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하르(아프간 남부) = 이유경 / Penseur21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벌렁거리고 속도 안 좋고 환상도 보이고, 숨쉬기가 어렵고 늘 목이 말라”
60세 여인 마굴라는 멀쩡한 데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마치 의사 대하듯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부르카를 들쳐 보이며 엄청나게 불러있는 배를 내밀었다.
“한 번 봐봐, 뭐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아”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것도 여성이 ‘살’을 보인다는 건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지만 20년 동안 과부로 살아왔다는 그녀는 스스럼이 없었다. 동행했던 아프간 동료(남) 파트말이 ‘갑자기’ 2미터쯤 떨어져나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심하게 불러 있는 배는 심상치 않은 문제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온 스무살 딸도 오빠한테 맞았다며 손가락 몇 개를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녀가 병원을 찾았다는데, 내가 보기엔 어머니가 더 심각해 보였다. 마침 한국 엔지오가 운영하는 병원이라 여인은 내게 자꾸 ‘압력’을 넣었다.
“저기 의사한테 말 좀 잘해봐. 나 좀 잘 봐달라고 말야”
의사 앞에서 그냥 울어버리는 여인들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시 힐라 병원에서 만난 여성 환자들은 마굴라처럼 대체로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다. 특정 부위의 이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그냥 전부 아픈 증상이었다.
“두통에다 기운 없고 잠 못 자고, 온몸이 쑤시고 그러니까 증세는 신경성, 우울증, 불면증, 스트레스…”
한 의사가 여 환자들의 보편적인 증상을 그렇게 설명했다.
“여성들에게 정신적 질환이 더 많다. 앉아서 그냥 우는 경우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얼마나 울고 싶었으면 난데없이 ‘외국인’ ‘남자’ 의사 앞에서 그냥 울어버렸을까. 그나마 외간남자인 의사와 대화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 남편들이 아픈 아내와 동행하는 경우에는 의사와 제대로 된 상담도 못하고, 또 여인들은 울지도 못한다. 그래도 남편이 허락하지 않아 병원을 찾지 못하고 병을 키우는 이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결혼을 앞둔 10대 중 후반 여성들의 증상도 엇비슷하다. “두통, 가슴 답답, 밥맛 없음”
아프간독립인권위에 따르면 아프간에서 이루어지는 결혼 80%가 강제결혼이고 신부의 약 60%가 16세 미만이다. 결혼을 앞둔 10대 예비신부들이 ‘허니문’이 아니라 ‘지옥문’으로의 여정을 앞둔 심정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앓아, 병원을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슬람 샤리아 율법을 강제로 적용시켜왔던 탈레반은 그들이 통치하던 시절(1996~2001) 여성교육을 금지하거나 종교 교육에 국한해왔다. 이런 탈레반의 극단적 조치들은 사실상, 아프간 전 인구의 50%를 넘는 파슈툰 족 사회의 ‘보편적인’ 전통에 기반한 것이다. 사진은 칸다하르의 자루구나 여학교 수업장면. (Photo by Lee Yu Kyung)
최근 칸다하르 지방 옆 동네인 헬만드 지방에서는 25세 한 여성이 6살 꼬마신랑을 키우는 기막힌 사연이 보도된 적이 있다. 꼬마신랑은 사별한 전 남편의 어린 동생이었다. 여인은 그 ‘신랑’을 3살 때부터 씻기고 먹이고 키워왔다. 봉건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프간 시골에서 결혼한 여성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온 재산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시댁이 계속 ‘소유’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남편이 죽고 나면 그 동생이나 형과 재혼하여 시집이 여성을 계속 ‘소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집안 간 빚잔치를 딸내미 하나 파는 걸로 씻어버리는 경우도 심심찮다. 9살 어린이가 60살 넘은 할아버지와 강제 결혼하는 것도 실은 결혼이 아니라 빚잔치인 셈이다. 이렇게 ‘팔려 온’ 여성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도 많이 하기 때문에 병원에는 여성 통증 환자도 많았다.
사실 이런 현상은 굳이 ‘국가’ 아프가니스탄에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동남부 그리고 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 서남부의 발로치스탄과 파타(FATA) 지역에 퍼져 사는 파슈툰족 사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내려오는 악습 같은 부족의 전통이다.
탈레반의 본고장인 칸다하르 역시 이 파슈툰 족이 살고 있는 지방이다.
“우리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은 일을 하지 않는다”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 여성들은 몸 전체를 가린다”
소위 의식이 조금은 깨어있을 법한 기자들도 이런 소리를 당연한 듯 해댔다. 탈레반이 여성들을 집안에 가두고 여성 교육을 금지하고 부르카를 뒤집어씌우고 친척이 아닌 남성과 동행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던 건 바로 이런 파슈툰 사회의 보수적 관습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게 남의 눈에는 극단적 조치로 보일지 몰라도 탈레반과 파슈툰 사회에서는 특별히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여학교 금지를 제외하면 그랬다. 아무튼, 칸다하르 시내에서조차도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일주일 체류하는 동안 나는 부르카를 두르지 않은 여성은 유목민으로 불리는 쿠치족 단 한 명을 보았을 뿐이다.

탈레반 시절 여성의 공개처형 장면. (사진 출처 : 아프간 여성혁명위원회 / 필자 재 촬영) Source : RAWA photo / Retaken by Lee Yu Kyung

탈레반의 본고장 칸다하르 거리에는 여성들을 좀처럼 볼 수 없다 (Photo by Lee Yu Kyung)

Photo by Lee Yu Kyung
이슬람 근본주의, 제국주의가 키웠다
79년 12월 24일.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아프간 전역에서는 무자히딘 전사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이미 78년 4월 27일,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친소 공산주의 계열의 아프간인민민주당(PDPA)이 ‘아프간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강력한 토지개혁과 여성권리신장 그리고 세속주의(Secularism) 등을 밀어붙이자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아프간 농촌 전역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이어져온 터였다. 도심의 이슬람 학자들과 카불 대학생들이 그 리더십 전면에 나섰다. 지지기반을 잃어가는 친소 정부를 ‘지원’도 할 겸 소련이 탱크를 들이밀었고 반정부 세력들이 결집한 무자히딘 정파들이 곳곳에서 결집해갔다. 그리고 약 10년간 전쟁이 이어졌다.
무자히딘의 저항이 일정하게는 ‘반외세 민족주의적’ 토대를 딛고 대소항쟁을 벌여온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대소항쟁이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강력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타올랐다는 점이다. 이 근본주의에 자양분을 듬뿍 제공하며 대소항쟁 전선을 냉전의 장으로 만든 게 다름 아닌 미국과 파키스탄이다. 게다가 미국과 파키스탄은 특히 더 근본주의적인 정파일수록 더더욱 많은 달러를 들이부었다. 악명 높은 군벌이자 훗날 90년대 내전에서 카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인물 헤크메티아르의 히즈비 이슬라미(Hizb-i-Islami)가 그 대표적 ‘고객’이었다.
아프간의 지리정치학적 요충성과 중앙아시아의 붉은 기운을 막으려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 지역적으로 형님 노릇을 하려는 파키스탄의 야망,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기름까지 가세하면서 그야말로 아프간은 붉게 물들어갔다. 8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사실상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 여기까지가 일단 ‘공식적’ 역사이다.

칸다하르 시 외곽 한 잔디밭에서 무슬림 남성이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루 다섯 번 기도를 드리며 쿠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이런 모습은 아프간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쿠란의 또 다른 가르침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큰 아프간 부족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고 매매하는 부족 관습이 ‘이슬람’과 ‘전통’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 근본주의를 키워 온 게 바로 80년대 ‘반공’ ‘반소’ 전선에 돈과 무기를 퍼부었던 미 제국주의다.(Photo by Lee Yu Kyung)
“우리는 이제 소련에게 ‘그들의 베트남 전쟁’을 부여했다” (프리덤 넥스타임 274쪽)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졌던 것처럼 소련이 이제 아프간의 늪에 빠지게 됨을 ‘통쾌’해하는 보고였다. 그리고 미국은 아프간의 순박한 무슬림 형제들을 종교적 프로파간다를 활용하여 전선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우리 ‘믿는 사람들’(believer:이슬람의 신이든 기독교의 신이든)이 힘을 합쳐 … 이단자(infidel : 공산무신론자) 들을 무찌르자”
이 기간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수천 개의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들이 성황을 이뤘다. 미 중앙 정보국이(CIA) 쏟아 붓고 파키스탄의 악명 높은 정보국 ISI(Inter Service Intelligence)가 실어 나르는 수억 달러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마드라사가 당시에는 무자히딘 전사들의 병영 모집센터였다. 지금은 ‘테러리스트’ 모집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때는 미국의 동지였고 지금은 적이 되었기에.
아무튼 ‘CIA 달러’로 만들어진 이 마드라사의 교재에도 종교 근본주의는 듬뿍 담겨 있었다고 아프간을 20년 넘게 취재해온 AP 기자 캐시 개논은 증언한 바 있다. 영어 알파벳 ‘I’를 설명하는 보기 단어가 “Infidel”(이단자)였다는 것은 그 좋은 보기이다. 이렇게 제국주의가 키워온 이슬람 근본주의는 대소항쟁의 정당성까지 얻어갔고 종교적 문화적 파시즘은 아프간 전역에 수십 년 이어지고 있다.

4월 28일 무자히딘 승전 기념일은 국경일이고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10여 년 대소항쟁을 벌여 소련의 꼭둑각시정부를 몰아낸 무자히딘은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이념적 토대를 달고 성장해왔다. 아프간 대다수 여성들은 수십 년 이어진 전쟁과 종교근본주의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억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