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일, ‘여성 대통령’으로 한때 스리랑카 정치권을 풍미했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전 스리랑카 대통령은 비판적 일간지 <선데이 리더>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 앞으로 ‘화이트 밴’을 보낼까봐 두려워 답을 못하겠다.”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을 두 문장으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전직 대통령조차 현 정권과의 불편한 심기를 ‘화이트 밴’으로 표현할 만큼, 스리랑카에서 화이트 밴은 단순히 ‘흰색 봉고차’가 아니다. 그건 ‘강제실종’과 거의 동의어처럼 이해되는 ‘납치’의 대명사이며 국가 폭력의 상징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차량을 세워 검문하고 있다. 콜롬보는 물론, 동북부 타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납치와 강제 실종의 ‘천국’이다. 마을의 한적한 길가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섰지만, 납치차량이 잡힌 적은 없다. (Photo @ Yu K. Lee)
스리랑카의 강제실종 역사는 깊다. 타밀반군과의 내전과정에서는 물론, 1970년대 초와 1980년대 후반 극좌민족주의그룹인 인민해방전선(JVP)의 무장 반란 당시에도 수만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실종자 문제를 다루던 인권변호사 라자팍세는 2005년 말 대통령이 되어 ‘번호판 없는 화이트 밴’을 가동, 강제실종의 역사를 적극 이어가고 있다.그가 집권한 이래 지금까지 콜롬보에서만 대략 600명이 실종되었고, 동북부 타밀 지역은 콜롬보 수치의 4배가 넘는다고 인권단체들은 보고 있다. 가장 심각한 북부 자프나 반도가 약 20m당 한 명꼴로 군이 배치된 곳임을 감안하면 납치의 배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타밀 반군으로 자동 인식되는 수많은 타밀 젊은이들이 무작위로 실려갔고, 그리고 언론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협박, 납치, 실종, 살해 등에 노출된 언론인들에게서는 무작위성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좀 더 도드라진다.
1990년 이래 정부와 타밀 호랑이 반군 간에 있었던 네번의 휴전협상 전 과정을 취재한 베테랑 타밀 기자 나데사필라이 비타야탈란. 그는 지난해 2월 26일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사복, 경찰복 무리들에게 끌려갔다. 국제사회의 유례없는 압력으로 2개월 만에 풀려난 그가 증언하는 ‘흰색 봉고’의 세계는 이렇다. “나를 차 안으로 밀어넣자마자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묶고는 차 바닥에 눕혀놓고 달렸는데….”
국제사회 압력으로 2달만에 풀려나
15분 가량 흘렀을 무렵 차 안 라디오 뉴스에서는 비타야탈란 기자 납치를 목격한 이는 119로 제보하라는 경찰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가 납치당하고 있음을 경찰이 공개적으로 확인해 준 셈이다. 모처에 도착해 발가벗기고 눈은 여전히 가려진 채로 3~4시간 구타와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납치범 중 한 명이 “실수로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며 그를 다시 차에 태웠다. “두번째 차량에서는 눈가리개를 풀어줬는데, 며칠 전 취재차 만났던 경감 2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실려간 곳은 ‘4층’, 고문의 대명사인 범죄 수사국(CID)이었다. 거기서 비타야탈란 기자는 “연행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납치되기 5일 전 타밀 호랑이 반군이 콜롬보 중심가를 공격했던 자살공습에 공모했다는 것이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친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세 국방부 장관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혐의에 대한 확신이 넘쳐 비타야탈란 기자를 테러리스트라 단정했다. 고타바야 장관은 2009년 1월 2일 암살당한 <선데이 리더> 편집장 라산다 위크레마퉁가를 ‘타블로이드 기자’라고 비하하기도 있다. 국경없는 기자단 선정 ‘언론자유 약탈자’ 명단에 올라 있는 그의 지휘 아래 국방부 사이트에는 ‘국가의 배신자’로 찍힌 언론인들이 실명으로 오르곤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협박 전화와 ‘화이트 밴’ 공포가 해당 언론인들을 휘감는다. 자유언론운동(FMM)의 대표였던 언론인 수난다 데샤프리야도 그 명단에 올라 협박에 시달리다 지난해 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스리랑카 북부 마을 골목에 지키고 선 스리랑카 군인 (사진 왼쪽) 산디야 에카날리야고다(사진 오른쪽)의 남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올 1월 실종된 이래 아직 소식이 없다. 전쟁 당시 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자료를 모아온 그의 행적과 반정부 성향이 실종의 주 원인인 것으로 동료 기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은 보고 있다.(Photo @ Yu K. Lee)
이례적으로 풀려난 비타야탈란 기자와 달리 올해 초 실종된 언론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지금 실종 1년을 채워가고 있다. ‘랑카 이 뉴스’(Lanka eNews)에 만평과 글을 기고해온 그는 대선 이틀 전인 지난 1월 24일 오전 7시 30분,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선거 취재를 떠난 이래 돌아오지 않고 있다.
프라기트는 범 야당 후보였던 사라 폰세카 전 군 총 사령관 캠프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대선에서는 타밀 정치인들조차 울며 겨자먹기로 폰세카 후보를 지지 할 만큼 스리랑카 야권은 라자팍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폰세카 후보를 지지하는 언론에는 여지없이 협박이 가해졌다. 그런 이유로 주간지 ‘랑카’는 일시적 폐쇄를 당했고, 편집장 샨다나 시리말와트는 경찰 조사에 자주 불려다녔다.
실종 1년째 행방 묘연한 기자도
한편, 프라기트의 실종에 대해 아내 산디야와 동료 언론인들, 인권단체들은 그의 반정부 성향은 물론, 지난 몇년간 타밀지역 전쟁터에서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자료를 집중 추적해왔던 점을 실종의 주 원인으로 보고 있다. 프라기트는 지난 해 8월 납치당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 당시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 납치범들을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화학무기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군내 고발자와의 교신내용을 집중 추궁받았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랑카 이 뉴스’ 편집장 산다루완 세나디라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 군인 역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리고 경찰의 추궁과 협박전화를 받아온 산다루완 그 자신도 지난 3월 결국 스리랑카를 도망쳐 나왔다. 프라기트의 가까운 동료인 디스넨드라 페레라 역시 지난 5월 31일 집으로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 여러차례 살해 협박을 받아온 페레라 역시 이날 괴한들로부터 프라기트와 공유한 화학무기 관련 자료를 추궁받았다고 전했다.
“납치되기 약 일주일 전, 남편이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어 사연을 물었다. 모 장관의 비서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프라기트의 아내 산디야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프라기트에게 ‘경고’한 모 장관 비서 이름을 알렸지만 수사에 별 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고타바야 국방부 장관,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프라기트는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자작극을 벌이는 중”이라고.
프라기트는 어디 있나? 당뇨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아내는 확신한다. 2년 전 실종된 형이 여전히 어느 수감소에 갇혀 살아 있을 거라 굳게 믿는 타밀 청년 엥가란 비나야감(24)처럼. “남편은 내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밤낮 캠페인 벌일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때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산디야의 자신감에 찬 말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의 검문소들. 소수 타밀족과 언론인을 포함한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해온 납치차량 화이트 밴은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전쟁 이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검문소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 언론인 협박, 실종은 전후에도 여전히 드리운 스리랑카의 암울한 모습이다.
스리랑카 콜롬보|이유경 <국제분쟁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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