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녀가 내민 영수증

마흐무다바드 아바드(Mahmoodabad Abad / 테헤란 외곽) = 이유경 

지난 4월 23일 이란 정부는 자국 내 거주 아프간 난민 중 약 5만에서 7만 명가량을 강제 추방했다. 아프간 외무부장관이 이란을 방문하여 ‘난민추방을 좀 미뤄 달라’고 요청한 지 일주일만의 일이라 아프간 정부로서도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여파는 컸다. 외무부 장관 스판타 박사(Dr. Rangeen Dadfar Spanta)는 ‘무능 죄’로 탄핵에 부쳐졌고 이 엄청난 수치의 난민들이 쏟아져 나온 아프간 서부 헤랏 지방은 갈 곳 없고 할 일없는 남정네들로 더 더욱 북적대고 있다. 이중 일부는 다시 ‘일자리 없는’ 수도 카불로 ‘일자리 찾아’ 나서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미 40~50%에 육박하는 아프간의 심각한 실업률이 더욱 치솟을 거라는 불 보듯 뻔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렇게 추방된 난민 일부는 약 300달러가 넘는 거액을 빚지고 브로커를 통해 다시 밀입국하고 있다. 다시 쫓겨나지만 또 다시! 제2, 제3의 밀입국을시도하고 있다.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도 다시 오는 그들의 항변은 이랬다. “우리 가족들이 여기 있으니 내가 와야지”
그렇다. 이 강제 추방이 토해낸 가장 비인도적 장면중 하나가 바로 순식간에 발생한 셀 수 없는 수의 이산가족들이다. 단속에 걸려들어 쫓겨나는 건 대부분 남성 가장들이고, 남겨진 건 줄줄이 달린 아이들과 함께 대책 없이 홀로 된 아내에서부터 앳되고 고운 얼굴의 소녀 같은 아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생계 대책이 없는 여인들이었다.

 

테헤란 외곽 마흐무드 아바드 지역 아프간 난민 어린이들은 이란 당국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사복’을 입고 비밀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부분 4~5 km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통학한다. (Photo by Lee Yu Kyung)

테헤란 외곽 마흐무드 아바드 지역 아프간 난민 어린이들은 이란 당국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사복’을 입고 비밀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부분 4~5 km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통학한다. (Photo by Lee Yu Kyung)

강제 추방이 낳은 이산가족을 찾아

6월 초, 자꾸만 뒤로 넘어가는 스카프가 머리와 목을 잘 감싸고 있는지 끝없이 다독거려가며 나는 테헤란 남부외곽 지역인 마흐무드 아바드로 향했다. 아프간 난민들이 대거 체류하고 있는 이 지역은 깨끗하고 번잡하고 부티도 제법 흐르는 수도 테헤란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심심하면 풀풀 날리는 먼지, 황량한 황토 빛 대 벌판, 수십 미터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연기를 뿜어내는 벽돌 공장의 굴뚝. 모두 난민촌의 상징적 그림들이다. 50~60도는 족히 넘을 듯한 뜨거운 공장 안에서 벽돌을 굽고 있는 노동자들은 모두 아프간 난민들이다. 파키스탄 난민촌과 마찬가지로 이란 땅에서도 벽돌공장은 아프간 난민들의 주요 밥줄이다. 달리 말하면 양국의 ‘벽돌산업’은 아프간 난민들의 손에 달려있는 셈이다. 최근 이란 당국의 갑작스런 추방에 노동력이 대거 빠지면서 벽돌 값도 치솟았다며 한 노동자가 입을 열었다.

그 공장을 지나, 다시 황량한 벌판을 지나, 외롭게 서 있는 한 ‘반 지하’ 돌담 집으로 들어섰다.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소녀와 중년 여인이 따뜻한 몸짓으로 취재진을 맞아주었다. 열 일곱 살 소녀 자흐라 레자이는 이래 뵈도 11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는 어엿한 엄마다. 그녀는 한 달 전 남편과 생이별 한 뒤 아이와 단 둘이 지내왔다. 그러다 최근 어린 조카와 조카손녀가 걱정되어 이웃 마을에서 건너온 숙모까지 가세하여 3대, 세 식구, 세 ‘여성’이 함께 지내고 있다.

“그날 난 남편이 단속에 걸리지 말라고 기원하기 위해 특별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어. 우리 남편 두 번이나 잡혀서 보호감호소에 갇혀있었거든”

하필 특별저녁까지 준비한 그날 남편은 담배 사러 갔다 오는 길에 단속 보안대에 또 다시 잡히고 말았다. 요리를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근처 친척 집에 아이를 맡기러 갔던 그녀는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이 잡히는 걸 보았다.
그날 이후 3일 동안 자흐라는 아픈 아기를 안고 남편이 유치된 보호소를 들락거렸다. ‘약간의 돈’으로 빼낸 경험이 있어 남편 직장 사장으로부터 한 달 치 급여 십오만 리알(한화 약 1만 6천원)을 받아 챙겨갔지만 이번에는 통하질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소용없는 것 같으니 더 이상 오지 말고 아픈 아기를 잘 돌보라”는 남편의 말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다음 날 남편은 수천만 난민들에 묻혀 이란과 국경을 맞댄 헤랏 지방으로 추방당했다.

벌판에 우뚝 선 벽돌 공장의 굴뚝.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에 위치한 아프간 난민 촌의 상징적 그림이다. 이곳에서 난민들은 이동의 자유마저 제약당한 채 고립과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벌판에 우뚝 선 벽돌 공장의 굴뚝.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에 위치한 아프간 난민 촌의 상징적 그림이다. 이곳에서 난민들은 이동의 자유마저 제약당한 채 고립과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이란과 파키스탄에 흩어진 수백만 아프간난민들은 대부분 벽돌 공장에서 일한다. 50~60도가 족히 넘는 공장 안에서 구운 벽돌을 밖으로 빼내고 있는 아프간 노동자들  (Photo by Lee Yu Kyung)

이란과 파키스탄에 흩어진 수백만 아프간난민들은 대부분 벽돌 공장에서 일한다. 50~60도가 족히 넘는 공장 안에서 구운 벽돌을 밖으로 빼내고 있는 아프간 노동자들 (Photo by Lee Yu Kyung)

여성난민과 소녀들도 벽돌 만들기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여성난민과 소녀들도 벽돌 만들기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그녀는 현재 남편이 있는 아프간에 가기로 단단히 맘을 먹었다. 최근 난민센터를 찾아 이동 허가증도 받았고 그 허가증을 받기 위한 돈도 지불했다며 영수증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듣자 하니 이란 내 아프간 난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가까운 인근 도시로 이동 할 치라도 반드시 난민센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 허가증을 받기 위해 센터와 은행을 왔다 갔다 하며 7달러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어느 나라든 비합법 체류 노동자나 난민들이 단속의 위협에 놓여 있는 건 엇비슷하지만 이렇게 움직임을 철저히 제약하는 사례를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이동허가증은 받아놓았는데 소녀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헤랏에서 전화를 걸어온 남편이 아프간에서 살자며 돈을 좀 모아오라고 한데다 헤랏으로 가는 교통비는 물론 그 동안 쌓인 빚까지 갚고 떠나려면 한화 몇 백만 원은 족히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솔직히 말해 이 순박한 소녀가 빚을 남기고 도망갈 만큼 간이 커 보이지도 않았다. “난 이란 땅이 정말 싫어” 그렇게 말하는 자흐라가 내민 영수증 넉 장은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녀의 간절함을 너무 도드라지게 했지만, 돌아갈 돈도 없으면서 7달러나 주고 이동허가증을 받아놓은 그녀의 모국 행을 위해 나도 그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갈 돈도 없으면서 받아놓은 이동 허가증
또 다른 이산가족 파테메 무하마디(25)는 내가 머리 덮은 스카프를 자꾸만 만지작거리듯 몸 전체를 가린 천을 만지작거리며 자꾸만 얼굴을 가렸다. 눈만 드러내기도 했다가 코와 입을 보이기도 했다가……. 아무튼 그녀는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위한 출구만을 남긴 채 자꾸 가리려 들었다. 낯선 방문객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렵게 털어놓는 여인의 불편함이 배어 나왔다. 그녀 옆에는 그녀와 함께 남겨진 세 명의 아이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파테메의 남편 무하마드 아마디(30) 역시 5월 초 퇴근길에 붙잡혀 다음 날 바로 추방당했다. “무하마드가 오늘 직장에 안 나왔는데 무슨 일 있냐?” 는 사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아내는 전날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 단속이 두려워 직장에서 잠을 잤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리나케 보호소를 달려간 그녀는 먼 발치에서 남편이 송환 차에 오르는 걸 보았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란 땅이 정말 싫은데…… 근데 아프간으로 가도 살 방법이 없어”
그녀 역시 빚을 많이 졌다. 그리고 또 빚을 얻어가며 지난 한 달을 버티고 있다. 어색함과 거리감을 끝없이 건넸던 그녀는 결국 내가 벌린 두 팔에 고맙게도 안겨 주었다. “아빠를 추방한 아저씨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아빠를 너무 좋아했다는 큰 딸을 그렇게 울려 놓고 난 문 밖을 나섰다.
이란 내 아프간 난민 다수는 또 하나의 ‘핸디캡’을 안고 있다. 대부분이 아프간 소수 민족이자 소수 종교자(시아 무슬림)인 하자랏족이다. 몽골리안의 피가 섞인 이들의 얼굴은 한․중․일 동아시아인과 많이 닮았다. 하여, 그들이 어딜 가든 ‘나는 하자랏입니다’ 라고 얼굴에 씌어있다. 내가 이 지역 국경을 넘으며, 또 이란 내에서도 ‘아프간?’ 이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아 던 것도 이란 주변을 떠도는 하자랏 난민들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이 하자랏족의 외모는 ‘콧대 높은’ 이란인들(이란 인들은 정말 콧대가 높다)의 눈이 ‘내려가는’ 대상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언어가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시아 무슬림이라는 동질성으로 이란으로 찾아 들었지만 그 유명한 ‘무슬림 형제애’도 아프간 난민들은 철저히 비켜가고 있다. 게다가 이란 사회에는 난민과 관련한 그 흔한 엔지오 하나 없다. 이처럼 하자랏 난민들은 철저히 고립과 무시와 차별 속에서 이동의 자유마저 제약당한 채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

 

아프간의 소수민족이자 소수종교자인 하자랏 족 여인. 언어와 종교(시아 이슬람)때문에 이란으로 넘어온 하자랏족은 그러나 ‘무슬림 형제애’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의 소수민족이자 소수종교자인 하자랏 족 여인. 언어와 종교(시아 이슬람)때문에 이란으로 넘어온 하자랏족은 그러나 ‘무슬림 형제애’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야밤으로 들어서면서 테헤란으로 돌아갈 길이 급해진 내 앞에 바로 그 하자라 여인무리들이 대거 나타났다.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들이 내 길을 막아선 이유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최근 난민 추방사태로 남편과 생이별을 했는지 나는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란은 왜 난민을 대량추방 했을까?
하루아침에 홀로된 그 여인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아프간을 두고 미국과 이란, 두 전통적 앙숙이 벌이는 ‘전쟁’의 희생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두 침공 전쟁 아프간과 이라크 사이에 끼인 나라 이란. 이란이 부시가 ‘공식 지정한’ 악의 축 중 하나다. 이란이 아프간, 이라크 양국의 반군과 저항세력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설이 전혀 허무맹랑한 논리만도 아닌 것은 이 지역 (중앙아시아와 중동) 내 미군의 장기 주둔과 미 패권주의의 확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이란의 노력 선상에서 그럴듯한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대량 난민추방사태 역시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치솟는 실업률과 국제사회의 재건 실패로 요동치는 아프간의 불안한 시국은 단연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실패를 말해주는 대목인데, 여기에 난민추방으로 쏟아져 들어온 수만 단위 난민들이 그런 실패의 그림을 더더욱 극명하게 잘 그려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예상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월 200달러에서 600달러까지 ‘월급’까지 지급하는 탈레반으로 젊은 실업인구가 흡수되는 구조역시 미국 주도의 전쟁과 재건의 실패를 또한 잘 보여주어 왔다. 전통적 앙숙인 탈레반에게 이란이 무기를 지원했는지 아닌지를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이란은 이미 ‘난민’이라는 그들의 카드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리고 ‘시의 적절하게’ 그 카드를 흔들어 대기도 하고 쏟아내기도 한다.

 

 

11개월 된 아이들 키우고 있는 소녀 같은 엄마 자흐라 레자이는 이제 겨우 17살이다. 5월 초 이란 정부의 강제추방으로 쫓겨난 남편과 결합하기 위해 이동허가증까지 받아놓고 아프간 행을 희망하지만 산더미 같은 빚 때문에 떠나질 못하고 있다. 그녀의 눈가에 옅게 남아 있는 멍은 도대체 누가 한 짓일까? (Photo by Lee Yu Kyung)

11개월 된 아이들 키우고 있는 소녀 같은 엄마 자흐라 레자이는 이제 겨우 17살이다. 5월 초 이란 정부의 강제추방으로 쫓겨난 남편과 결합하기 위해 이동허가증까지 받아놓고 아프간 행을 희망하지만 산더미 같은 빚 때문에 떠나질 못하고 있다. 그녀의 눈가에 옅게 남아 있는 멍은 도대체 누가 한 짓일까? (Photo by Lee Yu Kyung)

끝이 안 보이는 미국 주도의 대 테러 전쟁과 이란의 지정학적 응수는 난민이라는 인도주의적 고려대상을 두고 이렇게 게임을 벌여왔다. 17세 소녀엄마 자흐레가 내밀었던 영수증 넉 장도 이 게임 광들이 쏟아내는 카드 속에 묻힐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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