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22 제957호] |
[세계] 버마 전역에서 불교 승려가 주도하는 반무슬림 폭동 확산일로 군부가 방조하고 민주 세력은 침묵… 43명 죽고 모스크 37곳 불타 |
* 아래 기사는 <한겨레21> 957호 <부처의 나라 광기에 휩쓸리다> 의 원본입니다. 지면 관계상 실리지 못한 부분과 사진을 추가하였습니다.
– 이유경 penseur21 –
버마의 승려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2007년 9월 군부의 무력진압에 지하로 숨어든 샤프란 혁명의 불길을 살리고자 함도 아니요, 망명했던 주동자승의 결의대로 ‘다시 버마로 돌아가 혁명에 나선’ 것도, 물론, 아니다. 개혁의 단맛에 흠뻑 취한 버마는 지금 혁명 따위가 좀 거추장스러워보일 정도다. ‘총칼’에 맞서 ‘죽창’ 들 일이 세상 없을 법한데, 아무튼 승려들이 칼이며 장대 따위의 무기들을 되는대로 들었다. 이번엔 폭도들의 ‘두목’격이다.
무슬림-불교도 말다툼이 폭동으로
지난 3월 20일 버마 중부 멕틸라(Meiktila)타운에서는 무슬림 금은방 주인과 불교도 손님간의 언쟁이 삽시간에 종교폭동으로 번졌다. 무기를 쥐어든 불교 광신도 무리의 선두에 선 것은 승려들이었다. 일부는 심지어 무슬림 주민들을 산채로 불길에 밀어넣기도 했다는 게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일부는 채 타지못한 시체가 되어 거리에 뒹굴었다. 평화시위대를 향해 발포만 잘하던 50만 강력대군도 경찰도 이번만큼은 끝없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일부 경찰, 소방대원들은 폭력에 개입하지 말고 ‘불이나 끄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증언도 내놓았다. 사흘동안 이어진 ‘반(反)무슬림 폭동’은 23일 군인 수백명이 뒤늦게 타운에 들어선 이후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이건 커뮤니티간 분쟁이 아니다. 무슬림을 향한 일방적 공격이다. 차라리 미얀마 대학살(pogrom)이라 불러라”
버마 무슬림 협회 (BMA) 랑군 사무소 묘윈은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폭도들은 그 지역 사람들이 아니다. 밖에서 조직적으로 동원된 이들이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서는 불도우저까지 동원했다.” ‘사전에 계획된 폭동’이라는 게 묘윈의 설명이다. 폭동 후 현장을 방문한 유엔사무총장 특별자문관 비제이 남비아도, 폭동 직후 현장을 방문한 민코나잉도 각각 “사전 계획되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우 분명하다”는 말로 심증을 보탰다. 정부가 밝힌 공식 사망자수만 43명, 이슬람 사원 (모스크) 37곳과 건물 1300여채가 불탔고, 1만3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BMA쪽은 “사망자가 최소한 70-100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인권을 위한 의사들'(PHR)은 지난 4월 5일 발표한 자료에서 “폭동 당시 불에 탄 망갈라 자욘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학생 32명과 4명의 선생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 가족들이 애타게 찾는다”며 진상조사를 거듭 촉구했다. 버마 당국이 내놓은 공식 자료에는 실종자에 대한 통계 자체가 없다.

버마 중부의 작은 타운 포코쿠에서 novice 승려들이 명상과 학습에 심취해있다. 2007년 샤프란 혁명의 진원지였던 포코쿠를 포함하여 소위 반독재 혁명에 나섰던 승려 그리고 버마의 민주야당 세력들 중 상당수가 무슬림들에 대한 혐오나 불교애국주의 폐해를 고스란히 발현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메이크틸라 폭동의 여파는 버마 전역의 무슬림 집단 거주 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난 3월 28일까지 중부 바고지방과, 수도 네이피도 부근, 그리고 랑군 근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무슬림을 겨냥한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줄을 이었다. 일부 언론은 마치 ‘(군부의 개혁 조치로)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서 전에 없던 문제가 불거진 것’ 마냥 보도했으나, 버마에서 무슬림을 겨냥한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영국 식민지배를 받던 1930년과 1938년에도 일찌감치 반무슬림 폭동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군부의 압제가 기승을 부리던 1997년과 2003년, 2006년에도 비슷한 사건은 이어졌다.
그리고 소위 개혁이 시작된 시점 이후로 보자면 2011년 4월 중부 마구웨에서 무슬림 주민들에게 집단적 폭력이 가해진 것이 시작이었다. 최근의 폭동이 우려스러운 것은 폭력 사태가 점차 조직적, 계획적 경향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속을 파고드는 안티무슬림 증오 캠페인을 한편으로, 잘 조직화된 폭도들의 무력난동을 또 다른 한편으로 양 박자가 맞아떨어지는게 최근 경향이다. 그 증오 캠페인의 선두에 선 이들은 주류 버마족과 그들의 민족종교를 수호하겠다고 나선 불교극단주의자들이고, 폭도들의 조직적 움직임을 주동한 구체적 배후는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다.
버마족과 민족종교를 사수하기 위해
필자가 승려들의 반 무슬림 감정과 직접 맞닦드린 건 2007년 샤프란 혁명 직후였다. 혁명의 기운이 지하로 밀려 거친 숨을 몰아쉬던 2007년 11월초, 서부 라까잉주의 주도 시트웨와 더불어 혁명의 진원지였던 중부 포코쿠 타운에서 혁명 주동승려 몇 명과 인터뷰하며 귀 솔깃해지는 말이 들려왔다.
“그건 보복이었다. 2003년 우리가 무슬림하고 충돌했을때 진압경찰들이 불교 사원에 총질을 했기 때문에..”
포코쿠 승려들은 그해 9월 6일 왜 군인 차량을 때려 부수며 시위를 했는지 설명하며 무슬림과 충돌했던 과거와 연계지었다. 바로 전날 평화시위가 무력 진압당한 것에 대한 보복성 폭력으로 추측하던 것 이상의 맥락을 담고 있었다. 이어진 그들의 발언은 제법 널리 퍼진 작금의 증오 캠페인과 직결된다.
“무슬림..그 인디안들..사우디 아라비아 도움받아 ‘786’ 운동 하잖나. 전국적으로…”.
버마 라까잉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로힝야 무슬림이나 일부 중국계 무슬림을 빼고, 버마 무슬림의 절대다수는 영국식민지배 시절에 이주해온 인도계 후손이다. 하여 ‘인디안들’은 종종 ‘무슬림’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아울러 ‘786’은 남아시아에서 ‘자비로우신 신의 이름으로’란 이슬람 성서 코란의 첫 구절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상징적인 숫자를 버마 불교도들은 ‘(무슬림들의) 21세기 음모’로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 숫자를 더한 21이라는 합계에서 나온 음모론적 해석이다.

버마 중부 도시 만달레이 야시장에서 한 승려가 좌판에 펼쳐진 헌 책을 뒤적여 보고 있다. 불교도가 주류인 버마에서 승려와 사원은 교육수행자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불교 극단주의의 조직적 부상이 심각한 건 승려들의 사회적 입지와 영향력이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Photo © Lee Yu Kyung)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이 최근 잇따르는 ‘종교폭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개혁2년의 세월만에 더더욱 조직과 세를 키운 ‘반 무슬림 운동’은 올해 초 ‘969 운동’을 연 것으로 알려졌다. 969는 불교전통에서 나온 상징수로 9는 부다를, 6은 부다의 가르침 법륜을, 마지막 9는 부다의 제자 즉 승려를 가리킨다. 무슬림의 ‘786음모’에 맞선 불교도들의 ‘969 운동’.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거침없는 버마학자 마웅 자르니는 ‘969’ 캠페인을 ‘네오나찌’ 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969 운동’ 주도하는 인물은 위라뚜(U Wirathu)란 이름을 지닌 승려다. 그는 앞서 포코쿠 승려들이 언급했던 2003년 벌어진 종교 폭동의 배후로 알려졌는데, 당시 상황을 종합,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다.
2003년 버마 중부 만달레이 타운 촉세(Kyawkse)에서 무슬림을 겨냥한 폭동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경찰의 진압방식이 또 다른 대중 시위를 불러왔고 위라뚜를 비롯한 5명의 승려들이 ‘증오 선동’ 혐의로 구속,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이 다시 위라뚜 추종자들을 비롯한 일부 불교도들을 자극, 여러 타운쉽의 자잘한 시위로 이어졌다. 일부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폭동이 발생한 타운 멕틸라와 포코쿠도 이에 포함된다. 위라뚜는 2011년 ‘민간 정부’ 출범을 기념한 대사면 때 석방됐다.
석방 뒤 위라투는 버마 전역의 불교사원을 돌며 ‘반무슬림’ 정서를 자극하는 설교를 하고 있다. 그는 무슬림을 ‘칼라(Kalar)’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무슬림을 비하하는 호칭. 흑인을 비하하는 ‘니그로‘쯤 되는 단어다. 사실 위라뚜 뿐 아니라 일반 버마인들 사이에서도 간간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를테면, 몬주의 몰라뮌을 방문했을 때는 무슬림이 버스사업에 간여한 것을 두고 이런 식의 설교를 했단다.
“만일 우리 불교도가 대중적 역량을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몰라뮌은 머지않아 적(무슬림)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무슬림이 운영하는 상점에 대한 보이콧을 선동하고 있는 그는 “신심 있는 불교도라면 오직 ‘969 운동’의 스티커가 붙은 가게에서만 물건을 사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단다.
‘반무슬림’ 캠페인 확산은 지난해 6월 라카잉 지방에서 발생한 라까잉 불교도와 로힝야 무슬림 사이의 충돌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 약 200명이 목숨을 잃은 라카잉 폭동에서 희생자의 절대다수는 무슬림이다. 13만 명에 이르는 로힝야 무슬림들은 ‘영구적 게토’라 불리는 난민캠프에 갇히게 됐고, 요행히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안전을 위해 배를 타고 강 건너 방글라데시 등지로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1982년 네 윈 치하의 군부독재 시절 개정된 ‘시민권법’ 에 따라 버마 시민권을 박탈당한 로힝야족에 대해, 유엔은 “지구촌에서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규정한 바 있다.
“로힝야 무슬림을 제3국으로”. 라카잉에서 폭동이 발생한 지 석 달 남짓 만인 지난해 9월 초, 테인 세인 대통령의 ‘제3국 추방’ 제안을 지지하며 위라투를 중심으로 한 수백 명의 승려들은 거리 행진을 벌였다. “모국을 구해내자”는 구호와 함께. 그로부터 한 달 남짓 만인 10월23일 (‘우연히도‘ 위라뚜가 전 군정보국(MI)장 킨윤을 만난 다음날이다) 라카잉 지방에서는 다시 ‘반무슬림 폭동’이 벌어졌다. 이 폭동의 ‘목표물’은 로힝야가 아니라, 또 다른 소수민족인 카만족이었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로힝야와 달리 카만족은 버마의 13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무슬림이다. 이 폭동은 로힝야족에 초점이 맞춰졌던 ‘반무슬림 운동’이 무슬림 전체로 확산됐음을 알리는 계기였다.
무슬림 증오 캠페인 ‘969’
반무슬림 캠페인을 꾸준히 추적해 온 ‘버마 캠페인 영국 (Burma Campaign UK)’에 따르면 소위 ‘증오 리플렛’이 라까잉 지방 폭동 이래 불교 사원(Monastery)를 포함한 버마 전역에 뿌려지고 있다.
이중 지난 해 10월 카렌주 주도 파안(Hpa-an)에 뿌려진 한 리플렛을 보자. 리플렛은 ‘불교수호연맹그룹’이 파안(카렌 주도) 매바웅 사원 모임에서 통과시킨 네 가지 결의안을 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불교도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하지 말것”이다. 증오 리플렛이 돌던 그달 28일, 카렌주 초카레잌 타운쉽에서는 누군가의 폭탄투하로 예이난시콘(Yay-nan-si-kone) 모스크가 방화되는 일이 발생했다. 키온도 타운쉽에서 발생한 자메 모스크 수류탄 공격도 카렌 주 승려들의 회의 2주 후 발생한 일이다. 4월에도 모스크 방화 사례가 보고된 바 있고, 9월에는 74세 카렌 노인이 승려에 의해 치사폭행 당한 후 한달 후에 사망한 사건도 보고되었다.
최근 발생한 멕틸라 사례 역시 증오 설교와 리플렛 배포 그리고 폭동의 패키지가 맞아떨어진 경우다. 폭동 발생전 이지역에 배포된 리플렛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매일 매일 한 무리의 칼라(무슬림)들이 모스크를 갈 때마다 우리는 공포감을 느낀다. 우리를 지원줄 이가 필요하다”
위라투 역시 메이크틸라 폭동을 앞두고 현지 사원을 찾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그는 “무슬림이 민족민주동맹(NLD)에 지나치게 많이 가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만에 메이크틸라에선 사소한 말다툼 끝에 불교 광신도들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선동’의 효과를 본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지난 1일 휴먼라이츠 워치가 공개한 멕틸라 타운의 폭동 전후 위성 사진은 분주했던 무역타운을 3일만에 잿더미로 갈아버린 폭력의 수위를 짐작케 했다.

군부독재시절 버마 불교의 심장부인 중부 만달레이 지방 한 파고다안에 별달린 장성들의 홍보사진이 가득하다. 반세기 가까이 버마를 지배해온 군부는 곳곳에서 ‘불교 애국주의’를 세뇌시키며 소수민족,종교를 탄압에 종교와 민족을 이용해왔다. ‘반독재’, ‘민주’ 등 제한적 의제에만 몰입해온 소위 야당 민주세력도 이런 군부 정책의 폐해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하지 못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지난 2년간 큰 규모 폭동은 불교세가 강한 서부 라까잉주와 중부 지역에 집중되었지만 사실상 지역적 경계를 두드러지게 보이진 않는다. 17년 휴전이 어그러지고 2011년 6월부터 내전이 재개된 북부 카친주에서는 작년 4월 파칸(Pakant) 지역 모스크가 승려들에 의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한 바 있다. 올 2월에는 랑군의 따르카타(Tharkata) 타운쉽과 라잉따야르(Hlaing Thar Yar) 타운쉽에서는 이슬람 학교가 방화되었다. 그 얼마전 위라뚜가 불교사원이 이슬람학교로 바뀔 거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결과였다.
그럼에도 버마 내부에서 ‘반무슬림 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대신 ‘불교민족주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응과 답변이 도드라지고 있다. 중대사안마다 침묵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아웅산 수치야 그렇다 치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LD의 양윈 대변인은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칼과 몽둥이를 든 승려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 대한 반응을 묻는 질문에 “만달레이 승려들이 그럴 리 없다. 그들은 진정한 승려가 되려는 이들이다”라고 주장했다.
군부독재 시절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비판적 언론인 윈틴 역시 최근 스페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최근 폭력 사태는) 이슬람의 문제로, 전세계적인 현상”이라며 “유럽은 물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이라크 등 무슬림 국가들도 ‘지하드’(성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버마 안팎에서 활동 중인 익명의 한 국제인권운동가는 “로힝야에 대한 차별과 박해에 반대하는 활동가 그룹이 적잖다. 근데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 동료들로부터의 반향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쯤되면 수십년 군부독재가 갈고 닦은 소수민족, 종교차별정책의 효과는 불행하게도 잘 발휘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7일 타전된 ‘멀티신앙'(Multi-Faith)을 표방한 ‘프레이 포 미얀마’ (미얀마를 위해 기도하자) 활동가들이 랑군과 만달레이를 돌며 종교갈등을 비난하는 유인물과 티셔츠를 배포한다는 소식은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누구 좋으라고 인종주의 부추기나”
그리고 또 한명의 소신찬 목소리가 있다. 바로 샤프란 혁명을 최전선에서 이끌었던 전버마승려연합 의장인 우감비라 승려다.
“군인들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분쟁에 의존한다는 걸 모른다는 말인가? 민족주의는 그런 군부의 체제 유지에 이용될 뿐이다.”
혁명 좌절 이후 체포돼 징역 68년형을 선고받았던 우감비라는 2011년 대사면 때 석방됐다. 그는 출감 이후에도 분쟁과 수탈의 현장을 돌며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재구속과 석방을 되풀이했던 그는 결국 승복을 벗었다. “어느 불교사원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코니니르윈’이란 속명을 되찾은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승려들은 300여 명에 이르는 정치범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야 했다. 카친주에서 벌이는 전쟁 아닌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는, 농민들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라고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야 했다. 왜 인종주의를 부추기는가?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위기를 조장하는가?”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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