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무다바드 아바드(Mahmoodabad Abad / 테헤란 외곽) = 이유경
그렇다. 이 강제 추방이 토해낸 가장 비인도적 장면중 하나가 바로 순식간에 발생한 셀 수 없는 수의 이산가족들이다. 단속에 걸려들어 쫓겨나는 건 대부분 남성 가장들이고, 남겨진 건 줄줄이 달린 아이들과 함께 대책 없이 홀로 된 아내에서부터 앳되고 고운 얼굴의 소녀 같은 아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생계 대책이 없는 여인들이었다.

테헤란 외곽 마흐무드 아바드 지역 아프간 난민 어린이들은 이란 당국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사복’을 입고 비밀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부분 4~5 km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통학한다. (Photo by Lee Yu Kyung)
강제 추방이 낳은 이산가족을 찾아
그 공장을 지나, 다시 황량한 벌판을 지나, 외롭게 서 있는 한 ‘반 지하’ 돌담 집으로 들어섰다.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소녀와 중년 여인이 따뜻한 몸짓으로 취재진을 맞아주었다. 열 일곱 살 소녀 자흐라 레자이는 이래 뵈도 11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는 어엿한 엄마다. 그녀는 한 달 전 남편과 생이별 한 뒤 아이와 단 둘이 지내왔다. 그러다 최근 어린 조카와 조카손녀가 걱정되어 이웃 마을에서 건너온 숙모까지 가세하여 3대, 세 식구, 세 ‘여성’이 함께 지내고 있다.
“그날 난 남편이 단속에 걸리지 말라고 기원하기 위해 특별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어. 우리 남편 두 번이나 잡혀서 보호감호소에 갇혀있었거든”
하필 특별저녁까지 준비한 그날 남편은 담배 사러 갔다 오는 길에 단속 보안대에 또 다시 잡히고 말았다. 요리를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근처 친척 집에 아이를 맡기러 갔던 그녀는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이 잡히는 걸 보았다.
그날 이후 3일 동안 자흐라는 아픈 아기를 안고 남편이 유치된 보호소를 들락거렸다. ‘약간의 돈’으로 빼낸 경험이 있어 남편 직장 사장으로부터 한 달 치 급여 십오만 리알(한화 약 1만 6천원)을 받아 챙겨갔지만 이번에는 통하질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소용없는 것 같으니 더 이상 오지 말고 아픈 아기를 잘 돌보라”는 남편의 말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다음 날 남편은 수천만 난민들에 묻혀 이란과 국경을 맞댄 헤랏 지방으로 추방당했다.

벌판에 우뚝 선 벽돌 공장의 굴뚝.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에 위치한 아프간 난민 촌의 상징적 그림이다. 이곳에서 난민들은 이동의 자유마저 제약당한 채 고립과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이란과 파키스탄에 흩어진 수백만 아프간난민들은 대부분 벽돌 공장에서 일한다. 50~60도가 족히 넘는 공장 안에서 구운 벽돌을 밖으로 빼내고 있는 아프간 노동자들 (Photo by Lee Yu Kyung)

여성난민과 소녀들도 벽돌 만들기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그녀는 현재 남편이 있는 아프간에 가기로 단단히 맘을 먹었다. 최근 난민센터를 찾아 이동 허가증도 받았고 그 허가증을 받기 위한 돈도 지불했다며 영수증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듣자 하니 이란 내 아프간 난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전혀 없었다. 가까운 인근 도시로 이동 할 치라도 반드시 난민센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 허가증을 받기 위해 센터와 은행을 왔다 갔다 하며 7달러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어느 나라든 비합법 체류 노동자나 난민들이 단속의 위협에 놓여 있는 건 엇비슷하지만 이렇게 움직임을 철저히 제약하는 사례를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이동허가증은 받아놓았는데 소녀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헤랏에서 전화를 걸어온 남편이 아프간에서 살자며 돈을 좀 모아오라고 한데다 헤랏으로 가는 교통비는 물론 그 동안 쌓인 빚까지 갚고 떠나려면 한화 몇 백만 원은 족히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솔직히 말해 이 순박한 소녀가 빚을 남기고 도망갈 만큼 간이 커 보이지도 않았다. “난 이란 땅이 정말 싫어” 그렇게 말하는 자흐라가 내민 영수증 넉 장은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녀의 간절함을 너무 도드라지게 했지만, 돌아갈 돈도 없으면서 7달러나 주고 이동허가증을 받아놓은 그녀의 모국 행을 위해 나도 그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파테메의 남편 무하마드 아마디(30) 역시 5월 초 퇴근길에 붙잡혀 다음 날 바로 추방당했다. “무하마드가 오늘 직장에 안 나왔는데 무슨 일 있냐?” 는 사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아내는 전날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 단속이 두려워 직장에서 잠을 잤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리나케 보호소를 달려간 그녀는 먼 발치에서 남편이 송환 차에 오르는 걸 보았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란 땅이 정말 싫은데…… 근데 아프간으로 가도 살 방법이 없어”
그녀 역시 빚을 많이 졌다. 그리고 또 빚을 얻어가며 지난 한 달을 버티고 있다. 어색함과 거리감을 끝없이 건넸던 그녀는 결국 내가 벌린 두 팔에 고맙게도 안겨 주었다. “아빠를 추방한 아저씨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아빠를 너무 좋아했다는 큰 딸을 그렇게 울려 놓고 난 문 밖을 나섰다.
숨길 수 없는 이 하자랏족의 외모는 ‘콧대 높은’ 이란인들(이란 인들은 정말 콧대가 높다)의 눈이 ‘내려가는’ 대상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언어가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시아 무슬림이라는 동질성으로 이란으로 찾아 들었지만 그 유명한 ‘무슬림 형제애’도 아프간 난민들은 철저히 비켜가고 있다. 게다가 이란 사회에는 난민과 관련한 그 흔한 엔지오 하나 없다. 이처럼 하자랏 난민들은 철저히 고립과 무시와 차별 속에서 이동의 자유마저 제약당한 채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다.

아프간의 소수민족이자 소수종교자인 하자랏 족 여인. 언어와 종교(시아 이슬람)때문에 이란으로 넘어온 하자랏족은 그러나 ‘무슬림 형제애’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야밤으로 들어서면서 테헤란으로 돌아갈 길이 급해진 내 앞에 바로 그 하자라 여인무리들이 대거 나타났다.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들이 내 길을 막아선 이유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최근 난민 추방사태로 남편과 생이별을 했는지 나는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최근의 대량 난민추방사태 역시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치솟는 실업률과 국제사회의 재건 실패로 요동치는 아프간의 불안한 시국은 단연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실패를 말해주는 대목인데, 여기에 난민추방으로 쏟아져 들어온 수만 단위 난민들이 그런 실패의 그림을 더더욱 극명하게 잘 그려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예상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월 200달러에서 600달러까지 ‘월급’까지 지급하는 탈레반으로 젊은 실업인구가 흡수되는 구조역시 미국 주도의 전쟁과 재건의 실패를 또한 잘 보여주어 왔다. 전통적 앙숙인 탈레반에게 이란이 무기를 지원했는지 아닌지를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더라도 이란은 이미 ‘난민’이라는 그들의 카드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리고 ‘시의 적절하게’ 그 카드를 흔들어 대기도 하고 쏟아내기도 한다.

11개월 된 아이들 키우고 있는 소녀 같은 엄마 자흐라 레자이는 이제 겨우 17살이다. 5월 초 이란 정부의 강제추방으로 쫓겨난 남편과 결합하기 위해 이동허가증까지 받아놓고 아프간 행을 희망하지만 산더미 같은 빚 때문에 떠나질 못하고 있다. 그녀의 눈가에 옅게 남아 있는 멍은 도대체 누가 한 짓일까? (Photo by Lee Yu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