 그런 사례다.

아라칸 말레이시아 직항보트  vs  방글라데시 브로커 밀수선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는 2011년 4월 마을 사람 8-9명과 함께 고향 마웅도(Maungdaw)를 출발해 45분만에 방글라데시 국경타운 텤낲(Teknaf)에 닿았다. 종교폭동이 불붙기 전이지만, 이미 로힝야로서 버마 땅에 발붙인다는 건 목숨걸고 탈출하는 게 나을 만큼 희망이 없었다. 2005년 농사짓던 땅을 군인들에게 뺏아간 뒤 삶의 기반도, 시민권도 없는 모국을 남편,  노라 무하마드 탄다미아(25)는 이미 떠난 터다. 곧 남편이 있는 말레이시아로 가서 새롭게 시작할 참이다.

국경 타운 텤낲에서 3일을 기다린 뒤 4-5시간 어선을 타고 뱅갈만 국제수역 어디메쯤 떠 있는 조금 큰 배로 옮겨갔다. 국경부터 이미 말레이시아에 있는 남편이 방글라데시 브로커와 통화하며 원격조정 해주었다. 50-60명 수용 가능한 배에 250명이 채워지자 배가 출발했다. 선장은 방글라데시인, 선원은 버마사람 약간명과 대부분 타이사람 . 모두 권총과 장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통상 타이 혹은 버마에서 조직되는 밀수선에는 버마 선원들이 주로 고용되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타이 어선들이 오랫동안 뱅갈만은 물론 멀게는 소말리야 해역까지 가서 불법조업을 해왔던 역사로 볼때 살리마가 주장하는 ‘시암(타이) 선원‘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자나깨나 다리한 번  펴보지 못한 악몽의 항해 18일, 살리마의 배에서는 총 18명이 사망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배 안쪽에 있던 이들 약 14명이 숨막혀 죽었다. 나머지 네 명은 물좀 달라했다고, 좀 떠들었다고 선원들이 바다에 던져버렸다. 모두 젊은 청년들인데..’’.

‘마실물을 달라 하면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각기 다른 배를 타고 다른 시기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들이 엇비슷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 (25)는 2006년 먼저 말레이시아에 와 있던 남편과 2011년 재회했다. 재회 후 부부는 딸 하나를 낳았고 살리마의 ‘몸값’으로 빌렸던 돈을 아직 갚으며 페낭에 살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살리마 누라 아흐마드 (25)는 2006년 먼저 말레이시아에 와 있던 남편과 2011년 재회했다. 재회 후 부부는 딸 하나를 낳았고 살리마의 ‘몸값’으로 빌렸던 돈을 아직 갚으며 페낭에 살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목마른 남성들이 바다에 던져졌다면, 여성들은 ‘목마르지 ? 물줄께 이리오라’ 고 유인하는 선원들로부터 집단 강간 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부티동 타운쉽에서 온 누를 헤센 (41). 그는 자신이 타고온 배에서 강간이 자주 발생했다고 말했다.  4월 초 고향을 떠난 누를 헤센은 국제 수역에서 이틀을 기다려 무려 750명이 오른 화물선을 타고  8일 걸려 타이 해안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아주 많이 죽었다’’는 말로 그가 입을 열었다.

‘’선원들은 여성을 맨 윗 갑판에 배치했다. 성폭행하는 소리가 거의 매일 밤 들려왔다. 무슬림 여성들은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

‘무슬림 형제애’를 기대하며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줄 알았던 배는 타이 해안가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인간장사가 시작되었다.

물달라고 하면 바닷물에 던져 버려  

자니, 살리마, 누를의 배가 타이 해안가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맞이한 건 ‘정복차림의 타이 군인들’이다.

자니는 군인들이 난민들을 처음부터 험하게 다뤘다고 말했다. 그들의 ‘안내’하에 22명이 한 트럭에 구겨타고 5-6시간을 달려 1차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이동길, 총 500명 되는 사람들이 이틀 걸려 정글로 이동했다. 자니는 첫날 세 번째 차량에 올랐다. 살리마의 경우는 타이 선원들이 어딘가로 전화 연락을 한 후 정복차림들이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른 새벽 도착했다. 정복입고 총 꿰찬 이들이 와서 우릴 체크했다. 그리고 작은 보트에 5-6명씩 나워 태우고는 모기가 들끓는 정글로 데려갔다. 거기서 부터는 타이 브로커들이 우릴 픽업 트럭에 태우고 4-5시간을 달려 또 다른 정글에 이르렀다’’

2차 지점, 정글에서 브로커들은 말레이시아나 버마 안에 있는 가족들의 연락처를 묻고는 전화를 걸어 6천 링깃 (한화 217만원)을 통장에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말레이시아에 있던 남편은 전화받던 순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통화이후 돈을 빌리기까지 14일이 걸렸다며.

말레이시아페낭한마을에모여있는로힝야난민들. 지난 해 6월 (1차) 10월 (2차) 반 로힝야/무슬림 폭동을 거친 이후 버마 서부 아라칸 주를 떠나는 난민 보트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말레이시아페낭한마을에모여있는로힝야난민들. 지난 해 6월 (1차) 10월 (2차) 반 로힝야/무슬림 폭동을 거친 이후 버마 서부 아라칸 주를 떠나는 난민 보트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한겨레21>은 이번 취재과정에서 ‘정복차림의 군인들’이 로힝야 난민보트를 맞이하고 다른 브로커에 인계했다는 증언을 거듭 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은 단연 ‘타이 해군’이다.

그동안 ‘타이 해군’ 혹은 ‘타이 밀리터리’는 여러차례 ‘로힝야 스캔달’ 에 휩싸인 바 있다. 2009년 타이 해안에 도착한 난민보트의 엔진을 제거한 후 죽음의 바다로 흘려보내 바다를 떠돌던 난민들이 대량 사망했다는 보도가 생존자 증언을 통해 나온 바 있다. 올해 초에는 타이 해안가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들을 ‘해군’이 체크한 후 이송을 위해  군용보트에 나눠태우는 과정에서 겁에 질려 타기를 거부한 난민들을 향해 발포해 두 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체크 후 보트에 나눠태워 이송’ 과정은 <한겨레 21>이 취재한 일부 난민들의 증언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이와 관련 타이 해군은  <한겨레21>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이메일 답변을 보내왔다.

‘’타이 해군은 해군함, 항공모함을 배치하여 인근해역, 원해(遠海)까지 정기 순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로힝야 보트가 원해에서 포착되면 식량, 물 등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해주고 항해길을 계속 가도록 안내한다. 만일 보트가 타이 해역에 들어오면 관계당국으로 넘겨 법에 따라 처리된다. 이 모든 과정은 법의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른 것일뿐 어떠한 이익이나 이해관계도 없다’’

타이 해군의 부인은 물론 예상된 바다. 이에 대해 지난 6년간 로힝야 문제를 누구보다도 집중 추적해온 <아라칸 프로젝트> 크리스 리바의 말을 들어보자.

‘’아주 복잡한 이슈다. 언론은 ‘타이 해군’이라 단정하곤 했는데 그렇게 단정할 만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내가 가장 가능성을 두는 건 민병대일 가능성이다’’

크리스 리바는 민병대일지언정 상부의 허락 없이는 로힝야 보트를 죽음의 바다로 되돌려보내는 ‘거사’를 수행하진 않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각기 다른 이름을 달고, 군복을 입기도, 안입기도 하는 민병대가 수도없이 많은 타이. 특히 로힝야 난민들의 도착 지점인 타이 남부 어디메나, 로힝야를 포함한 주변국 이주민들이 인신매매단에 팔려가는 통로인, 라농에서 타이 해군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 ‘정복들’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병대 조직들이 국가안보작전사령부 (ISOC) 의 명령체계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타이 당국은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버마 무슬림들이 대거 모여사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 룸푸르의 한 구역.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버마전역에서 사랑받는 비틀넛을 판매하고 있다. 최근 버마내 종교 갈등이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 이주민들 사이에도 영향을 주면서 폭력사태가 불거진 바 있다. 버마 내 갈등이 계속되는 한 이주민들 사이의 긴장감도 쉽게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Photo © Lee Yu Kyung)

버마 무슬림들이 대거 모여사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 룸푸르의 한 구역.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버마전역에서 사랑받는 비틀넛을 판매하고 있다. 최근 버마내 종교 갈등이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 이주민들 사이에도 영향을 주면서 폭력사태가 불거진 바 있다. 버마 내 갈등이 계속되는 한 이주민들 사이의 긴장감도 쉽게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Photo © Lee Yu Kyung)

밀수단에 로힝야 난민 인계한 정복차림 타이군’,  해군인가 민병대인가     

그 유니폼들이 넘겨주다시피 한 브로커들 손으로부터 다행히 말레이시아에 친구가 있는 누를 헤센 같은 이는 4일만에 풀려났지만, 돈 보내줄 이를 찾지 못한 자니는 두 달 가까이 정글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고향 친척의 도움으로 마지막에 겨우 풀려났다. 자니가 머무는 두달동안 10명 정도가 죽아나갔는데,  그중 시트웨 (아라칸 주도) 출신 여섯 명은 도망가려다 붙잡혀 맞아죽었단다.

‘’소근대며 떠든다는 이유로 구타와 이빨 뽑는 고문도 했다’’

힘없는 자니지만 줄줄이 기억을 떠올렸다. 10여명의 브로커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선 그곳에서 접힌 다리 외에 다른 자세는 허용되지 않았다. 식량은 하루 점심 한끼. 난민들이 모두 ‘고무나무 투성이’라고 했던 타이-말레이시아 국경 정글 어딘가 자리잡은 ‘밀수캠프’는 떠나는 이들과 끊임없이 운송되어온 난민들이 교차하며 마르지 않는 인간시장 중심지였다. 끝끝내 ‘몸값’을 내지 못한 이들의 행방은 묘연하다. 다만, 인신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타이 어업계에 차고 넘치는 현대판 노예로 팔려갔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미국무성의 인신매매 (Trafficking In Person, TIP) 연례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부 로힝야 난민들이 타이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과정에서 타이 어선에 팔려가 강제 노역을 한다는 보도가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이 군 장성들의 역할도 보도되고 있다. ’’

‘’내가 떠날때 300명이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헤센의 말이다.

몸값 내면현대판 노예

석방된 이들은 다시 타이 정글에서 말레이시아 정글을 거쳐 페낭에 떨어졌다. 헤센처럼 배로 이동한 루트가 있고 살리마, 자니처럼 차량과 도보를 정글 국경을 넘은 이들도 있다.

‘’내 남편이 돈을 지불했다며 떠날 채비를 하라고 했을때 너무 기뻤다. 밤에 이동을 시작했다. 차를 타고 한 가옥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국경까지 3시간 도보 후 말레이시아 정글로 넘어왔다. 고무나무가 참 많았고 가옥은 한 채만 있었다’’

살리마 일행이 넘어온 시점부터는 말레이시아 브로커가 안내했다. 5-6명씩 트럭에 나눠타고 남편과 브로커가 통화로 동의한 지점까지 갔다. 두시간 걸려 도착. 마침내 남편과 상봉했다. ‘’세상의 왕이 된 것 마냥 행복했다’’. 남편 노라 무하마드의 말이다.

고문, 살인 그리고 강간의 끔찍한 기억을 안고 도착한 말레이시아. 먹고 살길은 막막해도 종교, 인종때문에 박해받는 일은 없을 거라 기대한 무슬림 형제국가. 그러나 요즘 이 기대마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버마 종교폭동의 여파가 간헐적이지만  말레이시아까지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30일부터 약 일주일 새  말레이시아 거주하는 버마출신 불교도 이주노동자  네 명이 괴한에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를 버마안 종교갈등이 말레이시아로 확산된 것이라 발표했다.

급기야 6월 11일에는 버마의 찐요 (Zin Yaw) 외무부 차관과 윈모툰 (Win Maw Tun) 노동부 차관이 위험에 직면한 ‘버마 시민’을 구제하고, 사태를 파악하겠노라며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그 ‘버마 시민’의 카테고리에 시민권 없는 로힝야 난민들이 있을리 만무하다.

말레이시아의 로힝야 인권단체 메롬 (MEHROM) 대표 자파르 아흐마드. 최근 버마내 반 무슬림 폭력사태가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이주민들 사이 갈등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버마 정부는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시민' 보호를 공언했다. 시민권이 없는 로힝야 난민이 그 보호대상에 들리 만무한 가운데 자파르는 말레이시아 조차 안전하지 않다면 더이상 갈곳이 없다고 호소한다. (Photo © Lee Yu Kyung)

말레이시아의 로힝야 인권단체 메롬 (MEHROM) 대표 자파르 아흐마드. 최근 버마내 반 무슬림 폭력사태가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이주민들 사이 갈등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버마 정부는 ‘(말레이시아 거주) 버마시민’ 보호를 공언했다. 시민권이 없는 로힝야 난민이 그 보호대상에 들리 만무한 가운데 자파르는 말레이시아 조차 안전하지 않다면 더이상 갈곳이 없다고 호소한다. (Photo © Lee Yu Kyung)

‘’국제사회, 언론이 로힝야 밀수과정, 불법성을 고발하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왜 그들이 목숨걸고 떠날 수 밖에 없는지를 더 부각시켰으면 한다.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는 전혀 없다. 그나마 말레이시아가 눈을 감는 정돈데 보트를 타고서라도 이동하게 두고 싶을 만큼 버마내 삶이 너무 비참하다. 아라칸 주 로힝야 캠프를 가보면, (오마이갓!) 아마 당신도 배에 오르고 싶을거다.’’

<아라칸 프로젝트> 크리스 리바의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동안 .로힝야 난민들의 도착을 눈 감아아온 말레이시아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 석방하고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편입시켜왔다. 그러나 눈감던 말레이시아도 최근 버마 내 종교갈등이 자국으로 전이되는 통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버마 이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 맥락에서다.  아울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버마출신 다양한 커뮤니티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불거질 우려는 이미 현실화되었다 .

‘’오늘 (13일) 오후 2시 (쿠알라룸푸르) 암팡 지역 로힝야 한 명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지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땅은 없는 것 같다. 버마에서도 이곳 말레이시아에서도.. ‘’

추방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전화로 연결된 말레이시아의 로힝야 인권단체 메롬 (MEHROM) 대표 자파르 아흐마드의 절규가 멈추질 않았다.

이유경 Lee@penseur21.com = 쿠알라 룸푸르페낭 (말레이시아)  / 방콕 (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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