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그들 말을 듣지 않으면 날 죽일지 몰라”
울먹이는 락슈만 (가명, 20대 중반), 온 몸에 고문 흔적이 남아있지만 그나마 이례적인 행운아다. 납치 후 실종 혹은 사망으로 이어진 다른 이들과 달리 락슈만의 납치범들은 그에게 한 번 더 살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며칠 안에 콜롬보 (수도)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마지막 경고를 받았다.

‘타밀엘람! 뿌리 깊은 차별이 부른 저항.’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중심가 대로변에 설치된 간이 검문소. 콜롬보 체류 허가증을 소지하지 않은 타밀인들은 검문에 걸리면 붙잡혀 한동안 구금되기 일쑤다.(Photo by Lee Yu Kyung)
콜롬보를 떠나라
략슈만은 2005년 북부 자프나 반도를 떠나 콜롬보로 이주 해 온 타밀 청년이다. 그의 친구들이 하나 둘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걸 보면서 공포에 떨던 그는 고향을 떠나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콜롬보로 왔다. 그리고 작은 가게 점원으로 일해왔다. 민병대를 두고 있는 타밀 정당이 운영하는 사업체 중 하나다. 그러나 2008년 4월 이래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가게문이 늦도록 열리지 않아 이상했는데 경찰이 근처 가게 점원들을 구속하러 와서는 나까지 데려갔다. 두달 동안 아무런 혐의없이 구치소에서 갇혀 있다 풀려났다” 심한 고문을 감내한 두달 후 석방, “너는 우리 손아귀에 있다. 지켜보겠다” 는 경찰의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몇 달 후 편지도 한 통 받았다.
“자프나 출신이 왜 여기(콜롬보) 있나? 당장 이곳에서 떠나지 않으면 벌을 가하겠다”
편지에는 ‘배신자 제거 담당’ 이라는 희한한 명의와 함께 사자 (다수족 싱할라 상징) 얼굴 안에 호랑이(소수족 타밀 상징)가 들어있는 알듯 말듯한 로고도 있었다. 그리고 상단에는 ‘번호 00’가 적혀 있어 적어도 수십 명 단위가 ‘배신자’ 명단에 있음을 암시해주었다. 편지에 본보기로 적힌 또 다른 ‘배신자’ (납치 대상) 5명의 명단은 모두 바띠깔로아, 트링코 말리 (이하 동부) 아니면 북부 자프나 반도 등 타밀 지역 출신들이다. 이 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략슈만은 그러나 2008년 말 “콜롬보를 떠나라”는 두번째 경고장을 받은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데드라인까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영부영 데드라인을 석 달 넘긴 2월 말 어느 날이었다.
“9시경 저녁 먹으러 밖으로 집밖을 나왔는데 거기 섰던 특전사 (STF) 군인들이 나를 부르기에 다가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내 입과 눈을 틀어막고 나를 차안으로 집어 넣고는 달렸다”
약 6시간의 공포여행 후 다른 차량으로 이송, 다시 5-6시간의 여행 후 이번에는 타밀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룹으로 넘겨졌다. 타밀 민병대가 거의 분명했다. 스리랑카의 두 종족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은 서로의 언어를 잘 말하지 못하는데다 말한다 해도 자기 모국어의 억양을 갖고 있다. 83 년 내전 반발을 본격화했던 대 타밀 인종폭동 당시 싱할라 폭도들이 타밀인을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도 바로 이 ‘악센트’였다. 83 폭동을 목격한 콜롬보 거주 한 외국인에 따르면 ‘타밀 악센트로 싱할라어 말하는’ 이들은 폭력과 방화의 대상이 되었다.
“목걸이 등 갖고 있는 물건들을 다 주며 한 번 만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상관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하더라”
우여곡절끝에 한 번 더 살 기회를 얻은 락슈만을 납치범들은 콜롬보 외곽에 던져놓고 사라졌다. 물론 “며칠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락슈만은 스무시간도 넘는 그 ‘납치 여행’ 동안 그를 태운 화이트 밴 (‘화이트 밴’은 스리랑카 납치의 대명사처럼 통용된다)이 단 한 번도 검문소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안군, 경찰, 그리고 타밀 민병대의 공동 작전으로 강력추정되는 이 “화이트 밴 납치” 차량은 검문소가 만연한 콜롬보와 스리랑카 전역 (특히 동북부)에서 일단 멈춤 없이 유일하게 이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특권층이다.
“이건 타밀 족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체계적인 납치야. 보다시피 검문소가 넘쳐난다. 하지만 ‘화이트 밴’이 검문소에서 멈췄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납치범이 그 검문소에서 잡혔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도 없다. 납치범과 정권 간의 협조관계를 이해하겠나?”
무소속 타밀 의원인 마노 가네샨은 거침없이 말했다. 다양한 조직으로부터 협박전화를 받고 있는 그는 “(협박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무시하고 산다” 며 웃었다. 2006년 ‘납치 모니터 위원회’를 함께 발족시켰던 가네샨의 친구이자 북부 자프나에서 당선된 타밀의원 나다라자 라비라쥬는 위원회가 발족한 지 두달 만에 암살당했다.
납치 차량만이 누리는 자유

콜롬보에서 10년째 살고 있다는 타밀족 여성 슈린(가명·왼쪽)의 남편은 2007년 1월 ‘흰색 밴’을 탄 사내들에게 납치된 뒤 이제껏 소식이 없다고 했다. 타밀족 출신인 마노 가네샨 의원은 ‘납치감시위원회’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Photo by Lee Yu Kyung)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05년 부터 2007년까지 스리랑카에서 실종된 인구를 대략 1천 5백명으로 보고있다. 2006년 한 해만 천 명이 실종되었다. 2008년에는 8월 한 달 동안 와우니아 (남부와 북부의 경계 타운)에서만 43명이 실종되었다. 가네샨의 모니터팀이 보는 수치는 이보다 높다. 2005년 라자팍세 대통령이 취임을 전후하여 최근까지 콜롬보에서만 약 4백명이, 동북부에서는 그 열배에 달하는 4천명이 실종되었다. 희생자 절대다수는 타밀인들, 극소수의 무슬림도 포함되어 있다. 납치 사례를 수집해 온 마노 가네샨의 분석은 이렇다.
“2002년 휴전협정에 따라 타밀 타이거는 동북부 내 정부군 통제 지역에 정치국 사무소를 열어 다양한 정치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무장 게릴라 조직을 민주적 정당 조직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당시 정부와 국제사회가 지지하고 부추겼다. 이 프로그램에 한 번이라도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있다. 당시 남아 있는 비디오, 오디오 자료들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납치 후 풀려난 락슈만 역시 이런 프로그램에 ‘강제로’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02년 하반기 그는 50명의 타밀인들과 함께 자프나에서 와니지방 (타밀 타이거 본부가 있는)으로 이동하던 중 스리랑카 군 검문소에서 막혔다. 그리고 군의 비디오 카메라에 다양하게 찍혔고 실랑이 끝에 결국 통과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폭력 사태가 잇따르고, 휴전협정이 휴짓조각이 되면서 타밀 타이거의 정치국 사무소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타이거는 사라졌지만 그들 프로그램에 참여한 타밀 민간인들은 여전히 그 구역에 남겨져 정체 불명의 폭력 사태에 노출되고 있다. 락슈만처럼 일부는 안전을 찾아, 혹은 해외이주취업을 희망하며 콜롬보로 오지만 콜롬보도 예외없다. 안전도, 희망도 인간들과 함께 모두 실종되고 있다.
또 다른 타밀 청년 삼판딴 (가명 20대)의 경우를 보자. 3개월 말레이시아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그는 말레이시아 재취업을 희망하며 콜롬보로 왔지만 지금은 실종된 지 1년이 넘었다. 2008년 초 콜롬보 중심가 페따 구역 검문소에서,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위해 (콜롬보에) 체류하는 중”이라고 답한 그는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이유로 연행되었다. 가족들이 여권을 포함한 온갖 문서들을 제출한 석달 후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여권을 돌려주지 않았다.
“형은 여권을 돌려 달라며 경찰서를 두번 찾아갔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새 여권을 신청하고 페따 구역 카티레산 거리를 걷던 중 화이트 밴을 타고 범죄 수사국(CID) 팀이라고 소개한 세 명에 끌려간 후 소식이 없다. 2008년 5월 10일 저녁 6시경 나와 전화 통화한 후 몇 분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헤 (가명, 20대 초반)는 거리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헤는 형이 여전히 범죄 수사국에 의해 갇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납치된 다음 날 형의 임시 거처로 찾아와 모든 자료들을 챙겨간 이들도 범죄 수사국에서 왔노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형의 신분을 증명 할 자료가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이헤에게 범죄 수사국을 찾아간 적이 있는지 묻자 정색을 했다.
“나는 타밀 청년이잖아. 어떻게 내가 거길 갈 수 있어!”
콜롬보에 사는 타밀인들 (특히 타밀 타이거 대원이나 그 지지자로 오해받기 쉬운 젊은층의 고충은 더하다) 은 잠재적 범죄자 혹은 ‘테러리스트’로 간주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십년을 산 이들이나 단기 방문하는 이들이나 예외없이 경찰에 그들이 콜롬보에 있음을 개인 신상 기록과 함께 신고해야 한다. 은행잔고까지 보고해야 하는 이 과정을 거쳐 받게 되는 종이 한장은 또 다른 신분증이다. 인권단체들은 이 종이가 납치범의 손에 쉽게 넘어가 타밀 사업가들의 ‘몸값’을 노리는 타밀 민병대 납치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검문소에서 혹은 집안 수색에 들이닥친 보안군에게 이 종이를 보이지 못할 경우에도 여지 없이 잡혀간다. 이 종이에는 이런 질문들이 적혀 있다.
‘콜롬보에 거주하는 이유는?’, ‘콜롬보에 거주하고자 하는 기간은?’ …
“우리를 이 나라의 동등한 국민으로 본다면 이방인 다루듯 하는 이런 질문을 어떻게 던질 수 있나? 그래서 우리가 타밀 일람 (타밀 모국) 을 목놓아 외치는 것 아닌가!”
티샤(37)의 항변이다. 그는 90년대 초 스리랑카 군이 그가 살던 민간 거주 지역을 군 캠프화하면서 콜롬보로 이주한 피난민이다. 그 이 후 20년 가까이 콜롬보에 살고 있다.
정치적, 인종적 불평등이 야기한 내전은 이렇게 군사작전을 한편으로, 납치와 실종 작전을 또 다른 한편으로 잔인하게 진행 중이다.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는 노력은 어디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택수색한다며 보안군이 들이닥칠 때마다 (주로 이른 아침) 나는 어린 딸 셋과 함께 공포에 떨어야 해. 내 남편은 2007년 1월 범죄수사국(CID) 직원에 의해 화이트 밴 납치를 당했거든. 군인들이 말하는 싱할라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아빠의 얼굴을 모르는 한 살 반짜리 막내에게 젖을 물리고 울먹이는 타밀 여인 슈린 (가명, 31)의 모습은 스리랑카 내전의 잔인한 상징이다.
콜롬보(스리랑카) = 이유경 국제분쟁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관련 기사 :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9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