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카’로부터의 해방

카불(아프카니스탄) = 이유경 

“사진은 절대 안 돼. 내가 구걸하는 걸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카불 시내 중심가에서 택시로 십여 분이면 닿는 폴 무하마드 칸(Pol Mohamad Khan) 지역, 십여 년 전에 ‘끝난’ 내전의 잔해들이 광범한 대지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 한켠에 파괴된 돌 벽을 뒤로하고 앉은 두 여성은 강고했다.
나의 간곡한 요청으로 그녀들은 자신들의 부르카 속으로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 천 더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그녀들과 따뜻한 볼맞춤을 나누었다. 눈 언저리 ‘창문’을 뚫어지게 봐도 좀처럼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운 부르카 (일부는 ‘텐트’라고 부르는) 안에는 흡사 내 어머니처럼 정겹게 주름진 여인들이 웃고 있었다.
‘볼맞춤까지 나누었으니 혹시 경계가 좀 풀렸겠지’ 그러나 여전히 ‘사진은 절대 안 돼’였다. “부르카를 둘렀으니 아무도 모를텐데…?”,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녀들의 사진을 이미 ‘몰래’ 찍어두었다. 거절당할 상황을 뻔히 예감하고 있었기에 건물을 찍는 척하면서, 미안하지만, 그녀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을 둔 뒤 그녀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아무 말도 하기 싫어. 다들 와서 사진만 찍고 질문만 해대지 뭐 하나 도와주는 인간들이 없어”

예상대로 첫 반응이 매몰찼다. 나의 통역인 나지브 역시 ‘예상대로’ 쉽게 포기하고 가자는 눈치다. 한 살 때 집으로 날아온 로켓포로 몸 구석구석 화상을 입은 데다 93년 말 내전 기간 카불 도심의 시가전(市街戰)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파키스탄으로 난민 길에 올랐던 7살 소년은 청년이 된 지금도 전쟁 후유증을 겪고 있는 듯 했다. 누군가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아는’ 다소 소심한 청년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카불 밖으로의 여행은 동행하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했고, “거기 기자들 사진 못 찍게 했어요” 라는 말도 종종 해댔다.

하지만 나는 이 부르카 여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걸 매몰찬 반응에서부터 감지했다. 그 분통 터뜨리는 대꾸에 꼬리를 물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보니 ‘말하기 싫다’던 여인들은 대답을 술술 해주었다. 볼맞춤을 한 뒤에는 웃음‘소리’까지 (웃은 ‘얼굴’은 통 볼 수가 없으니!) 던져가며 수다스런 아줌마처럼 굴었다.

 

 

뚫어져라 보아도 눈을 마추치기 어려운 부르카. 탈레반 정권 여성억압의 상징처럼 간주돼온 이 부르카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전쟁의 좋은 명분 중 하나였다. ‘부르카로부터의 해방 전쟁’이 끝난 지 5년 반, 많은 여성들이 부르카를 벗어 던졌지만 여전히 부르카를 벗지 못하는 여인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남성들의 차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Photo by Lee Yu Kyung)

뚫어져라 보아도 눈을 마추치기 어려운 부르카. 탈레반 정권 여성억압의 상징처럼 간주돼온 이 부르카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전쟁의 좋은 명분 중 하나였다. ‘부르카로부터의 해방 전쟁’이 끝난 지 5년 반, 많은 여성들이 부르카를 벗어 던졌지만 여전히 부르카를 벗지 못하는 여인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남성들의 차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Photo by Lee Yu Kyung)

 

부르카 과부들의 동냥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둔 슈크리아(가명, 40)는 아프카니스탄 기혼여성의 25%를 차지한다는 수십만 과부 중 한 명이다. 그녀가 23살 때, 그러니까 27년 전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 79년 소비에트 점령 이래 아프카니스탄 남성들은 의무적으로 점령군에 복무해야 했는데 그녀의 남편도 강제로 군복무 중이었고, 마수드(Ahmad Shah Masood, 아프카니스탄의 ‘공식’ 영웅으로 칭송받는 대소항쟁의 전설적인 무자히딘 전사.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90년대 내전의 ‘전범’으로 비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1년 9월 9일, 9.11 뉴욕 공격 이틀 전, 저널리스트로 위장한 자살테러범에 의해 암살당했다) 군과의 교전 중 사망했다. 슈크리아의 ‘동료’ 무니라(가명, 45) 역시 5명의 자녀를 둔 과부다. 그녀 역시 소비에트 점령 시절 남편을 잃은 이래 5명의 자녀들을 혼자 잘 길러내고 있다.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돈 벌이가 좀 돼요?”
“아니 아니, 우리 지금 쉬고 있는 거야. 저어기 사람 많은 데서 일하다가…”

한 푼이 절박한 게 분명한 이 여인들은 그러나 대학생 자녀까지 둔 평범한 어머니들이었다. 놀랍게도 아프카니스탄은 교육이 무료인지라, 탈레반에 의해 학교 (특히 여학교)가 불타오르는 남부 사정과 달리 수도 카불에서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도 제법 학교에 다니고 있다. 밤 낮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는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아프카니스탄 전체 통계로 볼 때 학교 등록률은 1/3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또, 많은 아이들이 방과 후에 껌 상자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대학생 자녀를 둔 이 여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돈 벌이에 나섰고 이렇게 ‘쪽 팔린’ 일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자신들을 감춰주는 부르카 때문이었다.

카불 시내 곳곳에는 이런 부르카 동냥 여인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외국 대사관과 엔지오들이 몰려 있는 샤하레나우 구역에는 택시 안으로 손을 들이미는 부르카 여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가난한 북서 지역으로 달리다 보면 먼지로 숨이 막혀오는 공사판 인근에서 땟국물이 심하게 흐르는 부르카를 입은 여인들이 ‘그릇’ 앞에 앉아 있다.

부르카!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이 천 더미는 2001년 10월 7일,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아프간을 ‘해방’시키겠다며 ‘침공’할 당시 전쟁의 좋은 명분이었다. 이슬람 근본주의 규율을 엄격히 적용시키며 ‘보호’를 빌미로 여성들을 집안에 가둬두었던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겠다는 게 바로 민주주의와 여성인권의 챔피언 미국의 전쟁 명분 중 하나였다.
96년 9월 탈레반의 카불 점령 이후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탈레반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여왔던 미국이 다시 그들에게 질려버린 배경 중 하나도 바로 탈리반의 여성정책과 미국 내 여성운동가들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게 여성을 해방시키겠다는 전쟁이 끝나고 5년 반이 흘렀건만 아직도 적잖은 여인들이 부르카를 붙들고 있었다. 남편과 가족이 ‘(부르카 벗는 걸) 허락하지 않아 두르는 경우도 있고, 슈크리아와 무니라처럼 ‘신분보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두르는 경우도 있다. 이 자발적 그룹은 단연 국제사회의 아프카니스탄 재건 정책의 실패를 신랄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구호와 아프간 재건 정책은 꼬리를 물고 늘어진 30여 년 전쟁의 최대피해자인 과부들을 비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구호금의 80% 이상이 군사시설 ‘재건’으로 흘렀고 약 3% 정도만 민간 재건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에 아프간 재건과 원조라는 건 군사시설 기반을 위한 ‘재건’이나 국제구호단체들의 생활비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탈레반과 교전 중인 남부의 재건실패는 더 심각한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이미 재건과 원조사업이 서서히 끊겨왔던 남부는 지난 해 3월부터는 아예 많은 엔지오들이 문을 닫았고 현재 극소수 엔지오들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과부 동냥객들에게 ‘부르카 벗기’는 해방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녀들에게 부르카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벌이 전선에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인격적’ 도구가 되고 있다. 부르카를 두른 여인들은 정말 누가 누군지 알기 어려웠다. 확실한 신분보장이었다.

 

 

10여 년 전에 끝난 내전의 흔적은 카불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파괴된 현장 한 켠에서 부르카를 두른 두 과부 여인이 앉아 있다. 거리에서 동냥하는 여인들에게 부르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도구다. 이 여인들 대부분은 전쟁과부들이다. (Photo by Lee Yu Kyung)

10여 년 전에 끝난 내전의 흔적은 카불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파괴된 현장 한 켠에서 부르카를 두른 두 과부 여인이 앉아 있다. 거리에서 동냥하는 여인들에게 부르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도구다. 이 여인들 대부분은 전쟁과부들이다. (Photo by Lee Yu Kyung)

10여 년 전에 끝난 내전의 흔적은 카불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파괴된 현장 한 켠에서 부르카를 두른 두 과부 여인이 앉아 있다. 거리에서 동냥하는 여인들에게 부르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도구다. 이 여인들 대부분은 전쟁과부들이다 (Photo by Lee Yu Kyung)

10여 년 전에 끝난 내전의 흔적은 카불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파괴된 현장 한 켠에서 부르카를 두른 두 과부 여인이 앉아 있다. 거리에서 동냥하는 여인들에게 부르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도구다. 이 여인들 대부분은 전쟁과부들이다 (Photo by Lee Yu Kyung)

부르카, 자존심을 지켜주다

“탈레반 정권이 부르카를 공식화해서 그게 ‘탈레반식 억압’처럼 알려진 건데, 실은 80년대 초반 이미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파키스탄 내) 아프간 난민캠프에서 부르카 두르기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어”

 

반 지하조직인 아프카니스탄 여성혁명위원회(RAWA : Revolutionary Association of Women of Afghanistan) 자르후나(가명)는 80년대 초반 아프카니스탄을 떠나 파키스탄 난민행렬에 동참했던 기억부터 더듬어 주었다. 그녀에 따르면 난민캠프를 ‘운영’했던 이슬람 근본주의 무자히딘 군벌들은 80년대 초반부터 난민캠프에 부르카 문화를 도입해왔다. 하여, 미국 주도의 동맹국이 (부르카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탈레반을 대패시키기 위해 무자히딘 군벌연합체, 즉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을 전선의 파트너로 끌어들인 게 자르후나에게 분통 터지는 모순이다. 그 해방 전쟁이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억압의 원조 격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다시 권좌에 앉혀놓고 말았다.
실제로 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야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 무력한 정치인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를 둘러싼 장관들이며 대통령 자문위원들이며 국회의원들이며 다수가 바로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 군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게 작금의 아프카니스탄 현실이다. 이 군벌들은 또 90년대 초 내전을 치르며 카불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던 바로 그 전범들이고, 그 내전의 혼란 속에 탈레반의 입성을 낳았던 책임을 면키 어려운 바로 그런 세력이다. 그렇게 권좌에 앉은 북부동맹 각 정파들은 지금 고위 사령관들이야 점잖은 척 양복을 빼 입고 앉아 있지만 무장을 풀지 않은 채 아프간 전역에 산발적으로 남아 있어 아프카니스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우린 국제평화유지군의 주둔과 국제사회의 도움이 아직 필요하다. 국제사회가 빠져 버리면 그 군벌들이 90년대처럼 다시 ‘무장권력투쟁’을 벌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내전을 보고 싶지 않다”


여대생 파르비나(가명, 27)의 이런 의견을 나는 여기저기서 자주 듣고 있다. 무자히딘 군벌들에게 이를 가는 다수 카불 시민들이 외세의 주둔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철수’를 외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무자히딘이 여전히 강력한 무장세력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프카니스탄에 군을 파견한 국가의 여론 다수가 ‘자국군대의 철수’에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지만, 이곳 카불을 중심으로 한 아프간의 여론은 조금 다르다. 국제사회가 또 다른 내전재발의 가능성과 전쟁공포를 최소화해주는 세력으로 남아 주길 아프간 국민들은 여전히 바라고 있다. 바로 외세의 늪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프간의 쓰라린 현실이 이런 국민여론에 반영된 셈인데, 국민들은 그저 ‘제발 전쟁만은 이제 그만…’ 이라는 ‘반전’을 최우선 생존 과제로 얹어 놓은 것이다. 이 군벌들이 완전 무장해제하지 않는 한 이런 ‘반전우선’ 여론은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고 보면 탈레반보다 먼저 부르카 문화를 ‘도입’했던 이슬람 근본주의 군벌들이 부르카로부터의 해방을 내건 미국주도의 전쟁을 등에 업고 다시 권좌에 오르는 이 모순적 현실에 부르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건 웃기는 얘기가 되고 만다.
“단지 강요된 부르카를 벗었다고 해서 아프간 여성이 해방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지 마라. 미국과 국제사회는 ‘부르카’ 이 세자를 붙들고 아프간 여성의 억압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여성해방을 왜곡해왔다”

부르카 속에 카메라를 숨기고 들어가 탈레반의 여성공개처형 장면을 촬영했던 그 ‘겁 대가리 없던’ 아프간여성혁명조직(RAWA) 여성운동가들은 국제사회를 향해 그렇게 따져 묻고 있다.

 

 

 

One response to “‘부르카’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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