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 Fotos ON / Lee Yu Kyung

Korean

타이에서는 환경운동하면 죽는다

[세계] ‘반석탄’ 운동하다 무참히 살해당한 국숫집 아저씨…

자본·마피아·관료의 카르텔 속에 16년 동안 타이 환경운동가 27명 살해당해

환경운동가 통낙 사윀친다 (47) 암살 배후 혐의를 받고 있는 석탄운송업자 가택 수색을 위해 경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7월 28일 오전 9시께였다. 타이 중부 사뭇 사콘(Samut Sakorn) 지방, 타 사이 (Tha Sai) 탐본 (서브 디스트릭트’, ‘마을바로 단위이자 지방 정부의 가장 작은 행정단위) 길은 인근 공장으로 출근하는 발걸음들이 총총히 사라진 뒤였다. 그  길로 들어선 오토바이 한 대, 뒷 사내는 길목 한 켠 국수집 앞으로 가 아침 신문을 읽던 주인 통낙 사윀친다 (47)에게 40구경 반자동 권총을 난사했다. 어깨, 등, 가슴, 허벅지 등 전신 여덟 군데에 총상을 입은 통낙은 병원에 도착하자 마자 숨졌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는 순박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없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내 좀크완 사윀친다(46) 가 버겁게 입을 열었다.

살해당한 환경운동가 통낙 사윀친다 (47) 의 혼을 달래는 불교의식에 참여중인 아내 좀크완 사윀친다 (46). (Photo @ Lee Yu Kyung)

사건 직후 타이 언론은 ‘저명한 환경운동가 살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이 좋아했다는 ‘순박한’ 국수집 아저씨 통낙은 어찌하여 ‘저명한’ 환경운동가가 되어 살해의 운명을 맞이한 걸까.

국수집 아저씨에서 환경운동가로

8월 3일 이른 아침 방콕 서남 지역과 경계를 나눈 사뭇 사콘 지방에  들어섰다. 아침 출근길의 상큼함은 커녕 목은 칼칼해지고 콧 구멍이 답답해왔다. 만만치 않은 오염 도시 방콕을 능가했다.

다운타운을 가로질러 통낙의 동네로 향하는 길,  “우리는 석탄을 원치 않는다”는 플랑카드가 스쳤다. 이어 ‘그린 파워 플러스’, ‘아시아그린 에너지’ 등, ‘그린’ 으로 치장한 각종 석탄 공장 간판들도 휑하니 지나갔다. 타이 내 최대 석탄 공급업체인 아시아 그린 에너지는 이 지역에 새 공장을 세우던 중에 시위를 만나 잠시 멈췄다. 동네 사람들은 이 회사 대표가 민주당 아무개 의원의  ‘경제 자문’ 이라며 “믿는 구석이 있어 투자하는 거”라 투덜댔다.

이 지역 노동단체  ‘노동권 신장 네트워크 재단 (Labor Rights Promotion Network Foundation, LPN)’ 에 따르면 사뭇 사콘에는 3천여개의 미등록 공장을 포함, 대략 7천여개 크고작은 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절대 다수가 해산물 가공 공장이고, 수십 개의 석탄 공장이 있다.  문제는 쉴새 없이 돌아가는 타이 전역 공단내 연료로 각광받는 게 ‘가장 더러운 에너지’라 불리는 석탄이라는 점다.  바로 그 석탄이 국수집 주인을 환경운동가로 바꾸어 놓은 ‘주범’이기도 하다.

사뭇 사콘의 경우를 보자.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에서 수입하는 것으로 알려진 석탄은 타 친 (Tha Chin)강 항구에 도착한 후 수십개의 공장으로 옮겨져 저장고에 쌓이고, 재분배 과정을 거쳐 여러 공장들로 이송된다. 이 지방은 석탄이송 길목이자 소비 지방이다.

“밭이 다 누래졌다. 코코넛 농사도 다 망했다. 폐도 안 좋고, 가려움증에…”

타사이 마을 주민 깃스나 파완 (60)의 말처럼 석탄 공장이 인근 밭들은 누리끼리 했다.

사뭇 사콘에 석탄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2006년. 아랫동네 사뭇 송크람 지방 주민들의 반대를 만나 공장이 이곳으로 옮겨온 온 그 순간부터 주민들의 시위는 시작되었다. 그 5년간의 투쟁이 귀 막은 당국과 언론의 눈을 피해갔을 뿐이다.

그러다 7월 13일 통낙을 선두로 한 천 여명의 주민들이 ‘라마 2’ 고속도로를 막는 대 소동 시위를 벌인 후에야 언론이 주목했고, 28일 통낙의 죽음은 언론의 관심에 더더욱 불을 댕겼다.

“이런 캠페인의 경우 업체들이 주민들 일부를 매수하여 분열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 지역에서는 그런 분열이 전혀 없었다.”

휴먼라이츠워치 타이 리서쳐인 수나이 파숙 (42)은 대신 시민사회가 옐로우와 레드로 분열된 탓에  이지역 투쟁에 대한 단일한 지지와 연대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석탄 관련 업체들이 들어선 지 5년, 심각한 환경 오염으로 과일, 채소밭들이 누렇게 변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 지역 제지업체가 사들여 폐휴지 처리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 이전에 과일농사를 짓던 곳이다. (Photo @ Lee Yu Kyung)

13일의 시위는 결국 ‘석탄 운송 중단’ 이라는 주지사 명령을 끌어냈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주지사의 명령을 위반하는 트럭을 모니터하기 시작했다. 22일,  통낙은 석탄을 운송하던 한 트럭을 막아선 적이 있다. 통낙 암살의 핵심 배후로 지목된 이가 운영하는 운송 회사, ‘테크닉 팀’ (Technique Team) 트럭이다. 회사 대표는 통낙을 위협하고, 거친 말들을 뱉어 온 인물이기도 하다.

“아니 그래, 당신 국수에 석탄 알갱이가 빠지기라도 했는가? 그렇게 설쳐대다가 당하는 수가 있어. 조심하라구!.”

석탄 알갱이가 통낙의 국수에 빠졌는지야 확인키 어렵지만, 석탄 운송 선박들이 뿜어내는 가루와 석탄 연료 공장들이 내뿜는 ‘석탄 물’은 이 지방 젖줄 타 친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모니터한 자료와 위반 증거 사진 등을 29일 주지사에게 보낼 참이었는데, 그 전날 통낙이 살해당했다”

여러해 동안 함께 캠페인을 이끌어왔던 캄폴 통치우 (51) 자신도 통낙이 죽기 이틀 전인 26일 밤 10시께, 석탄 운반 차량을 모니터 하던 중 미행 당했다고 말한다. 다행히 그는 작은 길로 차를 돌려가며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29일, 통낙 암살 다음 날 중앙행정법원은 타 사이 탐본 지역을 통과하는 석탄 운송 중단을 명했다.

사뭇 사콘 지방을 흐르는 ‘타 친’ 강은 예로부터 중국과의 무역 항으로 유명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로 부터 들여오는 석탄 산업이 활발해지면서 석탄 운송석박들이 야기하는 ‘석탄물’ 오염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Photo @ Lee Yu Kyung)

개발이익과 주민 인권 충돌  

지난 16년간 타이 사회에서 27명 환경 운동가가 살해되었다. 2007년에는 승려 프라수폿 수와요가 북부 치앙마이에서, 2004년 환경운동가 짜른 왓 악슨이 중부 프라추압에서, 2001년에는 솜폰 차나폴이 남부 수랏타니에서 살해당했다. 통낙은 27번에 이름을 올렸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석탄’ 아니면 ‘불법 벌채’에 맞서던 지역 운동가들이었다.

환경 갈등이 두드러진 곳이 주로 지방이라는 점, 그들이 대항하는 업체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는 청부살해 네트워크가 타이 사회에 적잖다는 점, 여기에 뒤를 봐주는 경찰과 공무원 변수까지 가세하며 지역 환경운동가들은 보다 많은 희생을 감내해 온 셈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인권운동가들이 직면한 위험상황을 모니터해 온 인권단체 프런트 라인 (Frontline)의 미디어 & 커뮤니케이션 부장 짐 라프란도 이 점을 우려했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스카이페 인터뷰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콕과 달리 지방 활동가들은 보다 높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문을 연 뒤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경제 개발을 내건 업체들의 이익과 주민들의 인권, 토지권이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소수 권력자들의 부를 위해 주민 인권을 희생시키는 정책이란 있어서는 안된다”

짐 라프란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수사를 통해 암살범 뿐 아니라 배후세력을 분명하게 처벌하여, 운동가들을 겨냥한 청부 살해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현직 군인들, 마피아들이 복합적으로 연루된 이 네트워크를 건드리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총잡이 요틴 테프리안(25)가 자수하고 7명의 혐의자가 체포되는 등 일단 초등 수사에 속도가 붙는 듯하다. 그러나 당국의 강력한 의지때문이라기 보다는 CCTV  덕분이라고 주민들은 싱겁게 받아들였다. 살해범이 타고 온 오토바이가 주차한 곳은 하필이면 (탁신의 친빈민 정책 하나였던) ‘빌리지 펀드 스킴’ (Village Fund Scheme) 사무실 근처 CCTV가 있는 곳이었다.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뭇사콘 경찰 서장 차이찬 푸라타나농 (41) 역시 이 부분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울러 차이찬 서장은 핵심 공모자 3인 중에 사뭇사콘 지방 내 ‘푸야이 반’ (‘마을 이장) 한 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통낙 사윀친다 (47) 살해 핵심 배후자 혐의를 받고 있는 석탄운송업체 대표 아무개씨(53).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 받은 뒤 그의 집을 수색하려는 경찰팀과 움직이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시스템의 실패다. 경찰, 군부, 지방 정부 등 관련 기관들의 총체적인 개혁은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절실히 요구되어 왔던 바다. 이번 사건을 수많은 범죄 사건 중 하나로 단순취급해선 안된다”

인권운동가 수나이 파숙은 총제적 개혁을 다시한 번 강조했다.

통낙 캠페인에 법률지원을 해왔던 단체, ‘지구온난화 반대’의 스리스완 잔야 변호사는 타이의 수많은 환경관련 법안들만 제대로 준수해도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관련 법안들은 주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공청회를 거치도록 명하고 있다. 토지 사용과 운송의 경우 통과 지역 환경과 공동체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함도 명시하고 있다. 뇌물에 약한 관련 부처들이 이런 조항들을 무시하고 있다”

2007년 군사 정권이 기안한 현행 헌법 역시 환경이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프로젝트는 승인전에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명시하지만 구체적 가이드 라인은 부재다.

이런 허점구조와 공무원 부패수준을 모를리 없는 업체들은 얄팍한 해결책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일례로, 아시아 그린 에너지는 8일 3일 보도자료를 통해,

“(29일) 중앙행정법원의 일시 중지 명령은 우리 회사에 적용된 것이 아니” 라고 운을 뗐다. 이어 “우리 회사는 페차부리, 촌부리, 아유타야 지방에 이미 석탄 저장고와 공장이 있음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객서비스를 할 수 있다” 고 밝혔다. 그러나 8월 10일, 이번에는 아유타야 지방에서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동을 텄다.

석탄, 가장 더러운 에너지

1992년 북부 람팡 지방 ‘매모(Mae Moh)’ 마을에 들어선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투쟁을 비롯, 타이 지방 주민들의 ‘대 석탄’ 투쟁은 사실 수 십년간 계속되어 왔다. 유황가스 불법 방출로 이후 10년간 약 120명의 주민 목숨을 앗아간 메모 발전소는 지금도 돌아가지만, 1995년 이래 7년 가까이 싸웠던 프로추압 지방 보녹 마을의 투쟁은 공장을 멈추게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이끌던 자른 악 왓슨이 살해당하는 댓가를 치뤄야했다.

통낙의 집앞에는 ‘석탄을 원치 않는다’ 딱지가 붙어있다. (Photo @ Lee Yu Kyung)

나사(NASA)의 지구 과학자 제임스 한센은 “문명과 지구 생물체에 단독으로 가장 위험한 물질” 로 석탄을 뽑았다. 그는 석탄 연료 공장을 ‘죽음의 공장’이라 표현한다. 2008년 “석탄 = 기후변화” 라는 구호를 걸고 타이 투어 캠페인을 벌인 바 있는 그린 피스는 석탄을 “가장 더러운 에너지”라 정의한다. 하여, 통낙과 수십명의 환경운동가들 그리고 수백명의 주민 목숨을 앗아간 ‘삽질’과 ‘검은 연기’가 더러운 에너지를 피워대는 한, 죽음의 공장에 대항한 주민 공동체의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뭇사콘(타이)= 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 위 기사는 <한겨레21> [2011.09.05 제876호] 게재된 기사의 긴 버전입니다. (한겨레21 기사 원문 보러 가기)

* 위 기사 관련 참고 자료들 :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multimedia/videos/video-archive/discover-the-plight-of-local-t/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multimedia/photos/greenpeace-launches-a-stop-glo/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news/features/decision-on-thai-coal-plants/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press/releases/accept-or-reject-on-polluting/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multimedia/photos/Thai-Coal-Plant-Protest/

http://www.greenpeace.org/international/en/news/features/thailand-coal-rainbow-warrior280708/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09/feb/15/james-hansen-power-plants-coal

http://www.hrw.org/news/2011/07/30/thailand-investigate-murder-environmentalist

기타 등등…

 


“휴가비요? 세상에나!”

[표지이야기2] 송끄란 등 연간 20일 공휴일에 대체휴가도 있는 타이…
휴가비는 못 받아도 휴가 기간이 늘어서 해외에 가고 싶은 나니

» 나니가 최근 다녀온 타이의 사판부리 사남슛 시장 입구에서 찍은 사진.(사진 제공 : 나니 린 / Photo by Nani Lin)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대만 회사의 타이지사에서 5년째 근무 중인 나니 린(28). 약 2만1천밧(약 75만원)을 월급으로 받고 틈틈히 타이-중국어 번역을 해 부수입도 짭짤한 나니는 타이 ‘중상층’이다. 1년에 3~7번은 당일치기든 2~3일간의 단기든 여행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휴가족이다.

타이는 우기·건기 외에는 계절 변화가 적어 한국처럼 딱히 여름휴가철이랄 게 없다. 남부 해변가나 북부 산악지대 등 갈 곳이 많아 국내 여행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하지만 일부 부유층이나 중산층 싱글 중심으로 중국·한국·일본 등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물가가 비싼 유럽 여행은 그리 흔치 않다.

연말, 송끄란 연휴는 7~10일

여름휴가 시즌은 없지만 쉴 수 있는 날은 많다. 따져보자. 어머니날(왕비 생일), 아버지날(국왕 생일) 등 타이에선 각종 왕실과 불교와 관련한 1일 공휴일만 1년에 20일이 넘는다. 공휴일이 주말과 겹치면 되려 좋다. 금요일이나 월요일로 대체해 휴일을 잃기는커녕 연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연말 연휴 3일, 타이 최대의 전통 행사인 타이력 정월 초하루(4월13일) 송끄란 연휴도 3일이다. 두 연휴 모두 직장별로 차이는 있으나 사실상 7~10일 쉬는 경우가 많다.

나니는 공휴일 외에 8일간의 정기 휴가가 있고, 병가와 각종 개인 잡무를 위해 쓸 수 있는 비번 휴가가 1년에 30일 이내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휴일은 많은데, 현 휴가 기간이 만족스럽진 않단다. “3일 이상 회사를 비우면 업무에 지장이 커요. 제 빈자리는 부서 매니저가 대신 채워주는데 3일 이상은 어렵거든요. 누구도 정기 휴가 8일을 한꺼번에 쓸 엄두를 못 내죠.”

길게 쓰지 못하는 정기 휴가는 송끄란과 연말 연휴에 붙여 7일로 만들어 쓰는 게 흔하다. 연말과 송끄란 연휴 두 기간에 타이 전역이 쉬기에 회사 일에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당일치기 여행이나 2~3일간의 단기 여행으로 휴가를 대신하는 건 흔한 일이다. 나니도 지난 7월9일, 친구네 가족 등 12명과 함께 방콕에서 멀지 않은 사판부리로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 봉고 한 대를 빌렸고, 친구 어머니가 점심을 준비해오셨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남슛 시장과 사원, 공원 등을 둘러본 그 여행에서 나니는 1천밧(약 3만5천원) 조금 넘게 썼다. 지난 1월에는 세라믹으로 유명한 콕퀘 섬도 다녀왔다. 연말에는 4일간의 연휴를 만들어 말레이시아를 다녀올 계획에 무척 설렌다. 나니에게도 달콤한 장기 휴가의 기억이 있긴 하다. 2008년 말 ‘달력 운’이 좋아 9일간 연휴가 가능했기에 타이 동부에 있는 섬 꼬창에서 7일 휴가를 보냈다. “마침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아 주문도 안 들어오던 때라 가능했다”며 웃는다.

너는 앞에, 나는 뒤에 붙이고

모두들 장기 휴가로 쓰고 싶어하는 송끄란, 혹은 연말 연휴 때 휴가 일정을 정하느라 갈등은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송끄란 연휴 앞에 며칠 더 붙여 쓰면, 다른 사람은 뒤에 붙이면 되는 거고. 전혀 문제된 적도 될 것도 없어요.” 나니도 정기 휴가 일부를 송끄란 연휴에 붙여 엄마와 남동생이 사는 대만에 다녀오는 데 활용하고 있다. “휴가비요? 세상에나, 그런 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나니는 휴가비보다는 휴가 기간이 늘어나길 더 원한다. 연휴가 길지만 엄마를 만나러 대만으로 가는 송끄란 연휴를 빼고 7일 이상의 장기 휴가가 가능하면 여유 있는 해외여행을 꼭 해보고 싶단다.

방콕(타이)=이유경 통신원

# 방콕 1년 평균 노동시간 #
2543시간(2003년·국제노동기구(ILO))

<한겨레> [2011.08.01 제871호] 게재. 기사 원문 보러 가기


“탁신 사면, 서두르지 않겠다”

타이 첫 여성총리 잉락
한겨레 등 외신 인터뷰

“지지층 레드셔츠 입각가능…
작년 유혈진압 군부 처벌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지난 3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타이 첫 여성 총리로 예정된 잉락 친나왓(44)의 행보는 지금 전세계의 주목 대상이다. 오빠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이나 지난해 탁신 지지층인 레드셔츠의 방콕 도심 시위를 유혈진압한 책임자 처벌 문제 등 새 정부가 결정할 사안에 따라 타이의 정국 향방은 크게 달라질 터다. 레드셔츠와 반탁신 세력인 옐로셔츠가 상징하듯, 양극화가 극심해진 타이에서 깊어진 계층갈등을 어떻게 풀지도 관심이다.

잉락이 8일 방콕 프어타이당사에서 주요 외신매체 30여곳과 한 인터뷰에 <한겨레>는 한국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참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오빠 탁신의 사면이나 레드셔츠 유혈진압 군인들의 처벌 등을 서두르지 않고 경제 문제에 우선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논란중인 ‘왕실모독법’은 개정하지 않겠지만, 악용되지도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정치 입문 두달밖에 안 된 신인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사전 질의서 없는 기자회견에도 그는 여유있게 답했다.

잉락 시나와트라. 타이 차기 여성 총리가 7월 8일 선별된 외신 30여곳과 인터뷰 중이다. (Photo by Lee Yu Kyung)

잉락은 도시빈민· 농민층이 주축이 된 레드셔츠의 지도부가 내각에 임명되느냐는 질문에 “내각 임명에 대해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면서도 “프어타이당 내외부 모두에게 장관직을 열어놓겠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의 강력한 정치적 배경이 된 레드셔츠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탁신의 사면·귀국과 군부 처벌을 두고서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군부 처벌에 대해 “전임 민주당 정부가 임명한 카닛 나 나콘 박사가 이끄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며 “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군인들에게 면죄부를 줄 것이냐는 질문에는 “섣부르게 사면을 하진 않을 것”이라며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고 답했다.

탁신의 사면에 대해서는 “그(탁신)는 나에게 자신보다는 국가와 사회 현안에 더 신경쓰라고 조언했다”며 처리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탁신의 아바타’일 뿐이라는 논란에는 “내가 탁신의 누이임은 사실이고 그의 좋은 아이디어를 긍정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면서도 “모든 결정은 우리가 독립적으로 국가를 위해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잉락은 옐로셔츠 등이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선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법에 따라 처리될 것”이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군의 쿠데타에 대해서는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군은 국민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옐로셔츠 시위 벌일 땐 법에 따라 처리”

잉락은 최저임금 인상 공약 등 포퓰리즘 논란을 두고선 “산업계 전반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 상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등과의 인터뷰에서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소비를 촉진해 경제성장이 빨라지는 효과도 있다”고 응답했다.

그의 포퓰리즘적 공약이 선거에서 먹혔다는 일부 시각과 달리, 타이 내 전문가들은 잉락 압승의 배경에 7%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한계상황에 몰리고 있는 도시빈민층 및 농민층의 생활과 지난해 시위 유혈진압과 관련해 민주당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그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외신들은 레드셔츠를 중심으로 “탁신 귀국과 군부 처벌이 무엇보다 선결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선거에 패배한 민주당은 8일 선거관리위원회에 프어타이당이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고 청원을 넣으며 프어타이당 해산 시도에 나섰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방콕/글·사진 이유경 통신원,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한겨레> 7월 9일자 게재. 기사 원문 보러 가기


타이, 심판의 날 이후

[세계] 레드셔츠 유혈 진압과 탁신 귀국에 대한 국민투표였던 총선… 군부와 기득권층이 선거 결과 또 무시하면 극단적 충돌 뻔해

“2006년 쿠데타 이후 기득권층이 벌인 행태에 대해 절반 이상의 유권자들이 대굴욕을 선사한 것이다.”

7월3일 밤, 총선에서 야당인 푸에아타이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윤곽이 드러나자 티티난 퐁수디락 쭐랄롱꼰대 교수는 촌평의 대가다운 논평을 날렸다. 그는 “이건 기득권층이 거부하지 못할 ‘뉴타일랜드’ 다”라고 덧붙였다.

7월 3일 방콕의 한 투표소. (Photo by Lee Yu Kyung)

투표하러 고향까지 간 사람들

친탁신 성향의 레드셔츠 내 좌파 진영의 짜이 웅파곤 전 쭐랄롱꼰대 교수는 좀더 급진적인 주문을 내놨다. “왕실모독법 위반으로 수감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유혈 사태의 책임자인 아누뽕 빠오찐다 당시 군 총사령관과 아피싯 웨차치와 민주당 총재 및 수텝 통수반 사무총장 등을 처벌하라. 쁘라윳 찬오차 현 군 총사령관도 해고하라.”

총 500석 중 262석을 얻은 푸에아타이당(민주당은 160석)은 쿠데타와 왕정주의자들의 반복된 개입과 당 해산에도 총선 4연승을 이룬 친탁신계 정당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격전지라 관심이 높았던 방콕의 경우 33개 선거구 중 23석이 민주당에 돌아갔지만 좁은 표차를 만들어내며 10석을 얻은 푸에아타이당의 선전은 간과할 수 없는 결과다. 주류 언론은 이번 선거를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을 중심으로 풀어갔지만, 푸에아타이당에 대거 투표한 농민과 빈곤층의 깨어난 정치의식은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다. 타이 고유의 전통 설날인 4월 송끄란 기간이 아니면 볼 수 없던 인구 대이동 현상이 이번 선거 기간에 나타난 것이 대표적이다. 버스 부족으로 선거 당일 오전 수천 명의 발이 묶이기도 했고, 기차 고장으로 귀향하지 못한 유권자들의 눈물이 현지 방송을 탔다.

“오늘은 심판의 날이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다시는 허용치 않겠다는 내 의사를 담아 1번을 찍었다. 탁신의 복귀는 별개 문제다.”

선적회사 대표인 아룬 키엥통(50)의 말처럼, 이번 총선은 두 가지 차원에서 국민투표적 성격이 강했다. 하나는 레드셔츠가 주장하듯 2006년 쿠데타와 지난해 레드셔츠의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벌어진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또 하나는 민주당과 반탁신계가 주장하듯 탁신 복귀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선거 결과로만 보면 과반의 유권자들은 탁신 복귀를 환영하거나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혹은 탁신의 부패보다는 군부와 기득권층의 정치 개입과 91명이 숨진 유혈 진압의 책임을 더 묻고 싶어하는 셈이다.

잉락 시나와트라. 탁신의 여동생이자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푸어타이당의 비례대표 1번 후보인 그녀는 타이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가 될 예정이다 (Photo by Lee Yu Kyung)

“푸에아타이당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민주당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군부도 타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민주적 선거 결과를 존중하길 바란다.” ‘탁신이 가급적 귀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부 수다랏(55)의 말도 푸에아타이당이 얻은 반사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잉락 시나와트라 차이 여성총리가 푸어타이 당의 압승이라는 선거 결과 윤곽이 드러난 7월 3일 저녁께 수백개의 국내외 언론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푸에아타이당도 이 부분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당 부총재인 카나왓 와신숭원(49)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막판까지 결정을 못한 시민 중 일부가 지난해 레드셔츠 유혈 진압에 대한 분노로 우리 당을 찍은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방콕은 타이 전역 77개 지방 중 하나일 뿐이며 방콕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방콕이나 지방이나 똑같이 취급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은 ‘반왕정주의’ 카드 꺼낼까

민주당은 탁신 정권의 친빈곤 정책을 베꼈다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에 반탁신 비방전에 집중해, 아피싯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진 총선 패배라는 부메랑을 만났다.

2010년 유혈 사태의 핵심 지역인 랏차쁘라송에서 열린 민주당 집회에서 수텝 통수반 사무총장은 레드셔츠의 폭력성만 부각된 비디오를 대형 스크린으로 반복 재생하며 “이곳에서 누구도 죽지 않았다”거나 “군은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는 등 선동적 주장을 펼쳤다. 아피싯 총재는 마지막 선거유세장에서 “이번 선거는 이 나라에서 탁신이라는 독을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분명한 의사표현에도 이번 선거가 지난 몇 년간 곪아온 타이 정치 분쟁을 종식시킬 것으로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텔레비전 채널 2개와 라디오 방송 수십 개를 소유하고 언론과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타이 군부의 향후 행보는 모든 이들의 관찰 대상이다. “만일 잉락이 타이 군부를 자유롭게 내버려둔다면 군부의 권력은 더 커질 것이고, (2006년 쿠데타 이후 50% 가까이 증가한) 예산도 더 요구할 것이다. 내 견해로는 이 가능성은 적다. 만일 잉락 정부가 군부를 향해 나름의 강력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군부는 잉락 정부에 위협을 가할 것이다.” 타이 군부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치앙마이 파얍대학 폴 챔버 교수는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군부의 향후 대응을 두 가지 가능성으로 분석했다. 폴 교수가 보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군부는 반잉락 세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거리시위를 유도할 것이고, 그런 시위대의 공격으로부터 잉락 정부를 보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친탁신 레드셔츠가 거리로 나와 반탁신 옐로셔츠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군부는 잉락과 레드셔츠 운동을 ‘반왕정주의자’로 몰아가며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다.”

7월3일 오후 푸에아타이당의 총선 압승이 확실해지자 당사로 모여든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실상 돌발 변수가 되기 쉬운 극우 세력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옐로셔츠의 다른 얼굴인 ‘국토보호 시민 볼런티어 네트워크’(일명 ‘멀티컬러셔츠’) 대표 툴시티솜월 박사는 탁신의 재산을 은닉한 혐의로 잉락의 수사를 요구하며 7월12일 ‘반부패위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테러리즘과 왕실모독법 고발 등에 걸려 수감 중인 레드셔츠 지도부이자 푸에아타이당 당선자인 자뚜폰 프롬판의 의원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탁신 사면에 대한 논의가 의회에서 진행된다면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식의 정책은 없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 결과에 따라 모든 이가 똑같이 대우받을 것”이라는 잉락의 반복된 답변에도 탁신의 복귀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의 귀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군부와 왕정주의 진영의 강력한 저항을 유발할 것이다.

“다시 뒤집으면 다음은 내전이다”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서거나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낀 캄보디아와의 국경 분쟁도 향후 배제할 수 없는 위기 변수다. 이 경우에는 타이 군부가 그동안 국내외 비난을 의식해 접어두었던 쿠데타를 정당화할 만큼 강도 높은 ‘비상사태’ 가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득권층이 다시 한번 민주적 절차에 개입해 유권자들의 선택을 뒤집어놓는다면 그다음은 내전이다. 레드셔츠와 푸에아타이당을 지지해온 이들은 지난 5년간 봐온 그런 개입을 더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타이 영자 일간지인 <더네이션> 기자 쁘라윗 로자나프룩의 이 말은 타이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다. 타이 사회는 지금 민주적 선거 결과를 수용하는 단순하고도 평화적인 해결책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 사이에서 불안하게 숨 쉬고 있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한겨레21> [2011.07.18 제869호] 게재. 기사 원문 보러 가기


붉은 열기로 가득한 타이 총선

[세계]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이끄는 푸에아타이당 지지 뜨거운 총선 현장… ‘푸에아타이-레드셔츠-탁신’ 3자 동맹 우세 속에 여전한 군부 변수

푸어타이 당 비례대표 1번 후보인 잉락 시나와트라가 같은 당 후보들과 함께 방콕 지하철 순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6월17일 아침 8시께 타이 방콕 시내 타일랜드 문화센터 전철역. 부정부패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44)과 그가 이끄는 제1야당 푸에아타이당 후보 20여 명이 나타났다. 경호원이 있는지 없는지 몰려드는 시민들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 전날인 16일 낮에는 카오산에서 붐자타이당 운동원이 괴한의 총에 맞고 사망해 충격을 주었다. 방콕과 인근 지방은 7월3일 치러질 총선의 최대 격전지이자 보안 당국이 경고한 최고 위험 지역이기도 하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중 속에 묻혀 사진 찍기에 바쁜 잉룩의 캠페인은 삼엄한 경비병을 달고 다니는 집권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 현 총리 팀과 대조를 보인다.

“탁신이 구상하고 당이 실천한다”

마침내 선거철이다. 총 40개 정당이 500개 의석(정당 투표 125개 포함)을 두고 각축전을 벌인다. 이 조기 총선을 치르려고 탁신 지지자인 도시 빈민층과 농민 출신의 ‘레드셔츠’(반독재민주전선·UDD) 약 1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가 유혈 진압을 당한 지 1년여 흘렀다. 그동안 지도부는 옥살이하거나 해외 도피 중이며, 레드셔츠는 급진화와 내분을 겪어왔다. 그러나 선거를 목전에 둔 요즘 레드셔츠의 다양한 정파들은 일단 푸에아타이당으로 몰려들 기세다. “기대가 크다. 오랫동안 기다려왔고, 유혈 사태에 대해 차근차근 규명되기를 바라기에….” 레드셔츠 강성 지역인 동북부 이산 출신 활동가 사라윳 탕 프라삿(42)이 전하는 현지 분위기다.

1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보석 석방된 지도부들은 거의 푸에아타이당의 비례대표 후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을 쿠테타로 몰아내고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총질한 이들이라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푸에아타이당과 손잡지 않으면 우린 살아남을 수 없다.” 지도부의 수감 생활 동안 레드셔츠 의장직을 맡아온 띠타 따본세뜨(66)는 푸에아타이당과의 연대가 ‘생존’을 위한 것이라 강조했다.

6월17일, 잉룩의 캠페인을 동행 취재했다. 타일랜드 문화센터 전철역 밖으로 나온 잉락은 오토바이 운전사와 악수를 하고는 그 오토바이에 자신의 캠페인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방콕의 좁은 길을 누비는 오토바이 운전사들은 대로의 택시 운전사들과 함께 대부분 레드셔츠 성향이다. “우리 당이 집권하면 예정된 지하철 노선을 조속한 시일 내에 건설하겠다.” 탁신 정권 시절 대중고속전철부(MRTA) 수장으로 지하철 프로젝트를 맡은 프라팟 총사구안의 말이다. 2004년 7월4일 지하철이 개통할 때 향후 6년 안에 터널 60km를 더 건설하겠다던 계획은 2006년 쿠데타와 정치 혼란 속에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6월 중순 잉락 팀은 방콕 방플랏 지역의 오톱(OTOP)을 방문했다. 오톱은 지역 특산품을 개발해 주민 경제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30밧(약 1100원) 의료제도’와 함께 탁신의 대표적인 친서민 정책으로 꼽힌다. (Photo by Lee Yu Kyung)

오전 지하철 순회에 이어 오후 3시. 잉락 팀은 방콕 방플랏 지역의 오톱(OTOP)을 방문했다. 오톱은 지역 특산품을 개발해 주민 경제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30밧(약 1100원) 의료제도’와 함께 탁신의 대표적인 친서민 정책으로 꼽힌다. 탁신 정권의 공과를 되새김질하며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푸에아타이당은 아예 캠페인 구호를 “탁신이 구상하고 당이 실천한다”라고 달았다. 그 오라비의 전설을 타고 정치 경험이 없는 잉락은 푸에아타이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등장했다. 푸에아타이당이 집권에 성공하면 그는 타이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다.

오후 5시. 차로 약 1시간30분을 달려 랏차부리 지방 선거 유세장에 이르렀다. 무대 중앙에는 ‘곧 여성 총리 탄생’이라는 플래카드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먼저 무대에 오른 건 나타웃. “나타웃 프롬판”이라고 소개하며 옥중에 있는 자투폰 프롬판과의 연대를 표한 그는 군중을 잘 웃겼다. 나타웃은 “작금의 연대는 ‘푸에아타이-레드셔츠-탁신’ 3자의 결속이고, 시국이 빚어낸 이 ‘생산물’을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오후 5시50분께, 잉락이 무대로 오르자 열광의 도가니가 펼쳐졌다.

“잉락 버 능!”(잉락 최고!) 지지자들이 주는 꽃을 한 송이씩 받아드는 그는, 비서가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면 밤새워 꽃을 받을 기세였다. 잉락은 저녁 8시30분 같은 지방의 반퐁 지구로 이동해 “나와 당과 잉락을 믿는다”는 구호와 장미꽃, 지지자들이 내미는 손에 다시 묻혔다. 그는 이미지 정치를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빡빡한 스케줄에도 얼굴에 피곤한 기운이 전혀 없다.

민주당 텃밭 방콕도 푸에아타이 우세

“잉락이 비례대표 1번을 단다고 했을 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지가 신선하고 젊어서 캠페인에 아주 효과적이다.” 생애 첫 투표라 설렌다는 학생운동가 출신 파이 술룩(25)의 말이다. “첫 연설 때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지난 6월18일 유세장에서 많이 변한 걸 보고 놀랐다. 맡은 직무에 잘 적응해가는 것 같다.” 진보적 온라인 매체 <프라차타이>에서 선거 취재를 담당하는 기자 핀파카 낭솜도 잉락의 변화에 긍정적 뉘앙스를 담았다.

핀파카를 놀라게 했던 지난 6월18일, 방콕 외곽 웅위안야이 지역에서 열린 푸에아타이당 집회에서 잉락은 각종 공약을 발표하며 정치 보복도 이중 잣대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사회의 빈곤층은 오랜 세월 병원 바닥에서 죽어갔다. ‘30밧 의료제도’를 도입한 탁신은 그 현상을 완전히 바꾼 사람이다. 내 생애에 그런 총리를 본 적이 없다.” 이날 유세 현장에서 만난 방콕 주민 찌라파르 밧사파누랏(65)의 말이다. 솜삭(67) 역시 “탁신이 타이 역사에서 최고의 총리였다”며 “잉락이 탁신의 여동생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는 지도자다”라고 덧붙였다.

잉락 친나왓 푸에아타이 당수가 지난 6월17일 타이 중부 랏차부리 지방 무앙지구 선거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옥외 캠페인에 주력하는 푸에아타이당과 달리 민주당은 온라인 캠페인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6월22일 오후 1시45분(현지시각)을 기준으로, 아피싯의 페이스북과 잉락의 페이스북은 각각 67만7887명, 14만156명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민주당은 유혈 사태 종반에 발생한 방콕 중심가의 방화를 선거 캠페인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선거 캠페인 의제와 방식이 어찌됐건,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푸에아타이당의 우세를 말해준다. 지난 6월17일 여론조사기관 ‘수안 두짓’의 조사 결과를 보면, 격전지로 꼽히는 방콕만 해도 52.05% 대 34.15%다. 민주당 강세 지역인 남부 분쟁주에서도 푸에아타이당의 선전 가능성이 제법 있다고 현지 전문가는 진단한다.

“민주당이 그들이 약속한 것을 전혀 이행하지 못했기에 주민들의 기대가 크지 않다. 대신 푸에아타이당을 대안으로 보고 있고 소규모 지역 정당들도 선전하고 있다.”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둔 전 기자 노이 따마(39)의 관전평이다. 노이는 “주민들은 이 지역 문제가 특정 정권보다 군부의 손에 달렸다는 걸 잘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장 안달이 난 건 군부다. 지난 6월15일 군 최고사령관 프라윳 찬 오차는 군부 소유의 <채널5> <채널7>을 통해 “좋은 후보에게 투표하라”며 “양심과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투표해야 이 국가와 왕정이 안전하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중도 성향의 티티난 풍수디락 출라롱꼰대학 교수는 “딱한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프라윳 사령관의 논평에는 그가 원하지 않는 선거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절박함이 담겨 있다. 2000년대 선거는 1970∼90년대 선거와 다르다. 정당들의 공약 이행이 일정하게 관측되고 있다.”

선거에서 이겨도 군부가 뒤집는다?

왕정주의자 조직인 반탁신 성향의 ‘옐로셔츠’(PAD·민주주의민중연대)는 ‘투표 거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지난 6월21일 선거관리위원회에 푸에아타이당의 해산을 요청하는 등 사실상 민주당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푸에아타이당의 승리를 장담하기는 이르다. 6월22일 여론조사기관 ABAC 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 30%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가까스로 제1당이 되더라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건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만일 푸에아타이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면, 취약한 정부를 유지하다가 2008년처럼 ‘기득권층’의 도움을 받는 민주당에 정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는 수란드 웨자지와의 분석이다. 싱크탱크 ‘시암 인텔리전스 유닛’ 국장인 칸 위안용(39)의 진단은 이렇다. “표퓰리스트 정책을 고려할 때, 푸에아타이당은 정당투표에서 유리하다. 하지만 선거구의 싸움은 가봐야 안다.” 다수의 열망대로 푸에아타이당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레드셔츠 지지세가 강한 타이 동북부 이산 출신 활동가 수라윳의 말은 레드셔츠들의 마음 한구석에 담긴 조바심과 회의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드셔츠의 지지를 받은 푸에아타이당이 집권 이후 기득권층과 화해할까봐, 나는 그게 가장 두렵다.”

방콕·랏차부리(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레드셔츠 지도자 인터뷰>>

코캐우 피쿨통 (Photo by Lee Yu Kyung)


“군부와 PAD가 민주당을 돕는다”

레드셔츠 지도자이자 푸에아타이당 비례대표인 콕케우 피쿨통은 6월22일 푸에아타이당사에서 이뤄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민중연대(PAD)와 군부가 민주당을 간접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PAD가 선거관리위원회에 푸에아타이당 해산을 요청했다.
푸에아타이당을 파괴하려는 음모다. 물증은 없지만 배후가 있다고 믿는다.

지난주 군 최고사령관 프라윳의 ‘좋은 후보에 투표하라’는 성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민주당을 간접적으로 돕는 성명이다.

PAD가 지금은 투표거부운동을 하지만 막판에 민주당 품에 안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PAD는 그럴 수 있다. 선거 전후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레드셔츠는 푸에아타이당이 정권을 잡은 뒤, 지난 2년간의 유혈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 없이 화해 절차를 밟을까봐 우려한다.
진상규명위원회는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인가.
처벌, 화해와 사면에 대한 건 또 다른 문제로서 사회의 여론과 상황에 달렸다.

아시아의 여성 정치인을 보면 딸이고, 아내이고, 누이이다. 당신 당도 그 모델을 밟나.
남편과 아버지가 정의롭지 못한 처우를 받을 때 여성이 그 뒤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탁신이 이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큰데도 불의한 방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만일 푸에아타이당이 정부를 구성한 이후 쿠데타나 사법부 판결 등으로 정권이 또 뒤집어지면 싸울 것인가.
시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한겨레21> 2011.07.04 제867호 발행. 기사 원문 보러 가기


고물가에 대처하는 세계 주부들의 자세

[특집]
한국ㆍ중국ㆍ일본ㆍ캄보디아ㆍ영국ㆍ독일ㆍ에콰도르 7개국 주부들의 생생한 물가불안 체험기

회사 앞 식당의 가격표가 많이 바뀌었다. 메뉴마다 500원씩 오른 게 기본이다. 정유사들이 ℓ당 100원씩 휘발유 가격을 내렸다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고물가 시대,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진다. 아랍권의 민주화 바람에도 빵값 등 식량값 폭등이 한몫했다. 멕시코에서는 주식인 토르티야의 원료인 옥수수, 인도에서는 카레에 많이 쓰이는 양파 가격이 인상될 때마다 국민의 불만이 치솟는다. 고물가 시대에 세계의 주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물론 캄보디아, 영국, 독일, 에콰도르까지 각국 주부들의 살림살이 모습을 알아봤다. 공식 수치에 나타난 물가상승률보다 몇 배는 더 껑충 뛴 물가를 체감하고 있었다. 먼저 서울 도봉구에 사는 주부 박현정씨의 장보기 동행으로 시작한다._편집자

캄보디아 주부 헹 로타. (Photo @ Lee Yu Kyung) 오른쪽 그래프 단위:%, 자료: 국제통화기금(IMF)

[캄보디아] “친정집에 얹혀살기로 겨우 버텨”

중산층 주부 헹 로타가 전하는 캄보디아 물가… 기름값과 고기류 제일 올라 “오르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아”

“버는 건 뻔한데 나가는 돈은 늘어만 가고. 정말 힘들어요.”

결혼 4년차, 두 살짜리 아들을 둔 헹 로타(23)는 소녀티가 나는 주부다. 남편 얘기만 나오면 행복한 표정이 줄줄 흐르는 새댁이다.

“옷가게를 제대로 해보려고요. 생계에 보탬도 돼야 하고.”

의상학원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헹 로타 (왼쪽). 로타가 배우는 의상은 캄보디아 여성들이 잔치때 입는 드레스 정장이다. 한벌 주문가가 약 40달러. (Photo @ Lee Yu Kyung)

친정 지원과 텃밭 채소 재배로 생활비 줄여

‘옷가게 프로젝트’를 위해 로타는 1년 과정 의상학원에 다니고 있다. 의상학원 등록금은 무려 180달러(약 20만원). 캄보디아 소득수준을 고려하면 적잖은 돈이다. 육아와 살림에 전념해온 로타는 6개월 뒤 의상학원을 마치면 옷을 만들어 팔 생각이다. 로타가 배우는 의상은 캄보디아 여성들이 잔치 때 입는 드레스 정장으로 한 벌 가격이 약 40달러니 주문만 잘 들어오면 수입이 괜찮다.

4월12일, 시엠리아프 시내에서 40km 남짓 떨어진 로타의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서니 개 서너 마리 다음으로 반기는 건 도요타 캠리다. 친정아버지가 1천달러를 보태주고 은행 융자를 받아 장만한 8천달러짜리 중고차지만 보물 1호다. 10년 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두 배 넘게 훌쩍 늘어 2112달러이고 초등교사 월급이 100달러, 식당 노동자 월급이 50~70달러인 캄보디아에서 로타네는 중산층에 가깝다. 기술자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은 100달러다. 남편은 중고 오토바이 매매 등을 해 월 최소 200달러는 벌어온다.

“매월 은행 융자 180달러를 갚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아직 여덟 달이나 남았는데.”

야채 중심으로 파는 식품점에서 로타는 간장과 젓갈만 각 한 병씩 샀다. 야채는 물가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지출하지 않는 품목이다. 간장 젓갈은 각각 300 리엘씩 올라 총 3000 리엘 (820원)을 지불했다. (Photo @ Lee Yu Kyung)

로타네가 융자를 갚고 남은 몇십달러로 버티는 비결은 친정집에 얹혀살기다. 60명의 인부를 두고 농사를 짓는 부모님 덕에 쌀값은 들지 않는다. 이 덕에 로타 부부가 지출하는 건 약간의 먹을거리와 닭 모잇값, 그리고 하루 1달러 미만의 오토바이 기름값 정도다.

“지난해 기름값이 1ℓ당 3500리엘(약 959원)이었는데, 약 5개월 전부터 4500리엘로 올랐어요.” 물가가 가장 많이 오른 품목으로 로타는 기름값을 꼽았다. 물가 상승을 뼈저리게 느끼는 품목을 묻자 고기를 꼽았다. “체감 상승폭은 두 배예요!”

“옷을 안 사요. 채소도 밭에서 키운 걸로 대충 때우고.”

오전 10시30분께. 더 더워지기 전에 장에 가야 한다며 로타가 방과 부엌을 들락거린다.

“쇠고기와 생선은 500g만 사고 케이크 두 개, 바나나, 생강, 주스, 콩, 젓갈, 간장….”

꼼꼼하게 적힌 쇼핑 품목을 위에서부터 다시 훑는다. 역시 채소는 없다. 캄보디아 최대 명절인 ‘쫄 츠남’(캄보디아의 설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건만 시장은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옆 나라 타이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느라 전기요금이 비싼 시엠리아프 지방에는 냉장고 없는 가정이 다수다. 하루에 두 번 장터를 다녀가는 게 흔한 까닭이다. 장터를 도는 로타는 깎아달라고 조르진 않았지만 이따금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장에서 돌아온 로타와 가격을 비교해봤다. 우선 6천리엘 하던 생선 500g이 오늘 9천리엘이었고, 케이크는 두 봉지는 5천리엘에서 7천리엘로 올랐다.

명절이라 두 배 또 오른 물가

“바나나는 딱 두 배 올랐어요. 한 묶음에 1500리엘이었는데 오늘은 3천 리엘이나 하잖아요!”

총 4만5천리엘을 지출했다. 명절만 아니었다면 2만리엘로 때울 수 있었단다.

“명절이라 또 오른 거예요. 설 연휴가 지나면 물가가 내려가야 하는 거잖아요? 오르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아요.” 2년 안에 분가하려는 로타 부부의 계획은 로타의 옷가게 프로젝트에 달린 듯하다.

시엠리아프(캄보디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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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찌마는 초등학교 6학년

[2011.03.25 제853호]

[창간 17돌 기획] 헤어드레서를 꿈꾸는 캄보디아 소녀 찌마의 걱정
“가족의 건강과 부족하기만 한 물·음식”

분홍 손목시계가 비눗물 범벅 대야 속을 휘젓고 다녔다. “방수되는 거예요.” 시계가 비눗물에 젖는 걸 걱정하는 기자에게 “노 워리!”라고 안심시키며 빨랫감을 비벼대는 라 찌마. 찌마는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 초청으로 2010년 4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시계는 그때 받은, 자랑하고픈 선물이다. 시엠리아프 빈민가, 톤레사프 호수 인근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온 다일공동체에서 찌마는 3년째 밥을 먹고 있다.

열일곱살 찌마 (사진 앞줄 가운데) 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같은 반에서 늦깎이 공부하는 17살 왕언니 세명 (사진 앞줄)이 심드렁하게 앉아 있다. (Photo @ Lee Yu Kyung)

10살부터 17살까지 한 반에

3월12일, 찌마를 따라나섰다. 아침 6시30분에 찌마의 집을 떠나 약 15분을 걸어가니 ‘프놈크롬수원 초중학교’에 닿았다. 7시부터 30분간 운동장 체조, 7시40분 1교시 시작. 첫 시간은 크메르 문학 시간이다. 찌마는 1994년 10월4일생이다. <한겨레21>과 동갑내기인지라 고등학교 1학년쯤 다닐 법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생이다. 6학년 오전반에는 10살, 11살, 12살, 13살…, 17살 먹은 왕언니 3명까지 40여 명 급우들의 나이가 참으로 다양했다. “괜찮아요. 잘 어울려 놀아요.” 찌마는 여러 해 휴학기를 거쳐, 몇 년 전 이주해온 시엠리아프에서 초등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가족이 아플까봐 고민이고, 먹을 게 넉넉지 않아 고민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저녁을 못 먹어요.”

캄보디아 소녀 찌마. (Photo @ Lee Yu Kyung)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운전사로 일하는 아버지의 월급이 50달러(비수기는 40달러), 다일공동체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월급이 60달러, 이렇게 총 100~110달러(약 12만원)에 찌마네 아홉 식구의 생계가 달려 있다. 저녁 밥상을 할 수 없이 건너 뛸 때면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얘들아, 점심을 많이 먹었잖니.”

토요일은 다일공동체 점심이 쉬는 날, 찌마가 집에서 조촐한 점심을 먹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찌마의 답변은 자꾸 먹을거리로 흘렀다. 17살이 좋은 것은 “별로 없다”. 17살이 나쁜 건? “괜히 철만 더 들어 가족 건강과 먹을거리 문제에 대한 걱정”이 커졌단다. 그러다 고민 하나를 더 털어놓는다. 크메르어 받아쓰기가 조금 어렵고 역사책을 읽을 때 이해 안 되는 단어들이 튀어나온단다. 하지만 학교 생활은 만족스럽다.

오전 10시. 둘째 시간이자 마지막 수업인 사회 시간. ‘제40장, 농민과 노동자’라는 주제를 칠판에 적은 선생님이 캄보디아 1500만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과 농업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농민은 정직합니다. 서로 협력해 열심히 일하고….”

초등학교 6학년 크메르 문학시간. 한 여학생이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 (Photo @ Lee Yu Kyung)

쉬는 시간. '공기놀이'하는 학생들 (Photo @ Lee Yu Kyung)

괜스레 연상되는 건 급진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루주다. 1975년 4월 ‘농민이 주인 되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품고 수도 프놈펜으로 진군해, 인민들을 강제 노역장으로 이주시키고 지식인의 씨를 말렸던 학살자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살아남은 이들과 후세대의 생존 투쟁은 여전히 지루하고 눈물겹다.

깨끗한 화장실을 갖고 싶어

찌마에게 물었다. 사회에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화장실이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싶어요. 먹을거리도 넉넉하고 깨끗한 물도 콸콸 나왔으면 좋겠어요. 우리 동네는 일곱 가족이 펌프 하나를 공유해요. 그나마 우리는 (20ℓ에) 1달러짜리 저 물이라도 사 먹지만, 톤레사프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마실 물 문제가 심각해요.”

헤어드레서가 되고 싶은 찌마는 대학도 가고 싶단다. 대학까지 마치고 나면 30살이 되는데? 반문하니,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음… 그렇다면 대학보다는 헤어드레서 되는 게 더 중요해요. 아버지가 미장원을 차려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은 꼭 따야겠어요.”

시엠리아프(캄보디아)=글·사진 이유경 분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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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복 군사독재’ 완성?

[세계] 부정선거로 얼룩진 버마 총선…
군부의 영구집권 시나리오에 맞설 야권의 정치력과 민주 진영의 전술 부재 시험대 올라

“선거의 전 과정이 날조다. 이른바 ‘사전 투표’(부재자투표의 일종) 부정 때문에 (상·하원과 지방의회 전체 1159석 가운데) 16석밖에 못 얻었다.”

지난 11월7일 버마(미얀마)에서 20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최대 민주 야당’으로 주목받은 민족민주세력(NDF) 대표 킨 마웅스웨는 9일 밤 전화 인터뷰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불과 이틀 전 투표가 진행 중이던 오후께만 해도 여유와 자신감을 보였었다.

이번 선거에서 보이콧 입장을 취한 민족민주동맹 (NLD) 랑군 본부. 선거 운동 기간 NLD는 보이콧 '선언' 이상의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벌이지 못했다는 평이다. (Photo @ Yu K. Lee)

“아시아권 최악의 부정선거”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총선 보이콧(선거 거부)을 선언하자 당을 깨고 나온 그는 NDF를 창당하고 선거에 참여했다. 그가 애당초 기대한 50~70% 당선률은 과대망상만은 아니었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버마의 민심은 소수민족주를 제외하면 NDF를 찍겠다는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NDF지! 많은 사람들이 그 당은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을 할거라고 믿으며 좋아해.” 서른 중반의 랑군 시민 틴 마웅(가명)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선거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 여사(아웅산 수치) 당은 출마를 안 했단 말이야! 그 당이 출마했으면 당연히….” NLD의 보이콧을 아쉬워하는 틴 마웅의 말엔 수치의 인기가 배어 있다. 결국 그가 찍은 NDF 후보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전 투표함’에 밀려 낙선됐다. 틴 마웅은 “매우 혼란스럽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랑군 시민은 “군정이 미는 연방단결발전당(USDP)을 찍겠다는 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하나같이 그 당을 혐오한다. 투표에 관심 있는 이들은 모두 NDF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투표소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고, 한 투표소에서는 투표를 진행할 공무원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며 선거 당일의 풍경을 전했다.

대중의 열망을 결집시키지 못한 NLD

1990년 총선에서 NLD가 거둔 83%의 압승 기록에 도전하려는 군정의 권력 1인자 탄 슈웨(77)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 의장의 야심은 익히 알려졌다. 최종 개표 결과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채, 11월9일 오후 USDP는 ‘고참 당직자’라는 익명을 빌려 ‘80% 압승’을 언론에 흘렸다. 이 여당의 압승으로 탄 슈웨의 야심은 현실화된 셈이다. 1997년 이래 아시아 국가의 선거를 감시해온 아시아자유선거네트워크(ANFREL)의 사무국장 솜싯 하나눈타숙은 투명성·공정성·자유성 차원에서 이번 선거는 아시아권에서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군정이 우리 감시단의 모니터를 허용했더라도 거부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NLD와 망명 단체들이 주도한 선거 보이콧이 국제사회에 미친 파급력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2010년 11월 13일 7년간의 가택연금을 마치고 석방된 아웅산 수치는 여전히 높은 지명도와 인기를 국내외적으로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석방된 아웅산 수치가 버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이상의 전술적 노련함을 보일지, 분열된 야권과 영구집권 체제를 공고히 해가는 군부에 어떻게 맞설지 전면 물음표로 남아 있다. 사진은 2008년 6월 19일 가택연금 중이던 아웅산 수치의 63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NLD 랑군 본부에 모여든 당원들의 모습. (Photo @ Yu K. Lee)

보이콧에 동참한 랑군의 변호사 우아웅탄의 말처럼 “‘군사헌법’이나 다름없는 2008년 헌법에 기반한 이번 선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은 민주주의의 원칙에서나 군정 시나리오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나 옳고도 남는다. 그러나 군부의 영구 집권 시나리오에 맞설 야권의 정치력과 민주 진영의 전술은 선거를 전후로 분열과 무기력 증세를 보이며 시험대에 올라 있다.

보이콧 진영을 들여다보자. 버마 내부에서 보이콧을 주도한 건 ‘세대물결’이라는 신생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활동가 보보(가명)는 “페인트 스프레이로 ‘2010’이라 쓰고 그 위에 ‘×’를 그은 다음 바로 흩어지는 게릴라 전술”로 선거의 부당함을 알려왔다. 보이콧의 상징이던 NLD는 실상 선거를 전후해 카페·이발소 등에서 정치를 주제로 대화와 토론이 벌어지는, 전에 없던 기현상의 틈새를 파고들지 못했다. 보이콧을 ‘선언’만 했을 뿐 ‘캠페인’으로 상승시키지 못한 무기력은 선거 당일 랑군의 NLD 본부 앞에 걸린 현수막이 보여주었다. 이날 당사 앞에는 ‘보이콧’ 석 자나 군정의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글자 대신 “5일 남았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석방되기까지는”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한 사람에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분파 야당 NDF도 선거를 통해 제도정치권으로 들어가 변화를 모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을 것이다. 군정이 민주세력에 호락호락 공간을 내줄 리 없다.” 망명 언론 <이라와디>의 편집장 아웅 조의 지적이다. 11월13일 석방될 것으로 보이는 수치가 분열된 야권과 ‘민간복 군정’을 어떻게 상대할지는 물음표로 남아 있다.

기대한 득표율에 턱도 못 미친 민주 야당 NDF로서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친군부 의회와 ‘배신자’라는 낙인 사이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의회정치에 들어서게 됐다. 짧은 시차를 두고 가진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표 킨 마웅스웨가 다소 오락가락하는 발언을 한 건 종잡을 수 없는 작금의 버마 정치나 야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소수민족 저항으로 국경엔 ‘전운’

한편, 영구집권 시나리오로 집대성한 군정의 2008년 신헌법은 반세기 넘게 자치를 걸고 싸워온 소수 민족 진영에 지속적 반향을 낳고 있다. 신헌법 7장 338조에 따라 휴전 무장단체를 국경수비대로 전환해 버마군의 단일명령 체계하에 두려는 군정의 압박은 여러 해 잠잠하던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의 결집 현상을 낳고 있다. 선거 당일부터 사흘간 국경수비대 편입을 거부하는 소수민족 반군‘민주카렌불교도군(DKBA) 5여단’의 관공서 공격으로 타이-버마 국경 인근 미아와디 등에서 정부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버마인 2만여 명이 타이로 피난을 떠난 사태가 그 한 토막이다.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버마 민주화도 분쟁 해결도 없다는 해묵은 공식이, 야권은 분열하고 소수민족 반군은 결집하는 복잡한 버마 정세 속으로 새삼 파고들고 있다. ‘민간복 독재 시대’로 향하는 버마 군정은 국경의 전운을 만나고 있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킨 마웅스웨 NDF 대표 인터뷰>

“선거 보이콧보다 빈곤 해결이 우선”

킨 마웅스웨(68) 민족민주세력(NDF) 대표는 지난 11월9일 전화 인터뷰에서 아웅산 수치의 선거 거부를 비판하고, 의회에서 버마의 변화를 이루겠다고 강조했다.

 

» 킨 마웅스웨(68) 민족민주세력(NDF) 대표 (사진출처 : 미즈마 닷컴)

-민족민주동맹(NLD)이 선언한 선거 보이콧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소용없는 전술이었다. 시민들이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느 시민이나 투표할 권리가 있다.

-국제사회는 대체로 보이콧에 동정하거나 찬성했는데.

=국제사회는 버마인이 직면한 빈곤이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염려해야 한다. 그게 버마인에게 더 이익을 줄 것이다.

-선거에 참여한 걸 후회하진 않나.

=전혀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의 열망을 갖고 우리 당에 표를 준 유권자에게 미안할 뿐이다.

-군정에 유리한 헌법과 선거법하에서 선거에 참여하는 의미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국민의 이익을 위해 불공정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민주주의란 게 피상적인 주제가 아닌가. 빈곤 문제를 가급적 빨리 극복해야 한다. 앞으로 10년, 두 번의 선거는 지나야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의회에서 제기할 첫 번째 의제는.

=조건 없는 정치범 석방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이며, 첫 5년은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이 모든 건 민주주의를 향한 지난한 과정이다. 우린 더 이상 군사정부의 지배를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수립해야 할 과제가 많다.

-또 다른 군인들의 정당인 민족단결당(NUP)과 같은 야당으로서 손을 잡을 수 있나.

=사안에 따라 그럴 수 있다. 정당 자체가 아니라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이 우리 적이다.

-아웅산 수치에게 기대하는 바는.

=그는 전 동료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이지만 내가 몸담은 정당의 지도부는 아니다. 민족 화해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싶다.

-거리시위 풍경은 이제 없어지는 건가.

=무엇을 위해 또 거리에 나서겠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지만 별다른 변화를 낳지 못했다. 의회에서 현안을 해결하는 데 주력하겠다.

 

<한겨레21> [2010.11.19 제836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495.html


스리랑카 반정부 언론인 ‘강제실종’

지난 9월 3일, ‘여성 대통령’으로 한때 스리랑카 정치권을 풍미했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전 스리랑카 대통령은 비판적 일간지 <선데이 리더>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 앞으로 ‘화이트 밴’을 보낼까봐 두려워 답을 못하겠다.”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을 두 문장으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전직 대통령조차 현 정권과의 불편한 심기를 ‘화이트 밴’으로 표현할 만큼, 스리랑카에서 화이트 밴은 단순히 ‘흰색 봉고차’가 아니다. 그건 ‘강제실종’과 거의 동의어처럼 이해되는 ‘납치’의 대명사이며 국가 폭력의 상징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차량을 세워 검문하고 있다. 콜롬보는 물론, 동북부 타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납치와 강제 실종의 ‘천국’이다. 마을의 한적한 길가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섰지만, 납치차량이 잡힌 적은 없다. (Photo @ Yu K. Lee)

 

스리랑카의 강제실종 역사는 깊다. 타밀반군과의 내전과정에서는 물론, 1970년대 초와 1980년대 후반 극좌민족주의그룹인 인민해방전선(JVP)의 무장 반란 당시에도 수만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실종자 문제를 다루던 인권변호사 라자팍세는 2005년 말 대통령이 되어 ‘번호판 없는 화이트 밴’을 가동, 강제실종의 역사를 적극 이어가고 있다.그가 집권한 이래 지금까지 콜롬보에서만 대략 600명이 실종되었고, 동북부 타밀 지역은 콜롬보 수치의 4배가 넘는다고 인권단체들은 보고 있다. 가장 심각한 북부 자프나 반도가 약 20m당 한 명꼴로 군이 배치된 곳임을 감안하면 납치의 배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타밀 반군으로 자동 인식되는 수많은 타밀 젊은이들이 무작위로 실려갔고, 그리고 언론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협박, 납치, 실종, 살해 등에 노출된 언론인들에게서는 무작위성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좀 더 도드라진다.

1990년 이래 정부와 타밀 호랑이 반군 간에 있었던 네번의 휴전협상 전 과정을 취재한 베테랑 타밀 기자 나데사필라이 비타야탈란. 그는 지난해 2월 26일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사복, 경찰복 무리들에게 끌려갔다. 국제사회의 유례없는 압력으로 2개월 만에 풀려난 그가 증언하는 ‘흰색 봉고’의 세계는 이렇다. “나를 차 안으로 밀어넣자마자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묶고는 차 바닥에 눕혀놓고 달렸는데….”

국제사회 압력으로 2달만에 풀려나
15분 가량 흘렀을 무렵 차 안 라디오 뉴스에서는 비타야탈란 기자 납치를 목격한 이는 119로 제보하라는 경찰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가 납치당하고 있음을 경찰이 공개적으로 확인해 준 셈이다. 모처에 도착해 발가벗기고 눈은 여전히 가려진 채로 3~4시간 구타와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납치범 중 한 명이 “실수로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며 그를 다시 차에 태웠다. “두번째 차량에서는 눈가리개를 풀어줬는데, 며칠 전 취재차 만났던 경감 2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실려간 곳은 ‘4층’, 고문의 대명사인 범죄 수사국(CID)이었다. 거기서 비타야탈란 기자는 “연행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납치되기 5일 전 타밀 호랑이 반군이 콜롬보 중심가를 공격했던 자살공습에 공모했다는 것이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친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세 국방부 장관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혐의에 대한 확신이 넘쳐 비타야탈란 기자를 테러리스트라 단정했다. 고타바야 장관은 2009년 1월 2일 암살당한 <선데이 리더> 편집장 라산다 위크레마퉁가를 ‘타블로이드 기자’라고 비하하기도 있다. 국경없는 기자단 선정 ‘언론자유 약탈자’ 명단에 올라 있는 그의 지휘 아래 국방부 사이트에는 ‘국가의 배신자’로 찍힌 언론인들이 실명으로 오르곤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협박 전화와 ‘화이트 밴’ 공포가 해당 언론인들을 휘감는다. 자유언론운동(FMM)의 대표였던 언론인 수난다 데샤프리야도 그 명단에 올라 협박에 시달리다 지난해 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스리랑카 북부 마을 골목에 지키고 선 스리랑카 군인 (사진 왼쪽) 산디야 에카날리야고다(사진 오른쪽)의 남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올 1월 실종된 이래 아직 소식이 없다. 전쟁 당시 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자료를 모아온 그의 행적과 반정부 성향이 실종의 주 원인인 것으로 동료 기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은 보고 있다.(Photo @ Yu K. Lee)

 

이례적으로 풀려난 비타야탈란 기자와 달리 올해 초 실종된 언론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지금 실종 1년을 채워가고 있다. ‘랑카 이 뉴스’(Lanka eNews)에 만평과 글을 기고해온 그는 대선 이틀 전인 지난 1월 24일 오전 7시 30분,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선거 취재를 떠난 이래 돌아오지 않고 있다.

프라기트는 범 야당 후보였던 사라 폰세카 전 군 총 사령관 캠프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대선에서는 타밀 정치인들조차 울며 겨자먹기로 폰세카 후보를 지지 할 만큼 스리랑카 야권은 라자팍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폰세카 후보를 지지하는 언론에는 여지없이 협박이 가해졌다. 그런 이유로 주간지 ‘랑카’는 일시적 폐쇄를 당했고, 편집장 샨다나 시리말와트는 경찰 조사에 자주 불려다녔다.

실종 1년째 행방 묘연한 기자도

한편, 프라기트의 실종에 대해 아내 산디야와 동료 언론인들, 인권단체들은 그의 반정부 성향은 물론, 지난 몇년간 타밀지역 전쟁터에서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자료를 집중 추적해왔던 점을 실종의 주 원인으로 보고 있다. 프라기트는 지난 해 8월 납치당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 당시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 납치범들을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화학무기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군내 고발자와의 교신내용을 집중 추궁받았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랑카 이 뉴스’ 편집장 산다루완 세나디라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 군인 역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리고 경찰의 추궁과 협박전화를 받아온 산다루완 그 자신도 지난 3월 결국 스리랑카를 도망쳐 나왔다. 프라기트의 가까운 동료인 디스넨드라 페레라 역시 지난 5월 31일 집으로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 여러차례 살해 협박을 받아온 페레라 역시 이날 괴한들로부터 프라기트와 공유한 화학무기 관련 자료를 추궁받았다고 전했다.

“납치되기 약 일주일 전, 남편이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어 사연을 물었다. 모 장관의 비서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프라기트의 아내 산디야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프라기트에게 ‘경고’한 모 장관 비서 이름을 알렸지만 수사에 별 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고타바야 국방부 장관,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프라기트는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자작극을 벌이는 중”이라고.

프라기트는 어디 있나? 당뇨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아내는 확신한다. 2년 전 실종된 형이 여전히 어느 수감소에 갇혀 살아 있을 거라 굳게 믿는 타밀 청년 엥가란 비나야감(24)처럼. “남편은 내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밤낮 캠페인 벌일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때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산디야의 자신감에 찬 말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의 검문소들. 소수 타밀족과 언론인을 포함한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해온 납치차량 화이트 밴은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전쟁 이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검문소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 언론인 협박, 실종은 전후에도 여전히 드리운 스리랑카의 암울한 모습이다.

스리랑카 콜롬보|이유경 <국제분쟁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Published by <Weekly KyungHyang> at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011101604081


죽어도 떠나는 사람들

[세계]물에 빠져 죽고 돌아와 맞아 죽어도 스리랑카를 탈출하는 보트피플…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타밀족 난민 인정을 회피해

글 싣는 순서

1회: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2회: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3회: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 아래 기사는 지면관계상 실리지 못한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

“엄마가 죽었어”

‘내가 바로 그 아무개 기자…’ 라며 소개하는 필자에게 수젠드란 구나세카람(27)이 ‘대뜸’ 건넨 첫 인사가 딱 그랬다. 20대 후반 청년이라기 보다는 울음보 터지기 직전의 어린애 같았다. 그럴만도 했다. 지난 해 10월 초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향하는 난민밀항선에 올랐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로 돌아온 건 오로지 엄마의 병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외아들은 공항에서부터 연행되었고, 고문실의 상징인 “4층”, 범죄 수사국(CID)과 악명 높은 부사 캠프로 이송되며 고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올해 1월 풀려났다. 지난 해 연행 소식을 듣고 필자는 수젠드란을 원거리 취재하며 간간히 교신해왔다. 고문 후유증과 여전한 협박을 견디며 엄마를 간호해왔는데, 귀국의 이유였던 엄마는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살.

4년간 이어진 휴전이 어긋나며 전쟁이 고조되던 2006년 이래 타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납치와 고문의 위협에 노출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각종 브로커선을 타고 인근 국가로 빠져나왔다. 인도계 타밀족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는 소통의 어려움도 덜 겪고 잘하면 일자리도 얻을 수 있는 ‘선호국’이다. 수젠드란도 2009년 6월 말레이시아로 갔다. 거기서 밀항선박 브로커를 만나 10월 초 난민선박에 올랐던 게다.

수젠드란은 난민 밀항선에 올랐다가 호주정부의 보트난민 거부대응으로 인도네시아에 정박했다. 우여곡절끝에 스리랑카로 돌아간 그를 기다린 건 구속과, 고문이다.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난 그지만 여전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젠드란 처럼 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의반 타의반 귀국하거나, 강제 송환된 수많은 난민 신청자들이 실종, 체포, 고문의 위협에 노출된 게 스리랑카의 전후 현실이다. (Photo @ Yu K. Lee)

그는 말레이시아 남부 도시 조호루바루(Johor Baru) 인근 정글에서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달가량 숨어지내던 253명의 또다른 타밀난민들과 함께 제야 레스타리(Jeya Lestari)호에 올랐다. 그런데 열흘도 되지 않아 배가 엔진고장을 일으켰다. 많은 짐들을 바다에 버렸고, 인도네시아에서 엔진을 갈려던 참에 해군 경비정에 걸렸다. 자바섬 끝자락 메락(Merak)에 강제로 정박한 난민들은 이때부터 시위를 벌였다.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스리랑카에서 살수 없다”, “호주가 아니면 내리지 않겠다”

그 즈음 78명의 타밀난민을 태운 또 다른 배 한척이 조난을 당해 호주해군이 구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군은 구출한 난민들을 호주가 아닌 인도네시아 영해로 데리고 갔다. 당시 호주 총리 캐빈 러드는 난민 배를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대통령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 ‘돈을 댈테니 인도네시아 손에서 해결하라’고, 이른 바 ‘인도네시아 솔류션’ (Indonesia Solution)이다. 수많은 난민들이 세월 모르고 갇혀 있는 인도네시아 빈탕 섬의 탄중 피낭(Tanjung Pinang) 수용소는 그렇게 난민들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로 지어진 것이다.

난민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

타밀 난민들에 대한 국제적 혐오반응은 머나먼 캐나다까지 이어지고 있다. 8월 13일 캐나다 벤쿠버에 도착한 난민선박 MV Sun Sea 는 도착하기 전부터 캐나다와 미국의 모니터 망에 걸려들었다. 492명을 태운 이 밀항선은 3개월 전 타이 남부 송클라항을 출발해 단 한명만 목숨을 잃은 기적같은 항해를 치뤘다. 캐나다 영해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지 방송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던 이 선박을 두고 캐나다 공공안전부 장관 빅 토우(Vic Towe)는 “테러리스트와 인신매매단이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스리랑카 정부의 프로파간다까지 더해지면서 ‘테러리스트 보트’가 언론을 달궜다. 스리랑카 전쟁 막바지 콜롬보 유엔 대표부 대변인을 지낸 골든 와이스는 이와 관련, 캐나나 일간지 ‘메일 엔 글로브’(Mail and Globe) 8월 28일자 기고문을 통해 “누가 보트피플이 안보를 위협한다고 말하는가”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냉정히 말해보자.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주의 경우 돈 있는 이들은 미화 4만 달러를 주고 가짜 비자를 여권에 박아 비행기를 타고 간다. 그게 안되는 이는 1만 6천 달러를 주고 보트를 타지만 그마저 없는 이들이 투성이다. 보다 더 높은 수치로 공항에 도착하는 이들은 감금생활없이 난민심사를 받는 반면, 보트피플들은 온갖 인종주의적 수사(修辭)에 직면함은 물론, 난민 심사기간 이민국 수용소에 갇혀 지낸다. 올해 초 알자지라는 호주에서 보트피플 중 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한해 평균 200명에 불과하고, 비행기 타고 온 이들은 평균 2,200명이 난민으로 인정받는다고  전했다. 이에 반해 주로 영어권 출신 관광객인 주를 이루는 장기불법 체류자는 약 5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정부의 보트피플에 대한 제노포비아적 반응은 올해 4월 보트피플의 다수를 이루는 스리랑카 난민과 아프간 난민(절대 다수는 소수 하자라족)들 난민 심사를 각각 3개월, 6개월간 중단하는데 이르기도 했다.

이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보트난민들이 ‘죽어도’ 호주나 캐나다등에 닿길 원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이 스리랑카를 탈출하면서 도착하는 말레이시아, 타이,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 등은 제네바 난민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보호는 커녕 대량구속과 본국강제송환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지난 10월 6일 방콕 북부 사판마이 지역에서 130명 가량의 스리랑카 타밀난민들이 대거 연행된 건 좋은 본보기이다. 일부 언론은 “또 다른 타밀난민들이 보트 탈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방콕내 캐나다 정보국의 팁으로 단속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방콕의 유엔난민기구(UNHCR) 키티 맥킨시 대변인은 <한겨레21>과의 전화 통화에서 2달된 아기까지 연행한 이 단속을 강하게 비판했다.

“18명이 4살 미만 어린이고, 4명의 임산부도 끼어 있다. 밀항 브로커 조직을 단속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작금의 단속은 밀항 브로커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 진짜 난민과 불법 이주자를 구분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연행되는 난민들이 갇히는 방콕 이민성 감옥에는 ‘7년 장기수’가 있고, 인도네시아 난민 수용소에는 ‘10년 장기수’가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인정한 난민카드를 지니고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스리랑카 난민들은 전 세계 24개 국가들이 난민들의 재정착을 받아주는 이른바 ‘난민 제 3국 정착’ 프로그램에서도 찬밥이다. 타밀 호랑이 반군이 전 세계 32개국에서 테러리스트로 찍힌 효과는 그들의 사후에도 지독하게 적용되고 있다.

두 달 된 아기를 단속하기도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향하는 난민선에 오르기 직전 단속에 걸렸던 타밀 젊은이들. 그들은 '다음 배'를 기다린다. 수많은 난민들이 항해길에 물에 빠져죽고, 난민인정을 거부당하는 현실에 아랑곳없이 안전하게만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가겠다고 말한다 (Photo @ Yu K. Lee)

정체된 난민심사, ‘제 3국 정착’ 프로그램 차별, 타밀난민들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이들의 절박함은 여러차례의 조난사고가 가슴 아프게 반영하고 있다. 지난 6월 초 12명의 난민을 태운 보트가 뒤집혀 몰사당한 사건을 비롯, 5월 에는 호주 당국이 모니터하던 5명의 난민보트가 대양에 잠겼다. 지난 해 11월에도 호주 영해 코코스 섬 부근에서 보트가 뒤집혀 12명이 빠져 죽었고, 그 한달 전인 10월에는 100명의 타밀 난민을 태운 보트가 호주로 떠났지만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물론! 기회만 되면 다시 탄다. 여기선 아무것도 보호받을 수 없다. 안전하게 살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렇게 호언하던 네 명의 타밀청년은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 바루에서 호주행 밀항선에 오르기 하루전인 2009년 9월 8일 단속에 걸렸드랬다. 그러나 ‘다음 선박’을 타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강고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배에 오를 각오는 물론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 고 말했다. 온갖 종류의 친정부 타밀 민병대가 설치는 와우니아 지방에서 마을 남자들의 릴레이 실종을 보며 말레이시아로 온 칸다사미 마니발라완 (44), 2009년 2월 마저 탈출나온 아들의 교육때문에 배 타기를 희망했다.

“말레이시아에선 내 아들이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갈수만 있다면 배를 탈 거다”

한편, 메락에 정박했던 254명의 시위가 세상의 관심을 잃어가는 사이 세 명이 사망했다. 한 명은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서, 두명은 호주로 밀항하던 중 물에 빠졌다. 또 다른 두명은 앞서 언급한 캐나다 행 엠브이 선 씨(MV Sun Sea) 에 다시 올랐다. 올해 4월 모두 강제하선한 후 탄중 피낭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은 그중 75명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또 다시 밀항선을 타고 결국 호주에 닿았다. 122명만이 현재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위험을 알면서도 다시 밀항브로커에게 또 다른 돈을 지불하고 호주로 오지 않는가. 호주 정부가 지금 밀항업자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는 꼴이다”

호주의 난민운동가 사라 네이뜬의 따끔한 지적이다.

또 다시 탈출을 갈구하는 건 수젠드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병환때문에 일찌감치 국제이주기구(IOM)가 마련해준 항공권으로 IOM 가방을 들고 귀국한 수젠드란에게 전쟁이 끝난 스리랑카는 전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문당했다고 말하면 더 심한 고문에 시달려

2009년 11월 26일 오전 1시, 콜롬보 외곽 반다라나이케 공항 입국 심사대에 도착해 여권 심사를 받던 수젠드란은 이민성 직원이 부른 세 명의 범죄 수사국 (CID) 직원의 손에 끌려갔다. 타밀어를 못하는 그들은 수젠드란을 사무실에 앉혀 놓고 나가버렸고, 바로 얼마 후 동부 바띠깔로아 억양의 타밀어를 말하는 이가 들어왔다. “카루나 당”(주1 ) 에서 온 이가 분명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젠드란을 ‘패기’ 시작했다.

“네가 갖고 있는 그 IOM 가방…걔네 구호물자로 가장해서 타밀 호랑이에게 무기 조달한 단체 아냐. 네가 그 일에 관여했구! 맞아 안 맞아?!”

한 바탕 구타를 치른 후 수젠드란은 다시 범죄 수사국 직원들 손에 이끌려 녹색 지프차에 올랐다.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져 죽으러 가는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4층”, 범죄 수사국이었다. 그리고 12월 3일 부사 캠프로 이송되었다.

“눈 부위를 특히 많이 맞았고 초첨을 못맞추겠어. 정부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면 의사가 어쩌다 눈이 그렇게 되었냐고 물을 거고 그러면 고문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내 기록이 들어가면 또 나를 잡아갈 거 아냐. 게다가 정부 병원 싱할라 의사들은 타밀어를 못해”

싱할라어를 조금 알아듣지만, 읽지는 못하는  수젠드란은 그러나 싱할라어로 적힌 어머니의 진료 기록을 잘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스리랑카” 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혜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의료비가 비싼 개인 병원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정부 병원’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과대망상만은 아닌 듯 했다. 현지 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다른 곳에서 심문을 당하다  부사 캠프로 이송된 수감자들이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면담 의사에게 이전 감옥에서 고문이 있었노라 밝힐 경우 더 심한 고문을 당한다. 수감자와 의사의 면담 기록이 부사캠프 당국자에게 전해진다고 어렵지 않게 추정되는 부분이다. 수젠드란 역시 12월 3일 도착한 부사캠프에서  ‘고문을 당했냐’고 묻는 의사에게 ‘아니오’라고 답했단다. 의사가 떠난 후 수젠드란은 거꾸로 매달리면서 본격적인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무기는 어디있나?” “자금을 모았는가?” 등의 질문과 함께 철체 파이프와 자전거 부속품 등으로 맞고 벽으로 내동댕이 쳐지기도 했다. 2009년 12월 3일 오후, 지옥같은 세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올해 1월 20일 수젠드란은 30 여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석방되었던 이들 중 두 명은 다시 실종되었다. 수젠드란 역시 5월 21일 범죄 수사국 직원의 협박성 전화를 받은 후 휴대폰 심카드를 바꿨다. 그는 현재 스리랑카 국내에서 유일하게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는 스위스 대사관에 난민 비자를 신청한 상태다. 이 비자를 신청한 이는 수천명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10월 6일, 수젠드란과 같은 배에 탔던 젊은이 세 명이 다시 자발적으로 스리랑카로 왔다. 이들 역시 공항에서 ‘실종’되었고, 수소문 끝에 “4층” 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IOM과 UNHCR 모두 탄중 피낭 수용소 난민들에게 본국으로 가지 말것을 권고한 상태다. 국제 위기 그룹 역시 지난 5월 발표한 스리랑카 전범 보고서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타밀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s)들은 물론 (해외로 빠져나온) 타밀 호랑이 대원들까지도 본국 송환하지 말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처럼 연행과 고문으로 이어지는 본국 송환에 대한 두려움은 난민신청자들의 자살과 자해 그리고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의 빌라우드 난민 수용소에 12개월 갇혀 있다 난민심사에서 거부당한 슈레스 쿠마르. 그가 지난 23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난민운동가 사라 네이뜬은 전했다. 대학시절 군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쿠마르는 전쟁 막바지 살아 남았다가 탈출한 난민신청자다. 아울러, 9월 20일 오후 1시부터 30시간 가까이 빌라우드 수용소 지붕위에 올라 뛰어내리겠다고 시위를 벌인 11명의 다국적 난민들의 모습 역시 이들이 직면한 본국 송환의 두려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날 오전 본국 송환 통지를 받은 피지(Fuji)출신 40대 남성은 결국 뛰어내려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난민문제를 밀항브로커 혹은 ‘인신매매’ 의제로 전환하는 호주, 캐나다 등과 스리랑카 정부는 ‘인신매매 브로커’들을 검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상호 협력을 아까지 않고 있다. 콜롬보 주재 호주 대사관의 경우 범죄수사국(CID)과 물적지원과 정보 교류를 나누고 있다. 싱할라족 보트피플로 지난 해 10월 5일 강제 송환된  수미스 멘디(30)는 연행과 석방을 반복하다 지난 8월 14일 다시 연행되었고 고문당했다. 그는 고등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싱할라족 보트 피플로 떠났다가 강제 송환된 후 체포된 수미스 멘디(30)의 가족들. 수미스는 어린 아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게 구타와 갖은 수모를 당했다. 밀항선 네트워크를 단속하겠다며 스리랑카 정부와 호주정부는 협력을 아끼지 않지만, 스리랑카 당국은 수미스를 취조하며 밀항선 네트워크에 대해 묻기 보다는 타밀 호랑이 재건여부를 집중 추궁했다고 가족과 변호사들은 말한다. (Photo @ Yu K. Lee)

“고문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아시아계 얼굴의 호주 대사관 직원이 봤다. 그는 내가 강제 송환자인 걸 잘 아는 이다. 그는 그 부서 (밀항브로커 수사팀)를 돕고 작은 냉장고를 기증하러 거기에 왔었다”

수미스는 아들, 아내 가족들 앞에서 경관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싱할라족인 그에 대한 고문과 심문은 엉뚱하게도 “타밀 호랑이 재 조직화를 도와준 혐의”에 모아지고 있다. 실제로 그의 밀항선을 조직화한 선박 주인은 며칠 수사만 받고 풀려났다. 또 다른 싱할라족 보트피플로 지난 해 11월 4일 강제 송환된 후 사라 폰세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던 라산다 위제라트나 (31) 역시 보트피플시절 타밀난민들과 친하게 지냈던 ‘친 타밀 성향’을 집중 추궁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밀항 브로커들’ 망을 파고드는 수사보다 이미 무찔렀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한 반군유령을 좇는 스리랑카 정부, ‘국경보호’와 안보를 내세우며 전범 논란에 오른 정부와 협력하는 호주, 캐나다 그리고 여타 난민협약국가들. 이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보트피플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난민이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와 같은 유엔캠페인 구호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콜롬보, 칠라우, 가네물라, 니곰보 (스리랑카)/ 쿠알라룸푸르, 조호루바루(말레이시아)/방콕(타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주1. 카루나는 타밀 호랑이 동부 사령관으로 2004 정부진영으로 넘어간 타밀 민병대를 운영하며 타밀 호랑이 반군과 대치해왔다. 그의 민병대는 수많은 인권침해와 타밀인 납치에 연루되어 왔다. 타고난 전투력을 발휘하던 카루나의 배신 그가 스리랑카 정부군에 제공한 타밀 지역 교전 정보는 타밀 타이거가 패배에 결정적 원인 하나로 꼽히고 있다. 카루나는 현재 재정착부장관이다.

관련 기사<한겨레21> [2010.11.05 제834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413.html


전쟁이 끝나자 군정이 들어선 타밀 지역

[세계] 빈손으로 내몰린 피난민 재정착촌, 이동의 자유도 없는 난민캠프…
검문소 군인만 촘촘한 스리랑카 북부를 가다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 싱할라족 군인은 점령군이 되어 북부 지방 곳곳에 있다. 마나르 지역 골목에서 검문을 서고 있는 군인들과 이들을 보는 민간인들. (Photo @ Yu K. Lee)

스리랑카 북부는 군인 천지다. 서부 마나르에서 북부 관문 도시 와우니아를 거쳐 오랜 반군 통치 지역이던 와니 지방까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의 소총(AK47) 밖으로 시야를 던지는 게 불가능하다. 북부 타밀 지역을 이어주는 간선도로(A9) 위 오만타이 검문소에서는 여전히 통행자를 샅샅이 검사하고, 북부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가방을 수색했다. 와우니아 타운에서 오만타이 검문소까지 4km를 이동하는 동안 이미 세 차례 검문을 받은 뒤에도 말이다.

타밀인 밀집 지역인 북부의 ‘군사화’는 종전 이전에 일찌감치 정부군 손에 넘어간 ‘마나르~와우니아’ 80km 도로에 늘어선 군 초소나 마나르 지역에서 본보기로 드러난 바다. 마나르에는 무장한 해군들이 한적한 마을 골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난 터라 골목에 선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불러 세우는 일은 현저히 줄었다.

마나르 와우니아 약 80km 가량 되는 도로 양편으로는 맑은 하늘 아래 심한 벌목현상과 군 초소가 자리잡고 있다 (Photo @ Yu K. Lee)

“말도 마라. 시내에 한번 나가려면 몇 개 검문소를 거쳐야 했는지….” 마나르의 ㅅ마을 타밀족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리 와’ ‘저리 가’ ‘가방 열어’와 같은 검문소 ‘명령어’만은 싱할라어로 줄줄 읊었다. 반면 싱할라족으로만 구성된 군인들은 타밀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하여, 영문 모르고 검문소에 붙들려도 하소연 한마디 할 수 없던 게 타밀족이 자기 땅에서 겪어온 수십 년의 수모다. 그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사라진 남편, 아들, 그리고 딸의 실종사건은 마을에서 그리 특별한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주류 싱할라족 군인과 소수 타밀족 주민간 말이 통하지 않는 검문소. 그 검문소에 걸려 군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갔고 실종되었다. 사진 속 여인(35세)의 남편 역시 2007년 북부 한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소식이 없다. 경찰서를 비롯 여러 인권단체들에 남편 실종사건을 신고하고 받은 신고서가 그녀의 두 손에 한 가득이다. (Photo @ Yu K. Lee)

9월 중순께, 피난민(IDPs) 캠프에서 풀려난 이들이 ‘재정착’했다는 마나르 ㅇ마을로 향했다. 주요 검문소는 무사통과했지만 이후에도 군 초소가 시시각각 나타났다. 멀쩡한 건물은 별로 없었다. 다만 화장실 몇 개가 꼿꼿이 서 있거나 총탄 자국이 난 폐허들이 나뭇가지로 덮인 채 남아 있다. 화장실 위치를 보고 ‘여기쯤 집이 있었지’라고 감을 잡는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1990년대 초반 폭격을 맞은 교회는 이제 재건 작업이 한창이다. “교회를 지으려고 해도 정부가 건축자재 반입을 허용하지 않은데다 수리할 만하면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교회 건물에 손대지 못했다고 마을의 신부는 설명했다.

재정착 마을엔 집도 식량도 부족해

전쟁으로 피난 갔다 ‘재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온 주민들에게는 임시 가옥용으로 국제이주기구(IOM)가 양철판과 시멘트를 제공한다. 더운 날은 안에서 견딜 수 없고, 10월에 시작되는 우기에는 물이 차기 쉬운 임시 가옥이다. 최근 한 구호단체가 우기를 앞두고 벽돌 자재를 보급하기 시작했다는데, 우기는 코앞이고 벽돌집은 가물에 콩 나듯 눈에 들어왔다. 이 밖에 유엔고등판무관사무소(UNHCR)가 2만5천루피(약 25만원)의 정착금을 지원하고, 세계식량기구(WFP)는 6개월간 기본적인 식량을 제공한다. 약 1년 전 재정착을 시작한 이 마을 주민들은 그나마 지난 8월까지 WFP의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전쟁 때문에 5년간 농사짓지 못한 땅에 이제 막 씨를 뿌린 뒤 식량 지원이 끝났다. 주민들은 “수확을 하기까지 4개월은 걸리는데 그때까지 먹을 게 없다”고 한숨을 지었다.

전기는 24시간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천주교 단체인 카리타스(Caritas)가 학생이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태양열 랜턴을 일부 제공했다. 물은 우물 물을 끓여 마시지만 “마실 만해서가 아니라 달리 방법이 없어서”라고 주민 란지타(32·가명)는 말한다. 이 마을에는 의료시설이나 의사가 없다. 그 전에 싱할라족 의사가 한 명 있었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잘못 처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그래도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이 마을을 ‘베스트’ 재정착지로 꼽았다. 한 비정부기구(NGO) 직원은 “사나르 지역으로 간 주민들은 임시 가옥의 뼈대와 지붕 정도만 주어진 채 밀림 속에 던져지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재정착 지역의 현장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 산지브(31·가명)가 전하는 현실도 이를 뒷받침했다. 총 150가구가 재정착한 페리아마두, 타제나마두, 팔리아뤼 등지의 주민들은 임시 가옥 자재마저 없는 빈손이라고 산지브는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구호단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8월에 재정착한 이들에게는 화장실이 없고, 9월2일 재정착한 주민들에겐 지붕이 될 만한 덮개 하나만 달랑 주었고….” 말단 공무원 산지브는 답답해했다.

‘구호’와 ‘NGO’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의 알레르기는 참 지독했다. 한 NGO는 단체명 마크가 없는 차량을 이용하도록 권고받았다. 또 다른 NGO는 ㅇ마을에 농사용 펌프를 기부하려 했지만, NGO 차량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 주민들이 와서 펌프를 가져갔다고 전했다.

열악한 재정착지에서 가장 크고 건실하게 서 있는 건물이 바로 군 캠프라는 점은 종전 뒤 스리랑카 북부의 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반군으로 몰려 남편이 수감 중인 라즈니(28·가명)가 고향 복귀의 첫 소감으로 “공포스러웠다”고 속삭인 것도 그런 진실의 단면이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통치 지역이었고, 우린 스리랑카 군인들로 둘러싸인 환경에 익숙지 않아….” 그녀의 이어지는 속삭임이다. 9살 소녀 데보라처럼 반군의 징병제에 끌려간 오빠를 둔 아이에겐 무장 군인이 정부군과 반군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연상시키며 고통을 가중했다.

돌아간 고향에도 편히 머무를 집은 없다. 마나르에 재정착한 주민들이 정부군의 공세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있다. (Photo @ Yu K. Lee)

재정착에 밀려 더욱 참담한 난민캠프

“마나르 쪽은 아무것도 아니다. 킬리노치, 물라이티브 쪽으로 가봐라. 민간인보다 군인이 훨씬 더 많다. 모든 마을이 군 점령 지대다.” 외부인의 출입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지역을 방문한 타밀민족동맹(TNA) 소속 국회의원 슈레스 프리마찬드란은 전화 인터뷰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지난 9월 기자회견에서 “지난 6월 물라이티브 비수와마두 지역으로 풀려난 255가구 1215명의 주민이 물라이티브 사령관의 불허로 자기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인근 학교 등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물론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은 전혀 닿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가 “올해 말까지 재정착을 완료하겠다”고 말한 게 지난해 중반으로 종전 직후다. 그해 8월부터 난민을 ‘석방’하기 시작했고,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HCA)이 올해 8월3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난민 25만8846명이 석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친적집 혹은 중간 캠프캠프(난민 캠프에서 재정착지로 가면서 거치는 캠프)로 풀려난 이들을 모두 합친 수치다. 그리고 여전히 피난민 캠프에는 난민 3만 명 이상이 남아 있다. 난민에게는 지난해 12월1일부터 제한적으로 이동의 자유가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까지 캠프로 복귀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내 블록(C5)에 같이 머물던 20대 중반의 청년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그 때문에 구타를 당한 뒤 반군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의 병세가 악화돼 와우니아 병원에서 콜롬보로 옮겨드리고 간호하다 늦게 돌아왔다고 한다.”

‘존 4’ 난민캠프에서 열흘간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온 부디마(21·가명)의 목격담이다. 부디마의 말을 더 들어보니 재정착이 진행되면서 피난민 캠프는 찬밥이 된 듯했다. “선생님을 할 만한 사람이 다 풀려난 뒤에도 학교는 운영되지 않는다.# NGO의 급수차가 나눠주던 마실 물이 8월부터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난민들은 캠프 안 펌프물을 마시고 있다. 24시간 들어오던 전기도 8월부터는 하루 5시간이 고작이다.”

전쟁 막판에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라(35)는 캠프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채소가 없어 밥과 ‘달’(남아시아의 주요한 부식인 콩죽 겸 커리)만 먹을 때가 많다. 전에는 비누도 있었는데 그것도 배급이 중단됐고, 커리·고춧가루 등도 지난 석 달간 배급이 전부 중단됐다”고 말했다.

부디마와 사라의 증언은 실제로 OCHA의 6월 보고서와 맞아떨어진다. 보고서는 “마실 물 공급은 7월 말쯤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가 제공하던 피난민 식량이 5월31일 중단됐다” “피난민 지원을 위한 모든 필수품이 요구수준에 심각하게 못 미치고, 피난민 지원단체에 대한 거부도 위험한 수준”이라고 적고 있다.

‘라자팍세 왕국’화되는 스리랑카

30년 전쟁이 종지부를 찍은 지 1년6개월,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 난민의 생존권보다는 타밀 지역의 군사화와 장기집권 음모에 여념이 없다. 스리랑카의 군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종전 뒤 1년간 스리랑카 군의 수가 17만5천여 명에서 23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앞으로 30만 명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북부 지역에는 현재 지역 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어떤 민간 행정도 이행되지 못하는 ‘군사행정부’가 들어서 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계속되는 군사력 증강을 두고 전문가들은 북부 타밀족뿐 아니라 스리랑카 전역의 반대파를 겨냥한 조처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라스 폰세카 전 군 총사령관의 구속은 한 본보기다. 그는 대선에 출마해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도전한 ‘죄’를 지었고, 전범 재판이 열리면 증언하겠다는 발언으로 현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런 와중에 9월8일 스리랑카 의회가 긴급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은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임기 제한 없이 권력을 쥘 수 있는 여건과 모든 독립기구의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콜롬보대학 법학교수 로한 에드리시나는 이렇게 개탄했다. “헌법 개정안을 공지도, 공개 토론도, 국민적 동의도 없이 긴급 법안 형식으로 2~3일 안에 처리해버렸다. 소수자(타밀족과 무슬림)의 권익을 더 악화시킨 터라 민주주의와 인종분쟁 모두의 관점에서 크게 후퇴한 헌법이다.”

스리랑카는 지금 의회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라자팍세 가문의 왕국’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왕국의 북동부 타밀 지역은 패배와 절망감, 그리고 국제사회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서리치고 있다. 남부는 여당의 독재와 야당의 분열로 정국이 마비된 상태다.

마나르·와우니아·와니·콜롬보(스리랑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 아래 인터뷰는 지면 관계상 실리지 못한 부분까지 담았습니다.

타밀 소수정당 대표 인터뷰

“우리 땅을 팔레스타인처럼 만들고 있다”

마노 가네샨(50)은 타밀소수정당인 민주민중전선(Democratic People’s Front) 대표이자 콜롬보의 타밀표를 끌어모으던 정치인이다. ‘화이트 밴 납치’와 실종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해온 인권운동가이기도 한 그를 콜롬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북부 재정착 지역을 방문해봤나.

‘재정착’이 아니라 ‘식민화’만 가속화되고 있다. 싱할라족 군인들을 정착시키고 있고, 불교사원을 짓고 있다.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의 문화·종교·언어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인은 그들의 땅에서 세대를 거듭해 난민으로 사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만들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캔디 (스리랑카 중부)에서 출마하여 의석을 잃었는데,왜 콜롬보에서 출마치 않았나?

전략적 실수였다. 하지만 내가 출마한 지역구에 타밀인들이 많이 살지만 타밀 대표가 없어 간거다. 다른 타밀 정치인들에 비해 제법 많은 표를 얻었지만 당선되기엔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우리 선거운동을 훼방하는 폭력사태가 12번이나 벌어졌다. 전 장관출신 마힌다난다 주먹들 짓이다.

황당한건 콜롬보에서 당선된 당신 형이 여당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그는 당이 공천했고 내 지명도에 힘입어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가 지금 나와 당 그리고 타밀커뮤니티를 배신한 채 정부쪽으로 넘어갔다. 그와는 이제 말도 안한다.

‘화이트 밴 납치’ 는 전쟁 이후 줄었다고 하던데…

없는 건 아니다. 한달에 한 번 정도. 그전에는 하루에 10-15건 정도는 되었다. 전쟁 후 (납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특히 타밀 커뮤니티 내에 ‘패배주의적’ 사고가 있어 반정부 타밀 인사 수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갑자기 마하트마 간디라도 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필요성이 떠오르면 납치도 다시 벌어질 거다.

지난 대선에서 군 총사령관 출신인 사라스 폰세카 후보를 지지했다. 타밀족 수만 명을 학살한 전쟁의 사령관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마힌다 라자팍세(현 대통령)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다른 방안이 없었다. 싱할라의 주류 진영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직접 대선에 출마했다면 몇십만 표 정도 얻었을 것이다. 그게 전부고, 그건 휴지가 되는 표다.

지난 2월 폰세카가 체포당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걸로 안다.

폰세카 사무실에서 토론 중이었는데, 한 장군(소장)이 들어와 “폰세카 선생, 당신을 체포하러 왔소”라고 말했다. 폰세카는 “군이 아니라 경찰에 출두하겠다. 나는 민간인이다”라고 답했지만 그 장군은 무장 군인들을 데려오더니 저항하는 폰세카를 개처럼 끌고 갔다. 싱할라족은 그동안 나를 ‘타밀호랑이’ 분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내 앞에서 타밀호랑이를 끝장내고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영웅’으로 추앙받던 사령관을 동네 개처럼 끌고 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구성한 ‘전범 자문위원회’는 어떻게 보나.

(목소리를 높이며) 신뢰하지 않는다. 몇 달 전 구성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 왜 그렇게 연기하나. 자꾸 연기하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 타밀인은 골목골목을 쑤시며 모든 방법을 강구해봤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 어디 빛줄기는 없는지 찾으며 너무 절박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2009년 상반기)에 국제사회가 보여준 태도는 역겨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적 위원회의 조사가 필요하다. 이 정부가 구성한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를 결코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콜롬보 = 이유경)

관련 기사 <한겨레21> [2010.10.29 제833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67.html


타밀호랑이, 살아서 돌아오라

종전 뒤에도 이어지는 타밀 반군 강제 수용과 실종… 비밀에 부쳐진 스리랑카 반군 수용소의 참상을 보다. [2010.10.22 제832호]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불교도가 대부분인 싱할라족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소수 타밀족은 오랜 무력 저항을 해왔다. 긴 내전의 끝, ‘타밀호랑이’ 반군이 진압된 뒤 스리랑카에는 평화가 왔을까? 스리랑카 정부는 안정을 말하지만, 2009년 5월 내전 종료 선언 뒤에도 반군포로, 피난민, 보트피플로 떠도는 타밀족 사람들의 생존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9월3~30일 스리랑카 현지에서 취재한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3회에 걸쳐 르포를 연재한다. 편집자

* 아래 기사는 지면관계상 담지 못한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 필자

» 타밀 반군에 ‘징집’됐다가 전쟁이 끝나자 정부군에 체포돼 반군 포로 수용소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Photo by Yu K. Lee)

“오만따이 검문소에선 더이상 숨길수가 없었다. 한때 나의 동지들이 정부군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5월, 전쟁이 종착지로 향할 무렵 스리랑카 정부군은 전쟁터에서 빠져나온 수십만 난민들 사이에서  타밀호랑이 (LTTE) 반군을 샅샅이 추려냈다. 수간디(35, 가명)도 그렇게 추려졌다. 다수의 반군들이 투항하고 자수했지만 수간디는 ‘나는 투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부군과 동행한 동지들이 누구였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정치국과 정보국 소속 4-5명 섞여 있었다”

수간디도  정치국 소속이었다. 그녀는 반군통치영토, 일명 타밀엘람 (타밀모국이라는)의 거주민에 관한 각종 통계사업과 주민들이 주로 몸담고 있는 농업, 어업 관련데이터 수집을 10여 년간 담당해왔다. 1995년 킬리노치 (타밀엘람수도) 전투에서 다리하나를 잃은 뒤 정치국으로 ‘발령’ 받았고 그 뒤론 줄곧 그쪽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2006년부터 강화된 정부군의 공세가 타밀엘람 목전까지 치고 들어왔다.

“킬리노치가 함락되기 직전 (2009년 1월 초), 보이스오브타이거(VoT, 타밀호랑이 라디오방송국으로 타밀어와 싱할라어 방송을 병행해왔다필자 ) 국장, 자완이 ‘장애인 전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타밀 호랑이 전 대원이 전투에 나선다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그렇게 명령을 하달하러 온 자완 역시 다리 하나를 잃은 장애인 전사였다. 전쟁 막바지 가족들까지 대동하며 ‘모바일’ 방송을 하던 자완은 현재 생사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던 자완의 딸, 삿수딴의 행방도 묘연하다. 당시 삿수딴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6살. 타밀 호랑이는 2006년부터 ‘한 가족 한 타이거’ 징병제를 실시해왔고, 자완은 큰 딸을 ‘해방운동’에 ‘바쳤다’.

그러나 장애인 전사들에게까지 전투를 명령하던 막바지, 반군은 ‘한 가족 두 타이거’ 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 소녀 소녀들까지 징집해갔다. 기본 3개월, 특수훈련까지 총 6개월이던 군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제대로 훈련 받지도, 싸울 의지도 없는 소년, 소녀 병사들이 뒹굴던 전장은 결국 비참한 끝을 봤다.

“우린 (장애인 전사들) 블랙 타이거 – 자살 공격조 – 와 함께 제 2선에 포진해 있었다. 5월 15일부터 전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열해졌다.  1선이 무너지고 나와 팀을 이뤘던 동지마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이송 팀 (타밀 호랑이는 부상입은 동료나 전사자들을 현장에 방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정부군에 의한 시체 훼손이나 부상자 현장사살, 강간의 우려때문이다. – 필자 ) 에 연락했지만 아무도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수간디 자신이 부상 동지를 끌고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지점까지 갔다. 반군 민간인 할 것 없이 부상자들과 시체더미로 넘쳐나는 현장을 담당하던 현장을 담당하는 동료는 수간디에게  그냥  정부군쪽으로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다음 날 수간디는 포탄이 날아드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었지…와뚜와깔루 다리에 도착하니 정부군이 보였다. 그들은 외다리인 나를 보자마자 반군이라고 몰아붙였다. 동행한 난민들이 그냥 부상입은 거라 말해줬고, 나도 계속 부인했다.”

그러나  19일 도착한 오만따이  검문소에서 그녀는 결국 난민들과 분리되어 반군 포로 수용소 (이하반군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오만따이 검문소 스피커는 자수 안내 방송을 계속했다.

“단 하루라도 반군활동을 한 자는 자수 바란다. 이름만 등록하면 보내 주겠다. 길어야 3개월 조사하고 풀어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두려워 자수를 택했다. 다수는 부모들의 설득에 의해서였다. 사하이에 라니(43)의 아들도 그렇게 자수했다. 하지만 아들은 와우니아 팜바이마두 수용소에 1년 반 넘게 수감 중이다. 3개월 안에 풀려난 이는 아무도 없다.

“아들이 (반군에) 징집된 게 2007년 4월이고 다음 해 초 도망쳐 나왔어. 그놈을 숨기느라 지하벙커에서 2년동안 똥 오줌 다 받아냈는데…”

어머니는 결국 눈물 두 줄기를 쏘옥 뽑아내고 말았다.

자수 끝에 수용소로

길어야 3개월이라던 정부가 반군 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한 건 11개월이 지난 올해 4월 10일, 장이앤들을 먼저 내보내면서 부터다. 한달 후에는 565명의 미성년 병사들을 석방했다. 이 미성년들은 처음부터 별도 관리를 받아왔고, 유니세프의 독립적 모니터를 허용하는 등 긍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수간디는 1300명의 장애인 병사와 함께 4월에 풀려났다. 이번에는 그녀의 외다리가 석방에 도움이 되었다.

“석방되기 직전까지 심문당했다.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내 차례가 돌아왔고, 각기 다른 정보국 직원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수간디에 따르면 군은 타밀 호랑이 내부 정보 화일대로 아주 상세히 물었다. 부서이동은 어떻게 했는지, 몇번의 전투를 치뤘는지, 언제 어떤 전투에서 싸웠는지, 몇 시에 전투에 나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까지까지. 수간디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허용되던 샤워 시간을 어기면 여군이 몽둥이로 팔뚝을 세차게 때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구타가 심했던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에겐 심각한 고문은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수감되었던 ‘ㅁ’ 수용소  A 블럭에는 샤워 시설이 없어 군의 인도하에 D 블럭 우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장에 가리개도 없다. 있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고 아무도 손 볼 생각을 안했다”.

석방 후에도 그녀는 자유롭지 않다. 정보국 직원이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집에 없을 때는 가족들에게 행방을 묻기도 한다. 반군 조직에서 익힌 컴퓨터 기술과 행정 능력 덕에 최근 새 일터를 구하고 거주지를 옮긴 그녀에게 군은 ‘재직 증명서’와 거주지 등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 종전 선언 1년 뒤에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는 준전시 같은 검문이 계속된다. (Photo by Yu K. Lee)

샅샅이 추려진 반군들, 체포와 감시는 계속된다

“수용소(detention center) 가 아니다. 전(前) 반군들은 지금 사회복귀훈련 (Rehabilitation Center) 센터에서 교육받고 있다.”

반군 수용소 총 책임자 수단따 라나싱헤 준장은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수용소’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전 반군들과 군인들이 1년 넘게 함께 하며 얼마나 사이가 좋아졌는지 ‘와서보라’ 는 빈말도 했다. 공식적으로도 그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의 책임자다. “반군 활동에 개입한 기간과 개입정도 그리고 사회복귀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나 성과에 따라 석방 순위를 정한다” 는 게 그가 설명하는 석방 기준이다.

수감자들은 ‘애국의례’ 로 아침을 연다. 그들이 거부해 온 싱할라어 국가를 불러야 하고, 부르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한 소년은 국가를 부르지 않아 땡볕에서 무릎끓고 하루종일 벌을 섰고, 또 다른 소년은 국가를 부르는 동안 기침을 했다고 군화발로 채였다” 지난 4월 ‘ㅁ’ 캠프에서 석방된 카란(38, 가명)의 말이다. 캠프안 모든 전달사항은 싱할라어로 이루어진다. 싱할라어를 말하줄 아는 수감자가 소 그룹의 대표노릇을 했고 그를 통해 모든 사항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해체하라는 명령을 못알아듣고 자리에 계속 남아 있던 40대 쯤 되보이는 이가 군화발에 채여  쓰러졌다…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난 해 12월에는 30대 초반의 한 수감자가 몸이 아주 좋지 않아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허가가 안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 사망한 일도 있었다고 카란은 말했다. 수용소 안에는 전문 의사를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반군 중에서 군의관 노릇을 하던 (일부는 진짜 의사) 수감자가 전체 수감자들의 진료를 담당했지만, 의약품이 허술해 가족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잦았다. 반군 수용소에 대한 가족들의 방문은 허용되었지만 교통비 문제로 방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많았다. 10-20분 가량 허용된 면담은 두 세명의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아울러, 당국의 허가를 받은 카톨릭 신부들이 주도하는 일요일 미사가 허용되고 있다.

지난 4월 10일, 다리 하나가 불편한 카란 역시 장애인 석방 당시 풀려났다. 그 한 주 전 4월 2일 그의 캠프에서 차출된 107명의 수감자들이 인근의 한 학교 건물로 먼저 이송되었다.

“거기서 우리가 곧 석방될 거라 들었다. 그러나 한 명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6명은 테러리스트조사국(TID) 에서 데려갔다. 6명 중 한 명은 두눈 장님, 두명은 한눈을 잃었고, 또 다른 한명은 눈 하나와 두 손을, 그리고 한 명은 다리 하나가 없다. 나머지 하나는…기억이 잘 안나는데…그들을 왜, 어디로 데려 갔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 여섯 명이 다른 캠프로 이송되었는지, 강제 실종의 희생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제 실종의 역사가 깊은 스리랑카에서 기록없는 이송은 강제 실종과 법외 사살 우려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카란이 전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 역시 이런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 하루는 3명의 수감자들이 아침 조례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군은 ‘그들은 간밤에 도망갔다’고 말했다는 것.

“캠프는 이중 망으로 철통같이 쌓여 있고, 사방에 무장 군이 배치되어 있다. 도망가면 바로 사살당한다고 처음부터 세뇌 받아왔다. 누구라도 도망갈 환경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카란의 말이다.

강제 실종, 법외 사살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

이 반군 수용소에 대해 인권단체들의 우려는 대단히 높다. 우선, 국제적십자사를 포함 독립적 기구의 방문과 모니터가 전혀 허용되고 있지 않아 수감인원과 감호 상태, 더 나아가 생사 여부에 대한 정보까지 투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지난 9월 ‘법적 구속을 넘어 : 스리랑카의 타밀호랑이 혐의자 대량구금’ 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국제법률가협회 (ICJ)는 이들 수용소를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부운영 집단 수용소’ 라 표현했다.  국제법률가협회는 정부가 공식적 혹은 비공식으로 발표해 온 수감자 인원부터 불규칙한 점을 꼬집었다.

ICJ가 정리한 오락가락 수치를 보자. 수용소 책임 준장이 지난 해 11월 공식적으로 밝힌 ‘10,992명의 투항자’ 와 비공식적으로 밝힌 ‘12,000명 수감자’ 두 개의 버전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유엔대표부는 “12,700명의 반군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반군으로 추려졌다”고 말했다. 이후 언론에는 10,732 라는 숫자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 2월 이래 반군 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된 라나싱헤 준장이 9월 29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수치는 10,970 명이다. 그는 “현재까지 3580명이 석방되어  7390명이 남아 있고, 내일(9월 30일)  400명이 더 석방되면 대략 6900명 가량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다시, 정부소유 일간지 <데일리 뉴스>는 10월 26일자 보도에서 11,696명중 5,819명이 석방되었다는 ‘사회복귀 및 교도소 개혁부’ 장관 구네세카라 (D E W Gunesekara)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렇게 수감자 수치가 둘쭉날쭉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불규칙하게 계속된 추가 검거다 지난 해 중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의 잇단 탈출 드라마가 펼쳐지던 시절  (<한겨레 21> 797 기사 참조) 캠프내에서는  검거 열풍이 불었다고 난민들은 전했다. 아울러,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난민 석방 과정에서 일부 난민들은 재정착지가 아닌 반군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서너달 돈있는 사람들이 캠프를 탈출하고, 군은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대거 잡아갔다. 우선 17 – 25 살 사이의 소년들을 잡아갔고, 하룬가 이틀후에 소녀들을 잡아갔다. 한 가정에서 두 명이상  잡혀간 경우도 있는데 부모들이 통곡 하고 반발하면 한 두명 풀어주기도 했다. 군은 도망치지 않은 젊은이들이 반군이기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 떠나지 못했다는 짐작으로 잡아갔다.”

‘존 4’  피난민 캠프 난민 아노자(20대, 가명)의 증언이다. 그녀는 올해 8월 말께, 정부 에이전트가  (Government Agent  : ‘구청장 되는 공무원으로 중앙정부가 임명필자주) 난민들에게 중간 캠프로 이동해 한 두달 지내면 고향으로 재정착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난민들이 거부한데도 이 점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젊은 아들 딸이 있는 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새로운 캠프로 이동하면 또 등록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반군 추린다는 명목으로 젊은 이들을 또 잡아갈 것 아닌가”

‘존 2’  피난민 캠프에 갇혀 있다 지난 해 8월 가족들이 모두 석방되었던 카란의 경우도 재정착길 향하는 버스에 오르다 다시 붙들려 피난민 캠프에 홀로 남았고 심문과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 연행된 8월 부터 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존 2’ 피난민 캠프내 자리잡은 군 초소로 열 다섯 번 정도 호출받아 불려갔다. 처음 4-5번은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나같은 사례는 많다. 나는 자동자 정비소에서 일했지 반군이 아니었다”

군은 카란에게 반군이 아닌 걸 증명하라 다그치며 크리켓 스틱으로 구타했다. 그 후유증으로 카란은 지금 숨쉬는데 어려움이 크다고 말한다. 카란처럼 심문받던 작은 소년 하나는 눈에 심한 구타를 당하고 병원치료도 허용되지 않아 결국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도 반군 캠프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시력 상실 때문에 불구자들과 풀려났다. 50살 넘은 한 남성은 구타가 심해 기절하기도 했다. 카란은 그가 타밀 호랑이 행정조직에서 월급 받고 일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타밀 호랑이는 자체 법원, 은행, 경찰서 등 여러 기관과 부서를 운영해왔고 그에 딸린 고용인원이 적지 않았 – 필자 주).

한편, 반군이었던 수간디가 석방되는 나기 직전까지 심문을 당했다면, 카란은 그렇게 이송된 반군 캠프에서 별다른 심문이 없었고 대신 ‘중노동’을 했다고 말한다.

“반군이 아님을 증명하라”

반군 수용소의 수감자 수치가 모호한 두번째 이유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대략 10여개로 추정) 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용소로 이송된 수감자들이 적지 않아  ‘반군 수용소’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수감자들은 수감 생활 중간에 ‘사회복귀훈련 센터’ 에 속하지 않는 ‘웰리칸다’나  ‘오만따이’ 혹은 콜롬보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부사 군캠프’ 등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사 캠프를 꾸준히 방문해온 국제적십자사가 그곳으로 이송된 수감자 정보에 따라 실종된 아들을 찾던 부디마 (30대, 가명) 의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고 방문을 도와준 것도 이 점 때문에 가능했다. 부디마의 남편은 그러나 타밀 호랑이 대원이 아닌  타밀구호기구(TRO)의 직원이었다. TRO는 친 반군 타밀 구호기구로 쯔나미 재난 당시와 지난 해 전쟁 막판까지 전장에서 유일하게 구호작업을 했던 구호단체다.

“국제적십자사는 경찰 감호소, 부사 군 캠프를 포함 기존에 우리가 꾸준히 방문해왔던 다양한 형태의 수십개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후 투항한 반군들이 주로 수용되어 있는 ‘투항 캠프’ (‘사회복귀훈련센터’를 말함) 에 대해서는 지난 해 7월 이래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사  스리랑카 대변인 사라신 웨자라트나의 말이다. 국제적십자사는 수용소 방문에 관한 사항을 정부와 양자간의 의제로만 풀 뿐 비밀 정책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구호단체 일꾼도 반군으로 몰려 수감

국제법률가협회를 비롯 인권단체들은 재판도, 뚜렷한 혐의도 없는 이 구금행태가 국제인도주의법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스리랑카 정부군이 생포된 타밀 반군을 알몸으로 벗긴 후 사살하는 비디오와 반군 포로를 고문하다 결국 죽이는 듯한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반군 수감자에 대한 우려는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두 사례는, 병원폭격과 식량 배급줄 폭격 그리고 전쟁 막바지 백기 들고 투항하던 타밀 호랑이 정치국 지도자 나데샨 등 수백 명의 투항자들을 모두 학살 했던 이른 바 ‘백기 투항 학살’ 사례와 더불어 스리랑카 전쟁 범죄의 증거들로 거론되고 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는 또 다른 ‘백기 투항’이 ‘학살’ 이 될 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 30대 남성의 증언이다.

“5월 17일 늦은 오후였다. 총성은 멈춘 듯 했고, 타밀 호랑이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어린이 연장자들과 한 벙커에 있었다. 인근 벙커에 있던 신부님 하나가 ‘정부군을 봤다.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치며 모두들 백기 들고 투항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린 백기를 보이며 벙커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군은 총을 쏘았다. 잠시 후 밖이 조용해진 듯 해서 우린 (어린이, 연로자 포함) 다시 백기를 보이며 랜턴도 들고 군인들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는데 군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등을 돌려 다시 벙커 방향으로 걸어가자 군은 총을 쏘았다. 모두들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고, 벙커로 다시 기어들어 왔다. 다음날 아침 군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병원과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고 백기 투항하는 민간인들까지 학살과 생존의 갈림길을 오가야 했던 이 전쟁터가 과연 재판대에 오를 수 있을까? 굼뜨던 유엔 사무총장의 스리랑카 전범 자문위원회가 이제 막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타밀호랑이’와 ‘전쟁범죄’ 두 단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단어이자 가장 민감한 이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논쟁도 그리고 증언도 강제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쟁범죄를 조사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라는 기구를 구성했지만 이 위원회가 교훈과 화해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스리랑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관련기사: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22.html

* 아래는 전반군 대변인 인터뷰 기사.

인터뷰 : 다야 마스터 (55, 타밀 호랑이 전 대변인)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다야마스터 (전 타밀호랑이 대변인)

본명 벨라이우탐 다야니디. ‘다야 마스터’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타밀 호랑이 대변인을 지냈고, 기자들에게 친근한 인물이었다. 2009년 종전 한달 전인 4월 정부군에 투항한 후 정부소유 방송국 토크쇼에 출연하여 타밀 호랑이 (LTTE) 반군을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 북부 자프나에 사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하였다.

질> 반군 대변인을 하던 당신은 지금 친정부 방송국 (Dan TV) 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가 임명한 건가?

답> 내가 선택한 일이다. ‘친정부’ 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린 북부지역 개발 이슈 등 골고루 다룬다.

질>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답> 자프나에서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인이 자유롭다. 콜롬보 상황은 잘 모른다.

질> 사는 환경은 어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나?

답>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석방된 모든 반군 대원들이 다 자유롭다.

질> 재정착 지역이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 이동의 자유를 완벽히 누린다면서 왜 그런 곳은 둘러보지 않나?

답> 곧 방문할 에정이다. 안다, 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걸.

질> 북부의 군사화, 식민화가 심각하다. 불교도가 없지만 볼교 사원도 짓고 있는데

답> (불교도) 군인들이 있으니 사원을 지을 수도 있지…

질> 반군 대변인까지 지낸 당신은 그렇게 자유로운데, 투항한 반군사병들 다수가 여전히 수감 중이다. 국제적십자사의 접근까지 봉쇄되고 있다.

답> 그건…. 그들도 서서히 석방될 것이라 본다.

질> 재판없이 1년 반 넘게 구금 중이다. 국제인도주의법 위반이다.

답> 코멘트 하고 싶지 않다. 내 신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질> 지난 해 투항할 때 정확한 상황은 뭔가? 일각에선 당신이 그냥 병원에 있었고 그 지역이 군에 함락된 것이라는데

답> 푸투마딸란에 있었고 군이 진격해 왔다. 그리고 내가 투항한 거 맞다.

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건가? 아님 그동안 싸워온 신념과 가치를 다 버린건가?

답> …

질> 일부는 당신을 배신자라고 한다. 투항 직후 정부 운영 방송국 토크쇼에 나와 타밀 호랑이를 비판했는데…

답> 내가 4월에 투항했고, 5월 18일 정치국 지도부도 투항했고 (백기 투항건을 말함) 다른 전투병들도 결국 투항하지 않았나!

질> 타밀 호랑이가 강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뭐가 잘못되기 시작했나?

답> 2005, 2006년부터 무기 공급에 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해군이 영해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인도 정보국의 작업으로 무기를 적절하게 들여오지 못했다.

콜롬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부활한 타이의 ‘레드존’

[2010.06.25 제816호]

‘레드 셔츠’의 본거지 이산을 가다… 공산 게릴라의 전통을 품은 타이 동북부에서 살아난 붉은 기운

» 이산에는 레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키티삭 포사왕처럼 과거에 타이공산당에 몸담았다가 레드 세력이 된 사람이 적잖다. (Photo by Lee Yu Kyung)

6월4일 찾아간 어둑한 방 안에는 여느 타이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푸미폰 국왕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주인 잃은 방은 단정했고, 가운데 놓인 선풍기가 여전히 사람 사는 집인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타이 동북부 깐라신 지방에 자리잡은 이 민가는 지난 5월19일 방콕에서 타이 정부군의 ‘레드 셔츠’ 시위대 진압 당시 사망한 아카라데 깐 게우(22)가 살던 집이다.

“어머니는 10년 전 에이즈로 사망하고, 2년 전에는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뜬 뒤 녀석 혼자 지냈어. 내가 옆집에 살면서 끼니를 챙겨줬지….” 이모 인타라참 인풍(58)은 목이 메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지난해 4월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한 송끄란 유혈 사태를 계기로 레드 셔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아카라데는 방콕의 레드 셔츠 시위에 참여하면서도 주로 의료 텐트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몸집이 작아 사수대 같은 건 못한다”는 게 이모의 말이다.

사원에서 저격당한 ‘레드 청년’

지난 5월19일, 진압이 시작되자 아카라데는 마지막 피난처 빠툼와나람 사원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생을 마감했다. 이틀 뒤 장례식에 참석한 한 목격자는 그가 저격수의 총을 맞은 간호사를 도우려다 총에 맞았다고 했다. 간호사 역시 앞서 총탄에 맞은 이들을 돕다가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 맞은 이들과 손 내미는 이들의 피로 ‘붉은 사원’이 돼버린 빠툼와나람 사원의 총격 사건은 5월19일 유혈 진압의 가장 큰 논란으로 남았다.

사원 총격의 공포를 고스란히 안고 눈물로 레드 셔츠가 회군한 지 보름이 지난 뒤에야 기자는 그들의 뒤를 밟았다. 레드 시위대 다수가 돌아간 타이 북동부 ‘이산’ 지방으로 향했다. 이산은 타이 인구 3분의 1에 달하는 약 2천만 명이 거주하는 타이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다. 농촌이 대부분인 이 지역은 인접한 라오스 말과 가까운 방언을 쓰고,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또 다른 수도로 여길 만큼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민간 자본이 영세한 이산은 정부 정책이나 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타이 시골 지역을 연구해온 앤드루 와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박사는 이산 주민들이 시국과 정부정책에 유독 민감한 배경을 그렇게 설명한다. 탁신 전 총리의 ‘30밧 의료정책’은 물론 ‘100만밧 마을기금’ 등의 정책이 상대적 빈곤과 소외 속에 살아온 이산 주민에게 획기적으로 와닿은 배경이다. 이렇게 이산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레드 셔츠 지지자인 ‘레드존’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방콕의 엘리트가 중심이 된 ‘옐로 셔츠’와 대비되는 세력이다.

가난한 붉은 지역, 이산

» 타이는 가난한 농촌지대인 동북부(이산)와 북부, 방콕이 있는 부유한 중부, 무슬림이 일부 거주하는 남부로 나뉜다. 짙은 붉은색으로 표시된 동북부에 레드 지지세가 가장 강하고, 옅은 붉은색의 북부가 그다음 강하다. 중부와 남부엔 현 집권 세력 지지가 강하다.

이산의 푸판 산맥은 1970~80년대 타이공산당(CPT·80년대 중반 이후 쇠퇴해 사멸) 게릴라가 넘나들던 곳이다. 베트남과 라오스에 이어지던 공산화 도미노의 영향에 CPT 게릴라의 본거지 푸판 산맥까지 있어서 사꼰나콘, 깐라신, 묵다한 등 동북부 지방은 예전부터 ‘붉은’ 기운이 강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올해 방콕 중심가를 두 달 넘게 점거한 주역이다. 묵다한 지방 빡총 마을 전체 200여 가구 중 절반 이상이 방콕 시위 현장을 다녀갔다. 과거에는 베트남전을 치르는 미군의 군사기지로 활용돼 공산 게릴라가 얼씬하기 힘들었던 이산의 중심도시 콘깬과 우돈타니도 지금은 붉디붉은 ‘레드존’이다. 콘깬 지역의 한 레드 셔츠 지지자는 콘깬 주민의 약 70%가 레드 셔츠라고 자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빈곤 지역 젊은이들이 주로 징집 대상이 되는 타이의 징병제 아래서, 진압에 동원된 군인 중에도 이산 출신이 많다.

“방콕에 있는 동안 아들과 수시로 통화하고, 위치를 확인하고… 심지어 부대를 도망쳐나올 수 있는지 물었다.” 깐라신 지방 출신 프라윗(58·가명)은 4월7일 방콕 시위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사흘 뒤 방콕에서 유혈 진압에 투입된 군인 아들과 조우할 뻔했다. 그날 이후 프라윗은 차마 방콕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M16, 고무 총탄, 실탄 같은 건 하사관 이상에게만 지급됐고 우린 방탄복, 방패 그리고 몽둥이밖에 없었다. 진압 당시 맨 앞줄에 배치된 건 우리 사병들이다.” 군에서 휴가를 받아 집에 머물고 있던 통차이(22·가명)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논란이 돼온 실탄 사용과 발사 여부, 발사 각도와 관련해 상부의 명령 없이 살상을 노리는 각도로 실탄을 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통차이는 “군복무를 마친 친구 한 명도 레드 셔츠 사수대를 했다”며 “군복무를 마친 뒤 레드 셔츠 시위가 재개된다면 기꺼이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진압에 ‘끌려’나왔지만, 속은 시위대와 같이 붉은 전형적인 ‘수박 병사’였다.

한편 시위 진압 뒤 평온을 찾은 듯 보이는 타이의 뒷마당에선 레드 셔츠 활동가를 포함한 반정부 인사의 검거와 체포가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나날이 심해지는 미디어 검열로 가히 ‘공안 정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레드 셔츠 핵심 지도부는 최소 3년형에서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테러리즘죄’로 수감 중이고, 이산의 코랏 지역에서는 4월9일 밤 레드 셔츠 현지 지도부 콩 케우(24)가 괴한의 총을 맞아 죽었다. 인권단체가 시위 진압 이후 100여 명이 실종됐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타이 일간지 <마띠촌> 6월10일치는, 지난 두 달여간 비상사태령 위반으로 85명이 연행되고 형법 위반으로 819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됐다고 전했다. 이 중 787명이 지방 출신이다.

이산의 사꼰나콘 지역 출신 르완 시수포(46)도 검거를 피해 거처를 옮겨다니는 수백 명의 레드 셔츠 중 한 명이다. 그는 5월25일까지 경찰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고, 6월7일까지 소환 날짜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답을 얻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친탁신 정당에 투표한 적이 없다는 그는 레드 셔츠 운동과 거리를 유지해오다 3월12일 재개된 시위 때부터 동참했다. 레드 셔츠의 ‘의회 해산과 민주적 선거’ 요구가 너무나 정당했기 때문이란다. 르완은 “정부는 주민의 마음을 잃었고, 레드 셔츠는 그 마음을 얻었다. 다음 시위엔 더 많은 이가 모여들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 방콕의 레드 셔츠 진압 당시 빠툼와나람 사원으로 피신했다 숨진 아카라데 깐 게우의 집에는 푸미폰 국왕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저강도 내전으로 이어질 전망도

패배감과 혼란도 있지만, 이산에서는 ‘다음’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일요일에 여는 시장에서 붉은 셔츠 입기, 군인에게 물건 팔지 않기 같은 소박한 실천방안이 논의되는가 하면, 콘깬 지방에서 교사로 일하는 파니 탐마(51) 같은 이는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선거가 공정할지 의심스럽다”고 우려한다. 좀더 과격한 충돌 양상을 점치는 전문가도 있다. 풀 챔버 박사(독일 하이델버그 정치학회 회원)는 올해 시위에 출몰해 정부군 사령관을 저격한 ‘블랙 셔츠’(군 내부의 레드 지지 세력으로 짐작됨) 등을 중심으로 “선포되지 않은 저강도 내전”이 지방에서부터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산 지방에는 “탄압이 계속되고 지하운동이나 무장조직이 조직되면 동참할 사람은 널려 있다”거나 “(반군에) 먹을거리와 피난처 정도는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전 CPT 출신 레드 셔츠들은 “이 땅에선 비폭력 투쟁이 먹히지 않는다”는 푸념을 털어놓고 있다고 일부 주민들이 귀띔해주었다. 부활한 레드존에 반란의 기운이 조금씩 솟아오르고 있다. 2009년 송끄란 유혈 진압 사태에 분노해 2010년 방콕 거리로 나선 이가 더욱 많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아나는 민병대의 공포

받들어 왕실!

“그냥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5월19일 군이 한 것처럼. 누가 공산당이고 아닌지 알 수 있나….”

타이 동북부 묵다한 지방 주민 용 농숙(57)은 공산반군을 잡던 자신의 과거를 거리낌 없이 풀어놨다. 1971년부터 약 20년간 그는 1954년 창설된 타이 최대 민병대 ‘국방의용군’ 소속으로 공산반군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반정부 레드 지지자다. 그는 예전엔 정부군과 함께 반군을 잡던 총잡이였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부에 대한 증오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보면 그가 민병대가 된 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었다. 용은 15살 때부터 공산군을 돕다 18살 때 군에 체포됐고, 민병대로 차출된 뒤 반군 진압에 동원된 것이다. “우리 모두 타이 피플,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 레드 셔츠 진압 현장에서 이따금 군의 스피커를 타던 노래나 연설은 대략 그런 유였는데, 39년 전 체포된 용에게 정신교육을 시키던 교관도 그런 말을 물리게 해댔다. 그러나 막상 군사훈련에 돌입하자 “보이는 대로 (공산군을) 쏘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역시 공산당원이던 키티삭 포사왕(58)도 “과거에 공산반군을 진압하는 걸 경험했기에 나이 좀 있는 이들은 타이군이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안다”고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사실 방콕 시위의 유혈 진압 이후 레드 셔츠에 대한 옥죄기가 계속되는 요즘 이산은 공산반군 시절에 왕성하던 민병대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다.

일부 마을에서 5월 말부터 돌고 있는 종이가 그런 조바심에 불을 댕긴다.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왕실을 숭배하고 보호할 것이며….” 깐라신 지방 한 마을의 이장들은 내무부에서 지방정부를 거쳐 마을로 내려보낸 이런 내용의 종이에 300명씩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유사한 문구가 적힌 또 다른 종이는 이장에게 서약을 ‘이행할’ 주민 20명을 조직할 임무를 부여했다.

레드 셔츠를 ‘반왕정주의자’로 몰아세운 정부가 사병 조직을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무슬림 반군이라는 ‘유령 게릴라’와 싸우고 있는 타이 남부 분쟁 지역에서도 민병대는 물론 마을 단위로 조직된 무장 사병들이 반군작전에 이용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면 이산 주민들의 우려가 괜한 게 아니지 싶다. “우린 이미 왕실을 존중하고 왕을 사랑하는데….” 서명 용지가 도는 한 마을의 주민 퐁판(55·가명)은 말끝을 흐렸다.

묵다한·깐라신·콘깬(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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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시간, 피로 물든 레드 셔츠

[2010.05.28 제812호]

[특집2] 5월19일 방콕, 시위대 무력진압 현장 르포…
시민의 ‘자기 방어용’ 바리케이드에 쏟아진 타이 지배 세력의 총격

학살의 시간, 피로 물든 레드 셔츠

새벽 5시: 군과 장갑차 살라댕 방향으로 이동 중.
아침 6시: 첫 번째 경고사격.
아침 6시30분: 레드 셔츠 바리케이드에 대한 공격 시작.
… 레드 셔츠 사수대의 2시간여 격렬한 저항 뒤 살라댕 바리케이드 몰락.

5월19일 이른 아침, 기습처럼 뜨는 속보(브레이킹 뉴스)를 타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리는 머릿속은 온통 ‘레드 셔츠’투성이였다. 암흑 속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레드 셔츠 사수대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이틀 전 아피싯 웨차치와 정부의 해산 데드라인을 넘긴 뒤 피난처 빠툼와나람 사원에서 만난 소녀 나타몬 통요이(8)의 해맑은 얼굴과 아줌마 시위대의 얼굴이 범벅이 됐다. 소녀도 사수대원도 아줌마도 “메이 꾸아!”(두렵지 않아!)를 반복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녀가 피신한 사원도, 사수대원들이 지키던 바리케이드도, 아줌마들이 모인 라차쁘라송 본무대도 군의 진압구역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회가 해산되기 전에는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던 묵다한 지방 출신 여인 수타드 웽와이(46)가 불끈 쥐던 주먹은 여전한지…. 먹고사는 게 바빠 열흘 전에야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지금’이 몹시나 궁금했다.

» 타이 진압작전

새총 든 자에게 총 겨누는 진압군

설마 했다. 왕실과 민주당 그리고 유력 영자지 <방콕포스트> 소유주 등 사회 초엘리트 계층의 자산과 고급 쇼핑가가 집중된 방콕의 금싸라기 땅 라차쁘라송으로 총탄을 부어댄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무력 진압이 벌어진다면 시위대가 주변 건물을 가만히 둘 리 없다는 건 자명했다. 지난 두 달간, 정부와 레드 셔츠 지도부가 협상을 벌인 ‘며칠 정도’를 빼면, 거의 매일 밤 진압 소문‘만’ 나돌았던데다 시위의 본무대인 라차쁘라송을 지키던 수천 명의 시위대는 노인·여성·어린이, 이 삼박자가 절대다수였기에 더더욱 설마 했다. 그러나 M16 방아쇠를 당기며 진군한 군인들은 간이 컸고, 잔인했다. 레드 셔츠가 점령한 구역의 남쪽, 살라댕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린 그들은 라차담리 길을 따라 북쪽 라차쁘라송 방향으로 서서히 레드 셔츠를 밀어붙였다.

“옥빠이!”(나가라!)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밀고 들어오는 군인들이 쏘는 연발 사격에 겁먹고 숨어든 시위대를 향해서도, 살라댕 교차로와 멀지 않은 지점, 루암까타뉴 파운데이션 부근에 모여든 시위대를 향해서도 이 한마디가 던져졌다. 저항할 생각 말고 나오거나, 접근할 생각 말고 물러서라는 의미였다. “옥빠이” 뒤에는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소리에 조용해진 반대편을 관찰하기 위해 어떤 군인들은 망원경을 들었고, 무엇이 발견됐는지 다시 총을 연발했다. 단순한 시위 진압이나 시위대 해산이 목적이라면 그런 총질은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 그건 시위대의 목숨을 노린 발포였고 학살이었다. “저기 레드 셔츠가 있다”고 군인에게 알려주는 어떤 방콕 시민도 군인 못지않게 잔인해 보였다. 나무 방패와 새총, 화염병과 죽창으로 맞서온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 빈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그런 잔인함에 부딪히며 붉은 피로 튀었다. 한 달 반가량 그들이 점거했던 ‘붉은 영토’가 장갑차에 서서히 깔려 들어갔다.

이날 낮 12시께 살라댕 교차로에서 라차쁘라송 방향으로 후퇴하던 시위대의 또 다른 저항 지점, 사라신 교차로에서 10여 명의 시위대가 포로로 잡혔다. 여성 3명과 승려 2명이 포함된 이들의 손은 뒤로 묶였고, 승려 2명을 제외한 나머지 포로의 두 눈은 하얀 천으로 가려졌다. 포로들은 군의 명령에 따라 눕거나 앉기를 반복했고, 한 국경 수비대는 군홧발로 포로의 배를 눌러댔다. 그즈음 친정부 성향의 영자지 <더네이션>의 브레이킹 뉴스가 떴다. “20명의 무장한 검은 복장 사나이들, 사라신 교차로에서 군인들에게 잡혀….” 그러나 ‘검은 복장의 사나이’들이 이 포로 중에 몇 명이나 섞였는지는 검은 복장을 한 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검은 복장의 사나이들은 지난 4월10일 시위에서 정부군과 총격전을 벌인 이들로, 정부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불러왔다.

이 포로들이 경찰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기까지 약 3시간 동안 사라신 교차로 부근은 이따금 십자포화의 현장이 되었다. 4월10일 그날처럼, 검은 복장 사나이들이 다시 등장한 듯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땅바닥에 배 깔고 엎어지기를 두어 번, 고개를 들 만하면 다시 시작되는 연발음에 기자를 포함한 수십 명의 취재진은 작은 골목으로 뒷걸음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남쪽 방향 룸비니 공원 인근에서 M79 유탄기로 발사된 수류탄이 최소 세 번은 터졌다. 이 폭발에 사진기자 1명과 군인 4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취재진 사상자는 오전에 이탈리아 기자 파비오 폴렝기가 사망한 것을 비롯해 이날 하루만 사망 1명, 부상 3명이었다.

2010년 방콕의 5월은 가난한 이들의 피로 물들었다. 정부군 탱크와 총격에 ‘겨우’ 새총을 쏘며 대항하는 본까이의 시위대(맨위). 딘댕 시위 현장에서 총격을 피해 몸을 숨긴 '홈리스' 여성(가운데). 방콕의 중심가에 나타난 무장 군인들. (Photo by Lee Yu Kyung)

이날 나온 군인 부상자는 5월13일 밤 레드 셔츠 지지자인 카티야 사왓디폴 소장이 피격당한 이후부터 벌어진 도심 교전 이래 처음이었다. 사실 이날 진압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약 6일간 이어진 격렬한 충돌에서 3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이 다쳤지만, 모두 시위대나 현장을 우연히 지나던 시민, 기자나 의료진이 피해자였다. 이유는 자명했다. 군은 시위대 방향으로 주로 실탄을 쐈고, 이에 맞선 시위대의 주 무기는 폭죽, 화염병, 돌멩이 그리고 사제폭탄이었다. 시위대는 타이어를 태워 군인들의 조준 사격을 최대한 막았다. 타이어는 끊임없이 조달됐고, 검은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정부의 주장과 달리 군의 실탄 사용이 ‘자기방어용’도 공중사격이 결코 아니고, 정부가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시위대의 수제 무기가 사실상 ‘자기방어’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이 두 현장을 취재한 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진 건 이게 다다. 왜 저렇게 총질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진압 사흘 전인 5월16일 밤 방콕 중북부 딘댕 시위 현장에서 만난 파이롯 따놈탄(41)의 말이다. 봉쇄된 도로를 뚫고 방나 지역에서 수십km를 오토바이를 타고 온 그는 뭐가 억울한 듯 울먹이며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방콕 도심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딘댕’ 지역과 빈민가 끌롱또이의 ‘본 까이’ 구역은 최근 며칠 가장 격렬한 전투 현장이 되고 있다. 분명한 건 이 지역들에서 시위가 폭발한 게 카티야 소장의 피격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 언론이 그를 레드 셔츠 지도부급으로 격상시킨 것과 달리, 그는 레드 셔츠의 지도부인 적도 없고, 사수대를 이끈 것도 아니다. 논란이 되는 검은 복장의 사나이들과 군인 출신 카티야 소장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됐을 거라는 분석은 제법 설득력이 있지만, 이따금 현장을 방문해 자기 인기를 확인하고 조언 몇 마디 하는 게 그의 주된 행보였다. 그렇다면 5월13일 밤부터 급격히 악화된 폭력 사태의 배경은 뭐였나? 그가 피격당한 13일 밤의 상황을 잠시 짚어보자.

5월13일 밤부터 급격히 악화된 폭력 사태

이날 저녁 7시께 카티야 소장이 살라댕 교차로 룸비니 전철역 부근에서 정부군 저격수의 소행으로 보이는 피격을 당한 뒤 살라댕 바리케이드의 레드 셔츠 영토 쪽으로 의문의 폭발이 잇따랐다. 이날부터 정부가 전기와 물을 모두 끊어놓은 상태라 암흑 천지 교차로에서 알 수 있는 건 폭발물이 터진다는 ‘소리’뿐이었다. 잰걸음을 치는 노인들을 비롯해 공포에 빠진 일부 시위대들은 라차쁘라송 쪽으로 피신했고, 또 다른 무리들은 자체 제작한 화살과 죽창을 들고 바리케이드 쪽으로 웅성거리며 몰려들거나 바리케이드 밖을 향해 폭죽을 던졌다.

그리고 밤 10시30분께, 룸비니 공원 동쪽 방향에 위치한 ‘룸비니 권투경기장’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폭력 사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경기장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군인이 배치됐고, 이곳과 가까운 본까이 구역에선 정부의 봉쇄 때문에 시위 현장으로 향하지 못한 레드 셔츠가 거점을 잡고 있던 참이다. 이날 밤 군의 발포로 노트북을 들고 블로깅을 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위 대원이 죽었고, 이어 살라댕 교차로에서 폭발음이 잇따르며 밤을 달궜다. 다음날인 14일부터 딘댕과 본까이 지역은 무차별 총격이 난무하는 격렬한 시위 현장으로 돌변했다.

14일 딘댕 지역 라차쁘라폽 도로를 취재한 독일 사진기자 닉 노스티츠는 ‘킬링 존에서 닉’이라는 블로그 기사를 통해, 몇 개 안 되는 타이어와 엎어진 몸을 겨우 가릴 정도의 시멘트 벽을 방패 삼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총격을 해댔는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날 기자가 취재한 살라댕 교차로에서는 오후 5시께 도로를 점령한 시위대 사이로 난데없이 탱크 한 대가 들어와 빙글빙글 돌면서 시위대를 자극했다. 그리고 이내 방향을 감잡기 어려운 총소리와 수류탄 폭발이 여러 차례 이어지면서 다시 한번 폭발과 공포의 밤을 장식했다. 교차로 인근 두싯타니 호텔로 들려온 부상자가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나가는 중에도 굉음은 이어졌다.

“군이 시위 현장을 조금씩 봉쇄해 들어가면서 공격하는 이번 진압 양상은, 예컨대 4월10일 허술했던 진압과 달리 꼼꼼히 준비한 것 같다.”

13일 밤부터 사실상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진압 과정에 대해 타이 군부 문제에 정통한 폴 챔버 박사는 이렇게 진단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정치학회 위원인 폴 박사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진압은 무력 진압에 소극적인 아누퐁 파오친다 현 참모총장보다는 수도 방콕을 소관하는 제1군 사령관 카닛 사피탁 중장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퀸스 가드(Queen’s Guard·왕비 경호군)의 제2사단장을 지낸 카닛 사피탁 중령, 차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유력한 프라윳 차누차 대령, 아누퐁 파오친다 현 육군참모총장, 프라윗 웡수완 국방부 장관 모두 군내 상위직을 지배하는 퀸스 가드 정파다. 그런데 은퇴를 앞둔 아누퐁 참모총장은 진급을 위해서 뭔가 과시할 필요가 없는 반면 카닛 중장과 프라윳 대령은 좀 다르다. 군내 최고직을 향해가는 그들은 진급을 위해 뭔가 기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챔버 박사는 이렇게 군내 승진 문제와, 각기 다른 정치권과 연계된 군부의 분열상과, 앞으로 들어설 정권에 대한 미지수가 군의 진압이 늦어진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수많은 레드 셔츠들이 비무장 평화 시위를 벌였다(왼쪽). 군인들은 5월19일 체포한 시위대를 눈을 가린 뒤 어딘가로 데려갔다. (Photo by Lee Yu Kyung)

52명 사망·399명 부상, 실제 수치는 그 이상

한편 최근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나 시민, 그리고 취재진을 더한 공포로 몰아간 건 높은 건물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저격수다. 이미 몇주 전부터 살라댕 교차로 바리케이드 부근과 라차쁘라송 거리의 높은 빌딩 곳곳에 저격수가 배치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 오스트레일리아 여행객이 높은 건물에서 누군가를 겨누는 저격수를 촬영한 것이 최근 공개되면서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카티야 소장도 이 저격수의 총탄에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라차쁘라송 시위 현장은 지도부 암살을 막기 위해 검은 천으로 뒤덮인 지 오래고, 밤이면 바리케이드 최전선에선 저격수에게 포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빛을 쓰지 않았다. 전투가 격렬한 딘댕과 본까이 현장에서는 모두가 저격수 때문에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숙인 채 뛰어다녔다. 5월15일 오후 본까이 현장을 취재한 일본인 사진기자 다나카에 따르면, 이날 저격수의 총탄에 시위대 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군의 진압이 벌어지던 19일, “메이 꾸아”라고 말하던 소녀를 비롯한 여성과 노약자의 피난처인 빠툼와나람 사원에서도 6명이 숨졌다. 여기엔 의료구호 활동을 벌이던 여성 간호사도 포함됐다. 이것 역시 저격수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무력 진압이 최고조에 이른 19일 인명 피해의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다. 5월21일 현재 공식 통계는 14일 이후 52명 사망, 399명 부상이지만, 높은 위험도와 당국의 봉쇄로 현장 구석구석에 대한 목격과 취재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실제 수치는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혀 알 수 없는 수의 시위대가 군경 차량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부는 눈이 가려진 채였다. 이와 관련해 아시아인권위원회(AHRC)는 5월20일 성명을 내고 “구금자 수를 밝히고 왜 그들의 눈이 가려졌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위원회는 구금자에 대한 변호사와 의료진의 접견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 사태를 꾸준히 관할해온 비상사태해결센터(CRES)는 지난 두 달간 다양한 계층의 레드 셔츠를 소환해서 꾸준히 심문해왔다. 레드 셔츠 운동에 공식 동참해온 타이학생연합(SFT)의 중앙위원 술룩파이 라무볼(22)도, 이 조직의 사무총장 아누띠 데떼라폰(22)도 그렇게 불려가 심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나는 그래도 학생이고, 심문에 당당하게 응했지만, 거기 불려온 택시기사·간호사 등 일반인들은 겁에 질린 듯했고, 무조건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술룩파이의 경험담이다.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약속하며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지도부 자투폰 프롬판과 나타웃 사이끄아도 19일 오후 1시가 넘어 투항했다. 다음날에는 닥터 웽 토지라칸, 그리고 시위 종식 문제를 놓고 다른 지도부와 이견을 보여온 위라 무시카퐁도 자진 출두했다. 사실 이번 진압이 있기까지 레드 셔츠 지도부의 책임이 전혀 없진 않다. 5월3일 아피싯 총리가 발표한, 11월14일 선거 실시를 비롯한 이른바 ‘로드맵’은 냉정히 말해 시위 종식만을 생각해 서두른 안이었다. 그러나 협상 대표로 나선 온건파 지도부인 위네 무시카퐁의 서투른 양보에 이어 지도부가 협상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만 조건을 덧붙이면서 혼란을 부추겼다. 대표적인 조항 중 하나가 수텝 투악수반 부총리가 4월10일 10여 명이 숨진 폭력 사태에 책임을 지고 경찰서에 출두할 것을 요구한 조항이다. 처음부터 일관되고 견고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뒤늦게 조건 하나를 더 붙인 모양새는 정부와 군에 ‘정치적 해결 불가능, 무력 사용’이라는 빌미를 얹어주었다.

아피싯 정부, 결국 자기 무덤 판 꼴

반면, 막바지에 분열하고 우왕좌왕한 지도부와 달리 레드 셔츠 시위대는 원칙적이었다. 두 달의 취재 경험으로 보건대, 별다른 성취 없이 시위 해산 명령이 내려질 경우 시위대의 반발은 예고된 것이었다. 오늘내일 군이 친다는 그럴듯한 정황이 잡혀도 붉은 아이디를 발급하는 테이블 앞에는 여전히 기나긴 줄이 이어질 만큼 레드 셔츠가 보인 정체성과 동지애는 타이 엘리트 기득권층의 강고한 연대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런 레드 셔츠 시위대는 투항한 지도부의 ‘해산하자’는 눈물의 호소를 뒤로한 채 극단적 편파 보도로 자신들을 매도해온 언론사를 비롯해, 기득권층의 부와 권력의 상징들을 전역에서 불태웠다. 방콕 시내만 30여 곳이 불타올랐다. 지도부를 체포하고 무력 진압으로 레드 셔츠를 잠재울 수 있을 거라 계산한 아피싯 정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혼란상에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비폭력 대중운동의 노력이 거듭 짓밟힌 레드 셔츠의 분노가 이후 어떻게 조직화될지, 방콕은 불편하고도 고요한 통행금지의 밤을 보내고 있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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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인가 내전인가… 운명의 살라댕 교차로

[2010.05.07 제809호]

붉은 셔츠, 방콕 중심가에 바리케이드… 타이 지배 엘리트에 대한 사상 최대의 저항

» 실롬가와 맞닿은 살라댕 교차로를 포함해 붉은 셔츠는 6개의 바리케이드를 세워놓았다. 죽창과 트럭 타이어로 세운 바리케이드에는 기름을 부어 공권력과 ‘안티 레드’ 시위대의 접근을 막고 있다.(Photo by Lee Yu Kyung)

“승리할 때까지 절대로 집에 가지 않겠다.”

타이 북동부 지방, 암낫차른에서 온 농사꾼 술리안 웡수완(52)은 허리께 새총을 차고 죽창과 타이어로 뒤엉킨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있었다. 4월28일 자정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만난 그는 방콕 심장부를 점령하며 7주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반정부 시위대 ‘붉은 셔츠’의 사수대원이다. 3월12일 방콕으로 원정투쟁을 온 이래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7주 동안 아무 벌이 없이 모아놓은 돈 1만밧을 쓰기만 했다”는 그는 “그래도 벌이보다는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가 민주주의를 위해 더 중요하다”며 웃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32살의 건설노동자도 어둠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낮에는 노가다를 뛰고 밤이면 시위 현장을 찾아 사수대 노릇을 한다는 그는 붉은 셔츠가 자체 생산한 나무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자위용이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다시 나타났으니 이거로라도 막아야지.” 요즘 하루 3시간 이상을 못 자지만 그는 시위 현장으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모든 계급이 참여한 대중정치운동

이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선 바리케이드는 방콕 번화가, 실롬가 끝자락 살라댕 교차로에서 불과 30~4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붉은 셔츠가 점령한 이른바 ‘붉은 성’의 ‘남대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4월10일 민주탑 부근에서 발생한 유혈 진압 이래 붉은 셔츠는 상업지구인 라차프라송으로 시위 지역을 단일화했다. 그러고는 영토를 실롬 부근까지 넓혀왔다. 여전히 ‘비폭력 시위’를 입버릇처럼 달고 있지만 죽창과 트럭 타이어, 철조망 등으로 실롬을 비롯한 총 6군데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기름을 부어놓았다. 공권력과 반대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바리케이드 안에는 엄청난 양의 돌과 새총, 죽창 그리고 접근하는 군인을 ‘낚겠다’며 그물까지 준비해놓았다.

붉은 셔츠 사수대가 바리케이트를 지키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붉은 셔츠 사수대가 바리케이트 밖으로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탐마삿대학 역사학자 타넷 아폰수반은 지난 4월22일 타이 외신기자 클럽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붉은 셔츠가 비폭력 시위를 고수한다고 해서 군부의 무력 진압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나라에서 비폭력 투쟁이 먹힌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그는 붉은 셔츠 운동을 타이 역사상 유례없는 대중정치운동으로 평가하고 작금의 상황을 ‘프랑스혁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에 견주는 건 좀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이 갈등이 반드시 계급전쟁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붉은 셔츠 진영에는 중산층과 지식인도 대거 참여하거나 지지한다. 사실상 모든 계급이 참여하고 있다.”

마히돌대학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르치는 진보적 정치학자 시롯테 클람파이분(38)은 약간 다르게 분석했지만 두 학자 모두 ‘친탁신 조직’에서 출발한 붉은 셔츠 운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해왔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정부의 무력 진압이 입박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매일 밤 붉은 성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이 구역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붉은 셔츠의 ‘중무장‘은 사실 4월19일 군인들이 실롬가를 부분 점령해 들어오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사망자 25명, 부상자 800여 명의 큰 인명 피해를 낸 4월10일의 유혈사태에도 불구하고 붉은 셔츠를 진압하는 데 실패한 군은 8일을 병영에서 지냈다. 그러다 방콕의 금융가인 실롬을 보호하겠다며 19일 탱크를 몰고 다시 거리로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군의 복귀는 ‘멀티컬러 셔츠’라 불리는 ‘실롬 주민’ 시위대를 불러왔다.

멀티 컬러 셔츠 실롬 ‘주민들’이 붉은 셔츠는 방콕을 떠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며칠 지속된 양측의 충돌로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Photo by Lee Yu Kyung)

멀티 컬러 셔츠 실롬 ‘주민들’이 붉은 셔츠는 방콕을 떠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며칠 지속된 양측의 충돌로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Photo by Lee Yu Kyung)

“저들을 죽여버려!” 군이 복귀한 다음날인 4월20일 밤, 실롬 거리는 그렇게 외치는 멀티컬러 시위대로 난장판을 이뤘다. 그들은 “우리는 왕과 왕비를 사랑한다”는 구호를 외쳐댔고, 1970~80년대 타이 공산당이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시절에 부른 반공산주의 노래 <낙판딘>(‘가치가 떨어지는 인간들’이라는 뜻)을 열창했다. 한 여성 시위대는 붉은 셔츠를 입은 외국인이 지나가자 “니네 편으로 가라”며 거칠게 쫓아냈다. 22일에는 “교육받지 못한 인간들”(Uneducated)이라는 영문 피켓까지 등장했다. 이날 두 셔츠 진영은 암흑 속에서 2시간가량 투석전을 벌였다. 4월6일 붉은 셔츠의 행진에 환호가 넘쳐나던 거리 실롬은 붉은 셔츠의 모든 것에 대한 증오로 넘쳐났다.

» 4월9일 시위 현장에서 한 군인이 붉은 스카프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군인을 ‘수박 군인’이라 부른다. (Photo by Lee Yu Kyung)

정부-군부, 강경대응 놓고 삐걱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주주의민중연대’(PAD·‘노란 셔츠’ 진영)의 움직임까지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4월18일, 정부에 일주일 기한을 주며 붉은 셔츠를 진압하라고 요구했던 이 왕정주의자 시위대는 29일 오전, 붉은 셔츠 시위가 시작된 이래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칩거하고 있는 제11보병 사단 군부대 앞에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에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요구를 시작으로 “군대를 보내 붉은 시위 현장과 기물들을 파괴하고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라” 등과 같은 과격한 요구가 가득했다. 해를 거듭해온 방콕의 정치 분쟁은 지금 위험한 ‘민-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 분석가는 내전을 경고하고 있다.

한편, 아피싯 총리와 아누퐁 파오친다 군 참모총장, 현 사태를 위해 마련된 특별 기구인 비상사태해결센터(CRES) 산센 코칸너드 대변인의 일치되지 않은 성명이 불쑥거리는 가운데 불협화음 역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정부 대변인 빠니탄 와따나야꼰이 평화적 해결을 선호한다고 발표한 직후에는 CRES 대변인 산센 코캄너드 대령이 강경 진압을 천명했다. 상대적 온건파로 알려진 아누퐁 참모총장이 개인 대변인을 통해 “강경 진압은 누구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며 정치적 해결을 촉구한 직후에는 다시 정부의 강경 진압이 천명됐다. 실상 아누퐁 총장은 10일 유혈 진압이 실패한 직후부터 정치적 해결을 촉구한 바 있다.

4월 22일 발생한 실롬 연쇄 폭발 사건 현장을 경찰들이 점검하고 있다. 살라댕 교차로와 살라댕 역에 연쇄 폭탄사고가 발생하여 1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했다. 19일 군인들이 실롬가로 들어온 이래 이 지역은 멀티컬러 시위대와 붉은 셔츠의 충돌과 연쇄 폭탄사고 등 폭력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Photo by Lee Yu Kyung)

이에 대해 출랄롱꼰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피치 퐁사왓(39) 박사는 타이 역사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다 신뢰를 잃어온 군이 “더는 정치의 그늘 아래 존재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불법 모금으로 정당법을 위반한 민주당의 해체건이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는 터라, 군은 민주당이 탐탁지 않아서 시간을 끌면서 무력 진압을 최대한 피하려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여기에 진급을 둘러싼 타이 군 내부의 고질적인 분열도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군이 단일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요소로 분석된다. 실제로 10일 유혈 사태 당시 의문의 검은 복장 사나이들이 유혈 진압 막판에 군과 총격전을 벌인 것을 두고 군 내분이 그 현장에서 가시화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하여, 긴장이 고조되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 이런 군내 불만 세력이나 은퇴 군인들이 붉은 셔츠 시위 속으로 침투해 또다시 대혼돈의 총격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붉은 셔츠 지도부가 “폭력 사태의 재발을 막고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며 기존의 ‘의회 즉각 해산안’에서 ‘30일 이내 해산’이라는 양보안을 내놓은 것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4월23일 붉은 셔츠 라차프라송 ‘본부’를 방문한 10여 명의 외교단 앞에서 지도부 중 가장 온건한 인물로 평가받는 베라 무시카퐁(63)이 발표한 이 양보안은 그러나 다음날 바로 거절당했다. 아피싯 총리는 “(붉은 셔츠의 양보안은) 외신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붉은 셔츠는 즉각 협상 불가를 선언하고 끝까지 싸우겠노라 또 다짐했다. 그들은 4월29일 방콕의 유럽연합 대사관을 방문해 정부의 임박한 무력 진압을 국제사회가 현장에서 모니터해줄 것을 ‘긴급’ 요청했다. 유럽연합의 ‘평화적 해결 촉구’ 성명이 바로 이어졌지만, PAD 골수 지지자인 카짓 피롬야 외무부 장관은 국제사회의 간섭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 4월19일 실롬가 보호를 명목으로 붉은 셔츠와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 (Photo by Lee Yu Kyung)

‘왕실 전복 음모론’까지 제기

더 나아가 민주당 정부는 ‘왕실 전복 음모론’까지 들고 나왔다. 붉은 셔츠 지도부를 포함한 반대파들이 음모론자 명단의 대부분이다. 이에 PAD는 왕실 전복 음모의 내막을 밝히는 CD를 배포하겠다며 맞장구쳤다. 이와 관련해 타이 불교를 깊이 연구해온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피터 잭슨 박사는 4월21일 열린 이 대학의 타이 사태 관련 포럼에서 붉은 셔츠 시위에서 왕실 이미지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점을 주목했다. “1973년, 92년 등 과거 시위에서는 늘 왕실이나 왕의 이미지가 시위 현장에 많이 등장했다. 붉은 셔츠 시위 현장에서는 그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여러 달 동안의 시위 과정에서 왕의 사진을 들고 오는 이가 한두 명 있었으나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붉은 셔츠 운동이 왕정 타도를 음모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붉은 셔츠를 이끄는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의 여섯 가지 원칙 중 첫 번째가 바로 왕이 국가원수가 되는 입헌군주제 지지다. “나는 이걸 정치적 음모라 부르겠다. 다급한 민주당 정부가 지금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이 해체되기 전에 사태를 무력으로라도 진압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출랄롱꼰대학 피치 퐁사왓 박사의 말이다.

2006 무혈 쿠테타의 '부산물', 붉은 셔츠 운동은 군부와 왕정주의자들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아비싯 총리에게 의회해산을 요구하고 있다. 붉은 셔츠는 군인들의 헌정유린이 반복되어 온 타이 역사에 도전하고 있다. 쉽사리 거리로 나서는 무장 군인들과 군부, 엘리트들의 강고한 지배벽에 붉은 셔츠 운동이 얼마나 흠집을 낼 수 있을지 관심있게 지켜 볼 일이다. (Photo by Lee Yu Kyung)

이렇게 다급한 정부와 9월 은퇴를 앞두고 유혈 진압의 명령자가 되고 싶지 않은 아누퐁 총장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압박하면 군은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푸른 군복을 입고 있으면서 속으론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수박 군인이 많다지만, 그들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총구의 방향을 바꾸길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발상이다.” 군부보다는 정부가 더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마히돌대학 시롯테 교수의 말이다.

강경론의 목소리는 특히 수텝 트악수반 부총리와 산센 코칸너드 CRES 대변인의 입을 타고 나와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산센 대변인은 4월19일 도심으로 복귀한 군인들이 실탄을 지녔음을 더는 숨기지 않았고, 27일 “30m 이내 (군이) 위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실탄 사격이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그 자기방어용 실탄의 첫 희생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인이 되고 말았다. 28일 방콕 북부 돈므앙 공항 인근에서 붉은 셔츠 시위대와 군인들이 충돌 당시 발생한 이른바 ‘프렌들리 파이어’(아군의 오발로 아군이 숨지는 상황)로 나롱릿 사랏 일병이 사망했다.

타이 전역이 분쟁의 소용돌이

정부의 무력 진압 다짐이 거듭되고 예측불허의 충돌이 생겨나면서 붉은 성의 바리케이드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돈므앙 공항 부근 충돌 이후에는 바리케이드에 철조망까지 씌워졌다. 누구 하나 중재할 엄두도, 생각도 못하는 가운데 콘캔·농카이·우돈타니 지방 등지에서 붉은 셔츠 시위대가 지방에서 방콕으로 향하는 군과 경찰들의 차량을 막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가히 타이 전역이 정치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가고 있는 듯하다. 자력 갱생으로 조직력을 발전시켜온 타이 역사 최대의 대중정치운동 붉은 셔츠는 지금 오랜 세월 타이 사회를 주물러온 엘리트 기득권층의 양보 없이 달리는 기차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 소요가 민주주의를 향한 고통스런 한 걸음으로 이어질지, 여러 분석가의 우려대로 내전으로 빠져들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방콕은 지금 시한폭탄을 기다리는 분위기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Published by <HanKyoReh21> at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7265.html


타이 정부가 ‘붉은 벌집’을 쑤셨다

[2010.04.23 제807호]

현지에서 전하는 4월10일 유혈 현장…

‘붉은 셔츠’ 시위 강경 진압으로 사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 4월10일 방콕의 유혈사태는 타이 현대사에서 ‘암흑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방콕 시내에서 진압에 나선 군이 시위 참가자 한 명을 폭행하고 있다. 이 시위대는 군인들이 탱크와 M16 소총으로 시위대를 위협하며 밀어붙이자 한 군인의 총을 뺏으려다 충돌을 빚었다 (Photo by Lee Yu Kyung)

꼭 1년 만이다. 옷통 벗은 한 시민이 타이 방콕 시내로 들어오는 탱크 위에 뛰어올라 온몸으로 총구를 막던 모습이 전파를 탄 지 1년 만에 군인들은 또다시 방콕 도심으로 탱크를 들이밀었다. 왕정파 시위대인 민주주의국민연대(PAD·이른바 ‘노란 셔츠’ 진영)와 군부의 ‘협조’로 2008년 12월 정권을 잡은 민주당 아피싯 정부는 4월7일 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10일 무력 진압을 감행했다. 1년 넘게 의회 해산과 총선을 요구하며 최근 한 달가량 비폭력 시위를 벌여온 반정부 시위대, 이른바 ‘붉은 셔츠’ 진영의 분노는 진압군의 탱크와 총탄에 격렬하게 부딪혔다.

4월10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시위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맨손이었지만 이들의 이동을 막는 무장군들이 곳곳에 배치됐다. 그리고 3시께, 수십 명의 시위대가 시위 중앙무대가 있는 팡파 다리로 향하던 중 정부청사 부근에서 군의 바리케이드에 막혔다. 군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시위대는 자신들의 수가 불어나자 몸으로 군을 밀어붙였고 군대열은 의외로 쉽게 뚫렸다. 일부 시위대는 부서진 바리케이드에서 집어올린 막대기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물대포와 M16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반격해오자 시위대는 다시 밀렸다. 이즈음 영자 일간지 <더 네이션>은 “시위대, 날카로운 대나무 막대기로 무장…”이라는 브레이킹 뉴스를 띄웠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연방 최루탄을 뿌려댔다.

“우리는 지난해 (폭력) 사태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비폭력 평화 시위를 통해 우리의 요구사항인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지난 3월20일 방콕 시민의 깜짝 환호를 받으며 행진하던 끝없는 붉은 차량 대열에서 만났던 시골 간호사 윙(25)의 굳은 믿음은 20일이 지난 뒤 발생한 폭력 사태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4월10일 승리를 외치며 군인들이 남겨둔 탱크에 올라간 ‘붉은 셔츠’ 시위대. (Photo by Lee Yu Kyung)

맨손 시위대, 막대기를 들기 시작하다

“팡파 다리로!”

4월10일 저녁 7시께, 방콕 위숫카삿 도로에서 군인과 시위대가 한판 충돌을 마치고 ‘휴전’ 중인 현장을 취재하다 “팡파 다리 부근이 심각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2시간 전 정부 대변인 빠니탄 와따나야꼰이 “오늘 저녁 군이 팡파 다리와 인근 라차담논 거리를 재탈환할 것”이라고 다짐한 터였다. 현장에 같이 있던 일본 프리랜서 사진기자 소우와 오토바이를 나눠 타고 팡파로 달렸다. 함께 있던 <로이터> 소속 일본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43)는 그의 ‘전용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막힌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현장, 팡파 다리와 멀지 않은 민주탑과 여행자 거리로 유명한 카오산 부근의 콕쿠아 교차로는 그야말로 격렬한 전투 현장이었다. 총소리와 폭발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시위대는 흥분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돌을 깨고 막대기를 들었고, 어떤 이는 1년 전 탱크 위 시민처럼 웃통을 벗어던졌다. 시위대와 대치한 진압군 쪽에선 실탄을 포함한 총탄이 날아들고, 동쪽 방향 약 300m 지점 팡파 다리 중앙무대에선 쉴 새 없이 ‘붉은’ 연설이 이어졌다. 이 현장에서 일본 기자 무라모토 히로유키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실려갔다. 그는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이날 군인 4명을 포함해 최소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800여 명을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의 인명 피해는 저녁 6시3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벌어진 이 콕쿠아 교차로 충돌에서 집중 발생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솜삭 세총(29)도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이곳에서 잃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한 아버지 몬차이 세총(54)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퇴한 군인이었다. 4월12일 경찰병원에서 만난 솜삭은 “너무 충격이라… 세상에 나 혼자 남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저녁 8시께, 콕쿠아 교차로 충돌이 막바지로 흐를 무렵 수상한 장면이 목격됐다. 붉은 셔츠 진영에 선 몇 명이 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카메라 촬영을 막기도 했다. 얼마 뒤 붉은 셔츠 사수대처럼 검은 점퍼 복장을 한 이들 서너 명이 어둠 속 현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게 목격됐다. 이들이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붉은 셔츠’ 주류 진영)인지, 붉은 셔츠 지지자이지만 비폭력 시위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 카티야 사와스디폴 소장(일명 ‘세 댕’) 추종자인지, 혹은 또 다른 세력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현지 언론은 세 댕이 자신의 ‘로빈투사’들이 M79 수류탄을 두 번 쏘아 군인 쪽에 치명타를 입혔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고, UDD 지도부의 닥터 웽 토치라칸은 그들이 UDD가 아니라 “군 내부에 불만이 많은 또 다른 군인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군인 쪽 사령관 롬클라오 투와땀 대령이 사망했다. 4월14일 언론은 롬클라오 대령이 레이저로 포착된 뒤 사살됐다고 속보를 띄웠다.

타이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들’로 표현된 2시간여의 대혼란과 총격전은 밤 9시를 넘기며 잦아들었다. 퇴각한 군인들이 어둠 속에 남겨놓은 탱크 앞에는 민주탑의 불빛을 받은 붉은 피가 반짝거렸다.

방콕 콕쿠아 교차로에서 군과 시위대가 격렬히 충돌하던 중 수류탄이 터졌다. 누구의 짓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Photo by Lee Yu Kyung)

‘블랙 토요일’ 누가 부추겼나?

“왜 비상사태인가! 지난해 4월 (붉은 셔츠 시위 당시) 폭력 사태가 발생한 것도 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였다. 시민 기본권을 제약하고 무기 든 군인들의 권력만 비대해지는 상황에서 비판적 언론의 입까지 막았으니 왜곡된 정보나 정체불명의 상황을 확인하기도 힘들다. …폭력 사태 발발 가능성이 더욱 열린 셈이다.”

2006년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쫓겨난 뒤 타이락타이당을 이끈 바 있는 차투론 차이상은 4월7일 비상사태 선포 직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토했다.

비상사태는 방콕을 포함해 인근 5개 지방에까지 선포됐다. 정부는 전날(4월6일) 붉은 셔츠 시위대 일부가 의사당에 난입한 것을 이유로 댔지만, 그 의사당 난입도 의문을 낳았다. 의사당 내부에서 누군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던졌고 이에 흥분한 시위대가 의사당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일부는 문을 타고 오르는 ‘의사당 난입’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선포된 비상사태령에 따라 4월8일에는 붉은 셔츠의 기관방송 <피플채널>(P Channel)이 강제로 중단됐다. ‘왜곡된 정보를 양산하고 폭력과 갈등을 부추긴다’는 게 이유였다. 4월9일 수천 명의 붉은 셔츠들이 <피플채널> 송신사인 타이콤을 항의 방문하면서 방송은 잠시 재개됐지만 그날 밤 정부가 다시 중단시켰다. 이는 3월19일 붉은 셔츠와의 협상 결렬 뒤 이어진 일련의 조처들, 예컨대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나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붉은 셔츠의 분노를 키우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무력 진압이 이어진 것이다.

“냉정히 말해 PAD의 기관방송 는 모든 반대자를 마녀사냥하듯 몰아가며 사회를 양분화했지만, <피플채널>은 그 정도는 아니다. 무대 연설자에 따라 말이 거친 경우가 있긴 해도 붉은 셔츠가 겨냥하는 정부와 군, 엘리트 집단을 비판 대상으로 명확히 삼고 있다.”

타이의 유일한 독립언론 <쁘라차따이>(prachatai.com) 기자 무티타 추아창(28)은 두 셔츠 진영의 기관방송을 이렇게 평가했다. 실상, 그녀가 몸담고 있는 <쁘라차따이>도 비상사태령에 따라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실제로 타이의 주류 언론을 포함한 중산층·엘리트 계층은 줄곧 북부와 동북부 시골 지역에 광범한 지지 기반을 둔 붉은 셔츠에 대해 오만과 편견이 담긴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어왔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의회 해산 문제를 놓고 ‘9개월 이내’라는 정부 입장과 ‘15일 이내’라는 붉은 셔츠 입장이 합의점을 못 찾고 있던 3월19일 오후, PAD의 대변인 수리야사이는 “붉은 셔츠와의 협상 자체를 반대한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는 “(붉은 셔츠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방콕 시민이 나설지도 모른다”는 말로 민-민 충돌을 부추겼다.

협상이 결렬된 다음날인 3월20일 <타이포스트>는 “잔라이 탁신 롬 제라자”라는 제목을 뽑았다. 직역하면 “빌어먹을 탁신이 협상을 망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 어디에도 탁신이 어떻게 협상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학계 등 지식인 집단은 협상 재개나 중재를 모색하기보다 정부 입장을 노골적으로 편들었다. 예를 들면, 100여 명의 학자들이 ‘3개월 내 의회 해산안’을 중재안으로 내놓았을 때 이를 보도하지 않던 언론은 303명의 학자들이 “이른 의회 해산을 반대한다”며 정부를 편들자 이를 브레이킹 뉴스로 띄웠다.

마지막으로, 각종 도구와 무기로 무장한 노란 셔츠 시위대가 2008년 정부청사 내부를 3개월이나 점거하고 수완나품·돈무앙 두 공항을 점거할 때도 별다른 비판 목소리를 내지 않던 언론은, 지난 4월3일 맨손의 붉은 셔츠 시위대가 고급 백화점이 몰린 방콕 중심가 라차프라송 구역을 점거하자 “경제·투어리즘 타격” 운운하며 우려와 비판을 쏟아냈다. 실상, 이 구역 일부 백화점 건물과 고급 호텔들은 <방콕포스트>와 민주당 쪽 인사들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피싯 정부가 상황을 악화시킨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붉은 셔츠 지도부 검거를 위한 체포영장을 늘려가며 정부는 지도부만 검거하면 나머지 시위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발언으로 붉은 셔츠를 자극했다.

“지금 지도부를 체포하면 이 많은 시위대의 행동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나올지 모른다. 지금까지 질서정연하고 비폭력 원칙을 고수한 건 모두 지도부의 강력한 원칙하에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방콕 콕쿠아 시위현장에서 머리 일부가 심하게 훼손된 붉은 셔츠 시위대 한 명이 민주탑 인근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심한 머리파손으로 보아 그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 정부는 4월 10일 붉은 셔츠에 대한 진압당시 실탄을 공중으로만 쏘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위대를 향한 실탄 발사 보도가 잇따르자 며칠 후 이를 인정했다. 실제로 이날 시위 사망자 21명 중 (이후 사망자 25명으로 늘어남) 최소 10명 가량이 초고속 유탄 발사기로 쏜 총탄에 맞았다고 병원측은 발표했고, 많은 이들이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았다. 그리고 일부 사망자의 머리는 심하게 파손되었다. (Photo by Lee Yu Kyung)

‘수박 군인’이 많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4월7일 밤 중심가 시위 현장인 라차프라송 거리에서 만난 호텔 노동자 암누이 둠롱벳(36)의 말이다. 그는 군 내부에 ‘우리 편’이 많다며 그들을 ‘수박 군인’이라 불렀다. 겉에는 녹색 군복을 입었지만 속내는 붉다는 의미에서다.

붉은 셔츠 기관위성방송 'P Channel' 이 정부에 의해 강제 중단된 후, 위성송신사인타이 텔레콤사를 항의방문한 붉은 셔츠 시위대가 군인들과 10분간 충돌을 빚은 후 퇴각하는 군대를 환호하고 있다. 군인들 중에는 시위대가 선사한 붉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거나 휘날리는 이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군 내부에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붉은 셔츠는 이들을 '수박 군인' 이라 부르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4월10일 발생한 충격적 인명 피해에 전 사회가 충격을 받은 듯 11일 하루 방콕은 조용했다. 그리고 12일 오후, 아피싯 총리 집으로 항의 방문을 다녀온 시위대에게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선거관리위원회가 민주당의 불법 기부금 모집과 관련해 헌법재판소에 민주당 해체 명령을 권고한 것이다. 시위대는 이틀 전 격렬했던 현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탱크 위에 올라 환호했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붉은 셔츠는 그들의 요구사항인 의회 해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위를 이어가겠다는 태도다.

“현 난국을 뚫는 길은 의회 해산과 선거밖에 없다.” 출랄롱꼰대학 정치학과의 수리차이 완카오 교수는 “다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애초 비상사태 선포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그는 “정부가 붉은 셔츠 운동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외돼왔는지 이해하게 됐다. 탁신의 부패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탁신을 지지하는 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준 최초의 총리이기 때문이다.”

빈민운동가 출신 농사꾼으로 붉은 셔츠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꾸이(42)의 말이다. 그는 선출된 권력을 뒤엎은 군부 쿠데타를 지지하고 빈곤 계층을 ‘어리석다’고 무시하는 타이 사회의 중산층과 엘리트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라고 단언했다.

지도부만 검거하면 시위대가 집으로 돌아갈 거라 말했던 아피싯 정부의 오판은 붉은 셔츠라는 ‘벌집’을 쑤셔놓았다. 지난 2~3년간 계속된 타이의 정치 위기는 더 깊은 나락으로 향하고 있다. 거의 매일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수류탄이 터지는 방콕은 지금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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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기사>>

‘붉은 셔츠’는 어떤 단체인가

친군부 왕정주의 ‘노란 셔츠’에 대항

지난 3월12일부터 타이 수도 방콕에서 시위를 벌이다 4월10일 진압군과 격렬하게 충돌한 이른바 ‘붉은 셔츠’ 시위대는 2006년 9월19일 발생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의 느슨한 연합체이자, 친군부 왕정주의자 진영인 ‘노란 셔츠’(민주주의국민연대·PAD)의 대항마로 등장한 대중운동이다.

붉은 셔츠의 공식 명칭은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UDD는 사실상 붉은 셔츠 운동 내부의 ‘주류’ 그룹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유는 UDD가 고수하는 비폭력 노선, 입헌군주제 지지 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붉은 셔츠 운동 내부에서도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진 그룹과 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붉은 셔츠를 지지하지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지 않는 군인 출신 카티야 사와스디폴 소장(일명 ‘세 댕’) 같은 이를 UDD는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또 좀더 과격한 체제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도 붉은 셔츠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나 이들의 목소리가 조직적 힘을 지닌 건 아니다. 과거 붉은 셔츠의 지도부 노릇을 하다 지금은 망명 중인 자크라폽 전 장관 역시 붉은 셔츠 운동에 동참하고 있지만 UDD의 현 지도부와 다른 견해를 지닌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왕실모독죄로 조사받던 중 영국으로 망명한 짜이 웅파곤 전 출랄롱꼰대학 교수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학자도 1년 반 전부터 붉은 셔츠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나 UDD 지도부 노선을 전부 수긍하는 건 아니다.

붉은 셔츠 운동에 동참하는 일반 대중을 보면, 2006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난 탁신을 지지하는 북부·동북부 농촌 출신과 도시 빈민이 다수다. 그러나 탁신에 비판적인 사회운동가 그룹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엘리트 중심의 귀족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군에 전복되는 것에 더 큰 위협을 느껴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고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다. 여기에 탁신의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사업가, 그리고 경찰과 군대 내 비주류 세력도 붉은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붉은 셔츠 주류 그룹인 UDD는 탁신 정부하에서 의원과 정부 관료를 지낸 베라 무시카퐁(전 국회의원), 나타웃 사이쿠아(전 정부 대변인), 자투폰 프롬판(친탁신계 프어타이당 의원) 3인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구성하다 최근 닥터 웽 토치라칸 등 다양한 인사를 지도부로 끌여들였다.

붉은 셔츠는 2008년 여름 집중 시위를 벌인 반탁신·친군부·왕정파인 노란 셔츠에 반대하며 모습을 드러낼 당시만 해도 조직력이 취약했다. 그러나 2009년 4월 폭력 사태 이후, 인명 피해를 우려한 지도부가 해산을 명령한 이래 고향 마을로 돌아간 붉은 셔츠 지지자들은 마을 단위로, 지역 단위로 조직망을 넓혀갔다. 지역에서 정치학교를 조직하고, 생협 등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벌이며, <피플채널>과 다양한 공동체 라디오, 잡지, 신문,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지난 1년 동안 조직적 응집력을 급격히 발전시킨 것으로 전문가들을 보고 있다.

방콕=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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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붉은 셔츠의 진심을

탁신 지지자들의 ‘예고’된 방콕 재집결… 최소한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조처 필요해

[2010.03.26 제803호]

민주주의를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직도 우린 희생하고 있다. 전세계 언론이 민주주의를 향한 붉은 셔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 상징하는 혈액시위

지난 3월16일 오후 5시께 타이 방콕 중심가 정부청사 앞. 4곳의 출입구 앞에서 벌어진 ‘혈액시위’에 참가한 뒤 경찰 바리케이드에 막힌 취재진 앞으로 다가온 한 여성은 감정에 겨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피를 뽑은 오른팔을 들어올린 그는 목 놓아 구호를 외친 뒤 자리를 떴다. ‘아피싯 옥빠이!’(아피싯 웨차치와 총리 퇴진하라!)

»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뽑다.’ 지난 3월16일 타이 수도 방콕 중심가에서 붉은 셔츠 시위대가 미리 뽑은 혈액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Photo by Lee Yu Kyung)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이른바 ‘붉은 셔츠 시위대’ 몇천 명은 이날 시위용으로 피를 뽑았다. 이미 전날 오후, 시위 지도부는 “혈액 100만cc를 모아 ‘혈액시위’를 벌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붉은 셔츠 시위대의 지도부 중 한 명인 웽 토지라칸(58)은 ‘혈액’이 상징하는 ‘희생’을 강조했다. ‘유혈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국내외 언론과 시위 인파로 이날 정부청사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타이 경찰당국은 소수의 시위대만 출입문 앞까지 다가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뿐, 예상외로 순순히 전례 없는 방식의 시위를 허용했다.

붉은 셔츠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은 최근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100만 명 시위’를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 모인 인파는 최대 15만 명 정도에 그쳤다. 붉은 셔츠 시위대는 지난해 4월 의도치 않게 아세안정상회의를 중단시키면서 ‘위력’을 보인 바 있다. 일부에서 타이 정부가 폭력 진압의 명분으로 삼으려고 이들의 회의장 난입을 가로막지 않았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이후 이어진 폭력 사태로 지도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농민들이 이번에 다시 방콕으로 몰려온 게다. 탁신 전 총리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군부의 잇따른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일부 군인·경찰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때보다 시위 열기가 높아지면서, 예상보다 적은 인원임에도 시위대는 방콕 곳곳을 마비시켰다. 시위대가 진을 친 라차담논 왕궁길, 정부청사, 사남루앙 광장에서 란루앙으로 이어지는 일대의 상점과 은행 등은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연중 무휴 번잡한 여행자 거리인 카오산 로드의 상점까지 일부 폐점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탁신 재산 60% 몰수에 자극받아

주말이면 인파가 넘쳐나는 짜뚜짝 시장은 시위 지역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환전소 문을 닫아버렸다. 방콕의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이 일대는 붉은 셔츠에 대한 지지세가 강한 곳으로 꼽힌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시민들이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지옥’ 같던 주말 교통체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도시 곳곳에 배치된 5만여 군경 병력이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의회 해산을 요구하는 붉은 셔츠 시위대가 방콕 도심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시위대는 비폭력 시위를 약속했고, 정부는 평화적 시위는 보장하겠다고 화답한 터다. 그럼에도 대치 국면이 달아오르면서 긴장감을 극으로 치달았다. 단 한 차례도 속 시원히 파헤쳐지지 않은 의문의 수류탄 투척 사건도, 시위대가 방콕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3월12일 이후 세 차례나 꼬리를 물면서 위기감을 키웠다.

“아피싯 총리 개인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군부의 입김을 등에 업고 총리에 오른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기에 반대하는 것뿐이다.” 시내 중심가 ‘민주주의의 탑’ 아래서 퇴약볕을 참아가며 연설을 듣고 있던 피팟(36)은 “솔직히 지난해처럼 폭력 사태가 벌어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부인과 딸 2명 등 온 가족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주말을 이용해 남부 송클라에서 방콕으로 올라왔다는 교사 키티팟(58)은 “(집권 민주당의 지지세가 강한) 남부 지역에도 붉은 셔츠가 많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탁신 전 총리의 최대 업적으로 빈민에게 의료 서비스의 문턱을 낮춰준 ‘30밧 의료제도’를 꼽았다.

시위 현장 주변에선 삼삼오오 패를 이룬 참가자들이 따로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부 시위대는 2006년 쿠데타로 폐지된 1997년 헌법을 복원하라고 외치며 ‘40’이라 적힌 펼침막을 들고 시위 장소 주변을 행진했다. 1997년 헌법은 타이 헌정 사상 가장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데, ‘40’은 타이력으로 1997년에 해당하는 2540년의 뒤 두 자릿수다.

낮에는 땡볕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지만, 밤이면 ‘아피싯 옥빠이’를 외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춤을 추는 이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시위가 아니라 축제로 보이기도 했다. ‘붉은 셔츠의 과격 시위’를 내심 ‘기대’했을 정부와 주류 언론으로선 아쉬움이 컸을 듯하다. 아피싯 총리는 시위가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개인 안전과 치안 상황 점검’을 이유로 보병연대 기지에 머물렀다.

이번 시위는 지난 2월26일 타이 대법원이 탁신 전 총리 재산의 60%에 가까운 14억달러를 몰수하도록 판결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재산 몰수 작업을 집행하는 ‘국가자산관리위원회’는 2006년 쿠데타 세력이 설치한 터다. 붉은 셔츠 시위대가 대법원 판결의 ‘합법성’을 따져묻기 위해 방콕으로 몰려든 이유다.

“보병연대 앞 시위로 아피싯 총리가 바로 의회 해산 요구를 수용할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행진하는 과정에서 방콕 도심이 꽉 막혀 도시 기능에 장애가 초래되면서, 우리의 요구를 방콕 거리에 좀더 분명히 알릴 수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폭력 시위를 ‘우려’한 타이 치안 당국은 도심 곳곳에서 두세 겹의 바리케이드를 쳤다.(Photo by Lee Yu Kyung)

눈물의 회군 뒤 풀뿌리 운동으로 세 키워

붉은 셔츠 시위대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짜란 디타피차이 박사의 설명이다. 기실 ‘의회 해산’은 붉은 셔츠 시위대가 지난 1년여 한결같이 주장해온 바다. ‘눈물의 회군’ 이후 지난 1년간 붉은 셔츠 진영은 북동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과 지역 단위로 조직화에 매진했다. ‘레드’ 꼬리표를 단 각종 상품 판매와 자활상점 운영 등 다양한 풀뿌리 운동을 병행하며 세를 키웠다. 정부의 거듭된 의회 해산 요구 묵살과 붉은 셔츠의 성장세까지. 대법원 판결이 없었어도, 붉은 셔츠의 방콕 귀환은 기실 시점의 문제였다.

붉은 셔츠 진영 내부의 분화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타이의 옛 국호인 ‘시암’을 딴 이른바 ‘시암 레드’란 좀더 급진적인 분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붉은 셔츠 시위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있지만, 이들은 주류가 고집하는 ‘비폭력 원칙’에 비판적이다. ‘시암 레드’에 가담한 이들이 시위 현장에서 붉은 셔츠를 지지한다고 밝힌 군 출신 카띠야(일명 세 댕)의 이름을 외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시암 레드’를 이끌고 있는 타이 공산당 게릴라 출신인 수라차이 단와타나누는 <한겨레21>과 만나 “이런 형태의 시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붉은 셔츠의 비폭력·평화 시위는 벌써 일주일째를 맞고 있다. 이제 와서 폭력 시위로 돌아설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진압이 시작되거나, 왜곡된 정보가 퍼지면서 분위기가 격화한다면 상황을 장담하기 어렵다. 타이 영자지 <방콕포스트>가 3월16일 수텝 트악수반 부통령의 말을 따 전한 기사 한 꼭지는 그 ‘일말의 가능성’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여전함을 일깨워줬다. “미국이 탁신과 붉은 셔츠 지도부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결과, 친탁신 조직이 주도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파악하고 우리에게 경고를 해왔다.” 붉은 셔츠 쪽은 이튿날인 17일 이에 대해 즉각 해명할 것을 미 대사관 쪽에 요구했다.

북동부 농촌 지역에서 올라온 시위대는 종일 집회 현장을 지킨다. 밤이면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방콕의 붉은 셔츠들이 그들과 합류한다. 그럼에도 시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시위대 규모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중산층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친왕정-반탁신 ‘노란 셔츠’ 시위대와 달리 서민과 빈민층이 중심인 붉은 셔츠 쪽은 시위를 계속해나갈 ‘경제적 지구력’이 부족한 터다.

시위는 야간에도 이어졌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사진을 가슴에 안은 한 여성이 시위 지도부의 연설을 듣고 있다.(Photo by Lee Yu Kyung)

의회 해산 뒤엔 노란 셔츠의 시위…

세계적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타이 담당 연구위원인 수나이 파숙은 “의회 해산이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줄 순 없다”고 지적했다. 다시 선거를 치른다면, 친탁신 계열의 정당이 과반 의석을 따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다시 노란 셔츠의 ‘선거 결과 불복종 시위’를 불러올 게다. 지난 몇 년 새 되풀이돼온 악순환이다. 그럼에도 사태가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면 최소한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혈액시위’로 표현된 절박함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건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혈액시위 제안한 웽 토지라칸 인터뷰

“의회 해산·공정 선거가 계급 전쟁 피하는 길”

Dr.웽 토지라칸

붉은 셔츠 진영의 지도부는 대부분 정치인이나 탁신 전 총리 정부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로 채워져 있다. 웽 토지라칸은 다른 이들과 달리 현직 의사다. 망설이던 그를 시위 대열로 불러들인 것은 지난해 4월13일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붉은 셔츠 시위대에게 가해진 무차별 폭력 사태였다. 1970~80년대 타이공산당(CPT) 소속 게릴라 전사로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한 그는 ‘혈액시위’를 맨 먼저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3월14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방콕 도심의 시위 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100만 시위대를 공언했는데.

=100만에는 못 미쳤지만,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시위다. 지도부에선 40만~5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부디 이 많은 인파가 왜 모였는지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기 바란다.

-정부가 의회 해산 요구를 수용할 기미가 없는데.

=최근 몇 년간 타이 사회의 계급 갈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심해진 계급 갈등이 계급 전쟁으로 번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것만이 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끝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여기 모인 수십만 민중이 직접 답을 할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우린 비폭력 원칙을 분명히 해왔다. 정부가 의회 해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주적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붉은 셔츠의 더욱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정부에 최후통첩까지 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혈액시위를 제안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의미하는 시위다. 정부는 이 처절한 투쟁을 더는 외면해선 안 된다.

-타이 언론의 부정적 보도가 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운 명분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였다. 미 주류 언론은 그 근거 없는 주장을 별다른 비판 없이 보도했다. 지금 타이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타이 주류 언론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와 권력자들의 이해에 복무해왔다.

-붉은 셔츠 시위를 이끄는 건 UDD이지만, 좀더 급진적인 ‘시암 레드’란 분파도 만들어진 것으로 안다.

=UDD는 여섯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첫째, 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진정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 둘째, 정실주의와 엘리트 관료주의를 배척한다. 셋째, 비폭력이 투쟁 원칙이다. 넷째, 법과 정의가 실현되는 정치를 바란다. 다섯째, 사회정의를 실현한다. 여섯째, 2006년 쿠데타 세력이 파괴한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원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는 UDD가 아니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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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보다 더한 강제수용소에 분노”

[2010.02.05 제797호]

타밀계 말레이시아 국회의원 라마사미 인터뷰
“스리랑카 난민 문제에 눈감고 있는 국제사회 행태 이해할 수 없어”

“자기 국민 몇십만 명을 열악한 환경에 무작정 가둬두는 게 말이나 되나?”

말레이시아 국회의원이자 페낭주 차관을 맡고 있는 라마사미 팔리나사미는 20여 년간 케방사안말레이시안대학(UKM)에서 역사와 정치를 가르친 저명한 학자 출신이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 인도 남부에서 건너온 타밀계 집안 출신인 그는 스리랑카 평화협상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이하 타밀호랑이)의 과도자치정부안(ISGA) 초안 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쿠알라룸푸르의 의원회관에서 <한겨레21>과 마주한 그는 “스리랑카 난민 문제에 눈감고 있는 국제사회의 행태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타밀계 말레이시아 국회의원 라마사미 (Photo by Lee Yu Kyung)

-스리랑카 정부가 최근 난민캠프 폐쇄와 난민 석방 약속을 다시 들고 나왔다.

=국제사회의 압박과 (1월26일) 대통령 선거 때문이다. 난민 석방은 진작에 이뤄졌어야 한다. 자기 국민 몇십만 명을 무작정 가두는 게 도대체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인가? 당장 시급한 건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걸 회복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돕는 거다. 그런 뒤 타밀족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난민캠프의 열악한 상황을 두고 ‘천천히 가해지는 인종학살’(슬로 제노사이드)이란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킬리노치(스리랑카 북부 타밀호랑이 통치 지역의 수도)를 일곱 차례 방문했다. 2002~2009년 휴전 기간에도 그 지역에는 전기와 의약품이 부족했고, 경제 봉쇄도 가해졌다. 그때도 이미 재난 수준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물도, 식량도, 위생시설도, 화장실도 없는 처참한 난민캠프에 갇혀 몇십만 명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난민캠프가 아니라 나치의 강제수용소, 그것도 나치 시절보다 훨씬 군사화한 강제수용소다. 국제사회가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 특히 유엔의 행보에 화가 치민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스리랑카 정부가 대량학살을 벌이는 동안엔 사실상 눈을 감았고, 참사가 벌어진 뒤에야 난민캠프를 잠깐 둘러봤을 뿐이다.

-난민들이 석방된다 해도 그들을 포함한 타밀족의 처지가 나아질 것 같지는 않는데.

=그렇다. 지금 스리랑카 타밀인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분쟁의 또 다른 장이 펼쳐지고 있다. 타밀호랑이 출신이라고 조금만 의심받아도 즉시 사살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밀호랑이 출신으로 의심돼 분리 수용돼 있는 이들의 안전이 걱정이다. 그들은 전쟁포로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도대체 난민캠프에 몇 명이 수용돼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교전 마지막 날 상황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 5월16일) 풀리델반이나 나데산 등 투항하는 타밀호랑이 간부와 그 가족을 스리랑카군은 전부 총살했다. 난민캠프에서 인권침해는 없는지 등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국제사회가 타밀족 문제에 무관심한 건 ‘테러단체’인 타밀호랑이가 패배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동의한다. 유럽연합과 미국, 인도 등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게 타밀호랑이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스리랑카 주변국과 서구 강대국들은 타밀호랑이가 어떻게든 사라지기를 바랐다. 중국·파키스탄·인도·미국은 스리랑카 정부군에 무기를 대주는 한편 타밀호랑이 쪽으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는 등 스리랑카 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니 작금의 상황에 대해 스리랑카 정부를 비판할 자격도 없다.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동남아·남아시아 각국으로 타밀 난민들이 밀려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계속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국민 중에도 타밀족이 있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 인도 남부에서 건너온 이들인데, 난민으로 떠도는 동족 때문에 마음이 무거울 거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타밀족 문제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출처 :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6677.html


난민캠프인가 죽음의 수용소인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스리랑카 내전 [2010.02.05 제797호]

지난해 5월 타밀호랑이 반군 항복 뒤에도 타밀족 난민캠프에선 살인·기아·질병 난무…
난민들 외국 탈출 잇따라

내전은 막을 내렸지만, 스리랑카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1월2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부정선거 시비가 일면서 야당 후보인 사라스 폰세카 전 합참의장이 호텔방에서 농성을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새 잊혀진 것은 스리랑카 인구의 15%를 차지하면서도 ‘난민’으로 내몰린 타밀족이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목숨을 건 탈출 끝에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타밀 난민들의 육성을 보내왔다. 편집자

드넓은 벌판은 온통 철조망이다. 그 안에선 총을 든 군인과 경찰 몇천 명이 전투지역처럼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스리랑카 북부 와우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진 드넓은 이들 시설을 당국은 ‘복지마을’이라 부른다. 국제 인권단체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그곳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나온 타밀족 주민들을 무작정 붙잡아두고 있는 난민캠프다.

‘어둠을 탓하지 말자. 차라리 촛불을 밝히자.’ 지난해 말 말레이시아 타밀족들이 내전으로 스러져간 스리랑카의 동족들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Photo by Lee Yu Kyung)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이하 타밀호랑이) 반군의 패퇴로 26년여 스리랑카 내전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건 지난해 5월19일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등의 자료를 보면, 전쟁 막바지 서너 달 새 발생한 난민만도 30만 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스리랑카 북동부 와우니아·마나르·자프나·트링코말리 등지에 급조된 ‘복지마을’에 분산 수용됐다. 그나마 돕겠다는 국제 인도지원 단체들의 접근마저 차단한 스리랑카 정부가 난민캠프의 시설을 제대로 갖춰놓았을 리 없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철저히 가려졌다. 와우니아 캠프에 수용됐던 카란(65·가명)도 그렇게 ‘숨겨진 난민’이었다.

지난해 5월16일 밤 스리랑카 북서부 난디카달 저수지와 인도양 사이에 낀 좁은 해안가 물리바이칼. 빗발치는 포탄을 피해 카란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집도 자동차도, 평생을 모은 책과 애완견 두 마리까지 모든 걸 남겨두고 서둘러 떠나야 했다. 목적지는 포탄의 출발지, 곧 정부군 진영이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카란는 와우니아 난민캠프의 ‘존 4-27번 텐트’를 배정받았다(‘존 4’는 이후 숱한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A1부터 F9까지 54개 구역으로 확대개편됐단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돈만 있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한 달여가 지난 6월 중순께, 텐트 밖 땡볕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카란에게 낯선 사내가 다가와 은근한 말을 건넸다. ‘정부군 첩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주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며 짐짓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상 그는 비좁은 텐트 안에서 부부 2쌍과 10대 소녀 2명, 그리고 70대 여성 1명 등 14명과 민망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주로 밖에서 잠을 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캠프에서 나눠주는 음식은 입에 댈 수도 없는 수준이었고, 물을 긷거나 화장실을 가려면 새벽부터 줄을 늘어서야 했다”고 말했다.

내전 막바지, 스리랑카 당국은 “정부군 쪽으로 넘어오면, 병원·식량·물·주거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선전방송을 해댔다. 새빨간 거짓이었다. 목숨을 건 피난 끝에 정부군 진영인 와두와칼루에 당도했지만 물도, 식량도, 잠자리도 없었다. 허허벌판에서 비스킷과 죽으로 며칠을 버틴 난민들이 마침내 도착한 난민캠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난민에 대비한 최소한의 물자도 갖추지 않은 터였다. 삶은 전쟁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이가 다가와 같은 말을 속삭이더라. ‘돈만 있으면 난민캠프에서 나갈 수 있다’고. 캠프에 채소를 대던 무슬림 상인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둘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탈출 비용’은 20만루피(약 200만원)로 흥정을 봤다. 그해 6월 말 채소 배달차에 몸을 실었다. 캠프에는 여러 겹으로 검문소가 설치돼 있었지만, 군인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캠프를 나서 2시간여를 달린 트럭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와우니아 시내 부근에 멈춰섰다. 캠프를 탈출한 10여 명의 낯선 이들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틀을 그곳에서 숨어지낸 뒤 수도 콜롬보행 기차표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20만루피의 값어치는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6월30일 아침, 카란은 콜롬보에 무사히 도착했다.

스리랑카 내전은 막을 내렸지만, 타밀족에 대한 박해와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타밀호랑이 전사였던 쿠마르는 “언제든 다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왼쪽). 라니와 수단티 자매는 “난민캠프에선 일주일에 대여섯 명씩 죽어나갔다”고 말했다(오른쪽) (Photo by Lee Yu Kyung)

탈출 난민 너무 많아 특수 누리는 브로커들

“아버지 돌아가신 줄 알고 장례식까지 치렀는데….” 외국에 사는 딸과 어렵사리 통화가 됐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딸이 마련한 급전으로 캠프를 빠져나온 지 보름 남짓 만에 그는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콜롬보에선 돈만 있으면 나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어렵지 않았다”며 “여권·비자·항공권 등을 패키지로 준비해놓은 수많은 브로커들이 ‘난민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만연한 부패상이 되레 난민들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스리랑카 타밀족 난민들의 국외 탈출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게 지난해 10월 중순이었다. 11월 중순부터 그들을 찾아나섰다. ‘존 0’부터 ‘존 4’까지, 와우니아 난민캠프의 각기 다른 구역에서 탈출을 감행한 타밀 난민들은 동남아 전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놀랍게도 난민들은 종전 불과 2주째 뒤인 지난해 6월 초부터 캠프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만큼 열악했기 때문이리라.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09년의 끝자락에 한 달여 동안 말레이시아 각지에서 타밀 난민들의 육성을 들어봤다. 더러는 가족이 난민캠프에 남아 있다. 모두들 여전히 불안해했다. 증언은 극히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머물던 캠프에선 일주일에 대여섯 명씩 죽어나갔다.” 온 가족이 전장을 빠져나와 지난해 4월20일부터 와우니아의 이루나찰람(존 3) 캠프에서 생활했다는 수단티(20·가명)와 라니(22·가명)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캠프에 도착하면서부터 설사와 구토 증세를 보였다는 수단티는 새벽부터 줄을 서 오후 늦게서야 의사를 만나는 일을 두어 달 반복해야 했단다. 7월 초 캠프 밖 체티쿨람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볼 수 있는 허가를 받고 밖으로 나온 자매는 그길로 탈출을 감행했단다.

“캠프에선 죽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아”

“6월 중순이었다. 열이 심해 캠프 병원을 찾았다. 나이 지극한 여성이 오후 1시께 쓰러졌는데, 시간이 가면서 몸이 차가워지더니 결국 숨을 거뒀다. 모두들 의사 한번 보려고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게 일상이라, 어느 누구도 쓰러진 여성에게 순서를 양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극이다. 그나마 결핵환자에게 해열제 몇 알 주는 게 고작이었지만….” 라마나탄 캠프(존 2)에서 지난해 11월 초 탈출했다는 제야발란(23·가명)도 비슷한 증언을 내놨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캠프 스피커에서 ‘주검 1구가 있는데, 자기 가족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와서 신원을 확인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곤 했다”고 전했다.

“누구한테도 구걸하며 살아본 적 없다. 존엄을 지켜왔다. 그런데 난민캠프에선 스리랑카 군인들이 식량을 배급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던져버린다. 그들 앞에서 우린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여야 했다. 군인과 경찰은 무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이나 하고….”

아난다쿠마라수와미 캠프(존 1)에서 빠져나왔다는 찬드라(40·가명)는 서럽게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5월17일 오전 9시30분께, 그는 마지막 전장 물리바이칼에서 와두와칼루까지 1km 남짓을 지나가면서 주검을 5천 구쯤은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맨발이 주검 속에 빠져드는 아수라의 땅을 딸 부디마(13·가명)의 손을 잡고 헤쳐나왔단다. 마지막 피난길에 헤어진 남편과 또 다른 딸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는 난민캠프에 머무는 동안 각별히 입조심을 했다. 남편이 타밀호랑이 고위 간부였던 탓이다.

난민들은 “캠프에선 누구라도 가족 외에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복을 입은 군경은 물론 사복 차림의 친정부 타밀 민병대원들이 캠프 안을 돌며 난민들의 일상을 감시한 탓이다. 이따금 정부에 투항한 타밀호랑이 출신들이 정부군 복장으로 나타나 난민들 사이에서 반군 출신자를 가려내기도 했단다. 지난해 7월24일 남편과 네 자녀를 데리고 카티르카마르나가르(존 0) 난민캠프를 탈출했다는 사리타(41·가명)는 “지난해 6월 초순 한밤에 군인들이 와서 소년 서른대여섯 명을 한꺼번에 데려갔는데, 내 옆 텐트에 살던 라제스와리(48)·캄다사미(50) 부부의 아들도 잡혀갔다”며 “부부는 자기 아들은 반군이 아니라며 밤낮으로 울먹였지만, 아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도 있다. 갑자기 주검으로 발견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몇십만 명의 난민들이 턱없이 부족한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난민캠프에서 어둠은 위험을 부르기 마련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배식을 하는 곳이나 물탱크 앞에서 줄을 늘어서 있으면 취한 군인들이 술병을 들고 와서는 ‘잠깐 같이 가자’며 팔을 잡아끌기 일쑤였단다. 라마나탄 캠프(존 2)에서 탈출했다는 아라빈단(41·가명)의 증언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다. 그러니까 지난해 5월23일 또는 24일로 기억한다. ‘존 1’과 ‘존 2’를 가르는 작은 냇가에서 주검 6구가 발견됐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기에 가보니, 내 옆 텐트에 살던 소녀도 주검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날 새벽에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는데 결국 그렇게 된 거다.”

애초 마힌다 라자팍세 스리랑카 대통령은 종전 직후 “180일 안에 난민캠프를 폐쇄하고, 수용됐던 난민들을 ‘석방’해 재정착까지 마치도록 하겠다”고 장담한 바 있다. 그의 호언이 거짓으로 드러난 지는 이미 오래다. 타밀 게릴라들이 총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8개월째다. 상황은 나아졌을까? 스리랑카 내부에서 타밀족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한 인권운동가는 지난 1월18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파괴된 고향조차 찾아갈 수 없는 난민들

“구호단체들의 난민캠프 접근은 여전히 어렵다. 난민들의 이동의 자유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반군이 장악했던 지역에 돌아간 귀향 난민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그곳에서 외부 지원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당국은 구호요원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는 걸 가로막기 일쑤다.”

총성은 멈췄다. 타밀 난민에 대한 박해와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전쟁이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전쟁의 땅이다.

쿠알라룸푸르·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출처 :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6678.html


폭력과 아편의 승리, 어둠의 휴일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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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고문 자행하고 아편 불러들인 무자헤딘 사령관들의 ‘승전 기념일’

▣ 카불·낭가르하르·페샤와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소련 점령보다 괴로웠고, 탈레반 통치보다 잔인했다.”

1992년 4월28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무력으로 입성한 무자헤딘은 더 이상 대소 항쟁의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4년 반 동안 종파와 인종으로 갈린 무장 권력투쟁을 벌여 카불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군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날은 무자헤딘 승전 기념일이다. 납치, 강간, 절도 그리고 머리에 못을 박는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던 사령관들을 기억하는 카불 시민들에게 이날은 ‘블랙 홀리데이’다.

멀리 우람한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의 들판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가난한 아프간 농민에게 아편재배는 때로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Phto by Lee, Yu-Kyung)

멀리 우람한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의 들판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가난한 아프간 농민에게 아편재배는 때로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Photo by Lee, Yu-Kyung)

전범재판에 세워도 시원찮은 그들은 ‘민주화된’ 아프간에서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지역 군벌들이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전범 기록을 꺼내들 때면 ‘대소 항쟁’을 들이대며 입 닥치라고 협박하는 ‘성스러운 전사’들이다. 사령관들의 컴백.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게 다시 아편을 불러들였다. 국제사회가 퍼부어댄 돈이 사령관들의 주머니와 배를 채우는 사이, 그때나 지금이나 배고픈 농민들은 아편 재배로 몰리고 있다. ‘아편 박멸’ 작업으로 이따금 쑥대밭이 되기도 하지만 아편이 박멸될 것 같진 않다. 가난한 밭을 ‘골라’ 박멸하고, 사령관들의 밥줄은 건드리지 않는 게 단속반의 비공식 규율이기 때문이다. 사령관들을 권좌에 다시 불러들인 ‘해방전쟁’ 5년 반. 그 전쟁이 낳은 사생아 ‘아프간 마약대국’은 이제 곧 여섯 살이 된다.

한 아프간 농부가 수확한 양귀비 열매에서 채취한 붉으스름한 생아편 즙을 들어 보이고 있다. 농민들은 수확기에 이렇게 긁어 모은 생아편을 밀수조직에 넘겨 얻은 수익으로 한해살이를 한다. (Photo by Lee, Yu-Kyung)

4월29일 미군의 공격으로 6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은 쉬르겔 마을에선 ‘어린이 부상자’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 어린이가 채 아물지 않은 그날의 상처를 내보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아편 박멸작업은 아프간에서 ‘공무’다. 10여 명의 일꾼들이 작업에 나선 현장에도 중무장한 경찰 병력이 어김없이 동원된다. (Photo by Lee, Yu-Kyung)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지난 4월28일 무자헤딘 승전 15주년 기념일을 맞아 수도 카불에서 군 수뇌부와 함께 퍼레이드에 나섰다. 아프간 민중을 옥죄어온 군벌들은 ‘성스러운 전사’로 둔갑해 이날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았다. (Photo by Lee, Yu-Kyung)

외국군대 없이는 수도 카불조차 지키지 못하는 아프간 군대. 아프간 새해 경축행사를 벌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27000/2007/05/021027000200705170660012.html


‘아편과의 전쟁’도 이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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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정부의 핵심 과제라는 아편 박멸 사업, 미국 지원받아 무차별 공격 중?

▣ 낭가르하르(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건 내게 ‘철거 깡패’를 연상시켰다. 산동네 판자촌에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한국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들이 ‘깡패’는 아니었다. 주정부 대변인과 무장경찰 그리고 도심에서 고용된 10여 명의 ‘막대기 부대’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은 아편 박멸사업이라는 막중한 ‘공무’를 수행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사업은 마약퇴치부(Ministry of Counter Narcotic) 동부지방관 아흐마툴라 알리자이의 말마따나, ‘테러와의 전쟁’과 쌍벽을 이루는 아프간 정부의 핵심 과제다. 그런데 이 핵심 과제를 수행하는 부처 간 불협화음은 거의 ‘콩가루 집안’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미국 ‘모 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주지사가 주도하는 아편 박멸작업을 두고 알리자이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건 불법이야. 주지사 개인 비서들이 날품팔이들 동원해서 벌이는 일이거든.” 그는 카니켈 지구 주민 1명이 미리 약속했던 일당 500아프가니(약 10달러) 가운데 300아프가니를 주지사 개인 비서인 마수드에게 뜯겼다며 낸 진정서를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아편 박멸 일용노동자’와 주민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작업에 동원된 한 일용노동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편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5월1일 아프간 동부 로닷 지구로 향하는 아편 박멸팀에 ‘임베드’(동행 취재)를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내일 마을 주민들이 우리 팀에 얼마나 협조적인지 보게 될 거요.” 전날 인터뷰한 닝가르하르 주정부 대변인 누라가 자왁은 내게 이렇게 장담했다. 물론 그의 말은 미심쩍었다. “그래, 어디 한번 가봅시다”라고 응수했다.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말한 ‘협조’라는 게 박멸팀에 고용된 현지인 인부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주민’이라기보다, 도시에서 고용한 ‘아편 박멸 일용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열심히 일했다. 일부는 마지못해 나선 분위기가 역력했다. 또 다른 이들은 때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들고 온 막대기로 양귀비 밭을 후려쳤다. 이를 불안하면서도, 그러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민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서너 살쯤 돼 보이는 꼬마에서부터 아편밭 주인 그리고 좀처럼 문 밖을 나서지 않는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까지 ‘구경’나온 주민은 다양했다. 약 20분간 이 밭에서 저 밭으로 박멸작업은 이어졌고, ‘팀’은 이내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권력 있는 사람들 밭은 안 건드리고 가난한 우리 밭만 건드려….”

망가진 밭을 바라보는 모히불라(29)는 23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편 농사가 세 번째 망가졌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묻지 못하고 또 다른 주민에게 옮겨가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통역이 ‘빨리’와 ‘그만’을 연발하며 취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주민 인터뷰를 최우선 취재 과제로 놓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주정부 대변인 자왁이 “더 이상의 사진 취재도, 인터뷰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갔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사진을 충분히 찍을 때까지 계속 박멸하리라”고 했던 자왁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었다.

“길도 물도 없는데 채소 기르라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아편 박멸작업이 한창이다. 작업에 동원된 한 일용노동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편밭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by Lee, Yu-Kyung)

아프간에서 체류한 두 달 동안 종종 느끼는 바지만 현지인 통역 일부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아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3월 초 납치 사건으로 외국인 기자는 풀려나고 현지인 통역(기자)과 운전기사만 목숨을 잃었던 탓에 이런 현상은 더더욱 정당성을 얻어갔고, 쉽사리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듯했다. 아편 박멸 현장에서 애당초 상의한 취재가 건건이 빗나가면서 급기야 통역과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덕분’에 양귀비 열매에서 아편 즙을 정성스럽게 긁어대는 인근 마을 주민들을 더는 취재할 수 없었다. 아편 박멸사업은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었고, 구린내가 많이 나는 ‘공무’였다.

“우리 보고 채소 농사를 지으라고 하는데, 채소를 팔러 시장 가는 길이 나빠서 가는 길에 전부 시들어버려. 게다가 물도 태부족인데, 아편 농사가 다른 농사보다 물이 덜 들거든.” 지난해 아편 농사로 아들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는 아지둘라(40)의 말이다. 주정부와 마약퇴치부 관계자에게 “보상 한 푼 안 한다면서 대책 없이 밭을 갈아엎으면 농민들은 뭘 먹고사느냐”고 묻자, 한목소리로 ‘도로’와 ‘물’ 관련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도로를 만들고, 마케팅을 활성화하고, 다른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학교를 짓고, 용수 공급 시스템을 만들고….” 마약퇴치부 지방관 알리자이도 허공에 떠도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던 주정부 대변인 자왁 못지 않았다. 그는 “농민들을 위해 각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며 “아편을 박멸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지원이 끊기기 때문에 반드시 박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편 재배는 단순히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나쁜 짓”이라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사안이 아니었다.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이던 아프간에선 탈레반 정권 등장과 함께 아편 재배가 사실상 퇴치됐다. 지난 2000년 여름 탈레반 정권이 아편 재배 금지령을 내린 이후 아편 재배 면적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2001년 2월 현지조사에 나선 유엔 마약통제프로그램(DCP) 실태조사팀도 “아편 재배가 거의 완전히 근절 단계에 와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정부 관료·경찰도 아편 밀수에 연루

그러나 미국 주도의 아프간 침공과 잇따른 탈레반 정권의 몰락과 함께 아편 재배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탈레반이 부활해 조직 기반을 넓혀나가는 사이 아편 재배는 무서운 생명력으로 아프간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약 200만 농민들의 생계수단이 돼 있다. 전후 약 6년간 물과 전기, 도로 등 기본적인 기반시설조차 닦아놓지 않은 국제사회의 재건 실패와 부패한 아프간 정부 탓으로 그 책임을 돌려도 될 듯싶다. 여기에 지방 군벌들은 물론 정부 관료와 경찰까지 아편 밀수사업에 연루된 부패상 때문에 박멸과 재배가 공존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간 아편 재배 관련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샤피쿨라 샤이크는 “아프간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널린 게 헤로인 공장이고 아편 밀수업자다. 그 밀수 조직들이 불안한 치안 조성에도 한몫하고 있다”며 “치안이 나빠야 밀수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 <블랙 포이즌>에서도 묘사된 바지만, 낭가르하르 지방의 2006년 아편 재배량이 전년도에 비해 346%나 급증한 배경을 두고 관련 부처들은 모두 마약 왕들이 농민들에게 뿌린 돈 탓을 했다. 생계를 보장해줄 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밥줄이 절박한 농민들의 현실이기에, 이런 악순환이 쉽게 가실 것 같진 않다. “아편 중독자 중 10% 정도만이 아편 재배 농민이고 나머지는 농사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다수는 파키스탄과 이란 등지에서 난민생활 중에 중독됐다.” 잘랄라바드시 퍼블릭 헬스 병원의 아편 중독치료실 의사 라이쿨라 오바이디의 설명 역시 아편 재배가 농민들에게는 그저 밥줄이라는 점을 방증하는 한 근거로 볼 만했다.

이렇게 아편과의 전쟁이 빚어낸 생계수단 상실과 경제적 박탈감을 한 축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빚은 민간인 피해를 또 다른 한 축으로 이 두 전쟁은 아프간 전역에서 민간인들의 목숨과 생계를 꾸준히 위협하고 있다. 아편과의 전쟁은 목숨보다는 생계를 위협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 역시 목숨을 앗아간 적이 있긴 하다. 4월 초 ‘낭가르하르 지역 라디오’는 바티콧 지구 한 마을에서 아편박멸팀과 주민들의 충돌로 주민 1명이 죽고 4명의 경찰이 주민들이 던진 돌에 다쳤던 사건을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에도 변함없이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공습 피해자들이다. 4월27일부터 3일간 서부 헤랏 지방에서는 미 동맹군의 공습으로 최소 5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5월1일 남부 칸다하르 마루프 지구에서는 다시 미 동맹군의 공습으로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틀 전인 4월29일 낭가르하르 가니켈 지구 쉬르겔 마을에서는 또다시 미 동맹군의 ‘가짜 교전’으로 6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1명이 테러리스트 혐의로 연행됐다.

탱크 앞세운 미군 공습에 민간인 사망

5월3일 쉬르겔 마을을 찾았다. 마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집채보다 더 큰 대문이 들머리에 버티고 선 이 곳에 4월29일 새벽 2시께 미군은 7대의 탱크와 2대의 헬리콥터를 끌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마을 들머리 대문 앞에 폭탄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담을 넘어 침입해 마구 총질을 해댔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기 위해 나오던 자나트 굴(50)이 처음으로 쓰러졌고, 야외에서 잠을 자던 굴의 친인척 3명(부부와 딸)이 두 번째로 사망했다. 그리고 도망치던 이브라임(35)이 풀밭에서 죽었고, 아부둘 나지르(30)가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군 쪽은 “반군과 교전 중 반군 4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반군’은 없었다. 일부 언론은 어린이 1명과 여성 1명이 죽었노라고 보도했지만, 어린이 사망자는 없었다. 주정부 대변인은 민간인 희생자에게 30만아프가니(약 6천달러)의 보상금을 줬다고 얘기했지만,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조사든 취재든 현지를 찾은 외부인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민간인 피해가 유독 심했던 한 주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도의 국제치안보조군은 기자회견을 열고 다시 한 번 이렇게 다짐했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아프간 군당국과 협조를 잘하겠노라”고. 계속 사고치는 미군보다 아프간 군당국과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좀 이상한 다짐이었다. 한편 미군 쪽은 “민간인 피해는 보고된 바 없다”거나 “민간인 피해를 잘 알지 못한다”며 건건이 잡아뗐다. ‘아편 전쟁’을 두고 낭가르하르 주정부와 마약퇴치부의 궁합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지휘부대가 서로 다른 NATO와 미군 쪽의 궁합이 그리 썩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밤중에 날벼락을 만났던 작은 마을 쉬르겔의 안마당에도 양귀비는 곱게 자라고 있었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55.html


칸다하르, 치안 실패 재건 실패

Home > 국제 >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5월03일 제658호
탈레반 탄생지 르포… 동맹군의 몸집 부풀리기가 가져온 건 치안이 아니라 전쟁, 미숙한 공격에 민간인 피해 심각 ▣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는 탈레반의 탄생지다. 이곳에서 1994년 말 탈레반 운동이 동터올랐고, 칸다하르 전역과 인근 남부지방 그리고 서부 헤라트를 거쳐 1996년 9월 카불에 도착하기까지 무섭고도 빠르게 번져갔다. 탈레반의 정신적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탈레반 집권 기간이던 1996~2001년 수도 카불이 아닌 이곳 칸다하르에 머물렀다. 탈레반이 지었다는 이 지역 최대의 모스크 ‘이드가르’에선 매주 금요일 오마르의 설교가 이어지기도 했다.

칸다하르 시내 순찰을 하고 있는 아프간 경찰. 아프간 군인과 경찰은 50~60달러의 월급을 받지만 탈레반 병사는 200~500달러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업과 경제적 박탈감이 칸다하르 주민의 탈레반 지원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충고가 잇따르고 있다.(Photo by Lee, Yu-Kyung)

“자기들 필요한 길은 잘 뚫어놓았다니까”

칸다하르는 파키스탄 남부 퀘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탈레반의 ‘물주’로 알려진 파키스탄과 소통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수많은 탈레반들이 난민들에 묻혀 ‘퀘타~칸다하르’ 국경을 별 문제 없어 넘나든다. 탈레반은 지난해부터 자신들의 본고장인 칸다하르를 다시 장악하겠다고, 칸다하르와 카불 간 연결 도로를 끊어놓겠다고 별러왔다. 그 도로가 혹시라도 끊길까, 그 전에 꼭 한 번은 육로를 타고 이동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3~4월 아프간 전역을 흔들어댄 납치 사건으로 간이 콩알만 해진 탓에 렌터카보다 값이 싸기까지 한 비행기를 예약했다. 결국 그 비행기가 예고도 없이 스케줄을 변경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차를 탔다. 애당초 육로 이동을 원하던 터라, 심리적으로 좋은 핑곗거리가 됐을지 모른다. ‘할 수 없다. 그냥 차 타고 가자!’

‘카불~칸다하르’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미국인들이 자기들 필요한 길은 잘도 뚫어놓았다니까”라던 한 카불 시민의 말이 떠올랐다. 탈레반의 활동 무대인 남부의 관문 격인 칸다하르와 수도 카불을 연결한 도로는, 알카에다가 주로 활동하는 동부 중심도시 잘랄라바드와 카불을 잇는 도로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로다. 군용 트럭이 이동해야 하는 길은 모두 잘 닦여 있다는 얘기다. 그 도로를 타고 5시간여 만에 칸다하르에 닿았다. 매번 놀라는 거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검문은 그리 까다롭지 않아 ‘맘만 먹으면’ 폭탄 들고 움직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카불~칸다하르 고속도로도 엇비슷했다. 대여섯 군데 초소도 없는 검문소에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복과 군복을 입은 이들이 옛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거칠게 들이대곤 했지만 그렇다고 검문이 까다로운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닿은 칸다하르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그냥 ‘사람 사는’ 동네였다. 임베드(종군) 프로그램으로 취재 중인 네덜란드의 한 방송사가 칸다하르는 도심조차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는데, 그건 ‘임베드’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갇힌 기사였다. 칸다하르 도심 밖 여행은 쉽지 않았지만 최소한 도심 내에서 움직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최하 밑바닥부터 최고 윗사람들까지 전부 부패했어. 이 정부에 희망이 없다고. 국제사회는 지금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아프간계 미국인인 자비드 아흐마드(50·가명)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남부지방에 체류 중인 그는 칸다하르 옆 동네인 헬만드 지방의 경우 “거의 모든 주민이 탈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억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부르카는 탈레반이 기반한 파슈툰 사회에서 보편적인 여성 차림이다. (Photo by Lee, Yu-Kyung)

‘부패’에 대한 불만은 가는 곳마다 이구동성으로 들려왔다. “탈레반은 물론 정부 관료들도 구호물품을 갈취하고 있다니까.” 사실 확인은 힘들었지만 피난민 와이즈 파지(가명)의 말에서도 부패한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부패 양상은 세계 아편 생산의 80~90%를 ‘책임’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아편 수확기에 접어든 요즘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지난 3월 말 칸다하르 주정부가 ‘아편 없는 지역’으로 선언한 칸다하르의 네 지구, 단드(Dand)·바만(Baman)·자리(Zhari)·아르간다브(Arghandab) 지역이 실상은 전부 ‘아편 청정지역’은 아니라는 사실. 그건 ‘1제리브’(0.19536ha에 해당하는 단위)당 1천아프가니(약 20달러)에서 5천아프가니(약 100달러)까지 돈을 받고 아편농사를 눈감아준 뒤 ‘청정’ 선언을 했다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달리 생계수단이 없는 농부들의 아편밭을 대책 없이 뒤집어엎는 아편 박멸 사업이 곳곳에서 충돌을 빚어내는 가운데 아편과 관련한 모순은 칸다하르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편 없는 청정 지역’의 실체

칸다하르 시내 중심가에서 미 동맹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이 뒤섞여 철통같이 버티고 선 시 외곽 칸다하르 공항으로 이르는 길목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아편꽃들이 여봐란듯이 활짝 피어 있다. 또한 ‘아편 박멸 프로젝트’의 현지 일꾼이 아편을 피워대는 모습도,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칸다하르 사무실 인근에 마리화나가 곱게 자라나고 있는 장면도 모두 ‘아편 모순’의 그림들이다. 이런 그림은 탈레반과 아편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아편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규율에 따라 2001년 아편 박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탈레반이 이제는 (아편 박멸을 외치는 정부에 맞서) 아편 농사꾼들의 보호막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헬만드 지방 상귄 지구를 탈레반으로부터 재탈환한 NATO 동맹군이 기자들까지 비행기로 실어날으며 축하행사를 열었지만 탈레반의 반응은 이런 거였다. “마을 원로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민들의 아편밭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전술적 후퇴였다. 곧 재탈환한다.” 그렇게 보호한 아편이 탈레반의 재원 일부를 채우는 걸로 알려진 가운데 탈레반은 이슬람의 아편 금지와 관련해서는 또 이렇게 자기 옹호를 한다. “대부분의 아편이 서방으로 건너가 (무슬림 형제가 아닌) 이단자들을 중독시키니까 별 상관없다!” 그러나 아편은 ‘이단자들’만 중독시키는 게 아니었다. 칸다하르 시내 아편 중독자 재활센터에 머물고 있는 10명 남짓한 아프간 중독자들은 작은 본보기일 뿐, 아프간 당국은 중독자 통계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아편을 피우거나 차에 섞어 복용하는 건 현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예상치조차 없는 민간인 피해

탈레반의 태생지 칸다하르 시민들은 연일 악화되는 치안과 경제 상황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2001년 전쟁 직후 잠시 외세를 환영했다는 이들은 이제 국제사회의 ‘해방’과 ‘재건’구호를 비웃는다. (Photo by Lee, Yu-Kyung)

이러는 사이 칸다하르와 남부지방 일대의 치안 부재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재난이 야기하는 건 단연 계속되는 각종 교전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칸다하르 지방의 치안 사정은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엔 하루에 세 번이 넘게 자살공격이 발생했는데 올해는 거의 없다. 칸다하르는 날씨도 춥지 않아 겨울에도 (탈레반이) 맘만 먹으면 공격할 수 있었다.” 칸다하르 주지사 아사둘라 칼리드는 악화되는 치안 사정에 대해 묻자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주지사의 항변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와 인터뷰한 사흘 뒤 칸다하르 시내에서는 NATO 차량을 겨냥한 자살 공격이 벌어져 민간인 6명이 다쳤다. 자살공격대 모집 담당이 퀘타에서 칸다하르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려온 날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를 모방했다고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의 자살공격은 그러나 이라크와 달리 아프간군과 경찰, 외국 군대(NATO와 미군) 그리고 정부 관료 등 ‘적’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그 미숙한 공격이 민간인을 더 많이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건 이라크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무기 들고 우리(탈레반)와 싸우는 놈들이나, 그 외국인들과 협조하는 놈들이나 우리에겐 다르지 않다.” 외세 점령에 이를 가는 탈레반의 골수 기질이 외국인 반감으로 발전하고 있는 탓에 칸다하르 시내에 자리한 국제 비정부기구(NGO) 사무소는 대부분 간판을 걸지 않고 있었다. 탈레반이 교전 중에 주민 가옥을 ‘방패’ 삼고 들어앉아 공습을 피하는 것처럼, NGO들도 민간인 가옥처럼 간판 없이 들어앉아 혹시 모를 공격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도 속속 떠나고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동안 정치적 이슈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탈레반 시절 이전부터 최근까지 남부지방은 15년 내리 심각한 가뭄에 직면해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때아닌 물난리가 나기도 했다. 구호가 절박한 이런 지역에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치안은 없고 교전만 계속되고 있으니 ‘치안유지 실패, 구호와 재건 실패’를 칸다하르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만 늘려가는 동맹군의 몸집 부풀리기가 가져온 건 치안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탈레반 시절엔 적어도 치안은 유지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탈레반의 극단적 규율은 근본적으로 아프간 동남부 일대에 퍼져 사는 파슈툰족의 보수적 관습에 기인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 의무나 남성들의 턱수염 기르기 의무 등은 칸다하르 같은 곳에선 별다른 문화적 충격이 아니다. 실제로 칸다하르 거리를 둘러보면 남성들의 턱수염은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 여전히 99%의 여성들은 부르카를 두르고 다녔다. 아프간 내 소수민족이자 유목민으로 분류되는 쿠치족 여성들만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 탈레반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돼온 부르카보다는 치안 부재와 교전으로 인한 위기 상황이 주민들에게는 더 피부로 다가오는 문제였다.

이런 측면에서 NATO군이 목표물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서 퍼붓는 공습을 ‘선호’해온 건 치명적 오류였다. 그건 ‘미숙한 자살공격’보다 더 나쁜 방식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민간인 피해가 주로 공습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 칸다하르에서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판자위 지구에 대한 공습으로 최소 60~80명의 민간인이 죽은 게 극명한 사례다. 심지어 당시 공습은 ‘이제 교전이 끝났으니 마을로 돌아가도 좋다’는 아프간 정부의 공지를 듣고 돌아간 주민들이 만난 날벼락이었다.

‘공습’은 ‘포기 정책’이다

그럼에도 공습은 멈추지 않고 있다. 마약 중독자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최근 잇따른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상황도 ‘파악 불가’다. 납치 위협까지 보태지면서 언론이나 공신력 있는 단체의 접근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아프간 인권위원회 등이 잇따라 내놓은 민간인 피해 보고서 어디에도 피해 수치는 예상치조차 거론되지 못했다.

“탈레반은 주민 가옥을 거점으로 교전을 벌이다 두어 시간 만에 달아나거든. 밤에는 오토바이 타고 와서 먹고 자고, 아침엔 사라져.” 판자위 인근에서 피난 온 아부둘 하디(가명)의 증언은 탈레반의 게릴라전과 민간인 방패 전술을 말해주고 있다. NATO 동맹군 역시 “탈레반이 민간인을 방패 삼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종종 해왔다. 그 게릴라전에 맞선 ‘공습’이 NATO에는 쉬운 방식일지 몰라도 민간인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방식이었다. 이를 ‘포기 정책’으로도 부르는 이유다.

“우린 전기가 없어. 전기가 있으면 일자리도 더 많아질 텐데….” 해를 거듭할수록 몸짓만 불려가는 아프간 ‘해방’ 전쟁. 그 한가운데 오도가도 못하는 칸다하르 주민들이 해방과 재건을 약속한 국제사회에 요구하는 건 이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인터뷰_ 아사둘라 칼리드]

올해 들어 나는 아주 행복하다

민심과는 달리 치안 상황이 좋다고 말하는 아사둘라 칼리드 칸다하르 주지사

▣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2년 째 칸다하르 주지사를 맡고 있는 아사둘라 칼리드는 자살공격 횟수 감소를 근거로 치안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나토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유감스럽지만, 외국 군대와 국제사회에는 불만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거리의 민심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인터뷰 내내 공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아사둘라 칼리드 칸다하르 주지사 (Photo by Lee, Yu-Kyung)

탈레반에

납치돼 최근 참수된 아프간 기자 아즈말 사건은 남부의 치안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는데.=칸다하르 방문이 이번이 처음인가?

그렇다.

=뉴스는 계속 챙겨봤나?

그렇다.

=아프간 뉴스를 제대로 챙겨봤다면…. 당신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칸다하르 상황은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예를 들면, 하루에 자살공격이 세 차례 발생한 적도 있다. 평균 주 1회. 올해는 자살공격이 한 달에 한 번도 발생할까 말까다. 거의 없다. 지난해 판자위와 재리에서 탈레반이 활동했고 우린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약 1만5천 명의 피난민도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판자위 지구가 완전 정상화됐고, 재리도 괜찮다. 피난민 80%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칸다하르 전역에 탈레반 활동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장담하건대, 탈레반 활동은 나날이 사그라지고 있다.

현실이 그렇기 바라지만….

=아니, 현실이 그렇다. 뉴스를 제대로 챙겨봤다면 알게다.

아직 4 초순인데, 지난해와 그렇게 비교하고 단언하긴 이르지 않나?

=칸다하르 날씨는 카불과 다르다. 지금은 탈레반이 공격하기 좋은 시즌이다. 겨울에도 맘만 먹으면 공격할 수 있었다. 주지사로서 내가 눈 감고 지내는 거 아니다. 다 보고받고 있다. 지난해보다 70~80%는 좋아졌다.

그렇다면 상황이 좋아졌다고 보나? 국제치안보조군(ISAF) 작전 때문인가?

=탈레반이 그렇게 강하다고 보지 않는다. 각 마을의 원로들과도 좋은 연락망을 갖고 있다. 지난해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 지역을 세 번이나 방문했고 성공적이었다. 칸다하르 주민들은 나날이 (대탈레반) 군사 작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고 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납치 사건은 탈레반이 약화됐다는 증거다.

지난해 10 판자위에서 나토군 공습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실수 인한 민간인 피해가 이어지고 있는데.

=민간인 피해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렇잖아도 ISAF와 이 문제를 놓고 얘기를 나눈 바 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실수였다. 나도 알고 모두 다 안다. 왜 우리가 싸우는가? 그건 탈레반 때문이다. 탈레반이 없다면 싸울 일이 없다. 나토 동맹군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맹군에 불만은 없나?

=전혀 없다.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나라에 와 있다. 여기에 싸움만 하러 온 게 아니다. 재건도 하고 있다. 이따금 테러리스트 활동이 있을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바로 우리에게 군 작전을 요청하고 있다.

피난민들은 구호물자 부족 여러 가지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어떤 종류의 피난민을 말하는 건가?

마이완 지구 출신도 있고….

=우린 그 지역에서 온 피난민이 없다.

내가 만나봤는데….

=아프간 북부 지역에서 온 쿠치족이 있고, 교전으로 생긴 피난민은 판자위, 재리 지구에서뿐이다. 그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 우린 구호물자를 전달해왔다. 물자가 부족해서 만족하지 않을 수는 있다. 아무튼 우린 그 피난민들을 모두 집으로 무사히 귀환시킬 수 있었다. 군사작전으로 파괴된 집도 다시 지어줄 계획이다. 보상금도 줄 거다. 마이완 지구에서 온 난민이 단 한 명도 없다. 만일 당신이 마이완 지구에서 온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건 미국이나 인도로 이민가고 싶어서 온 사람들일 게다.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지 않나?

=당신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을 거다.

피난민 중에는 교전뿐 아니라 가뭄, 홍수 자연재해를 피해 이들도 있던데.

=그렇게 피난 온 경우가 판자위, 재리 지구 등인데 누구도 그들 인생을 다 돌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당신 말대로, 불만이 있을 수는 있다. 올해 들어 나는 아주 행복하다. 칸다하르는 지난해보다 나아졌다. 내년엔 더 나아지길 바란다. 재건복구 공사도 진행 중이고, ISAF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은 지금 부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데, 신의 은총으로 그런 건 전혀 없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030658061.html


국적 따라 목숨값이 매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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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자 석방 뒤 잊혀져버린 아프간 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 납치 5주 만에 참수당하고 말아

▣ 카불(아프간)=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지난 3월 초 탈레반이 납치한 아프가니스탄 현지 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가 납치 5주 만인 4월8일, 납치범들이 정한 ‘데드라인’도 채우지 못한 채 참수당하고 말았다. 탈레반의 잔인함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노림수처럼 외세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는 아프간 정부의 취약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아즈말 참수 사건이 벌어지자 국제사회는 ‘즉각’ 경악과 비판을 쏟아냈고, 5주 동안 납치 사건을 단 한 줄 보도하지 않던 언론들도 예외 없이 기사를 썼다. 이런 ‘법석’이 조금만 일찍 나타났더라면, 분명 아즈말을 살릴 수 있었을 게다.

살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기자들이 수도 카불의 국회 앞에서 탈레반에 납치된 동료기자 아즈말 나카슈반디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함께 납치됐던 이탈리아 기자는 석방됐지만, 아즈말은 지난 4월8일 끝내 살해됐다.(Photo by Lee, Yu-Kyung)

아즈말은 지난 3월5일 오전 탈레반 강성 지역 중 한 곳인 헬만드 지방에서 납치됐다. 그는 이탈리아 기자 다니엘 마스트로지아코모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고, 아프간인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도 함께였다. 이들은 이날 오전 11시로 미리 ‘약속’이 돼 있던 물라 다둘라와의 인터뷰 장소로 향하던 길에 납치당했다.

납치범과의 협상은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가 참수를 당하면서 본격화했다. 지난해 10월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자국 프리랜서 사진기자 납치와 석방 드라마로 곤욕을 치렀던 이탈리아 정부에 아가의 참수는 발등의 불이 됐다. 아프간 병력 파병에 대한 자국 내 거센 반대에 직면한 이탈리아 정부는 ‘외세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아프간 정부를 ‘병력 철수’라는 카드로 압박했다. 급기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어명’을 내렸고, 다니엘과 탈레반 5명이 맞교환 형식으로 모두 풀려났다.

혼자 풀려난 다니엘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환호하며 만세를 불러댔지만, 아즈말은 납치범의 손아귀에 남겨진 채였다. 그로부터 나흘 뒤 다니엘이 며칠 전 그랬던 것처럼 아즈말이 머리에 모자를 얹고 천을 두른 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그러나 아프간 언론을 제외하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냉정히 말해 아즈말을 살릴 기회가 두 번은 있었다. 첫째, 애초 탈레반이 요구한 건 ‘동지의 석방’이었다. 처음부터 5명의 석방을 고집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1명 대 5명’식 ‘불공정 거래’를 최소한 ‘2명 대 5명’ 정도로는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탈레반의 납치 전술에 불을 지폈다는 비난에 ‘생명을 구한 것뿐’이라며 ‘인도주의’로 맞섰던 이탈리아 정부에도, 셀 수 없는 죽음이 수십 년 일상화해서인지 ‘생명 감각’이 무뎌져버린 아프간 정부에도 아즈말의 목숨은 계산에 없었다.

둘째, ‘납치극 2라운드’에 해당하는 다니엘의 석방 이후 3주 동안 이탈리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간 정부도, 국제사회도, 언론도 아즈말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간 기자들의 국회 앞 연좌시위, 이탈리아 시민들의 석방 요구시위, 유엔 아프간지원단(UNAMA)의 석방 촉구 성명과 국경 없는 기자회의 성명이 두어 차례 나오긴 했지만, 다니엘 납치 당시 연일 이어지던 보도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줄어든 관심 한편으로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압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제사회가 아즈말 석방 압력을 높이는 시점에서 그를 풀어줌으로써 이미지 쇄신에 보탬이 되는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제사회도, 아프간 정부도 이런 ‘탈레반의 마음’을 몰라줬다. ‘인도주의’를 강조하던 이탈리아 외무부는 다니엘 석방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젊은 운전기사 사이드 아가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의 죽음에 대해 연대와 깊은 슬픔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석방 협상에 노력을 다하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아즈말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리수, 탈레반 내의 불협화음도 드러내

“이탈리아 기자가 풀려난 건 조건 없이 환영한다. 그러나 정부는 한 생명이 죽기 전에 왜 서둘러 협상을 진척시키지 않았으며, 자국 국민의 안전 문제는 팽개쳐놓고 외부의 압력으로 다니엘 석방에만 분투했는가.” 지아 부미아 아프간 기자보호협회 회장은 다니엘 석방 직후 남겨진 아즈말에 대한 아프간 정부의 무관심을 이렇게 꼬집었다. 아즈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한탄했다. “불공평하다. 이탈리아 기자 1명 빼내려고 탈레반 5명을 석방시키면서, 내 아들 석방을 위해서는 단 1명의 탈레반도 석방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정서는 탈레반의 ‘탄생지’인 남부 칸다하르 같은 곳에선 종교적 색채를 띠고 탈레반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 정서란 건 이렇다. “무슬림도 아닌 외국인(일부는 ‘외국인 스파이’라고 표현했다) 석방을 위해서는 그렇게 노력하면서 어떻게 우리 무슬림 형제를 위해서는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나.” 현지 기자 사피울라(가명)의 말이다. 이런 분노는 다시 ‘이교도는 살리고 무슬림 형제는 죽인’ 탈레반을 향해서도 이어지고 있다. 5명의 동지를 되돌려받고 로켓포까지 쏘아대며 자축했던 탈레반 역시 아즈말 살해라는 무리수를 둔 탓이다.

아울러 이 무리수는 탈레반 내의 불협화음도 은근슬쩍 드러내고 말았다. 아즈말 참수 다음날인 9일 오전 10시경 물라 다둘라의 개인 대변인 아탈은 일부 언론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기자들이 우리를 테러리스트라 불러왔지만 우린 무자헤딘이다. 아즈말을 죽임으로써 경고하는데 당신들 태도를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기자들을 계속 납치하고 거래하고 살해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5시께, 이번엔 탈레반 대변인 카리무하마드유수프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기자들을 향한 협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건 탈레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탈레반 내부의 불협화음까지 들춰낼 만큼 아즈말 사건은 아프간 정국 사방에 던져진 폭탄이 됐다.

많은 언론이 아즈말의 죽음을 전후로 ‘외국인 납치 사건’이나 ‘외국인 납치 위협’ 등으로 써왔지만, 실상 이번 사건이 못지않게 들춰낸 건 현지 언론인 혹은 통역이나 가이드, 운전기사 등 외국인과 함께 일하는 현지인들의 안전 문제다. 위험 지역에서 현지인이나 현지 언론인의 도움 없는 취재나 구호활동이란 거의 불가능한 게 현실이고 보면, 이런 분위기는 아프간 국내 언론과 외신 그리고 그나마 가느다란 명맥을 유지하는 남부 지역의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위험 지역에 삶터를 두고 있는 이 현지인들이 직면한 위험의 수준은 ‘떠날 수 있는’ 외국인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도 현지(언론)인 보호에 더욱 신경써야 하는 이유다.

프랑스 구호요원 2명? 현지인 3명이 더 있어

다니엘 협상 거래로 재미를 본 탈레반은 ‘더 납치하겠다’는 약속을 지켜가고 있는 듯하다. 4월3일에도 2명의 프랑스 구호단체 요원과 3명의 아프간 동료들이 납치됐다. 불행하게도 현지인 인질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역시 반복되고 있다. 적잖은 언론들이 ‘프랑스 구호요원 2명 납치’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현지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납치 열하루 만인 4월14일 ‘2+3명’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제 프랑스 정부, 아프간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와 언론은 이들 ‘2+3명’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목숨임을 보여줘야 할 때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4/021019000200704260657009.html


‘한국군 위험하니 철군하자’ 논리를 넘어서

Home > 국제 > 세계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3월29일 제653호

난데없는 총격, 되풀이되는 참사, 미진한 수사… 유감스럽게도 아프가니스탄에는 외국군 주둔은 필요악

▣ 잘랄라바드(아프가니스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지난 3월9일 밤 9시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국경지대 토르캄에서 잘랄라바드(아프간 동부)로 차를 몰던 자비훌라(26)는 느닷없는 총격에 목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왔다. 당시 현지 주둔 미군은 테러 공격 정보를 입수했다며 ‘토르캄∼잘랄라바드∼카불’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 차량을 검문, 통제하고 있었다. 자비훌라는 차를 멈추라는 신호를 받지 못한 채 달리다 변을 당한 게다.

아프간 전쟁 5년여, 평화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아프간의 수도 카불 외곽에 자리한 컴백 난민촌.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났던 난민들은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의 ‘귀환 권고’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난민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Photo by Lee, Yu-Kyung)

“(아프간) 경찰이 오라고 손짓하기에 그쪽으로 차를 서서히 몰고 갔지. 근데 갑자기 (마주 보던) 미군 차량 쪽에서 총알이 날아들었어.” 경찰의 손짓이 차를 멈추라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비훌라가 이해한 대로 오라는 손짓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둠 속에서 그 경찰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 틈도 없이 미군의 총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카에다의 ‘왕성한’ 활동지 중 하나로 꼽히는 아프간 동부 낭가하르 지방은 그렇게 계속 들썩이고 있다. 자비훌라가 총격을 당하기 5일 전에 발생한 미군의 총기 난사 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길에, ‘어제 또 당했다’는 자비훌라 사례를 덤으로 얻었다. 그럼 3월4일 발생한 사건을 간략히 더듬어보자.

‘재수 없이’ 총질당한 민간인, 사망자는 도대체 몇 명?

이날 오전 낭가하르 지방 바라예카브의 한 시장에서 자살폭탄 차량 1대가 미군 차량을 겨냥한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이 공격에 대한 미군의 반응은 총기 난사였다. 목격자들은 6대가량의 미군 차량에서 인근 주민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총격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주민의 전화를 받은 ‘퍼블릭헬스’ 병원 등 잘랄라바드시 병원 두 곳에서 앰뷸런스 10대가 사건 발생 1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사상자들을 실어날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어. 건너편에서 오던 미군 차량에서 갑자기 총알이 차 안으로 날아들었어.” 팔에 총상을 입은 50대 주민 사이다잔은 “난데없는 총질이었다”고 말했다. 가슴에 부상을 입은 아부둘 왈리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 총기를 난사하면 누가 죽고 다치는지는 뻔한 거 아닌가? 직업군인이 그 정도의 감도 없이 총질을 했다는 게 말이 되나?” 잘랄라바드 주민 파리둘라(21)가 분통을 터뜨린다. 대부분의 사상자들이 얼떨결에 혹은 현장을 지나다 ‘재수 없이’ 총질을 당한 민간인들이었다.

미군 쪽은 자살폭탄 차량 말고도 총격을 먼저 받아 ‘자기 방어’를 했다고 말했지만,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엄청난 민간인 희생과 달리 미군 쪽은 누구도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퍼블릭헬스 병원 원장 아즈말은 “대부분의 (민간인) 부상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었고, 목과 가슴 등에 총상을 입은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자살폭탄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는 공격자 1명뿐이다. ‘공격’과 ‘피해’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지난 3월14일 카불에서 발생한 폭탄 사고 현장. 땅이 움푹 파일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벌어지면서 주변 건물들도 무너져내린 모습이 참담하다. (Photo by Lee, Yu-Kyung)

그렇잖아도 바닥을 치는 ‘이름값’을 달고 있는 미군이 ‘해방’과 ‘재건’이라는 구호에 맞지 않는 행동거지를 보여온 건 이런 유의 참사를 일찍부터 예고해왔다. 이날 총기 난사 사건으로 낭가르하르 지방은 물론 카불까지 발칵 뒤집어졌는데도, 5일 만에 다시 같은 지역에서 유사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는 건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 사건의 후속 처리 과정에선 외세의 늪에 빠져가는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 뭐 하나 뚜렷이 밝혀지는 게 없다. 그저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조용히 갖다대는 모양새다.

어이없게도 사망자와 부상자 수치조차 경찰, 병원, 언론, 정부, 동맹군 등 어디서도 정확히 아는 곳이 없다. 각 진영이 발표하는 수치 차는 크다. 현지 주민들은 부상자 45명에, 사망자가 최소 25명은 넘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병원 쪽은 중상자 중 4명을 바그람 미 공군기지로 이송했고, 자살공격원 1명을 포함해 사망자 8명, 부상자 24명이란 수치를 내놨다. 사건 조사를 ‘마쳤다’는 경찰은 사망자가 16명이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내무부는 10명의 민간인 사망을 발표했고, 동맹군은 ‘8명 사망에 35명 부상’이란 수치를 내놨다.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치안은 악화일로

아프간에 득실대는 외국 군대의 이런 ‘범죄 행위’는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심심찮게 벌어졌다. 2002년 7월엔 우르즈간 지방의 한 결혼식장에 미국이 공습을 가해 45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지난해 10월엔 칸다하르 판자와위 지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공습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일가족 20명이 포함됐다. 앞서 언급한 낭가르하르 총기 난사 사건 다음날에도 카불 북부 카피사 지방에서 미 공군기의 공습으로 4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일가족 9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지난 3월15일 밤엔 헬만드 지역 검문소에서 미군이 아프간 현지 경찰 5명을 ‘실수로’ 사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니 지난 1월 NATO 주도의 국제치안지원군(ISAF) 대변인 리처드 이 누지가 ‘2007년 군이 개선해야 할 점’ 가운데 하나로 민간인 살상 행위를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한국에선 지난 2월27일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벌어진 딕 체니 부통령을 겨냥한 테러 사건으로 윤장호 하사가 숨진 것 때문에 철군 여론이 들끓었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 ‘한국군의 안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을 게다. 하지만 전쟁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현지’ 민간인들이고, 그중에서도 어린이와 여성들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한국군의 안전이 위험하니 철군해야 된다”는 주장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 아프가니스탄에는 외국 군대가 필요한가? 아니면 모조리 철수해야 하는가? 유감스럽지만 “우선은 필요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잇단 언론 보도와 각종 보고서가 지적하는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치안 상황은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 붕괴 이래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탈레반이 ‘완전 장악’했다고 보도되는 남부 헬만드 지방에선 3월4일 탈레반에 의해 이탈리아 언론인이 납치됐고, 3월6일에도 영국 기자 1명이 피랍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외국인 납치나 남동부의 큰 싸움들은 관심과 보도라도 이어지고 있지만, 바깥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묻히는 사건도 적잖다.

예를 들어 3개월 전 카불에서 남부 카즈니로 이동하던 대학생 3명이 버스를 급습한 탈레반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대학도서관 출입증을 제시했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만 사건 같은 건 그냥 묻히는 뉴스 중 하나다. 이처럼 카불을 벗어난 지역에선 강도와 여전히 무장 중인 군벌들, 탈레반의 ‘공격’ 위험 등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카불 역시 안전지대라고 보긴 어렵다.

내전 주역 그대로, 외세의 ‘놀이’ 그대로

아프간 동부 낭가르하르 지방에서 발생한 미군의 총기 난사로 부상을 당한 주민들은 “사고 현장을 지나는데 난데없이 총격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았다. (Photo by Lee, Yu-Kyung)

그래서 아프간 국민들은 외국 군대가 이런 불안한 치안 상황의 제대로 된 보호막이 돼주길 간절히 바라왔고, 지금도 여전히 바라고 있다. 앞서 언급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한 낭가르하르 지역 주민들조차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총질은 그만두고 재건만 한다면”이란 조건을 달아 주둔에 찬성했다. “우리는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그런 군사행동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 나라의 재건과 원조에 신실하게 나서주기 바란다.” 총기 난사 사건에 강력하게 항의시위를 벌였던 잘랄라바드의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 10여 명은 그렇게 입을 모았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내전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과거의 내전 주역들인 북부동맹 군벌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정부 요직까지 두루두루 점하고 있어 ‘무장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여전히 안고 있다. 게다가 이 군벌, 무장세력 정파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원 조종해왔던 주변 외세의 ‘놀이’도 계속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외국군의 철수가 90년대 초반 카불을 완전 초토화시켰던 ‘국제 대리전 성격의 내전’과 유사한 상황으로 흐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북부동맹 군벌들의 전범재판과 처벌에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단체인 아프간여성혁명위원회(RAWA)는 아프가니스탄의 국민군대와 경찰이 자리잡고 치안 상황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외국 군대의 주둔과 재건 노력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이 단체의 사하르 사바 대변인은 “북부동맹 군벌들의 비무장화를 통해 내전 재발 가능성을 없애는 게 가장 시급하다”며, “군벌들이 차지한 정부를 밀고 있는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국제평화유지군의 주둔과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상황은 애당초 모순투성이였다. 탈레반을 무너뜨리고 북부동맹 ‘전범’들을 권력에 다시 끌어들인 게 바로 미국이다. 전쟁 이후 3~4년간 정말 필요한 곳에 군을 주둔시키지 않아 국제구호단체들마저 활동을 접으면서, 재건사업에 치명타를 가한 미국의 정책 실패는 급기야 남북 지역 탈레반의 ‘화려한 부활’을 불러오고 말았다. <탈레반>의 저자이자 아프가니스탄 전문기자인 아흐마드 라쉬드도 탈레반 패배 직후 약 3년간 후퇴한 탈레반 세력이 파키스탄 남부 발로치스탄으로 넘어와 재조직에 나서는 과정을 미국이 완전 방치했다고 꼬집었다.

올해가 ‘재건’ 실험의 분기점

‘해방’을 내걸고 ‘침공’했던 아프가니스탄, 5년 넘게 이어진 미국과 국제사회의 ‘재건’ 실험에 여전히 희망은 있는가? 흩날리는 눈과 비, 그리고 진흙더미와 껌 파는 소년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땟국으로 범벅인 카불의 3월은 올 듯 말 듯 여전히 오지 않는 봄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국제사회가 그렇게 팽개쳐왔던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은 외세에 의한 잇단 참사와 실패로 기우는 외세 주도의 재건 정책에도, 이 ‘필요악’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올해가 바로 그 분기점이 될 거라는 전망이다.

source :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3/0210190002007032906530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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