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 Fotos ON / Lee Yu Kyung

Afghanistan

101 East – Seeking asylum in Australia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DnAMcPi8Xa4


Healing the wounded in Helmand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WGycdOCTseI


Fears of humanitarian crisis in Marjah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s6VhkAEQqXI&feature=player_embedded#


Interview: Taliban fighter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GThIFQPgwLI&feature=player_embedded#

relevant report at

http://english.aljazeera.net/news/asia/2010/02/2010222131948670751.html


Riz Khan – Pakistan: Heading to civil war?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5U2Rcc0uC8Q


Bravest woman of Afghanistan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xZQePHIs1EA&feature=player_embedded


Enemies of Happiness(1)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rSj5TdhhFVk&feature=player_embedded


CIA Bomber Calls for More Attacks on U.S.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jvv6U7pVsrQ&feature=player_embedded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Idla9Gvql3U&NR=1


Noam Chomsky on BBC hard talk (2009) 3/3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i9QVNJYPMEo&feature=related


Noam Chomsky on BBC Hard talk (2009) 2/3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ZpQk5Jcj56w&NR=1


Noam Chomsky on BBC Hard talk (2009) 1/3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H6ROSdp2IaU&feature=related


폭력과 아편의 승리, 어둠의 휴일을 맞다

Home > 만평/사진 > 포토 스토리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5월17일 제660호
끔찍한 고문 자행하고 아편 불러들인 무자헤딘 사령관들의 ‘승전 기념일’

▣ 카불·낭가르하르·페샤와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소련 점령보다 괴로웠고, 탈레반 통치보다 잔인했다.”

1992년 4월28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무력으로 입성한 무자헤딘은 더 이상 대소 항쟁의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4년 반 동안 종파와 인종으로 갈린 무장 권력투쟁을 벌여 카불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군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날은 무자헤딘 승전 기념일이다. 납치, 강간, 절도 그리고 머리에 못을 박는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던 사령관들을 기억하는 카불 시민들에게 이날은 ‘블랙 홀리데이’다.

멀리 우람한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의 들판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가난한 아프간 농민에게 아편재배는 때로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Phto by Lee, Yu-Kyung)

멀리 우람한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의 들판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가난한 아프간 농민에게 아편재배는 때로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Photo by Lee, Yu-Kyung)

전범재판에 세워도 시원찮은 그들은 ‘민주화된’ 아프간에서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지역 군벌들이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전범 기록을 꺼내들 때면 ‘대소 항쟁’을 들이대며 입 닥치라고 협박하는 ‘성스러운 전사’들이다. 사령관들의 컴백.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게 다시 아편을 불러들였다. 국제사회가 퍼부어댄 돈이 사령관들의 주머니와 배를 채우는 사이, 그때나 지금이나 배고픈 농민들은 아편 재배로 몰리고 있다. ‘아편 박멸’ 작업으로 이따금 쑥대밭이 되기도 하지만 아편이 박멸될 것 같진 않다. 가난한 밭을 ‘골라’ 박멸하고, 사령관들의 밥줄은 건드리지 않는 게 단속반의 비공식 규율이기 때문이다. 사령관들을 권좌에 다시 불러들인 ‘해방전쟁’ 5년 반. 그 전쟁이 낳은 사생아 ‘아프간 마약대국’은 이제 곧 여섯 살이 된다.

한 아프간 농부가 수확한 양귀비 열매에서 채취한 붉으스름한 생아편 즙을 들어 보이고 있다. 농민들은 수확기에 이렇게 긁어 모은 생아편을 밀수조직에 넘겨 얻은 수익으로 한해살이를 한다. (Photo by Lee, Yu-Kyung)

4월29일 미군의 공격으로 6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은 쉬르겔 마을에선 ‘어린이 부상자’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 어린이가 채 아물지 않은 그날의 상처를 내보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아편 박멸작업은 아프간에서 ‘공무’다. 10여 명의 일꾼들이 작업에 나선 현장에도 중무장한 경찰 병력이 어김없이 동원된다. (Photo by Lee, Yu-Kyung)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지난 4월28일 무자헤딘 승전 15주년 기념일을 맞아 수도 카불에서 군 수뇌부와 함께 퍼레이드에 나섰다. 아프간 민중을 옥죄어온 군벌들은 ‘성스러운 전사’로 둔갑해 이날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았다. (Photo by Lee, Yu-Kyung)

외국군대 없이는 수도 카불조차 지키지 못하는 아프간 군대. 아프간 새해 경축행사를 벌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27000/2007/05/021027000200705170660012.html


‘아편과의 전쟁’도 이 모양인가

Home > 국제 >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5월17일 제660호
아프간 정부의 핵심 과제라는 아편 박멸 사업, 미국 지원받아 무차별 공격 중?

▣ 낭가르하르(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건 내게 ‘철거 깡패’를 연상시켰다. 산동네 판자촌에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한국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들이 ‘깡패’는 아니었다. 주정부 대변인과 무장경찰 그리고 도심에서 고용된 10여 명의 ‘막대기 부대’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은 아편 박멸사업이라는 막중한 ‘공무’를 수행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사업은 마약퇴치부(Ministry of Counter Narcotic) 동부지방관 아흐마툴라 알리자이의 말마따나, ‘테러와의 전쟁’과 쌍벽을 이루는 아프간 정부의 핵심 과제다. 그런데 이 핵심 과제를 수행하는 부처 간 불협화음은 거의 ‘콩가루 집안’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모 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주지사가 주도하는 아편 박멸작업을 두고 알리자이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건 불법이야. 주지사 개인 비서들이 날품팔이들 동원해서 벌이는 일이거든.” 그는 카니켈 지구 주민 1명이 미리 약속했던 일당 500아프가니(약 10달러) 가운데 300아프가니를 주지사 개인 비서인 마수드에게 뜯겼다며 낸 진정서를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아편 박멸 일용노동자’와 주민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작업에 동원된 한 일용노동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편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5월1일 아프간 동부 로닷 지구로 향하는 아편 박멸팀에 ‘임베드’(동행 취재)를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내일 마을 주민들이 우리 팀에 얼마나 협조적인지 보게 될 거요.” 전날 인터뷰한 닝가르하르 주정부 대변인 누라가 자왁은 내게 이렇게 장담했다. 물론 그의 말은 미심쩍었다. “그래, 어디 한번 가봅시다”라고 응수했다.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말한 ‘협조’라는 게 박멸팀에 고용된 현지인 인부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주민’이라기보다, 도시에서 고용한 ‘아편 박멸 일용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열심히 일했다. 일부는 마지못해 나선 분위기가 역력했다. 또 다른 이들은 때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들고 온 막대기로 양귀비 밭을 후려쳤다. 이를 불안하면서도, 그러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민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서너 살쯤 돼 보이는 꼬마에서부터 아편밭 주인 그리고 좀처럼 문 밖을 나서지 않는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까지 ‘구경’나온 주민은 다양했다. 약 20분간 이 밭에서 저 밭으로 박멸작업은 이어졌고, ‘팀’은 이내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권력 있는 사람들 밭은 안 건드리고 가난한 우리 밭만 건드려….”

망가진 밭을 바라보는 모히불라(29)는 23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편 농사가 세 번째 망가졌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묻지 못하고 또 다른 주민에게 옮겨가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통역이 ‘빨리’와 ‘그만’을 연발하며 취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주민 인터뷰를 최우선 취재 과제로 놓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주정부 대변인 자왁이 “더 이상의 사진 취재도, 인터뷰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갔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사진을 충분히 찍을 때까지 계속 박멸하리라”고 했던 자왁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었다.

“길도 물도 없는데 채소 기르라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작업에 동원된 한 일용노동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편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아프간에서 체류한 두 달 동안 종종 느끼는 바지만 현지인 통역 일부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아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3월 초 납치 사건으로 외국인 기자는 풀려나고 현지인 통역(기자)과 운전기사만 목숨을 잃었던 탓에 이런 현상은 더더욱 정당성을 얻어갔고, 쉽사리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듯했다. 아편 박멸 현장에서 애당초 상의한 취재가 건건이 빗나가면서 급기야 통역과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덕분’에 양귀비 열매에서 아편 즙을 정성스럽게 긁어대는 인근 마을 주민들을 더는 취재할 수 없었다. 아편 박멸사업은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었고, 구린내가 많이 나는 ‘공무’였다.

“우리 보고 채소 농사를 지으라고 하는데, 채소를 팔러 시장 가는 길이 나빠서 가는 길에 전부 시들어버려. 게다가 물도 태부족인데, 아편 농사가 다른 농사보다 물이 덜 들거든.” 지난해 아편 농사로 아들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는 아지둘라(40)의 말이다. 주정부와 마약퇴치부 관계자에게 “보상 한 푼 안 한다면서 대책 없이 밭을 갈아엎으면 농민들은 뭘 먹고사느냐”고 묻자, 한목소리로 ‘도로’와 ‘물’ 관련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도로를 만들고, 마케팅을 활성화하고, 다른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학교를 짓고, 용수 공급 시스템을 만들고….” 마약퇴치부 지방관 알리자이도 허공에 떠도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던 주정부 대변인 자왁 못지 않았다. 그는 “농민들을 위해 각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며 “아편을 박멸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지원이 끊기기 때문에 반드시 박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편 재배는 단순히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나쁜 짓”이라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사안이 아니었다.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이던 아프간에선 탈레반 정권 등장과 함께 아편 재배가 사실상 퇴치됐다. 지난 2000년 여름 탈레반 정권이 아편 재배 금지령을 내린 이후 아편 재배 면적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2001년 2월 현지조사에 나선 유엔 마약통제프로그램(DCP) 실태조사팀도 “아편 재배가 거의 완전히 근절 단계에 와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정부 관료·경찰도 아편 밀수에 연루

그러나 미국 주도의 아프간 침공과 잇따른 탈레반 정권의 몰락과 함께 아편 재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탈레반이 부활해 조직 기반을 넓혀나가는 사이 아편 재배는 무서운 생명력으로 아프간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약 200만 농민들의 생계수단이 돼 있다. 전후 약 6년간 물과 전기, 도로 등 기본적인 기반시설조차 닦아놓지 않은 국제사회의 재건 실패와 부패한 아프간 정부 탓으로 그 책임을 돌려도 될 듯싶다. 여기에 지방 군벌들은 물론 정부 관료와 경찰까지 아편 밀수사업에 연루된 부패상 때문에 박멸과 재배가 공존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간 아편 재배 관련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샤피쿨라 샤이크는 “아프간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널린 게 헤로인 공장이고 아편 밀수업자다. 그 밀수 조직들이 불안한 치안 조성에도 한몫하고 있다”며 “치안이 나빠야 밀수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 <블랙 포이즌>에서도 묘사된 바지만, 낭가르하르 지방의 2006년 아편 재배량이 전년도에 비해 346%나 급증한 배경을 두고 관련 부처들은 모두 마약 왕들이 농민들에게 뿌린 돈 탓을 했다. 생계를 보장해줄 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밥줄이 절박한 농민들의 현실이기에, 이런 악순환이 쉽게 가실 것 같진 않다. “아편 중독자 중 10% 정도만이 아편 재배 농민이고 나머지는 농사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다수는 파키스탄과 이란 등지에서 난민생활 중에 중독됐다.” 잘랄라바드시 퍼블릭 헬스 병원의 아편 중독치료실 의사 라이쿨라 오바이디의 설명 역시 아편 재배가 농민들에게는 그저 밥줄이라는 점을 방증하는 한 근거로 볼 만했다.

이렇게 아편과의 전쟁이 빚어낸 생계수단 상실과 경제적 박탈감을 한 축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빚은 민간인 피해를 또 다른 한 축으로 이 두 전쟁은 아프간 전역에서 민간인들의 목숨과 생계를 꾸준히 위협하고 있다. 아편과의 전쟁은 목숨보다는 생계를 위협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 역시 목숨을 앗아간 적이 있긴 하다. 4월 초 ‘낭가르하르 지역 라디오’는 바티콧 지구 한 마을에서 아편박멸팀과 주민들의 충돌로 주민 1명이 죽고 4명의 경찰이 주민들이 던진 돌에 다쳤던 사건을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에도 변함없이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공습 피해자들이다. 4월27일부터 3일간 서부 헤랏 지방에서는 미 동맹군의 공습으로 최소 5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5월1일 남부 칸다하르 마루프 지구에서는 다시 미 동맹군의 공습으로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틀 전인 4월29일 낭가르하르 가니켈 지구 쉬르겔 마을에서는 또다시 미 동맹군의 ‘가짜 교전’으로 6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1명이 테러리스트 혐의로 연행됐다.

탱크 앞세운 미군 공습에 민간인 사망

5월3일 쉬르겔 마을을 찾았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집채보다 더 큰 대문이 들머리에 버티고 선 이 곳에 4월29일 새벽 2시께 미군은 7대의 탱크와 2대의 헬리콥터를 끌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마을 들머리 대문 앞에 폭탄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담을 넘어 침입해 마구 총질을 해댔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기 위해 나오던 자나트 굴(50)이 처음으로 쓰러졌고, 야외에서 잠을 자던 굴의 친인척 3명(부부와 딸)이 두 번째로 사망했다. 그리고 도망치던 이브라임(35)이 풀밭에서 죽었고, 아부둘 나지르(30)가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군 쪽은 “반군과 교전 중 반군 4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반군’은 없었다. 일부 언론은 어린이 1명과 여성 1명이 죽었노라고 보도했지만, 어린이 사망자는 없었다. 주정부 대변인은 민간인 희생자에게 30만아프가니(약 6천달러)의 보상금을 줬다고 얘기했지만,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조사든 취재든 현지를 찾은 외부인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민간인 피해가 유독 심했던 한 주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도의 국제치안보조군은 기자회견을 열고 다시 한 번 이렇게 다짐했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아프간 군당국과 협조를 잘하겠노라”고. 계속 사고치는 미군보다 아프간 군당국과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좀 이상한 다짐이었다. 한편 미군 쪽은 “민간인 피해는 보고된 바 없다”거나 “민간인 피해를 잘 알지 못한다”며 건건이 잡아뗐다. ‘아편 전쟁’을 두고 낭가르하르 주정부와 마약퇴치부의 궁합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지휘부대가 서로 다른 NATO와 미군 쪽의 궁합이 그리 썩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밤중에 날벼락을 만났던 작은 마을 쉬르겔의 안마당에도 양귀비는 곱게 자라고 있었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55.html


칸다하르, 치안 실패 재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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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탄생지 르포… 동맹군의 몸집 부풀리기가 가져온 건 치안이 아니라 전쟁, 미숙한 공격에 민간인 피해 심각 ▣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는 탈레반의 탄생지다. 이곳에서 1994년 말 탈레반 운동이 동터올랐고, 칸다하르 전역과 인근 남부지방 그리고 서부 헤라트를 거쳐 1996년 9월 카불에 도착하기까지 무섭고도 빠르게 번져갔다. 탈레반의 정신적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탈레반 집권 기간이던 1996~2001년 수도 카불이 아닌 이곳 칸다하르에 머물렀다. 탈레반이 지었다는 이 지역 최대의 모스크 ‘이드가르’에선 매주 금요일 오마르의 설교가 이어지기도 했다.

칸다하르 시내 순찰을 하고 있는 아프간 경찰. 아프간 군인과 경찰은 50~60달러의 월급을 받지만 탈레반 병사는 200~500달러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업과 경제적 박탈감이 칸다하르 주민의 탈레반 지원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충고가 잇따르고 있다.(Photo by Lee, Yu-Kyung)

“자기들 필요한 길은 잘 뚫어놓았다니까”

칸다하르는 파키스탄 남부 퀘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탈레반의 ‘물주’로 알려진 파키스탄과 소통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수많은 탈레반들이 난민들에 묻혀 ‘퀘타~칸다하르’ 국경을 별 문제 없어 넘나든다. 탈레반은 지난해부터 자신들의 본고장인 칸다하르를 다시 장악하겠다고, 칸다하르와 카불 간 연결 도로를 끊어놓겠다고 별러왔다. 그 도로가 혹시라도 끊길까, 그 전에 꼭 한 번은 육로를 타고 이동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3~4월 아프간 전역을 흔들어댄 납치 사건으로 간이 콩알만 해진 탓에 렌터카보다 값이 싸기까지 한 비행기를 예약했다. 결국 그 비행기가 예고도 없이 스케줄을 변경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차를 탔다. 애당초 육로 이동을 원하던 터라, 심리적으로 좋은 핑곗거리가 됐을지 모른다. ‘할 수 없다. 그냥 차 타고 가자!’

‘카불~칸다하르’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미국인들이 자기들 필요한 길은 잘도 뚫어놓았다니까”라던 한 카불 시민의 말이 떠올랐다. 탈레반의 활동 무대인 남부의 관문 격인 칸다하르와 수도 카불을 연결한 도로는, 알카에다가 주로 활동하는 동부 중심도시 잘랄라바드와 카불을 잇는 도로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로다. 군용 트럭이 이동해야 하는 길은 모두 잘 닦여 있다는 얘기다. 그 도로를 타고 5시간여 만에 칸다하르에 닿았다. 매번 놀라는 거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검문은 그리 까다롭지 않아 ‘맘만 먹으면’ 폭탄 들고 움직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카불~칸다하르 고속도로도 엇비슷했다. 대여섯 군데 초소도 없는 검문소에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복과 군복을 입은 이들이 옛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거칠게 들이대곤 했지만 그렇다고 검문이 까다로운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닿은 칸다하르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그냥 ‘사람 사는’ 동네였다. 임베드(종군) 프로그램으로 취재 중인 네덜란드의 한 방송사가 칸다하르는 도심조차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는데, 그건 ‘임베드’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갇힌 기사였다. 칸다하르 도심 밖 여행은 쉽지 않았지만 최소한 도심 내에서 움직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최하 밑바닥부터 최고 윗사람들까지 전부 부패했어. 이 정부에 희망이 없다고. 국제사회는 지금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아프간계 미국인인 자비드 아흐마드(50·가명)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남부지방에 체류 중인 그는 칸다하르 옆 동네인 헬만드 지방의 경우 “거의 모든 주민이 탈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억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부르카는 탈레반이 기반한 파슈툰 사회에서 보편적인 여성 차림이다. (Photo by Lee, Yu-Kyung)

‘부패’에 대한 불만은 가는 곳마다 이구동성으로 들려왔다. “탈레반은 물론 정부 관료들도 구호물품을 갈취하고 있다니까.” 사실 확인은 힘들었지만 피난민 와이즈 파지(가명)의 말에서도 부패한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부패 양상은 세계 아편 생산의 80~90%를 ‘책임’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아편 수확기에 접어든 요즘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지난 3월 말 칸다하르 주정부가 ‘아편 없는 지역’으로 선언한 칸다하르의 네 지구, 단드(Dand)·바만(Baman)·자리(Zhari)·아르간다브(Arghandab) 지역이 실상은 전부 ‘아편 청정지역’은 아니라는 사실. 그건 ‘1제리브’(0.19536ha에 해당하는 단위)당 1천아프가니(약 20달러)에서 5천아프가니(약 100달러)까지 돈을 받고 아편농사를 눈감아준 뒤 ‘청정’ 선언을 했다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달리 생계수단이 없는 농부들의 아편밭을 대책 없이 뒤집어엎는 아편 박멸 사업이 곳곳에서 충돌을 빚어내는 가운데 아편과 관련한 모순은 칸다하르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편 없는 청정 지역’의 실체

칸다하르 시내 중심가에서 미 동맹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이 뒤섞여 철통같이 버티고 선 시 외곽 칸다하르 공항으로 이르는 길목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아편꽃들이 여봐란듯이 활짝 피어 있다. 또한 ‘아편 박멸 프로젝트’의 현지 일꾼이 아편을 피워대는 모습도,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칸다하르 사무실 인근에 마리화나가 곱게 자라나고 있는 장면도 모두 ‘아편 모순’의 그림들이다. 이런 그림은 탈레반과 아편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아편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규율에 따라 2001년 아편 박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탈레반이 이제는 (아편 박멸을 외치는 정부에 맞서) 아편 농사꾼들의 보호막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헬만드 지방 상귄 지구를 탈레반으로부터 재탈환한 NATO 동맹군이 기자들까지 비행기로 실어날으며 축하행사를 열었지만 탈레반의 반응은 이런 거였다. “마을 원로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민들의 아편밭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전술적 후퇴였다. 곧 재탈환한다.” 그렇게 보호한 아편이 탈레반의 재원 일부를 채우는 걸로 알려진 가운데 탈레반은 이슬람의 아편 금지와 관련해서는 또 이렇게 자기 옹호를 한다. “대부분의 아편이 서방으로 건너가 (무슬림 형제가 아닌) 이단자들을 중독시키니까 별 상관없다!” 그러나 아편은 ‘이단자들’만 중독시키는 게 아니었다. 칸다하르 시내 아편 중독자 재활센터에 머물고 있는 10명 남짓한 아프간 중독자들은 작은 본보기일 뿐, 아프간 당국은 중독자 통계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아편을 피우거나 차에 섞어 복용하는 건 현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예상치조차 없는 민간인 피해

탈레반의 태생지 칸다하르 시민들은 연일 악화되는 치안과 경제 상황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2001년 전쟁 직후 잠시 외세를 환영했다는 이들은 이제 국제사회의 ‘해방’과 ‘재건’구호를 비웃는다. (Photo by Lee, Yu-Kyung)

이러는 사이 칸다하르와 남부지방 일대의 치안 부재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재난이 야기하는 건 단연 계속되는 각종 교전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칸다하르 지방의 치안 사정은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엔 하루에 세 번이 넘게 자살공격이 발생했는데 올해는 거의 없다. 칸다하르는 날씨도 춥지 않아 겨울에도 (탈레반이) 맘만 먹으면 공격할 수 있었다.” 칸다하르 주지사 아사둘라 칼리드는 악화되는 치안 사정에 대해 묻자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주지사의 항변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와 인터뷰한 사흘 뒤 칸다하르 시내에서는 NATO 차량을 겨냥한 자살 공격이 벌어져 민간인 6명이 다쳤다. 자살공격대 모집 담당이 퀘타에서 칸다하르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려온 날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를 모방했다고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자살공격은 그러나 이라크와 달리 아프간군과 경찰, 외국 군대(NATO와 미군) 그리고 정부 관료 등 ‘적’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그 미숙한 공격이 민간인을 더 많이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건 이라크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무기 들고 우리(탈레반)와 싸우는 놈들이나, 그 외국인들과 협조하는 놈들이나 우리에겐 다르지 않다.” 외세 점령에 이를 가는 탈레반의 골수 기질이 외국인 반감으로 발전하고 있는 탓에 칸다하르 시내에 자리한 국제 비정부기구(NGO) 사무소는 대부분 간판을 걸지 않고 있었다. 탈레반이 교전 중에 주민 가옥을 ‘방패’ 삼고 들어앉아 공습을 피하는 것처럼, NGO들도 민간인 가옥처럼 간판 없이 들어앉아 혹시 모를 공격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도 속속 떠나고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동안 정치적 이슈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탈레반 시절 이전부터 최근까지 남부지방은 15년 내리 심각한 가뭄에 직면해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때아닌 물난리가 나기도 했다. 구호가 절박한 이런 지역에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치안은 없고 교전만 계속되고 있으니 ‘치안유지 실패, 구호와 재건 실패’를 칸다하르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만 늘려가는 동맹군의 몸집 부풀리기가 가져온 건 치안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탈레반 시절엔 적어도 치안은 유지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탈레반의 극단적 규율은 근본적으로 아프간 동남부 일대에 퍼져 사는 파슈툰족의 보수적 관습에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 의무나 남성들의 턱수염 기르기 의무 등은 칸다하르 같은 곳에선 별다른 문화적 충격이 아니다. 실제로 칸다하르 거리를 둘러보면 남성들의 턱수염은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여전히 99%의 여성들은 부르카를 두르고 다녔다. 아프간 내 소수민족이자 유목민으로 분류되는 쿠치족 여성들만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 탈레반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돼온 부르카보다는 치안 부재와 교전으로 인한 위기 상황이 주민들에게는 더 피부로 다가오는 문제였다.

이런 측면에서 NATO군이 목표물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서 퍼붓는 공습을 ‘선호’해온 건 치명적 오류였다. 그건 ‘미숙한 자살공격’보다 더 나쁜 방식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민간인 피해가 주로 공습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 칸다하르에서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판자위 지구에 대한 공습으로 최소 60~80명의 민간인이 죽은 게 극명한 사례다. 심지어 당시 공습은 ‘이제 교전이 끝났으니 마을로 돌아가도 좋다’는 아프간 정부의 공지를 듣고 돌아간 주민들이 만난 날벼락이었다.

‘공습’은 ‘포기 정책’이다

그럼에도 공습은 멈추지 않고 있다. 마약 중독자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최근 잇따른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상황도 ‘파악 불가’다. 납치 위협까지 보태지면서 언론이나 공신력 있는 단체의 접근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아프간 인권위원회 등이 잇따라 내놓은 민간인 피해 보고서 어디에도 피해 수치는 예상치조차 거론되지 못했다.

“탈레반은 주민 가옥을 거점으로 교전을 벌이다 두어 시간 만에 달아나거든. 밤에는 오토바이 타고 와서 먹고 자고, 아침엔 사라져.” 판자위 인근에서 피난 온 아부둘 하디(가명)의 증언은 탈레반의 게릴라전과 민간인 방패 전술을 말해주고 있다. NATO 동맹군 역시 “탈레반이 민간인을 방패 삼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종종 해왔다. 그 게릴라전에 맞선 ‘공습’이 NATO에는 쉬운 방식일지 몰라도 민간인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방식이었다. 이를 ‘포기 정책’으로도 부르는 이유다.

“우린 전기가 없어. 전기가 있으면 일자리도 더 많아질 텐데….” 해를 거듭할수록 몸짓만 불려가는 아프간 ‘해방’ 전쟁. 그 한가운데 오도가도 못하는 칸다하르 주민들이 해방과 재건을 약속한 국제사회에 요구하는 건 이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인터뷰_ 아사둘라 칼리드]

올해 들어 나는 아주 행복하다

민심과는 달리 치안 상황이 좋다고 말하는 아사둘라 칼리드 칸다하르 주지사

▣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2년 째 칸다하르 주지사를 맡고 있는 아사둘라 칼리드는 자살공격 횟수 감소를 근거로 치안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나토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유감스럽지만, 외국 군대와 국제사회에는 불만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거리의 민심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인터뷰 내내 공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아사둘라 칼리드 칸다하르 주지사 (Photo by Lee, Yu-Kyung)

탈레반에

납치돼 최근 참수된 아프간 기자 아즈말 사건은 남부의 치안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는데.=칸다하르 방문이 이번이 처음인가?

그렇다.

=뉴스는 계속 챙겨봤나?

그렇다.

=아프간 뉴스를 제대로 챙겨봤다면…. 당신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칸다하르 상황은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예를 들면, 하루에 자살공격이 세 차례 발생한 적도 있다. 평균 주 1회. 올해는 자살공격이 한 달에 한 번도 발생할까 말까다. 거의 없다. 지난해 판자위와 재리에서 탈레반이 활동했고 우린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약 1만5천 명의 피난민도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판자위 지구가 완전 정상화됐고, 재리도 괜찮다. 피난민 80%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칸다하르 전역에 탈레반 활동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장담하건대, 탈레반 활동은 나날이 사그라지고 있다.

현실이 그렇기 바라지만….

=아니, 현실이 그렇다. 뉴스를 제대로 챙겨봤다면 알게다.

아직 4 초순인데, 지난해와 그렇게 비교하고 단언하긴 이르지 않나?

=칸다하르 날씨는 카불과 다르다. 지금은 탈레반이 공격하기 좋은 시즌이다. 겨울에도 맘만 먹으면 공격할 수 있었다. 주지사로서 내가 눈 감고 지내는 거 아니다. 다 보고받고 있다. 지난해보다 70~80%는 좋아졌다.

그렇다면 상황이 좋아졌다고 보나? 국제치안보조군(ISAF) 작전 때문인가?

=탈레반이 그렇게 강하다고 보지 않는다. 각 마을의 원로들과도 좋은 연락망을 갖고 있다. 지난해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 지역을 세 번이나 방문했고 성공적이었다. 칸다하르 주민들은 나날이 (대탈레반) 군사 작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고 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납치 사건은 탈레반이 약화됐다는 증거다.

지난해 10 판자위에서 나토군 공습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실수 인한 민간인 피해가 이어지고 있는데.

=민간인 피해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렇잖아도 ISAF와 이 문제를 놓고 얘기를 나눈 바 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실수였다. 나도 알고 모두 다 안다. 왜 우리가 싸우는가? 그건 탈레반 때문이다. 탈레반이 없다면 싸울 일이 없다. 나토 동맹군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맹군에 불만은 없나?

=전혀 없다.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나라에 와 있다. 여기에 싸움만 하러 온 게 아니다. 재건도 하고 있다. 이따금 테러리스트 활동이 있을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바로 우리에게 군 작전을 요청하고 있다.

피난민들은 구호물자 부족 여러 가지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어떤 종류의 피난민을 말하는 건가?

마이완 지구 출신도 있고….

=우린 그 지역에서 온 피난민이 없다.

내가 만나봤는데….

=아프간 북부 지역에서 온 쿠치족이 있고, 교전으로 생긴 피난민은 판자위, 재리 지구에서뿐이다. 그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 우린 구호물자를 전달해왔다. 물자가 부족해서 만족하지 않을 수는 있다. 아무튼 우린 그 피난민들을 모두 집으로 무사히 귀환시킬 수 있었다. 군사작전으로 파괴된 집도 다시 지어줄 계획이다. 보상금도 줄 거다. 마이완 지구에서 온 난민이 단 한 명도 없다. 만일 당신이 마이완 지구에서 온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건 미국이나 인도로 이민가고 싶어서 온 사람들일 게다.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지 않나?

=당신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을 거다.

피난민 중에는 교전뿐 아니라 가뭄, 홍수 자연재해를 피해 이들도 있던데.

=그렇게 피난 온 경우가 판자위, 재리 지구 등인데 누구도 그들 인생을 다 돌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당신 말대로, 불만이 있을 수는 있다. 올해 들어 나는 아주 행복하다. 칸다하르는 지난해보다 나아졌다. 내년엔 더 나아지길 바란다. 재건복구 공사도 진행 중이고, ISAF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은 지금 부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데, 신의 은총으로 그런 건 전혀 없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030658061.html


국적 따라 목숨값이 매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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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자 석방 뒤 잊혀져버린 아프간 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 납치 5주 만에 참수당하고 말아

▣ 카불(아프간)=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지난 3월 초 탈레반이 납치한 아프가니스탄 현지 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가 납치 5주 만인 4월8일, 납치범들이 정한 ‘데드라인’도 채우지 못한 채 참수당하고 말았다. 탈레반의 잔인함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노림수처럼 외세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는 아프간 정부의 취약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아즈말 참수 사건이 벌어지자 국제사회는 ‘즉각’ 경악과 비판을 쏟아냈고, 5주 동안 납치 사건을 단 한 줄 보도하지 않던 언론들도 예외 없이 기사를 썼다. 이런 ‘법석’이 조금만 일찍 나타났더라면, 분명 아즈말을 살릴 수 있었을 게다.

살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기자들이 수도 카불의 국회 앞에서 탈레반에 납치된 동료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함께 납치됐던 이탈리아 기자는 석방됐지만, 아즈말은 지난 4월8일 끝내 살해됐다.(Photo by Lee, Yu-Kyung)

아즈말은 지난 3월5일 오전 탈레반 강성 지역 중 한 곳인 헬만드 지방에서 납치됐다. 그는 이탈리아 기자 다니엘 마스트로지아코모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고, 아프간인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도 함께였다. 이들은 이날 오전 11시로 미리 ‘약속’이 돼 있던 물라 다둘라와의 인터뷰 장소로 향하던 길에 납치당했다.

납치범과의 협상은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가 참수를 당하면서 본격화했다. 지난해 10월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자국 프리랜서 사진기자 납치와 석방 드라마로 곤욕을 치렀던 이탈리아 정부에 아가의 참수는 발등의 불이 됐다. 아프간 병력 파병에 대한 자국 내 거센 반대에 직면한 이탈리아 정부는 ‘외세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아프간 정부를 ‘병력 철수’라는 카드로 압박했다. 급기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어명’을 내렸고, 다니엘과 탈레반 5명이 맞교환 형식으로 모두 풀려났다.

혼자 풀려난 다니엘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환호하며 만세를 불러댔지만, 아즈말은 납치범의 손아귀에 남겨진 채였다. 그로부터 나흘 뒤 다니엘이 며칠 전 그랬던 것처럼 아즈말이 머리에 모자를 얹고 천을 두른 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러나 아프간 언론을 제외하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냉정히 말해 아즈말을 살릴 기회가 두 번은 있었다. 첫째, 애초 탈레반이 요구한 건 ‘동지의 석방’이었다. 처음부터 5명의 석방을 고집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1명 대 5명’식 ‘불공정 거래’를 최소한 ‘2명 대 5명’ 정도로는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탈레반의 납치 전술에 불을 지폈다는 비난에 ‘생명을 구한 것뿐’이라며 ‘인도주의’로 맞섰던 이탈리아 정부에도, 셀 수 없는 죽음이 수십 년 일상화해서인지 ‘생명 감각’이 무뎌져버린 아프간 정부에도 아즈말의 목숨은 계산에 없었다.

둘째, ‘납치극 2라운드’에 해당하는 다니엘의 석방 이후 3주 동안 이탈리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간 정부도, 국제사회도, 언론도 아즈말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간 기자들의 국회 앞 연좌시위, 이탈리아 시민들의 석방 요구시위, 유엔 아프간지원단(UNAMA)의 석방 촉구 성명과 국경 없는 기자회의 성명이 두어 차례 나오긴 했지만, 다니엘 납치 당시 연일 이어지던 보도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줄어든 관심 한편으로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압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제사회가 아즈말 석방 압력을 높이는 시점에서 그를 풀어줌으로써 이미지 쇄신에 보탬이 되는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제사회도, 아프간 정부도 이런 ‘탈레반의 마음’을 몰라줬다. ‘인도주의’를 강조하던 이탈리아 외무부는 다니엘 석방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젊은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의 죽음에 대해 연대와 깊은 슬픔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석방 협상에 노력을 다하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아즈말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리수, 탈레반 내의 불협화음도 드러내

“이탈리아 기자가 풀려난 건 조건 없이 환영한다. 그러나 정부는 한 생명이 죽기 전에 왜 서둘러 협상을 진척시키지 않았으며, 자국 국민의 안전 문제는 팽개쳐놓고 외부의 압력으로 다니엘 석방에만 분투했는가.” 지아 부미아 아프간 기자보호협회 회장은 다니엘 석방 직후 남겨진 아즈말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무관심을 이렇게 꼬집었다. 아즈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한탄했다. “불공평하다. 이탈리아 기자 1명 빼내려고 탈레반 5명을 석방시키면서, 내 아들 석방을 위해서는 단 1명의 탈레반도 석방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정서는 탈레반의 ‘탄생지’인 남부 칸다하르 같은 곳에선 종교적 색채를 띠고 탈레반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 정서란 건 이렇다. “무슬림도 아닌 외국인(일부는 ‘외국인 스파이’라고 표현했다) 석방을 위해서는 그렇게 노력하면서 어떻게 우리 무슬림 형제를 위해서는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나.” 현지 기자 사피울라(가명)의 말이다. 이런 분노는 다시 ‘이교도는 살리고 무슬림 형제는 죽인’ 탈레반을 향해서도 이어지고 있다. 5명의 동지를 되돌려받고 로켓포까지 쏘아대며 자축했던 탈레반 역시 아즈말 살해라는 무리수를 둔 탓이다.

아울러 이 무리수는 탈레반 내의 불협화음도 은근슬쩍 드러내고 말았다. 아즈말 참수 다음날인 9일 오전 10시경 물라 다둘라의 개인 대변인 아탈은 일부 언론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기자들이 우리를 테러리스트라 불러왔지만 우린 무자헤딘이다. 아즈말을 죽임으로써 경고하는데 당신들 태도를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기자들을 계속 납치하고 거래하고 살해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5시께, 이번엔 탈레반 대변인 카리무하마드유수프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기자들을 향한 협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건 탈레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탈레반 내부의 불협화음까지 들춰낼 만큼 아즈말 사건은 아프간 정국 사방에 던져진 폭탄이 됐다.

많은 언론이 아즈말의 죽음을 전후로 ‘외국인 납치 사건’이나 ‘외국인 납치 위협’ 등으로 써왔지만, 실상 이번 사건이 못지않게 들춰낸 건 현지 언론인 혹은 통역이나 가이드, 운전기사 등 외국인과 함께 일하는 현지인들의 안전 문제다. 위험 지역에서 현지인이나 현지 언론인의 도움 없는 취재나 구호활동이란 거의 불가능한 게 현실이고 보면, 이런 분위기는 아프간 국내 언론과 외신 그리고 그나마 가느다란 명맥을 유지하는 남부 지역의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위험 지역에 삶터를 두고 있는 이 현지인들이 직면한 위험의 수준은 ‘떠날 수 있는’ 외국인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도 현지(언론)인 보호에 더욱 신경써야 하는 이유다.

프랑스 구호요원 2명? 현지인 3명이 더 있어

다니엘 협상 거래로 재미를 본 탈레반은 ‘더 납치하겠다’는 약속을 지켜가고 있는 듯하다. 4월3일에도 2명의 프랑스 구호단체 요원과 3명의 아프간 동료들이 납치됐다. 불행하게도 현지인 인질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역시 반복되고 있다. 적잖은 언론들이 ‘프랑스 구호요원 2명 납치’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현지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납치 열하루 만인 4월14일 ‘2+3명’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제 프랑스 정부, 아프간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와 언론은 이들 ‘2+3명’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목숨임을 보여줘야 할 때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4/021019000200704260657009.html


‘한국군 위험하니 철군하자’ 논리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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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총격, 되풀이되는 참사, 미진한 수사… 유감스럽게도 아프가니스탄에는 외국군 주둔은 필요악

▣ 잘랄라바드(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지난 3월9일 밤 9시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국경지대 토르캄에서 잘랄라바드(아프간 동부)로 차를 몰던 자비훌라(26)는 느닷없는 총격에 목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왔다. 당시 현지 주둔 미군은 테러 공격 정보를 입수했다며 ‘토르캄∼잘랄라바드∼카불’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 차량을 검문, 통제하고 있었다. 자비훌라는 차를 멈추라는 신호를 받지 못한 채 달리다 변을 당한 게다.

아프간 전쟁 5년여, 평화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아프간의 수도 카불 외곽에 자리한 컴백 난민촌.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났던 난민들은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의 ‘귀환 권고’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난민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Photo by Lee, Yu-Kyung)

“(아프간) 경찰이 오라고 손짓하기에 그쪽으로 차를 서서히 몰고 갔지. 근데 갑자기 (마주 보던) 미군 차량 쪽에서 총알이 날아들었어.” 경찰의 손짓이 차를 멈추라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비훌라가 이해한 대로 오라는 손짓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둠 속에서 그 경찰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 틈도 없이 미군의 총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카에다의 ‘왕성한’ 활동지 중 하나로 꼽히는 아프간 동부 낭가하르 지방은 그렇게 계속 들썩이고 있다. 자비훌라가 총격을 당하기 5일 전에 발생한 미군의 총기 난사 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길에, ‘어제 또 당했다’는 자비훌라 사례를 덤으로 얻었다. 그럼 3월4일 발생한 사건을 간략히 더듬어보자.

‘재수 없이’ 총질당한 민간인, 사망자는 도대체 몇 명?

이날 오전 낭가하르 지방 바라예카브의 한 시장에서 자살폭탄 차량 1대가 미군 차량을 겨냥한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이 공격에 대한 미군의 반응은 총기 난사였다. 목격자들은 6대가량의 미군 차량에서 인근 주민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총격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주민의 전화를 받은 ‘퍼블릭헬스’ 병원 등 잘랄라바드시 병원 두 곳에서 앰뷸런스 10대가 사건 발생 1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사상자들을 실어날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어. 건너편에서 오던 미군 차량에서 갑자기 총알이 차 안으로 날아들었어.” 팔에 총상을 입은 50대 주민 사이다잔은 “난데없는 총질이었다”고 말했다. 가슴에 부상을 입은 아부둘 왈리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 총기를 난사하면 누가 죽고 다치는지는 뻔한 거 아닌가? 직업군인이 그 정도의 감도 없이 총질을 했다는 게 말이 되나?” 잘랄라바드 주민 파리둘라(21)가 분통을 터뜨린다. 대부분의 사상자들이 얼떨결에 혹은 현장을 지나다 ‘재수 없이’ 총질을 당한 민간인들이었다.

미군 쪽은 자살폭탄 차량 말고도 총격을 먼저 받아 ‘자기 방어’를 했다고 말했지만,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엄청난 민간인 희생과 달리 미군 쪽은 누구도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퍼블릭헬스 병원 원장 아즈말은 “대부분의 (민간인) 부상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었고, 목과 가슴 등에 총상을 입은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자살폭탄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는 공격자 1명뿐이다. ‘공격’과 ‘피해’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지난 3월14일 카불에서 발생한 폭탄 사고 현장. 땅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벌어지면서 주변 건물들도 무너져내린 모습이 참담하다. (Photo by Lee, Yu-Kyung)

그렇잖아도 바닥을 치는 ‘이름값’을 달고 있는 미군이 ‘해방’과 ‘재건’이라는 구호에 맞지 않는 행동거지를 보여온 건 이런 유의 참사를 일찍부터 예고해왔다. 이날 총기 난사 사건으로 낭가르하르 지방은 물론 카불까지 발칵 뒤집어졌는데도, 5일 만에 다시 같은 지역에서 유사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는 건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 사건의 후속 처리 과정에선 외세의 늪에 빠져가는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 뭐 하나 뚜렷이 밝혀지는 게 없다. 그저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조용히 갖다대는 모양새다.

어이없게도 사망자와 부상자 수치조차 경찰, 병원, 언론, 정부, 동맹군 등 어디서도 정확히 아는 곳이 없다. 각 진영이 발표하는 수치 차는 크다. 현지 주민들은 부상자 45명에, 사망자가 최소 25명은 넘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병원 쪽은 중상자 중 4명을 바그람 미 공군기지로 이송했고, 자살공격원 1명을 포함해 사망자 8명, 부상자 24명이란 수치를 내놨다. 사건 조사를 ‘마쳤다’는 경찰은 사망자가 16명이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내무부는 10명의 민간인 사망을 발표했고, 동맹군은 ‘8명 사망에 35명 부상’이란 수치를 내놨다.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치안은 악화일로

아프간에 득실대는 외국 군대의 이런 ‘범죄 행위’는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심심찮게 벌어졌다. 2002년 7월엔 우르즈간 지방의 한 결혼식장에 미국이 공습을 가해 45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지난해 10월엔 칸다하르 판자와위 지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공습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일가족 20명이 포함됐다. 앞서 언급한 낭가르하르 총기 난사 사건 다음날에도 카불 북부 카피사 지방에서 미 공군기의 공습으로 4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일가족 9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지난 3월15일 밤엔 헬만드 지역 검문소에서 미군이 아프간 현지 경찰 5명을 ‘실수로’ 사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니 지난 1월 NATO 주도의 국제치안지원군(ISAF) 대변인 리처드 이 누지가 ‘2007년 군이 개선해야 할 점’ 가운데 하나로 민간인 살상 행위를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한국에선 지난 2월27일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벌어진 딕 체니 부통령을 겨냥한 테러 사건으로 윤장호 하사가 숨진 것 때문에 철군 여론이 들끓었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 ‘한국군의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을 게다. 하지만 전쟁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현지’ 민간인들이고, 그중에서도 어린이와 여성들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한국군의 안전이 위험하니 철군해야 된다”는 주장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 아프가니스탄에는 외국 군대가 필요한가? 아니면 모조리 철수해야 하는가? 유감스럽지만 “우선은 필요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잇단 언론 보도와 각종 보고서가 지적하는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상황은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탈레반이 ‘완전 장악’했다고 보도되는 남부 헬만드 지방에선 3월4일 탈레반에 의해 이탈리아 언론인이 납치됐고, 3월6일에도 영국 기자 1명이 피랍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외국인 납치나 남동부의 큰 싸움들은 관심과 보도라도 이어지고 있지만, 바깥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묻히는 사건도 적잖다.

예를 들어 3개월 전 카불에서 남부 카즈니로 이동하던 대학생 3명이 버스를 급습한 탈레반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대학도서관 출입증을 제시했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만 사건 같은 건 그냥 묻히는 뉴스 중 하나다. 이처럼 카불을 벗어난 지역에선 강도와 여전히 무장 중인 군벌들, 탈레반의 ‘공격’ 위험 등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카불 역시 안전지대라고 보긴 어렵다.

내전 주역 그대로, 외세의 ‘놀이’ 그대로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 지방에서 발생한 미군의 총기 난사로 부상을 당한 주민들은 “사고 현장을 지나는데 난데없이 총격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았다. (Photo by Lee, Yu-Kyung)

그래서 아프간 국민들은 외국 군대가 이런 불안한 치안 상황의 제대로 된 보호막이 돼주길 간절히 바라왔고, 지금도 여전히 바라고 있다. 앞서 언급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한 낭가르하르 지역 주민들조차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총질은 그만두고 재건만 한다면”이란 조건을 달아 주둔에 찬성했다. “우리는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그런 군사행동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 나라의 재건과 원조에 신실하게 나서주기 바란다.” 총기 난사 사건에 강력하게 항의시위를 벌였던 잘랄라바드의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 10여 명은 그렇게 입을 모았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내전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과거의 내전 주역들인 북부동맹 군벌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정부 요직까지 두루두루 점하고 있어 ‘무장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여전히 안고 있다. 게다가 이 군벌, 무장세력 정파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원 조종해왔던 주변 외세의 ‘놀이’도 계속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외국군의 철수가 90년대 초반 카불을 완전 초토화시켰던 ‘국제 대리전 성격의 내전’과 유사한 상황으로 흐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북부동맹 군벌들의 전범재판과 처벌에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단체인 아프간여성혁명위원회(RAWA)는 아프가니스탄의 국민군대와 경찰이 자리잡고 치안 상황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외국 군대의 주둔과 재건 노력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이 단체의 사하르 사바 대변인은 “북부동맹 군벌들의 비무장화를 통해 내전 재발 가능성을 없애는 게 가장 시급하다”며, “군벌들이 차지한 정부를 밀고 있는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국제평화유지군의 주둔과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상황은 애당초 모순투성이였다. 탈레반을 무너뜨리고 북부동맹 ‘전범’들을 권력에 다시 끌어들인 게 바로 미국이다. 전쟁 이후 3~4년간 정말 필요한 곳에 군을 주둔시키지 않아 국제구호단체들마저 활동을 접으면서, 재건사업에 치명타를 가한 미국의 정책 실패는 급기야 남북 지역 탈레반의 ‘화려한 부활’을 불러오고 말았다. <탈레반>의 저자이자 아프가니스탄 전문기자인 아흐마드 라쉬드도 탈레반 패배 직후 약 3년간 후퇴한 탈레반 세력이 파키스탄 남부 발로치스탄으로 넘어와 재조직에 나서는 과정을 미국이 완전 방치했다고 꼬집었다.

올해가 ‘재건’ 실험의 분기점

‘해방’을 내걸고 ‘침공’했던 아프가니스탄, 5년 넘게 이어진 미국과 국제사회의 ‘재건’ 실험에 여전히 희망은 있는가? 흩날리는 눈과 비, 그리고 진흙더미와 껌 파는 소년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땟국으로 범벅인 카불의 3월은 올 듯 말 듯 여전히 오지 않는 봄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국제사회가 그렇게 팽개쳐왔던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은 외세에 의한 잇단 참사와 실패로 기우는 외세 주도의 재건 정책에도, 이 ‘필요악’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올해가 바로 그 분기점이 될 거라는 전망이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3/021019000200703290653038.html


한국군 파병과 아프간 딜레마

최근 저는 <미디어 오늘>과 아프간 파병을 주제로 서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화로 보충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아래 인터뷰 기사 링크입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840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제 인터뷰 기사에는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오류와 왜곡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악의적인 왜곡이나 오보가 아닌 ‘실수’였다고 굳게 믿습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한 대학생 잡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발행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서른살까지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섰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호호호) 기자의 상상력이 너무 깊었던 거겠죠. 아무튼 제 3류 배경으로 그 문을 두드릴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파악한 데다, 동의하기 어려운 언론고시 체계에 몸과 정신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던 제가 민언련과 함께 했던 20대의 역사는 그 기사 한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프간 파병을 다룬 이번 <미디어 오늘> 인터뷰 기사에는 큰 컴플레인 없습니다. 다양한 여론 형성을 시도하기 위한 <미디어 오늘>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한가지 찝찝한 건 ‘국익’에 대한 방점이 너무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댓글도 ’국수주의적 시각’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일부 마쵸들의 댓글이 아니라면 – 물론 저와 인터뷰한 내용을 기자의 언론 모니터와 엮어 쓴 기사라 기자의 시각을 중심으로 기술했을 거라 이해하며…

이 참에 파병에 대한 저의 소견을 짧게 나마 보충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군 파병문제의 기준을 ‘국익’으로 따져보는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습니다. 저는 해외 파병은 무조건 안된다는 감성주의적 평화주의자도 아니며 해외 파병을 전부 제국주의적 개입으로만 보는 극좌파도 혹은 민족주의적 좌파도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99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군의 횡포와 인도네시아 군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의 끔찍한 폭력으로 불바다가 되고 있을 때 동티모르인들은 다국적군의 파병을, 국제사회의 개입을 절절히 요청했지요. 호주의 ‘극좌’ 조직들은 파병을 무조건 반대했고, ’건설적’ 좌파 조직들은 파병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수의 생명을 살리고, 약자 혹은 소수 커뮤니티에 대한 학살을 막으며 인도주의적 임무와 재건 임무를 수행하는 파병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 없다고 봅니다.

물론 ‘군복’들의 파병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평화유지군이 점령군 행세를 해왔던 비꼬인 역사도 적지 않습니다. 평화유지군이 현지 여성을 강간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2007년 아이티에 파견된 스리랑카 사례인데, 뉴스를 접하고 버릇 못준다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많은 타밀족 여성들이 스리랑카 정부군의 강간에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죠. 관련 기사 : http://news.bbc.co.uk/2/hi/south_asia/7076284.stm )

아울러 구호물자와 구호 활동과 국가재건이 필요한 곳이라면 군복보다는 민간복을 파견하는게 훨씬 더 방점을 두어야 할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전후 혹은 전쟁 중인 국가 대부분이 절실하게 필요한 ‘국.제.사.회.’는 바로 이런 구.호.영.역.입니다. 아프간이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구호가 절절하게 필요한 상황이지요. 그러나 아프간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 80%가 군과 무기 쏟아부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9만 군대 중 단 한개의 여단도 독립적인 작전을 펴기 어려운 수준이라니! 대단한 실패 아닙니까?  그중 70%가 문맹이라 정밀 무기 사용에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여, 오늘 날 아프간의 실패는 첫 단추를 잘못 낀데서 온 예고 된 것이기도  하지만, 설상가상 구호활동과 국가재건의 실패와 일관된 정책 부재까지 겹쳐 작금의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잘못끼어 들어간 단추들을 읊어볼까요?

1)       2001년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탈레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면 전쟁 범죄자급 북부 동맹 군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북부 동맹 군벌들은 인도, 터키,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국가들, 이란 등등 주변 국들의 지원을 받으며 90년대 초반 ‘무장권력투쟁’을 벌여 아프간을 초토화시킨 장본인들입니다. 이런 무법천지 쑥대밭 상황이 탈레반이라는 종교광신주의 정치집단의 탄생을 야기하였지요. 결국 2001년 벌인 대 탈레반 전쟁은 ‘파시스트’ 정권을 ‘전범’정권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90년대 군벌들이 만들었던 쑥대밭은,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래 ‘다시 돌아온 군벌들’ 에 의해 ‘아편밭’이 되었습니다. (아래 관련 기사)

http://www.hani.co.kr/section-021027000/2007/05/021027000200705170660012.html

2)      아프간 의회, 정부, 지방정부, 마을 구석구석을 이 끔찍하고도 부패한 범죄자들이 주무르는 바람에 민간인들은 숨죽여 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군벌들의 폭력에 진짜 숨을 죽여왔습니다. 여성들은 이런 군벌들의 강간위협에 시달립니다. (아래 관련 비디오)

http://www.youtube.com/watch?v=9yFiHkhv-UE

http://www.youtube.com/watch?v=Z3A8stwELJU

3)     미국과 동맹국들은 부르카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주겠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들이대며 대 탈레반 전쟁을 벌였지요.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한 인도작가 아룬다티 로티는 이 부르카 해방 전쟁을 두고 “미 해병대가 페미니스트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며 시원하게 비꼬아 준적이 있습니다. 그 페미니스트미션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들은 여전히 부르카를 두룹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다소 어이없게도 동냥할 때 쪽팔림을 막기 위해서 두룹니다. 구호와 재건 실패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그림이죠. (아래 관련 기사)

http://penseur21.wordpress.com/2009/04/09/%e2%80%98%eb%b6%80%eb%a5%b4%ec%b9%b4%e2%80%99%eb%a1%9c%eb%b6%80%ed%84%b0%ec%9d%98-%ed%95%b4%eb%b0%a9/

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302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030658061.html

반면 아프간에 넘치고 넘치는 (한 때는 천개가 넘었다는데, 제가 취재하던 2007년 기준으로 보면 ‘수백 개’) 엔지오들은 카불의 가장 비싼 ’동네’에서 벽 높은 빌딩을 짓고 빌딩 안에서 온갖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안전을 이유로 현장 활동을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 물론 값진 구호사업을 벌여온 엔지오들이 전무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2년 전 한국인 23명 납치 사건 정국으로 시끄러울 당시, 제가 한국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던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시내의 ‘힐라 병원’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도 이런 관점에서입니다. 현지인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의료사업을 하고 있었으니깐요. 그들이 뒷마당에서는 선교를 하네마네 꿍꿍이를 따져 묻는 언론들이 잇었지만 제게는 그게 언론의 ‘먹물 근성’으로 보였습니다.

4)      외국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 증가는 아프간 정책 실패의 결정적인 폭탄입니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55.html

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307

아래는 제가 미디어 오늘에 보냈던 서면 인터뷰 내용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아프간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한국군 파병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 그리고 ‘내용있는 파병 반대운동’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Penseur21 – 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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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오늘 (이하 ‘미’) > 한국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정부는 내년 7월 지방재건팀(PRF)를 보호할 320명 내외의 병력을 2년6개월 간 치안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인 아프간 파르완주에 보내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정부의 이번 결정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갱 : 어리석고 뜬금없다. 아프간의 치안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부패한 관료들과 ‘인권침해의 챔피온’ 군벌들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 국제 사회의 정책 혼선과 전략 부재, 다국적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등등으로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에 반해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고 있는 (아프간) 탈레반 세력은 날로 확장되고 있다. 공신력있는 정보에 따르면 아프간 전체 34개 지방 중 11개 지방이 탈레반 통치하에 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도 물론 탈레반이 출몰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제대로 된 논의나 검증 한 번 거치지 않고 2년 반이라는 장기 파병을, 그것도 재 파병을 하는 것 아닌가. 현장 실사는 얼마나 꼼꼼히 했는지, 아프간 정세에 대해서는 얼마나 깊이있게 파악하고 있는 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외부의 압력이 그리 거세게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다, 철군이 대세인 국제 여론을 고려해보면 뜬금없다.

그리고 모순적이다. 2년전 탈레반의 한국인 대량 납치 사건 직후 한국 정부는 ‘한국인 전원’ 철수 방침아래 군대는 물론 기자, 교민 등등 철수시켰다. 그리고 아프간을 여행 금지국으로 설정하여 기자들의 취재길, 구호기관들의 활동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프간 처럼 국제 뉴스의 핵이 폭발하는 현장을 정부의 조치때문에 가지 못가는 기자는 한국기자밖에 없을 거이며, 아프간처럼 구호가 절실한 나라에 구호인력을 파견하지 못하는 나라도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상대적 안전 운운’하며 군대만 보내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그 군대 파병이 한국인의 신변을 위험헤 빠뜨리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요소 아닌가.

미 :  파르완주의 치안이 안전한 지 궁금합니다. 아프간 다른 지역은 안전합니까.

갱 : 기본적으로 아프간에 안전지대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물론 어디가 ‘덜 위험한가’ 정도의 차이가 과거에는 유효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카불 공항까지 공격하고 (9월 8일), ISAF 본부는 물론 (8월 17알) 유엔 게스트 하우스 (10월 28일) 까지 공격하는 판에 이제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란 무의미 해 보인다. 지금 예로 든 세 곳은 치안이 철통 같은 곳이다. 게다가 몇 년전까지만 해도 탈레반 세가 없던 북부 쿤두주 지방 (독일군 주둔)에서도 탈레반이 심심찮게 출몰하고 있다.

그리고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아프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게 탈레반 세력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악명 높은 군벌인 굴부딘 헤크메따아르의 무장 세력도, 하카니라는 인물이 이끄는 ‘하카니 네트워크’도 카불 정부와 외국 군대를 심심찮게 공격하고 있다. 물론 알카에다도 있다. 그리고 아프간 전역은 다양한 파벌로 나뉜 무장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들도 외국인을 포함한 납치,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이들이다.

미 : 탈레반이 지난 9일 데페아(dpa) 통신 등 외신들에 전자우편으로 성명을 보내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병력을 보낸다면 나쁜 결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안전대책을 철저히 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탈레반의 경고, 실현가능성 있습니까.

갱 : 당연!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실패하길 바라지만, 가능성은 제법 높다고 본다.

미 : 당시 (2007년) 아프간 취재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취재 뒤 어떤 점을 느끼셨습니까.

아프간은 뉴스 거리가 무궁무진한 곳이며 외신을 취재하는 기자라면 누구나 ‘매력적’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현장이다. 버마나 스리랑카처럼 기자들을 옥죄는 환경도 거의 없다. 안전이 가장 문제인데, 철저한 정보수집과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 할 마음의 준비만 한다면 취재하기 나쁘지 않다. 취재 후 느낀 점은 2001년 미국과 동맹국들이 ‘부르카로부터 해방’ 을 내걸고 벌인 전쟁이 얼마나 실패했는가를 부르카를 두르고 동냥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미 :  아프간 현지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한 정서는 어떻습니까.

갱 : 2007년만 해도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치안이 상대적으로 낳은 카불은 다국적군을 ‘필요악’정도로 봤고, 탈레반 강성 지역인 남부는 반미, 반 외세 정서가 강하다. 한국군에 대한 정서를 특별히 파본적은 없어 잘 모르겠다. 여러 정황과 보도로 볼때 지금은 외국군대에 대한 정서가 의심의 여지없이 더 나빠졌다.

미 : 한국 언론 보도를 챙겨보시는 지 궁금합니다. 하신다면 최근 정부의 아프간 파병 결정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의 문제점은 없었습니까?

갱 : 한국 언론 국제 보도를 최대한 챙겨보는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특파원 조차 외신 의존도가 높아 별로 참고할 만한 게 없다. 이런 흐름이 기본이고 대세인데, 불현듯 나 버린 파병결정에 불현듯 깊이와 전문성 있는 기사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익을 위한 파병’ 같은 ‘국가주의적’ 의제외에는 별다른 의제 설정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뭐 좀 분석해보려는 노력하는 언론정도가 ‘중동 전문가’ 를 활용하는데, 아프간은 중동이 아니다. ‘아프간 탈레반’은 중동,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세를 키우는 알카에다하고도 연결망이 있지만, 아프간 영토가 역사적으로 뿜어온 특유의 민족주의적 저항 색채와 종교적 광신주의를 기반으로 한 파시스트적 성격이 결합된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현장발 보도가 아니라는 전 언론의 공통점을 감안한다면 한겨레가 상황에 대한 이해나 전문가적 식견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미 : 미국의 아프간 추가 파병 결정을 해외 언론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갱 : 해외 언론도 다양할 터인데, 공신력있는 분석과 보도에 기준으로 본다면 오바마 행정부의 대 아프간 전략이 현실성 없음을 지적하거나 의구심을 표하는 분위기다. 이라크에서 철군을 명한 오바마가 아프간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실험 정도로 관찰하는 것 같다. 오바마는 3만명 파병을 발표하며 이미 2011년 7월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군 시작을 언급했다. 이들 언론은 향후 18개월간 아프간 군과 경찰이 급격히 개선되지 않는 한 미군이 떠난 자리를 그들이 제대로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Afghanistan Women say no more troops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avBejIiyzFs


Bloody Attack on UN House in Kabul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BgEVHYpt4qE&feature=player_embedded#

U.N. Facility Attack in Kabul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jb6YZo-uopc&feature=player_embedded


Kidnapped Journalist Pleas For Her Release

A year ago, i’ve got a news that one canadian journalist whose name is Amanda Lindhout was kidnapped in Somalia along with one Australian camera man. Being surprised then, as I’ve met Amanda in Afghanistan in 2007. Rather novice-like,friendly (to anyone), energetic (very), she was extremely enthusiastic for a story in Afghanistan as well as war-torn zones in the world.

Once she has illustrated how ‘Green Zone’ in Bagdad, where she’s been for quite long, was functioning as an ‘occupation-privileged world’ in a ‘war-disastered country’. In other discourse, she showed me several pictures that were taken by her local colleagues. In those pictures, ‘bikini’ weared girls were ‘performing’ to ‘comfort’ the battle sickened-US soldiers in southern Afghanistan, where locals are sick and hungry due to decades of war and unreported draught for many years. The performers seemed to be brought directly from the US for that. Not sure whether such a performance was routine practice or not, nor how much naive we were being outraged with those pictures then.

A year after, I’m stunned again to learn that she’s still in captive. To be honest, I’ve ’neglected’ the case, only coming across my mind on and off what’s afterwards but lazy to move fingers on keyboards to search out any news on it.

Yes, she was ready to willingly take riskes for such stories as many other journos were. That doesn’t ‘ever’ mean that she (or whosoever) ’deserves’ to face what she’s been facing now. Dead hope she will be free asap.

- Penseur21 -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mfidJdxlv5o


People & Power – Return of the Warlords – 7 Oct 09 – Part 2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ARN65XchR_c


People & Power – Return of the Warlords – 7 Oct 09 – Part 1

source : http://www.youtube.com/watch?v=KJ9Kzut0aqQ


It’s Always the Fixer Who Dies : The New Yorker

September 10, 2009
By George Packer

It’s difficult not to feel a certain bitterness about the death of Sultan Munadi. He was what journalists call a “fixer,” the local man or woman who helps the foreign correspondent. The help takes every conceivable form: interpreting, finding the phone number of the Iraqi member of parliament, knowing the personal history of the Afghan battalion commander, setting up interviews, hiring a car and driver, figuring out where to get food on a long drive in the desert, dispensing political analysis and cultural insight and—sometimes most importantly—security advice, about this or that contact, this or that road. In Baghdad, after 2004, it became impossible to cross the street without the help of a fixer. In some cases, the fixer’s work lay at the heart of a news story that wouldn’t have existed without it; whether or not the fixer received an attribution depended on his bosses in the Western news organization. I’ve seen cases in which the fixer was cheated of credit, but over time, as the war in Iraq became so dangerous that reporting began to resemble self-imposed house arrest, these cases diminished. Anyone who understood the supreme, indeed, indispensable, value of the fixer would make sure that credit was given.

The relationship between fixers and foreign correspondents can be very close. Shared dangers and successes will do that, especially when the work done together, the tie between you, is what puts you at risk. In Iraq and Afghanistan and a growing number of other places, the foreign correspondent would be a target with or without the fixer, but the fixer is a target because he or she is with the foreign correspondent. Both are considered spies, but one is only an infidel, while the other is something worse—an apostate, a traitor. In my experience, this mutually voluntary risk is rarely a source of resentment on the part of fixers. They are generally young, cosmopolitan, quick-witted, stoical, tinged with idealism, implacable foes of their countries’ extremists; and, after all, they understand better than anyone what they have signed up for. For the most part, the risk strengthens the bond. It becomes a cause of tension only when it’s borne by just one side.

In spite of the closeness, the relationship is troubled by a kind of imbalance of power. In the course of the work, the fixer is relied on so heavily by the foreign correspondent that an observer who didn’t understand the system might assume that it’s the fixer who is in charge. After all, it’s the fixer’s country, and he or she knows it so much better. And yet the foreigner has the money, the name, the infrastructure, the power to hire and fire, and the ability to come and go, especially if things get sticky. It’s inevitable that the news organization back in the home country is going to value the correspondent, who has the professional skills, who is well-known back at headquarters and probably has close friends, more highly than the fixer, who is only heard about, and whose importance isn’t always understood thousands of miles away. In the philosophical terms of master and slave, the former ends up weaker, more dependent, than the latter, and yet remains the master. It’s a subtle par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orrespondent and fixer, often unnoticed and unimportant. It really only seems to matter when there’s a crisis.

Somehow, it’s always the fixer who dies. Of course, this is a false statement of fact on its face—at the very least, an exaggeration. But it feels emotionally true. When I think of the cases I know of correspondents and fixers faced with some emergency, the fixer is suddenly revealed to be the more vulnerable, and perhaps the more disposable. The fault may lie with terrorists and extremists, with officials and security forces of the host country, with foreign governments and militaries and intelligence agencies, with news organizations, with the individuals themselves, or with no one at all. But when I read the terrible news that the rescue operation staged by British special forces in northern Afghanistan to free Stephen Farrell and Sultan Munadi of the Times left the former safe and the latter dead, my shock was accompanied by a sinking sense of unsurprise. A similar outcome, in very different circumstances, occurred in Afghanistan two years ago, after an Italian journalist, Daniele Mastrogiacomo, and his Afghan fixer, Ajmal Naqshbandi, were kidnapped by the Taliban: the former was released, the latter beheaded. (The story and the larger relationship are the subject of a very good documentary, “Fixer,” directed by Ian Olds.)

I didn’t know Sultan Munadi, though some of his colleagues in the Times Kabul bureau, past and present, American and Afghan, are friends. One of them, David Rohde, was kidnapped along with his fixer Tahir Ludin last year in eastern Afghanistan; in their case, both escaped, though their driver remains in Taliban hands. Rohde knew Munadi well, and he’s composed a moving portrait; other colleagues remember him, too; and Munadi himself wrote this short account of his own life a week before he was killed. It’s fitting to have these tributes; some of them are written with obvious love. But if I were a fixer, I would have the taste of ashes in my mouth today.

source :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georgepacker/2009/09/its-always-the-fixer-who-dies.html


As Taliban Threat to Hostages Grew, British Moved In : NYT

Published: September 9, 2009
WASHINGTON — Britain ordered a predawn commando raid in northern Afghanistan on Wednesday to rescue a British reporter for The New York Times and his Afghan interpreter after Afghan agents learned that the Taliban was planning to move the hostages into Pakistan, a senior Afghan official said Wednesday.

The raid by British Special Forces and Afghan soldiers freed the reporter, Stephen Farrell, but the interpreter, Sultan Munadi, and a British paratrooper were killed in a fierce firefight, as were least one Afghan civilian and dozens of Taliban fighters, officials said.

A senior Afghan official and Mr. Farrell described a situation where after two days in captivity, the hostages’ situation turned more menacing. They said it seemed likely that Taliban leaders from outside the immediate district in Kunduz Province were planning to move the captives across the border into neighboring Pakistan, largely outside the reach of NATO forces.

While Mr. Farrell said he was treated well — given food, water and blankets and never harmed — the militants increasingly taunted Mr. Munadi. At one point one of the Taliban reminded Mr. Munadi of a case two years ago in which an Italian journalist taken hostage in Helmand Province was freed while his Afghan translator was beheaded.

“I did not think they were going to kill me,” Mr. Farrell said Wednesday in a telephone interview from the British Embassy in Kabul. “I did think they were going to kill him.”

The Taliban captors talked freely on their telephones, increasing the chances that NATO eavesdroppers also picked up on the change in mood and believed time was running short to act. “My sense is they probably just got them in the right place and needed to get on to it,” said Peter Gilchrist, a retired British major general and a former senior commander in Afghanistan.

A senior American military official in Washington said that the United States provided intelligence assistance and helicopters for the mission, and had attack aircraft at the ready if needed, but that the operation was planned and carried out by British commanders and civilian officials.

A senior NATO spokesman in Afghanistan, Rear Adm. Gregory J. Smith, said that Gen. Stanley A. McChrystal, the top commander in the country, was informed of the raid after it took place.

The Times of London reported on its Web site on Wednesday that Prime Minister Gordon Brown of Britain personally approved the raid. But other British officials said Mr. Brown gave only general authorization to the military to rescue Mr. Farrell, who has dual British and Irish citizenship, and Mr. Munadi.

In a statement, Mr. Brown said the raid was a British operation supported by the Afghan authorities and NATO alli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He praised the heroism of the British commandos and confirmed “with very deep sadness” the death of one of them.

“This operation was carried out after extensive planning and consideration,” Mr. Brown said, adding that whenever “British nationals are kidnapped, we and our allies will do everything in our power to free them.

“Sadly, we were unable to rescue Stephen’s Afghan interpreter, Sultan Munadi, and we send his family our condolences,” he said.

President Hamid Karzai “strongly condemned the killing of an experienced Afghan journalist,” his office said in a statement on Wednesday, according to Agence France-Presse. The statement said Mr. Munadi “was killed mercilessly by the enemies of Afghanistan” — shorthand for Taliban insurgents — but did not give further details.

Neither The Times nor Mr. Farrell’s family knew that the military operation was taking place. But they had discussed with the military under what conditions they might attempt a rescue. Basically the answer was they might act if they had intelligence that they could act on quickly and with a high probability of success.

Gunmen seized Mr. Farrell and Mr. Munadi on Saturday while they were working in a village near Kunduz. They were reporting on the aftermath of NATO airstrikes on Friday that blew up two fuel tankers hijacked by Taliban militants and killed scores of people, including an uncertain number of civilians.

Mr. Farrell, speaking to colleagues at The Times, said that he and Mr. Munadi were moved several times a day amid the cornfields, rice plantations and mud-brick villages in the Char Dara district over their four days of captivity. In the first two days, he said, they felt optimistic that they would be released.

“They drove us around Char Dara, almost always in the same old Toyota Corolla, sometimes with masked and turbaned motorcycle outriders, rocket-propelled grenades sticking out of backpacks in full daylight, just a few miles from the main Kabul to Kunduz road,” Mr. Farrell said.

He said his captors delighted in showing off, at one point driving to within about 1,500 feet of Afghan government and NATO watch towers, gleeful at their daring.

The area of Kunduz Province where they were held is ethnically mixed, with Tajiks and Pashtuns living in separate villages. But there was no doubt who was in charge. “At no point did we see a single NATO soldier, Afghan policeman, soldier or any check to the Taliban’s ability to move at will,” Mr. Farrell said.

Six to eight guards took turns watching the hostages, and they were hugely unpredictable. “One became enraged when I urinated standing up, deeming it an offense to local families,” Mr. Farrell said. “He then calmed down and asked me to teach him how to count to 10 in English.”

But on the third day, the situation became more threatening. It became harder for the captors to find safe houses. They would get lost driving down ever-narrower and ever more obscure country lanes.

“When they finally found a house with electricity two youngsters produced a tape recorder and began blaring hours of religious sermons, praising Osama bin Laden, the mujahedeen of Chechnya, Somalia, Helmand, Kandahar and anyone fighting the Americans,” Mr. Farrell said.

Some new Taliban figures, evidently more senior, arrived on the scene. There was much discussion of moving the captives outside the Kunduz area, including to Baghlan, a medium-size city not far from the sanctuaries of the Taliban and Al Qaeda in Waziristan in Pakistan.

Mr. Munadi became worried about his own fate, and told Mr. Farrell, “I think you’re going to be O.K., but they’ve got it in for me.”

Late on the third night, loud explosions nearby and the drone of aircraft overhead sent the captors and their hostages into the darkness, racing across open fields. It was a false alarm, but with a waning moon Mr. Farrell warned Mr. Munadi that a rescue attempt could be coming soon. Indeed, it would.

At about 2:30 a.m. local time Wednesday, the allied helicopters descended on the hideout and disgorged the British commandos. British and NATO officials have refused to discuss details of the operations, but most of the nations with sizable forces in Afghanistan keep a special military hostage-rescue team at the ready for occasions just like this.

With surveillance drones and helicopters overhead, the captors scattered, Mr. Farrell said. The two men initially stayed put, fearing that they would be caught in any cross-fire. Then one of the captors came back and tipped his gun toward them, he said, but left without firing. “We absolutely expected them to cut us down as they ran,” Mr. Farrell said. “We were crouching targets in a long, narrow room devoid of anything but walls and matting, which felt like a death trap.”

The two men waited a bit, then made their way out of the room into a courtyard. The lost each other in the darkness for a moment, before linking back up. With Mr. Munadi leading, they scuttled along a narrow ledge on the outer wall of the compound. “We could see nothing more than a few feet in front of us,” Mr. Farrell said. “We had no idea who was where, and there were bullets flying through the air.”

After crouching and running for some 60 feet, the two men got to a corner. Mr. Munadi was about two feet ahead of Mr. Farrell, and walked out into the clearing saying in an accent, “Journaliste, journaliste.” It was not clear whether he was assuring commandos that he was not a Talib, or assuring the Taliban that he was not with the commandos. There was a hail of bullets — unclear whether from friend or foe — and Mr. Munadi fell.

Mr. Farrell said he reared back from the gunfire and dived into a ditch. He waited a couple of minutes until he was clear which direction the British voices were coming from, then shouted, “British hostage! British hostage!” A few seconds later with hands raised high, he walked to the British troops and safety.

On Wednesday, Mr. Farrell blamed himself for Mr. Munadi’s death, though he said the two of them discussed while in captivity the possibility that they might not survive.

Mr. Farrell said of his colleague, “He was trying to protect me up to the last minute.” As they left the room under commando siege, “he moved out in front of me.”

“He was three seconds away from safety,” Mr. Farrell said. “I thought we were safe. He just walked into a hail of bullets.”

Carlotta Gall and Richard A. Oppel Jr. contributed reporting from Kabul, Afghanistan, and John F. Burns from London.

source : http://www.nytimes.com/2009/09/10/world/asia/10rescue.html?pagewanted=1&tntemail0=y&emc=t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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