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경 통신원의 ‘종전 선언된 스리랑카 내전의 거짓과 신화’ |
이유경 |
유엔 비공식자료(1월~4월)엔 민간인 7천명 사망추산···정부는 부인 스리랑카 정부·정부군에 이어 ‘대량학살 주연’ 상할라족도 ‘공공의 적’ 구호단체·언론 등 국제사회 타밀인 학살 현실 알면서도 수수방관 20대 청년 타밀(가명)의 고향은 스리랑카 동부 ‘바띠깔로아’다. 타밀은 2006년 7월 친 정부 타밀 민병대 조직에 의해 납치당했지만 바로 그날 목숨 건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인근 A국까지 피신해왔다. A국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난민신청을 하고 반년의 기다림 끝에 ‘제 3국행 난민’(피신한 국가 A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북미대륙이나 유럽 등 난민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국가들로 이주해야 하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타밀은 2년반째 제 3국행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왜 하필 그 섬나라에서, 왜 하필 타밀족으로 태어났을까?” 자신이 태어난 땅과 인종에 대해 이따금 ‘왜 하필’을 자문한다는 타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타 타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민족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과 정체성을 지닌 혈기 왕성한 청년이다. 자부심 강한 타밀족 인도 대륙 남단 타밀 나두와 ‘스리랑카’라는 국명으로 불리는 실론 섬 동북부에 수천년간 거주해온 타밀족은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학 등의 전통을 자랑하며 높은 교육열로도 유명한 민족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타밀인들은 ‘타밀’ 이라는 태생적 이유만으로 정치 사회적 차별과 국가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왔다. 분쟁의 소용돌이까지 보태진 60년 세월이었다. 그 60년의 전반 30년은 ‘차별 저항’ 비폭력 투쟁으로, 후반 30년은 정치투쟁을 조금 가미시킨 ‘민족 해방’ 무장투쟁으로 보냈다. 무장투쟁은 물론 비폭력 투쟁이 차별을 근절시키지 못함에 따라 나타난 결과다. 마치 평화적 시위가 공권력의 폭력으로 거부당할 때 분노한 시위대의 손에 돌멩이가 들리는 것처럼. “쓰디 쓴 종말이다. 우리 타밀인들이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음에 이제 우리의 무기를 ‘침묵’시키겠다 |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타밀인들이 모여사는 '타밀 동네' 힌두 사원. 전쟁이 벌어졌던 동북부는 물론 콜롬보도 타밀인들에게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납치와 검문, 보안군의 체포 구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Photo by Lee Yu Kyung)
5월 17일, 스리랑카 내전의 막다른 골목이었던 북부 와니 지방 좁은 해안가에 내몰려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타밀 타이거(LTTE)는 ‘무.기.침.묵.’ 성명을 발표한 뒤 전선 패배를 인정했다. 그들과 함께 최후까지 남아 있던 약 5만(유엔추정)에서 15만(타밀단체 및 타밀타이거 주장)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담았다.
타밀 타이거의 이 ‘무기 침묵’ 성명은 “무기를 내려놓고 정치투쟁으로 탈바꿈하라”는 국제사회의 주문에 뒤늦게나마 반응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투지역 민간인들과 타이거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기도 했고, 이제 반군이 총을 내려놓았으니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정부군의 폭격을 멈추게 하지 않을까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전투가 격렬해지고 타밀 타이거의 패배가 ‘시간문제’로 보이던 그 얼마전까지도 필자가 인터뷰한 스리랑카 내외의 타밀인 대부분은 타이거의 지독한 생존력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또 80년대 후반 인도평화유지군과의 전투에서 정글 구석까지 밀려날대로 밀려났으나 기가막히게 버티다 인도군을 철수시키고만 타이거의 왕년 전설을 입에 올렸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휴전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인데, ‘순진하게도’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자기 동족이 학살당하는 상황을 알고도 방관한 국제사회에 야속함과 배신감이 컸던 타밀인들의 절망감은 종전 직후 타밀넷(Tamilnet.com)의 한 기사 제목에 잘 투영되었다.
“국제사회여 부끄러운 줄 알라. 인간 존엄 만만세.”
피신 나온 이국 땅에서 동족의 학살을 지켜보던 난민 청년 타밀의 목소리도 한숨과 분노로 간간이 메어왔다.

스리랑카 분쟁의 역사는 60년이다. 전반 30년은 비폭력 정치투쟁으로 후반 30년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저항해온 타밀인들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경험한 이 노인은 2년전 전쟁이 끝난 동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피난민 캠프에서 3년째 지내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국제사회는 우리 타밀인들이 학살당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 수도 쓰지 못했다. ?유엔과 미국 등은 위성사진을 통해 현장의 심각함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지금은 전투 지역을 빠져나온 민간인들이 ‘강제 수용소’ (정부가 운영하는 피난민 캠프를 말함) 에서 구호물자 태부족으로 고통받고, 심지어 실종되거나 죽어나가고 있다. 이 피난민들이 전투 지역을 목숨걸고 빠져나올 때 기대한 건 국제단체가 운영하는 피난민 캠프이지, 살인마 정부군의 장막에 둘러싸인 강제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스리랑카 정부군의 장막이 쳐진 캠프에서 죽느니 타이거 통치 지역에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대량학살, ‘인도주의적 구출 작전’으로 둔갑
스리랑카 정부와 국제사회 그리고 인권단체들은 이미 여러 달 전부터 타밀 타이거가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해왔지만, 타밀 타이거는 민간인들이 잔인한 스리랑카 정부군 영토로 넘어가길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타이거와 함께 남아있다고 반박해왔다. ‘반군들이-혹은 그에 준하는 무장 세력이-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고 있다’는 분쟁지역 단골 논란이 재연된 것이다. 어떻게 봐야 하나? 무엇이 진실인가?
스리랑카 최근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자면 필자는 그 중간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밀 일람’(‘타밀인의 모국’이라는 뜻으로 타밀 타이거가 오랜 기간 통치해온 영토를 일컬음) 수도 킬리노치가 정부군에 함락된 1월부터 ‘타밀 타이거 민간인 방패 이용’이라는 비판을 들이댄 유엔과 국제사회의 주장은 성급하고 지나쳤다.
그 ‘불공정한 양비론’은 양측을 같은 수준의 범법자로 만들면서 스리랑카 정부의 민간인 폭격에 힘을 보태는 효과를 가져 왔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말이다. 이 양비론에는 또한 와니 전투 현장이 바로 타밀인들이 목놓아 불러온 ‘모국’이라는 점,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말하는 정부군은 바로 타밀인들이 치를 떨며 끔찍하게 여겨온 점령군이라는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들은 타밀 타이거의 가족들이고 친지들이다. 그리고 타밀 타이거 통치하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고 타밀 타이거와 가깝고 친숙하니 거기 있길 원한다. 동시에 타밀 타이거도 그 민간인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쉽게 패배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점이 맞물려 작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월 중순께 만난 필리얀의 말이다. 오랜 세월 타밀 타이거 대원이었으나 2004년 타이거 동부 사령관 카루나가 분열할 당시 함께 조직을 깨고 나와 지금은 동부 지방 주지사 자리에 까지 오른 필리얀은 납치로 악명 높은 친정부 민병대 TMVP의 수장이기도 하다.
접근 봉쇄한 처절한 인종 학살
“사람들은 타밀 타이거가 ‘게릴라 반군’이라는 걸 잊은 것 같다. 게릴라는 민간인들 속에 묻혀 싸우는 무장조직이다.”
이렇게 말하는 비사카 다르마다사는 98년 타밀 타이거와 전투를 벌이다 실종한 둘째 아들이 타밀 타이거 전쟁포로 감옥에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10여년을 버텨온 전쟁피해여성모임의 대표다.
5월 28일자 인도 일간지 ‘더 힌두’ 가 인터뷰한 한 피난민의 말도 들어 보자.
“5월 둘째 주까지만 해도 타이거는 (그들이 패배하고 있던) 전선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우리도 그걸 믿었다.”
타밀 타이거가 민간인들의 탈출을 허용치 않은 건 ‘전쟁 중 안전지대로의 이동권’을 제한한 행위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 또 탈출하는 민간인을 향해 총을 쐈다는 증언이나 10대 초반 소년까지도 징집하여 싸울 것을 강요했다는 증언으로 볼 때 궁지에 몰린 타밀 타이거의 과잉 대응도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민간인 방패론 비판이 거세지자 스리랑카 정부는 “인도주의적인 인질 구출 작전”이라는 희한한 명의로 교회, 학교는 물론 병원까지도 되풀이 폭격하는 대량 학살 전쟁을 포장하기에 이르렀다. 국제 사회는 또 여러 차례 휴전을 호소하는 타밀 타이거와 달리 “며칠 안에” (타이거를) 끝장낼 수 있다며 콧방귀를 뀌던 정부군을 두고 “양측은 인도주의적 휴전에 동의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정도면 너무 불공정한 ‘균형 비판’ 아닌가.

동부 피난민 캠프. 동부는 2007년 소위 ‘타이거로부터 해방’이 선언되었지만, 3년전 격렬했던 전투에 쫓겨 고향 트링코 말리를 떠난 난민들은 여전히 바띠깔로아 난민캠프에서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아무튼 5월 18일 타밀 타이거의 전설적인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쟁은 일단 종지부를 찍은 듯하다. 그러나 이 종전 선언 이후에도 2만5천에서 3만명의 민간인들이 폐허와 불발탄과 ‘청소’하러 밀고 들어올 정부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와니 전투현장에 여전히 남아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그 누구도 무슨 수도 쓰지 못한 채 침묵이 흘렀다. 국제 적십자사 정도가 “우리 현지인 직원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며 접근 허용을 요청했으나 “그런 사람 없다”는 말로 일축한 스리랑카 정부는 전후에도 현장 접근을 철저히 봉쇄했다. 일부에서는 쌓이고 쌓인 시체를 처리하여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올 정도다. 취재진도 구호단체도 그 어떤 목격자의 접근도 철저히 봉쇄한 채 치뤄낸 인종 학살, 그건 대 테러 전이 승리한 사례로 꼽혔다.
참상의 목격자는 많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이번 전쟁에서 목격자가 전혀 없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전개될 전범 재판 논란에 큰 변수가 될 것이다. 목격자는 크게 세 부류다.
첫째, 계속되는 폭격에 지긋지긋한 벙커 세월을 견디다 피난민 캠프로 옮겨온 25만에서 30만에 이르는 민간인 모두가 전부 목격자들이다. 둘째, 언론이 취재하지 못한 참상을 찍어 세상 밖으로 알려낸 익명의 ‘시민기자들’. 그들 중 상당수는 운명을 달리했겠지만 그들이 찍은 비디오, 사진은 바깥으로 전해져 보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함락 직전까지 환자들을 돌보다 종전선언 이틀 전 전투 지역을 탈출한 서너명의 의사들이 있다. 외신과 간헐적 인터뷰로 처참한 현장을 알려내고, 폭격의 주체가 스리랑카 정부군임을 알려낸 의사 세 명은 현재 범죄 수사국(CID)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범죄 수사국은 스리랑카의 악명 높은 ‘화이트 밴’ (White Van) 납치단의 핵심 그룹으로 추정되는 조직이다. 유엔과 인권단체들을 이 의사들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영웅적’이라고 부른 반면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 타이거에 의해 조종당한 의사들이 잘못된 정보를 발설했다며 ‘타이거와의 협작 혐의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승전이데올로기와 전쟁마쵸이즘이 넘쳐나는 스리랑카에서는 민간인 피해를 보도하거나 입에 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국노’로 찍혀 어떤 위협에 노출될 지 알 수 없을 만치 폭력의 기운이 드높다. 하여, 난민 청년 타밀이 내게 이렇게 묻고 ‘모범답’을 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신이 스리랑카 전쟁의 진실을 보도하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뭐지?”
“코리아 LTTE”
최근 전쟁 동안 스리랑카 정부는 단 한 번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보나 성명, 기사를 인정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놓는 수치는 언제나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한 예로 전투 지역에 갇힌 민간인 수치를 정부군은 여러달 전부터 7만이라고 했고 타밀 단체는 35만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지역을 빠져나와 정부가 운영하는 피난민 캠프에 갇힌 이들만 25만에서 30만이나 된다. 어느쪽 수치가 보다 사실적에 가까웠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스리랑카 전역 어느 곳 보다도 보안군이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는 동부 트링코 말리에서 스리랑카 해군이 경계를 서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5월 초께 알자지라 영어방송이 전투 현장에 있는 한 가톨릭 사제-이 사제들 역시 전투 현장에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한 그룹으로 간주되고 있다-를 연결했을 때 전화선을 타고 나온 절규를 한 번 떠올려 보자.
“제발 도와달라. 지금 이곳에는 30여만명이 식량과 의약품 없이 쉴틈없는 폭격에 고통받고 있다. 우리 말을 못 믿겠으면 와선 보란 말이다. 언론들, 구호단체들 왜 아무도 오지 않는가. 아주 가끔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국제적십자사 선이 오는 것 말고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 고립무원속에서 절규하던 이 사제의 생사여부도 알 길이 없다. 여기 ‘아직도’ 사람이 있다 수치 논란은 종전선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5월 말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지와 영국 더 타임즈지가 비공식 유엔 자료를 입수해 폭로한 바에 따르면, 5월 초부터 종전 선언일인 5월 17 혹은 18일까지의 사망수치는 약 2만명이나 된다. 4월 말 누출된 유엔의 비공식 자료가 1월이래 4월말까지 추산한 민간인 사망수치는 이미 7천명이었다. 5월 들어 막바지 공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한 눈에 드러나는 수치들이다. 물론 스리랑카 정부는 이런 통계를 완강 부인하고 있고 있다. 사망자 수치는 무조건 부인해야 한다. 이번 전쟁의 사실상 최대 수장인 국방부 서기 고타바야 라자팍세에 따르면 단 한 명의 민간인도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고, 군 대변인 우다야 나나야카라에 따르면 4월 27일 이래 중화학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또 그렇다. “우리 최고 지도자(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가 사망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투) 현장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전해 지지 않아 5-6일간 혼란스러웠는데…그런데 지금은…”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난민청년 타밀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우리 지도자는 죽지 않았다. 때가 되면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를 규합해 저항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 모두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타밀은 ‘때’가 되면 이젠 자신도 기꺼이 싸우겠노라 적개심을 불태웠다. 타밀을 만났던 허름한 방안에 둘러앉은 또 다른 타밀 청년 대여섯명도 모두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무잡잡한 얼굴 속에 깊게 패인 예의 그 큰 눈빛들이 번득였다. “그동안 스리랑카 정부와 정부군이 우리의 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치르고도 승전에 취해 콜롬보 거리에서 춤을 추는 싱할라족들을 보며 이젠 저들도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춤사위에 청년 타밀이 가슴 속 분노의 씨앗을 키워내며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콜롬보는 그저 승전보에 만취해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
이유경 저널리스트 penseur21@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