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 Fotos ON / Lee Yu Kyung

홈리스의 다른 세상 이야기 Why Not!

스리랑카 반정부 언론인 ‘강제실종’

지난 9월 3일, ‘여성 대통령’으로 한때 스리랑카 정치권을 풍미했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전 스리랑카 대통령은 비판적 일간지 <선데이 리더>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 앞으로 ‘화이트 밴’을 보낼까봐 두려워 답을 못하겠다.”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을 두 문장으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전직 대통령조차 현 정권과의 불편한 심기를 ‘화이트 밴’으로 표현할 만큼, 스리랑카에서 화이트 밴은 단순히 ‘흰색 봉고차’가 아니다. 그건 ‘강제실종’과 거의 동의어처럼 이해되는 ‘납치’의 대명사이며 국가 폭력의 상징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차량을 세워 검문하고 있다. 콜롬보는 물론, 동북부 타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납치와 강제 실종의 ‘천국’이다. 마을의 한적한 길가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섰지만, 납치차량이 잡힌 적은 없다. (Photo @ Yu K. Lee)

 

스리랑카의 강제실종 역사는 깊다. 타밀반군과의 내전과정에서는 물론, 1970년대 초와 1980년대 후반 극좌민족주의그룹인 인민해방전선(JVP)의 무장 반란 당시에도 수만명이 실종되었다. 당시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실종자 문제를 다루던 인권변호사 라자팍세는 2005년 말 대통령이 되어 ‘번호판 없는 화이트 밴’을 가동, 강제실종의 역사를 적극 이어가고 있다.그가 집권한 이래 지금까지 콜롬보에서만 대략 600명이 실종되었고, 동북부 타밀 지역은 콜롬보 수치의 4배가 넘는다고 인권단체들은 보고 있다. 가장 심각한 북부 자프나 반도가 약 20m당 한 명꼴로 군이 배치된 곳임을 감안하면 납치의 배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타밀 반군으로 자동 인식되는 수많은 타밀 젊은이들이 무작위로 실려갔고, 그리고 언론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협박, 납치, 실종, 살해 등에 노출된 언론인들에게서는 무작위성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좀 더 도드라진다.

1990년 이래 정부와 타밀 호랑이 반군 간에 있었던 네번의 휴전협상 전 과정을 취재한 베테랑 타밀 기자 나데사필라이 비타야탈란. 그는 지난해 2월 26일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사복, 경찰복 무리들에게 끌려갔다. 국제사회의 유례없는 압력으로 2개월 만에 풀려난 그가 증언하는 ‘흰색 봉고’의 세계는 이렇다. “나를 차 안으로 밀어넣자마자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묶고는 차 바닥에 눕혀놓고 달렸는데….”

국제사회 압력으로 2달만에 풀려나
15분 가량 흘렀을 무렵 차 안 라디오 뉴스에서는 비타야탈란 기자 납치를 목격한 이는 119로 제보하라는 경찰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가 납치당하고 있음을 경찰이 공개적으로 확인해 준 셈이다. 모처에 도착해 발가벗기고 눈은 여전히 가려진 채로 3~4시간 구타와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납치범 중 한 명이 “실수로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며 그를 다시 차에 태웠다. “두번째 차량에서는 눈가리개를 풀어줬는데, 며칠 전 취재차 만났던 경감 2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실려간 곳은 ‘4층’, 고문의 대명사인 범죄 수사국(CID)이었다. 거기서 비타야탈란 기자는 “연행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납치되기 5일 전 타밀 호랑이 반군이 콜롬보 중심가를 공격했던 자살공습에 공모했다는 것이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친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세 국방부 장관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혐의에 대한 확신이 넘쳐 비타야탈란 기자를 테러리스트라 단정했다. 고타바야 장관은 2009년 1월 2일 암살당한 <선데이 리더> 편집장 라산다 위크레마퉁가를 ‘타블로이드 기자’라고 비하하기도 있다. 국경없는 기자단 선정 ‘언론자유 약탈자’ 명단에 올라 있는 그의 지휘 아래 국방부 사이트에는 ‘국가의 배신자’로 찍힌 언론인들이 실명으로 오르곤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협박 전화와 ‘화이트 밴’ 공포가 해당 언론인들을 휘감는다. 자유언론운동(FMM)의 대표였던 언론인 수난다 데샤프리야도 그 명단에 올라 협박에 시달리다 지난해 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스리랑카 북부 마을 골목에 지키고 선 스리랑카 군인 (사진 왼쪽) 산디야 에카날리야고다(사진 오른쪽)의 남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올 1월 실종된 이래 아직 소식이 없다. 전쟁 당시 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자료를 모아온 그의 행적과 반정부 성향이 실종의 주 원인인 것으로 동료 기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은 보고 있다.(Photo @ Yu K. Lee)

 

이례적으로 풀려난 비타야탈란 기자와 달리 올해 초 실종된 언론인 프라기트 에카날리야고다는 지금 실종 1년을 채워가고 있다. ‘랑카 이 뉴스’(Lanka eNews)에 만평과 글을 기고해온 그는 대선 이틀 전인 지난 1월 24일 오전 7시 30분,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선거 취재를 떠난 이래 돌아오지 않고 있다.

프라기트는 범 야당 후보였던 사라 폰세카 전 군 총 사령관 캠프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대선에서는 타밀 정치인들조차 울며 겨자먹기로 폰세카 후보를 지지 할 만큼 스리랑카 야권은 라자팍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폰세카 후보를 지지하는 언론에는 여지없이 협박이 가해졌다. 그런 이유로 주간지 ‘랑카’는 일시적 폐쇄를 당했고, 편집장 샨다나 시리말와트는 경찰 조사에 자주 불려다녔다.

실종 1년째 행방 묘연한 기자도

한편, 프라기트의 실종에 대해 아내 산디야와 동료 언론인들, 인권단체들은 그의 반정부 성향은 물론, 지난 몇년간 타밀지역 전쟁터에서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자료를 집중 추적해왔던 점을 실종의 주 원인으로 보고 있다. 프라기트는 지난 해 8월 납치당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 당시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가 납치범들을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화학무기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군내 고발자와의 교신내용을 집중 추궁받았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랑카 이 뉴스’ 편집장 산다루완 세나디라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 군인 역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리고 경찰의 추궁과 협박전화를 받아온 산다루완 그 자신도 지난 3월 결국 스리랑카를 도망쳐 나왔다. 프라기트의 가까운 동료인 디스넨드라 페레라 역시 지난 5월 31일 집으로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 여러차례 살해 협박을 받아온 페레라 역시 이날 괴한들로부터 프라기트와 공유한 화학무기 관련 자료를 추궁받았다고 전했다.

“납치되기 약 일주일 전, 남편이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어 사연을 물었다. 모 장관의 비서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프라기트의 아내 산디야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프라기트에게 ‘경고’한 모 장관 비서 이름을 알렸지만 수사에 별 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고타바야 국방부 장관,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프라기트는 지금 어딘가에 숨어 자작극을 벌이는 중”이라고.

프라기트는 어디 있나? 당뇨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아내는 확신한다. 2년 전 실종된 형이 여전히 어느 수감소에 갇혀 살아 있을 거라 굳게 믿는 타밀 청년 엥가란 비나야감(24)처럼. “남편은 내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밤낮 캠페인 벌일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때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산디야의 자신감에 찬 말이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시내의 검문소들. 소수 타밀족과 언론인을 포함한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해온 납치차량 화이트 밴은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전쟁 이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검문소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 언론인 협박, 실종은 전후에도 여전히 드리운 스리랑카의 암울한 모습이다.

스리랑카 콜롬보|이유경 <국제분쟁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Published by <Weekly KyungHyang> at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011101604081


죽어도 떠나는 사람들

[세계]물에 빠져 죽고 돌아와 맞아 죽어도 스리랑카를 탈출하는 보트피플…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타밀족 난민 인정을 회피해

글 싣는 순서

1회: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2회: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3회: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 아래 기사는 지면관계상 실리지 못한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

“엄마가 죽었어”

‘내가 바로 그 아무개 기자…’ 라며 소개하는 필자에게 수젠드란 구나세카람(27)이 ‘대뜸’ 건넨 첫 인사가 딱 그랬다. 20대 후반 청년이라기 보다는 울음보 터지기 직전의 어린애 같았다. 그럴만도 했다. 지난 해 10월 초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향하는 난민밀항선에 올랐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스리랑카로 돌아온 건 오로지 엄마의 병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외아들은 공항에서부터 연행되었고, 고문실의 상징인 “4층”, 범죄 수사국(CID)과 악명 높은 부사 캠프로 이송되며 고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올해 1월 풀려났다. 지난 해 연행 소식을 듣고 필자는 수젠드란을 원거리 취재하며 간간히 교신해왔다. 고문 후유증과 여전한 협박을 견디며 엄마를 간호해왔는데, 귀국의 이유였던 엄마는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살.

4년간 이어진 휴전이 어긋나며 전쟁이 고조되던 2006년 이래 타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납치와 고문의 위협에 노출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각종 브로커선을 타고 인근 국가로 빠져나왔다. 인도계 타밀족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는 소통의 어려움도 덜 겪고 잘하면 일자리도 얻을 수 있는 ‘선호국’이다. 수젠드란도 2009년 6월 말레이시아로 갔다. 거기서 밀항선박 브로커를 만나 10월 초 난민선박에 올랐던 게다.

수젠드란은 난민 밀항선에 올랐다가 호주정부의 보트난민 거부대응으로 인도네시아에 정박했다. 우여곡절끝에 스리랑카로 돌아간 그를 기다린 건 구속과, 고문이다.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난 그지만 여전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젠드란 처럼 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의반 타의반 귀국하거나, 강제 송환된 수많은 난민 신청자들이 실종, 체포, 고문의 위협에 노출된 게 스리랑카의 전후 현실이다. (Photo @ Yu K. Lee)

그는 말레이시아 남부 도시 조호루바루(Johor Baru) 인근 정글에서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달가량 숨어지내던 253명의 또다른 타밀난민들과 함께 제야 레스타리(Jeya Lestari)호에 올랐다. 그런데 열흘도 되지 않아 배가 엔진고장을 일으켰다. 많은 짐들을 바다에 버렸고, 인도네시아에서 엔진을 갈려던 참에 해군 경비정에 걸렸다. 자바섬 끝자락 메락(Merak)에 강제로 정박한 난민들은 이때부터 시위를 벌였다.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스리랑카에서 살수 없다”, “호주가 아니면 내리지 않겠다”

그 즈음 78명의 타밀난민을 태운 또 다른 배 한척이 조난을 당해 호주해군이 구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군은 구출한 난민들을 호주가 아닌 인도네시아 영해로 데리고 갔다. 당시 호주 총리 캐빈 러드는 난민 배를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대통령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었다. ‘돈을 댈테니 인도네시아 손에서 해결하라’고, 이른 바 ‘인도네시아 솔류션’ (Indonesia Solution)이다. 수많은 난민들이 세월 모르고 갇혀 있는 인도네시아 빈탕 섬의 탄중 피낭(Tanjung Pinang) 수용소는 그렇게 난민들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로 지어진 것이다.

난민을 거부하는 ‘호주 머니’

타밀 난민들에 대한 국제적 혐오반응은 머나먼 캐나다까지 이어지고 있다. 8월 13일 캐나다 벤쿠버에 도착한 난민선박 MV Sun Sea 는 도착하기 전부터 캐나다와 미국의 모니터 망에 걸려들었다. 492명을 태운 이 밀항선은 3개월 전 타이 남부 송클라항을 출발해 단 한명만 목숨을 잃은 기적같은 항해를 치뤘다. 캐나다 영해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지 방송들이 생중계를 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던 이 선박을 두고 캐나다 공공안전부 장관 빅 토우(Vic Towe)는 “테러리스트와 인신매매단이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스리랑카 정부의 프로파간다까지 더해지면서 ‘테러리스트 보트’가 언론을 달궜다. 스리랑카 전쟁 막바지 콜롬보 유엔 대표부 대변인을 지낸 골든 와이스는 이와 관련, 캐나나 일간지 ‘메일 엔 글로브’(Mail and Globe) 8월 28일자 기고문을 통해 “누가 보트피플이 안보를 위협한다고 말하는가”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냉정히 말해보자.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주의 경우 돈 있는 이들은 미화 4만 달러를 주고 가짜 비자를 여권에 박아 비행기를 타고 간다. 그게 안되는 이는 1만 6천 달러를 주고 보트를 타지만 그마저 없는 이들이 투성이다. 보다 더 높은 수치로 공항에 도착하는 이들은 감금생활없이 난민심사를 받는 반면, 보트피플들은 온갖 인종주의적 수사(修辭)에 직면함은 물론, 난민 심사기간 이민국 수용소에 갇혀 지낸다. 올해 초 알자지라는 호주에서 보트피플 중 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한해 평균 200명에 불과하고, 비행기 타고 온 이들은 평균 2,200명이 난민으로 인정받는다고  전했다. 이에 반해 주로 영어권 출신 관광객인 주를 이루는 장기불법 체류자는 약 55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정부의 보트피플에 대한 제노포비아적 반응은 올해 4월 보트피플의 다수를 이루는 스리랑카 난민과 아프간 난민(절대 다수는 소수 하자라족)들 난민 심사를 각각 3개월, 6개월간 중단하는데 이르기도 했다.

이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보트난민들이 ‘죽어도’ 호주나 캐나다등에 닿길 원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이 스리랑카를 탈출하면서 도착하는 말레이시아, 타이,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 등은 제네바 난민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보호는 커녕 대량구속과 본국강제송환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지난 10월 6일 방콕 북부 사판마이 지역에서 130명 가량의 스리랑카 타밀난민들이 대거 연행된 건 좋은 본보기이다. 일부 언론은 “또 다른 타밀난민들이 보트 탈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방콕내 캐나다 정보국의 팁으로 단속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방콕의 유엔난민기구(UNHCR) 키티 맥킨시 대변인은 <한겨레21>과의 전화 통화에서 2달된 아기까지 연행한 이 단속을 강하게 비판했다.

“18명이 4살 미만 어린이고, 4명의 임산부도 끼어 있다. 밀항 브로커 조직을 단속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작금의 단속은 밀항 브로커를 제대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 진짜 난민과 불법 이주자를 구분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연행되는 난민들이 갇히는 방콕 이민성 감옥에는 ‘7년 장기수’가 있고, 인도네시아 난민 수용소에는 ‘10년 장기수’가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인정한 난민카드를 지니고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스리랑카 난민들은 전 세계 24개 국가들이 난민들의 재정착을 받아주는 이른바 ‘난민 제 3국 정착’ 프로그램에서도 찬밥이다. 타밀 호랑이 반군이 전 세계 32개국에서 테러리스트로 찍힌 효과는 그들의 사후에도 지독하게 적용되고 있다.

두 달 된 아기를 단속하기도

말레이시아에서 호주로 향하는 난민선에 오르기 직전 단속에 걸렸던 타밀 젊은이들. 그들은 '다음 배'를 기다린다. 수많은 난민들이 항해길에 물에 빠져죽고, 난민인정을 거부당하는 현실에 아랑곳없이 안전하게만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가겠다고 말한다 (Photo @ Yu K. Lee)

정체된 난민심사, ‘제 3국 정착’ 프로그램 차별, 타밀난민들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이들의 절박함은 여러차례의 조난사고가 가슴 아프게 반영하고 있다. 지난 6월 초 12명의 난민을 태운 보트가 뒤집혀 몰사당한 사건을 비롯, 5월 에는 호주 당국이 모니터하던 5명의 난민보트가 대양에 잠겼다. 지난 해 11월에도 호주 영해 코코스 섬 부근에서 보트가 뒤집혀 12명이 빠져 죽었고, 그 한달 전인 10월에는 100명의 타밀 난민을 태운 보트가 호주로 떠났지만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물론! 기회만 되면 다시 탄다. 여기선 아무것도 보호받을 수 없다. 안전하게 살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렇게 호언하던 네 명의 타밀청년은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 바루에서 호주행 밀항선에 오르기 하루전인 2009년 9월 8일 단속에 걸렸드랬다. 그러나 ‘다음 선박’을 타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강고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배에 오를 각오는 물론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 고 말했다. 온갖 종류의 친정부 타밀 민병대가 설치는 와우니아 지방에서 마을 남자들의 릴레이 실종을 보며 말레이시아로 온 칸다사미 마니발라완 (44), 2009년 2월 마저 탈출나온 아들의 교육때문에 배 타기를 희망했다.

“말레이시아에선 내 아들이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갈수만 있다면 배를 탈 거다”

한편, 메락에 정박했던 254명의 시위가 세상의 관심을 잃어가는 사이 세 명이 사망했다. 한 명은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서, 두명은 호주로 밀항하던 중 물에 빠졌다. 또 다른 두명은 앞서 언급한 캐나다 행 엠브이 선 씨(MV Sun Sea) 에 다시 올랐다. 올해 4월 모두 강제하선한 후 탄중 피낭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은 그중 75명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또 다시 밀항선을 타고 결국 호주에 닿았다. 122명만이 현재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위험을 알면서도 다시 밀항브로커에게 또 다른 돈을 지불하고 호주로 오지 않는가. 호주 정부가 지금 밀항업자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는 꼴이다”

호주의 난민운동가 사라 네이뜬의 따끔한 지적이다.

또 다시 탈출을 갈구하는 건 수젠드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병환때문에 일찌감치 국제이주기구(IOM)가 마련해준 항공권으로 IOM 가방을 들고 귀국한 수젠드란에게 전쟁이 끝난 스리랑카는 전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문당했다고 말하면 더 심한 고문에 시달려

2009년 11월 26일 오전 1시, 콜롬보 외곽 반다라나이케 공항 입국 심사대에 도착해 여권 심사를 받던 수젠드란은 이민성 직원이 부른 세 명의 범죄 수사국 (CID) 직원의 손에 끌려갔다. 타밀어를 못하는 그들은 수젠드란을 사무실에 앉혀 놓고 나가버렸고, 바로 얼마 후 동부 바띠깔로아 억양의 타밀어를 말하는 이가 들어왔다. “카루나 당”(주1 ) 에서 온 이가 분명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젠드란을 ‘패기’ 시작했다.

“네가 갖고 있는 그 IOM 가방…걔네 구호물자로 가장해서 타밀 호랑이에게 무기 조달한 단체 아냐. 네가 그 일에 관여했구! 맞아 안 맞아?!”

한 바탕 구타를 치른 후 수젠드란은 다시 범죄 수사국 직원들 손에 이끌려 녹색 지프차에 올랐다.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져 죽으러 가는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은 “4층”, 범죄 수사국이었다. 그리고 12월 3일 부사 캠프로 이송되었다.

“눈 부위를 특히 많이 맞았고 초첨을 못맞추겠어. 정부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면 의사가 어쩌다 눈이 그렇게 되었냐고 물을 거고 그러면 고문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내 기록이 들어가면 또 나를 잡아갈 거 아냐. 게다가 정부 병원 싱할라 의사들은 타밀어를 못해”

싱할라어를 조금 알아듣지만, 읽지는 못하는  수젠드란은 그러나 싱할라어로 적힌 어머니의 진료 기록을 잘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민주사회주의 공화국 스리랑카” 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혜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의료비가 비싼 개인 병원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정부 병원’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과대망상만은 아닌 듯 했다. 현지 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다른 곳에서 심문을 당하다  부사 캠프로 이송된 수감자들이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면담 의사에게 이전 감옥에서 고문이 있었노라 밝힐 경우 더 심한 고문을 당한다. 수감자와 의사의 면담 기록이 부사캠프 당국자에게 전해진다고 어렵지 않게 추정되는 부분이다. 수젠드란 역시 12월 3일 도착한 부사캠프에서  ‘고문을 당했냐’고 묻는 의사에게 ‘아니오’라고 답했단다. 의사가 떠난 후 수젠드란은 거꾸로 매달리면서 본격적인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무기는 어디있나?” “자금을 모았는가?” 등의 질문과 함께 철체 파이프와 자전거 부속품 등으로 맞고 벽으로 내동댕이 쳐지기도 했다. 2009년 12월 3일 오후, 지옥같은 세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올해 1월 20일 수젠드란은 30 여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석방되었던 이들 중 두 명은 다시 실종되었다. 수젠드란 역시 5월 21일 범죄 수사국 직원의 협박성 전화를 받은 후 휴대폰 심카드를 바꿨다. 그는 현재 스리랑카 국내에서 유일하게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는 스위스 대사관에 난민 비자를 신청한 상태다. 이 비자를 신청한 이는 수천명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10월 6일, 수젠드란과 같은 배에 탔던 젊은이 세 명이 다시 자발적으로 스리랑카로 왔다. 이들 역시 공항에서 ‘실종’되었고, 수소문 끝에 “4층” 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IOM과 UNHCR 모두 탄중 피낭 수용소 난민들에게 본국으로 가지 말것을 권고한 상태다. 국제 위기 그룹 역시 지난 5월 발표한 스리랑카 전범 보고서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타밀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s)들은 물론 (해외로 빠져나온) 타밀 호랑이 대원들까지도 본국 송환하지 말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처럼 연행과 고문으로 이어지는 본국 송환에 대한 두려움은 난민신청자들의 자살과 자해 그리고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주 시드니의 빌라우드 난민 수용소에 12개월 갇혀 있다 난민심사에서 거부당한 슈레스 쿠마르. 그가 지난 23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난민운동가 사라 네이뜬은 전했다. 대학시절 군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쿠마르는 전쟁 막바지 살아 남았다가 탈출한 난민신청자다. 아울러, 9월 20일 오후 1시부터 30시간 가까이 빌라우드 수용소 지붕위에 올라 뛰어내리겠다고 시위를 벌인 11명의 다국적 난민들의 모습 역시 이들이 직면한 본국 송환의 두려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날 오전 본국 송환 통지를 받은 피지(Fuji)출신 40대 남성은 결국 뛰어내려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난민문제를 밀항브로커 혹은 ‘인신매매’ 의제로 전환하는 호주, 캐나다 등과 스리랑카 정부는 ‘인신매매 브로커’들을 검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상호 협력을 아까지 않고 있다. 콜롬보 주재 호주 대사관의 경우 범죄수사국(CID)과 물적지원과 정보 교류를 나누고 있다. 싱할라족 보트피플로 지난 해 10월 5일 강제 송환된  수미스 멘디(30)는 연행과 석방을 반복하다 지난 8월 14일 다시 연행되었고 고문당했다. 그는 고등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싱할라족 보트 피플로 떠났다가 강제 송환된 후 체포된 수미스 멘디(30)의 가족들. 수미스는 어린 아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게 구타와 갖은 수모를 당했다. 밀항선 네트워크를 단속하겠다며 스리랑카 정부와 호주정부는 협력을 아끼지 않지만, 스리랑카 당국은 수미스를 취조하며 밀항선 네트워크에 대해 묻기 보다는 타밀 호랑이 재건여부를 집중 추궁했다고 가족과 변호사들은 말한다. (Photo @ Yu K. Lee)

“고문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아시아계 얼굴의 호주 대사관 직원이 봤다. 그는 내가 강제 송환자인 걸 잘 아는 이다. 그는 그 부서 (밀항브로커 수사팀)를 돕고 작은 냉장고를 기증하러 거기에 왔었다”

수미스는 아들, 아내 가족들 앞에서 경관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싱할라족인 그에 대한 고문과 심문은 엉뚱하게도 “타밀 호랑이 재 조직화를 도와준 혐의”에 모아지고 있다. 실제로 그의 밀항선을 조직화한 선박 주인은 며칠 수사만 받고 풀려났다. 또 다른 싱할라족 보트피플로 지난 해 11월 4일 강제 송환된 후 사라 폰세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던 라산다 위제라트나 (31) 역시 보트피플시절 타밀난민들과 친하게 지냈던 ‘친 타밀 성향’을 집중 추궁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밀항 브로커들’ 망을 파고드는 수사보다 이미 무찔렀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한 반군유령을 좇는 스리랑카 정부, ‘국경보호’와 안보를 내세우며 전범 논란에 오른 정부와 협력하는 호주, 캐나다 그리고 여타 난민협약국가들. 이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보트피플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은 “난민이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와 같은 유엔캠페인 구호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콜롬보, 칠라우, 가네물라, 니곰보 (스리랑카)/ 쿠알라룸푸르, 조호루바루(말레이시아)/방콕(타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주1. 카루나는 타밀 호랑이 동부 사령관으로 2004 정부진영으로 넘어간 타밀 민병대를 운영하며 타밀 호랑이 반군과 대치해왔다. 그의 민병대는 수많은 인권침해와 타밀인 납치에 연루되어 왔다. 타고난 전투력을 발휘하던 카루나의 배신 그가 스리랑카 정부군에 제공한 타밀 지역 교전 정보는 타밀 타이거가 패배에 결정적 원인 하나로 꼽히고 있다. 카루나는 현재 재정착부장관이다.

관련 기사<한겨레21> [2010.11.05 제834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413.html


전쟁이 끝나자 군정이 들어선 타밀 지역

[세계] 빈손으로 내몰린 피난민 재정착촌, 이동의 자유도 없는 난민캠프…
검문소 군인만 촘촘한 스리랑카 북부를 가다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 싱할라족 군인은 점령군이 되어 북부 지방 곳곳에 있다. 마나르 지역 골목에서 검문을 서고 있는 군인들과 이들을 보는 민간인들. (Photo @ Yu K. Lee)

스리랑카 북부는 군인 천지다. 서부 마나르에서 북부 관문 도시 와우니아를 거쳐 오랜 반군 통치 지역이던 와니 지방까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의 소총(AK47) 밖으로 시야를 던지는 게 불가능하다. 북부 타밀 지역을 이어주는 간선도로(A9) 위 오만타이 검문소에서는 여전히 통행자를 샅샅이 검사하고, 북부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가방을 수색했다. 와우니아 타운에서 오만타이 검문소까지 4km를 이동하는 동안 이미 세 차례 검문을 받은 뒤에도 말이다.

타밀인 밀집 지역인 북부의 ‘군사화’는 종전 이전에 일찌감치 정부군 손에 넘어간 ‘마나르~와우니아’ 80km 도로에 늘어선 군 초소나 마나르 지역에서 본보기로 드러난 바다. 마나르에는 무장한 해군들이 한적한 마을 골목을 지키고 서 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난 터라 골목에 선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불러 세우는 일은 현저히 줄었다.

마나르 와우니아 약 80km 가량 되는 도로 양편으로는 맑은 하늘 아래 심한 벌목현상과 군 초소가 자리잡고 있다 (Photo @ Yu K. Lee)

“말도 마라. 시내에 한번 나가려면 몇 개 검문소를 거쳐야 했는지….” 마나르의 ㅅ마을 타밀족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리 와’ ‘저리 가’ ‘가방 열어’와 같은 검문소 ‘명령어’만은 싱할라어로 줄줄 읊었다. 반면 싱할라족으로만 구성된 군인들은 타밀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하여, 영문 모르고 검문소에 붙들려도 하소연 한마디 할 수 없던 게 타밀족이 자기 땅에서 겪어온 수십 년의 수모다. 그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사라진 남편, 아들, 그리고 딸의 실종사건은 마을에서 그리 특별한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주류 싱할라족 군인과 소수 타밀족 주민간 말이 통하지 않는 검문소. 그 검문소에 걸려 군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갔고 실종되었다. 사진 속 여인(35세)의 남편 역시 2007년 북부 한 검문소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소식이 없다. 경찰서를 비롯 여러 인권단체들에 남편 실종사건을 신고하고 받은 신고서가 그녀의 두 손에 한 가득이다. (Photo @ Yu K. Lee)

9월 중순께, 피난민(IDPs) 캠프에서 풀려난 이들이 ‘재정착’했다는 마나르 ㅇ마을로 향했다. 주요 검문소는 무사통과했지만 이후에도 군 초소가 시시각각 나타났다. 멀쩡한 건물은 별로 없었다. 다만 화장실 몇 개가 꼿꼿이 서 있거나 총탄 자국이 난 폐허들이 나뭇가지로 덮인 채 남아 있다. 화장실 위치를 보고 ‘여기쯤 집이 있었지’라고 감을 잡는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1990년대 초반 폭격을 맞은 교회는 이제 재건 작업이 한창이다. “교회를 지으려고 해도 정부가 건축자재 반입을 허용하지 않은데다 수리할 만하면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교회 건물에 손대지 못했다고 마을의 신부는 설명했다.

재정착 마을엔 집도 식량도 부족해

전쟁으로 피난 갔다 ‘재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온 주민들에게는 임시 가옥용으로 국제이주기구(IOM)가 양철판과 시멘트를 제공한다. 더운 날은 안에서 견딜 수 없고, 10월에 시작되는 우기에는 물이 차기 쉬운 임시 가옥이다. 최근 한 구호단체가 우기를 앞두고 벽돌 자재를 보급하기 시작했다는데, 우기는 코앞이고 벽돌집은 가물에 콩 나듯 눈에 들어왔다. 이 밖에 유엔고등판무관사무소(UNHCR)가 2만5천루피(약 25만원)의 정착금을 지원하고, 세계식량기구(WFP)는 6개월간 기본적인 식량을 제공한다. 약 1년 전 재정착을 시작한 이 마을 주민들은 그나마 지난 8월까지 WFP의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전쟁 때문에 5년간 농사짓지 못한 땅에 이제 막 씨를 뿌린 뒤 식량 지원이 끝났다. 주민들은 “수확을 하기까지 4개월은 걸리는데 그때까지 먹을 게 없다”고 한숨을 지었다.

전기는 24시간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천주교 단체인 카리타스(Caritas)가 학생이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태양열 랜턴을 일부 제공했다. 물은 우물 물을 끓여 마시지만 “마실 만해서가 아니라 달리 방법이 없어서”라고 주민 란지타(32·가명)는 말한다. 이 마을에는 의료시설이나 의사가 없다. 그 전에 싱할라족 의사가 한 명 있었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잘못 처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그래도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이 마을을 ‘베스트’ 재정착지로 꼽았다. 한 비정부기구(NGO) 직원은 “사나르 지역으로 간 주민들은 임시 가옥의 뼈대와 지붕 정도만 주어진 채 밀림 속에 던져지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재정착 지역의 현장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 산지브(31·가명)가 전하는 현실도 이를 뒷받침했다. 총 150가구가 재정착한 페리아마두, 타제나마두, 팔리아뤼 등지의 주민들은 임시 가옥 자재마저 없는 빈손이라고 산지브는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구호단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8월에 재정착한 이들에게는 화장실이 없고, 9월2일 재정착한 주민들에겐 지붕이 될 만한 덮개 하나만 달랑 주었고….” 말단 공무원 산지브는 답답해했다.

‘구호’와 ‘NGO’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의 알레르기는 참 지독했다. 한 NGO는 단체명 마크가 없는 차량을 이용하도록 권고받았다. 또 다른 NGO는 ㅇ마을에 농사용 펌프를 기부하려 했지만, NGO 차량 진입이 허용되지 않아 주민들이 와서 펌프를 가져갔다고 전했다.

열악한 재정착지에서 가장 크고 건실하게 서 있는 건물이 바로 군 캠프라는 점은 종전 뒤 스리랑카 북부의 진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반군으로 몰려 남편이 수감 중인 라즈니(28·가명)가 고향 복귀의 첫 소감으로 “공포스러웠다”고 속삭인 것도 그런 진실의 단면이었다. “이곳은 오랜 세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통치 지역이었고, 우린 스리랑카 군인들로 둘러싸인 환경에 익숙지 않아….” 그녀의 이어지는 속삭임이다. 9살 소녀 데보라처럼 반군의 징병제에 끌려간 오빠를 둔 아이에겐 무장 군인이 정부군과 반군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연상시키며 고통을 가중했다.

돌아간 고향에도 편히 머무를 집은 없다. 마나르에 재정착한 주민들이 정부군의 공세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있다. (Photo @ Yu K. Lee)

재정착에 밀려 더욱 참담한 난민캠프

“마나르 쪽은 아무것도 아니다. 킬리노치, 물라이티브 쪽으로 가봐라. 민간인보다 군인이 훨씬 더 많다. 모든 마을이 군 점령 지대다.” 외부인의 출입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지역을 방문한 타밀민족동맹(TNA) 소속 국회의원 슈레스 프리마찬드란은 전화 인터뷰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지난 9월 기자회견에서 “지난 6월 물라이티브 비수와마두 지역으로 풀려난 255가구 1215명의 주민이 물라이티브 사령관의 불허로 자기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인근 학교 등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물론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은 전혀 닿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가 “올해 말까지 재정착을 완료하겠다”고 말한 게 지난해 중반으로 종전 직후다. 그해 8월부터 난민을 ‘석방’하기 시작했고,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HCA)이 올해 8월3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난민 25만8846명이 석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친적집 혹은 중간 캠프캠프(난민 캠프에서 재정착지로 가면서 거치는 캠프)로 풀려난 이들을 모두 합친 수치다. 그리고 여전히 피난민 캠프에는 난민 3만 명 이상이 남아 있다. 난민에게는 지난해 12월1일부터 제한적으로 이동의 자유가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까지 캠프로 복귀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내 블록(C5)에 같이 머물던 20대 중반의 청년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그 때문에 구타를 당한 뒤 반군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의 병세가 악화돼 와우니아 병원에서 콜롬보로 옮겨드리고 간호하다 늦게 돌아왔다고 한다.”

‘존 4’ 난민캠프에서 열흘간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온 부디마(21·가명)의 목격담이다. 부디마의 말을 더 들어보니 재정착이 진행되면서 피난민 캠프는 찬밥이 된 듯했다. “선생님을 할 만한 사람이 다 풀려난 뒤에도 학교는 운영되지 않는다.# NGO의 급수차가 나눠주던 마실 물이 8월부터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난민들은 캠프 안 펌프물을 마시고 있다. 24시간 들어오던 전기도 8월부터는 하루 5시간이 고작이다.”

전쟁 막판에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라(35)는 캠프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채소가 없어 밥과 ‘달’(남아시아의 주요한 부식인 콩죽 겸 커리)만 먹을 때가 많다. 전에는 비누도 있었는데 그것도 배급이 중단됐고, 커리·고춧가루 등도 지난 석 달간 배급이 전부 중단됐다”고 말했다.

부디마와 사라의 증언은 실제로 OCHA의 6월 보고서와 맞아떨어진다. 보고서는 “마실 물 공급은 7월 말쯤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가 제공하던 피난민 식량이 5월31일 중단됐다” “피난민 지원을 위한 모든 필수품이 요구수준에 심각하게 못 미치고, 피난민 지원단체에 대한 거부도 위험한 수준”이라고 적고 있다.

‘라자팍세 왕국’화되는 스리랑카

30년 전쟁이 종지부를 찍은 지 1년6개월,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 난민의 생존권보다는 타밀 지역의 군사화와 장기집권 음모에 여념이 없다. 스리랑카의 군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종전 뒤 1년간 스리랑카 군의 수가 17만5천여 명에서 23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앞으로 30만 명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북부 지역에는 현재 지역 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어떤 민간 행정도 이행되지 못하는 ‘군사행정부’가 들어서 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계속되는 군사력 증강을 두고 전문가들은 북부 타밀족뿐 아니라 스리랑카 전역의 반대파를 겨냥한 조처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라스 폰세카 전 군 총사령관의 구속은 한 본보기다. 그는 대선에 출마해 현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도전한 ‘죄’를 지었고, 전범 재판이 열리면 증언하겠다는 발언으로 현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런 와중에 9월8일 스리랑카 의회가 긴급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은 라자팍세 대통령에게 임기 제한 없이 권력을 쥘 수 있는 여건과 모든 독립기구의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콜롬보대학 법학교수 로한 에드리시나는 이렇게 개탄했다. “헌법 개정안을 공지도, 공개 토론도, 국민적 동의도 없이 긴급 법안 형식으로 2~3일 안에 처리해버렸다. 소수자(타밀족과 무슬림)의 권익을 더 악화시킨 터라 민주주의와 인종분쟁 모두의 관점에서 크게 후퇴한 헌법이다.”

스리랑카는 지금 의회 민주주의에서 이른바 ‘라자팍세 가문의 왕국’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왕국의 북동부 타밀 지역은 패배와 절망감, 그리고 국제사회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서리치고 있다. 남부는 여당의 독재와 야당의 분열로 정국이 마비된 상태다.

마나르·와우니아·와니·콜롬보(스리랑카)=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 아래 인터뷰는 지면 관계상 실리지 못한 부분까지 담았습니다.

타밀 소수정당 대표 인터뷰

“우리 땅을 팔레스타인처럼 만들고 있다”

마노 가네샨(50)은 타밀소수정당인 민주민중전선(Democratic People’s Front) 대표이자 콜롬보의 타밀표를 끌어모으던 정치인이다. ‘화이트 밴 납치’와 실종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해온 인권운동가이기도 한 그를 콜롬보 사무실에서 만났다.

북부 재정착 지역을 방문해봤나.

‘재정착’이 아니라 ‘식민화’만 가속화되고 있다. 싱할라족 군인들을 정착시키고 있고, 불교사원을 짓고 있다.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의 문화·종교·언어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인은 그들의 땅에서 세대를 거듭해 난민으로 사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만들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캔디 (스리랑카 중부)에서 출마하여 의석을 잃었는데,왜 콜롬보에서 출마치 않았나?

전략적 실수였다. 하지만 내가 출마한 지역구에 타밀인들이 많이 살지만 타밀 대표가 없어 간거다. 다른 타밀 정치인들에 비해 제법 많은 표를 얻었지만 당선되기엔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우리 선거운동을 훼방하는 폭력사태가 12번이나 벌어졌다. 전 장관출신 마힌다난다 주먹들 짓이다.

황당한건 콜롬보에서 당선된 당신 형이 여당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그는 당이 공천했고 내 지명도에 힘입어 당선된 측면이 있다. 그가 지금 나와 당 그리고 타밀커뮤니티를 배신한 채 정부쪽으로 넘어갔다. 그와는 이제 말도 안한다.

‘화이트 밴 납치’ 는 전쟁 이후 줄었다고 하던데…

없는 건 아니다. 한달에 한 번 정도. 그전에는 하루에 10-15건 정도는 되었다. 전쟁 후 (납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특히 타밀 커뮤니티 내에 ‘패배주의적’ 사고가 있어 반정부 타밀 인사 수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갑자기 마하트마 간디라도 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필요성이 떠오르면 납치도 다시 벌어질 거다.

지난 대선에서 군 총사령관 출신인 사라스 폰세카 후보를 지지했다. 타밀족 수만 명을 학살한 전쟁의 사령관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마힌다 라자팍세(현 대통령)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다른 방안이 없었다. 싱할라의 주류 진영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직접 대선에 출마했다면 몇십만 표 정도 얻었을 것이다. 그게 전부고, 그건 휴지가 되는 표다.

지난 2월 폰세카가 체포당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걸로 안다.

폰세카 사무실에서 토론 중이었는데, 한 장군(소장)이 들어와 “폰세카 선생, 당신을 체포하러 왔소”라고 말했다. 폰세카는 “군이 아니라 경찰에 출두하겠다. 나는 민간인이다”라고 답했지만 그 장군은 무장 군인들을 데려오더니 저항하는 폰세카를 개처럼 끌고 갔다. 싱할라족은 그동안 나를 ‘타밀호랑이’ 분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내 앞에서 타밀호랑이를 끝장내고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영웅’으로 추앙받던 사령관을 동네 개처럼 끌고 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구성한 ‘전범 자문위원회’는 어떻게 보나.

(목소리를 높이며) 신뢰하지 않는다. 몇 달 전 구성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 왜 그렇게 연기하나. 자꾸 연기하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 타밀인은 골목골목을 쑤시며 모든 방법을 강구해봤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 어디 빛줄기는 없는지 찾으며 너무 절박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2009년 상반기)에 국제사회가 보여준 태도는 역겨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적 위원회의 조사가 필요하다. 이 정부가 구성한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를 결코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콜롬보 = 이유경)

관련 기사 <한겨레21> [2010.10.29 제833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67.html


타밀호랑이, 살아서 돌아오라

종전 뒤에도 이어지는 타밀 반군 강제 수용과 실종… 비밀에 부쳐진 스리랑카 반군 수용소의 참상을 보다. [2010.10.22 제832호]

글 싣는 순서

① ‘접근 금지’ 비밀 수용소의 참상

② 피난민 재정착 지역 잠입 취재

③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보트피플

불교도가 대부분인 싱할라족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소수 타밀족은 오랜 무력 저항을 해왔다. 긴 내전의 끝, ‘타밀호랑이’ 반군이 진압된 뒤 스리랑카에는 평화가 왔을까? 스리랑카 정부는 안정을 말하지만, 2009년 5월 내전 종료 선언 뒤에도 반군포로, 피난민, 보트피플로 떠도는 타밀족 사람들의 생존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9월3~30일 스리랑카 현지에서 취재한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3회에 걸쳐 르포를 연재한다. 편집자

* 아래 기사는 지면관계상 담지 못한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 필자

» 타밀 반군에 ‘징집’됐다가 전쟁이 끝나자 정부군에 체포돼 반군 포로 수용소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Photo by Yu K. Lee)

“오만따이 검문소에선 더이상 숨길수가 없었다. 한때 나의 동지들이 정부군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5월, 전쟁이 종착지로 향할 무렵 스리랑카 정부군은 전쟁터에서 빠져나온 수십만 난민들 사이에서  타밀호랑이 (LTTE) 반군을 샅샅이 추려냈다. 수간디(35, 가명)도 그렇게 추려졌다. 다수의 반군들이 투항하고 자수했지만 수간디는 ‘나는 투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부군과 동행한 동지들이 누구였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정치국과 정보국 소속 4-5명 섞여 있었다”

수간디도  정치국 소속이었다. 그녀는 반군통치영토, 일명 타밀엘람 (타밀모국이라는)의 거주민에 관한 각종 통계사업과 주민들이 주로 몸담고 있는 농업, 어업 관련데이터 수집을 10여 년간 담당해왔다. 1995년 킬리노치 (타밀엘람수도) 전투에서 다리하나를 잃은 뒤 정치국으로 ‘발령’ 받았고 그 뒤론 줄곧 그쪽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2006년부터 강화된 정부군의 공세가 타밀엘람 목전까지 치고 들어왔다.

“킬리노치가 함락되기 직전 (2009년 1월 초), 보이스오브타이거(VoT, 타밀호랑이 라디오방송국으로 타밀어와 싱할라어 방송을 병행해왔다필자 ) 국장, 자완이 ‘장애인 전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타밀 호랑이 전 대원이 전투에 나선다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그렇게 명령을 하달하러 온 자완 역시 다리 하나를 잃은 장애인 전사였다. 전쟁 막바지 가족들까지 대동하며 ‘모바일’ 방송을 하던 자완은 현재 생사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던 자완의 딸, 삿수딴의 행방도 묘연하다. 당시 삿수딴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6살. 타밀 호랑이는 2006년부터 ‘한 가족 한 타이거’ 징병제를 실시해왔고, 자완은 큰 딸을 ‘해방운동’에 ‘바쳤다’.

그러나 장애인 전사들에게까지 전투를 명령하던 막바지, 반군은 ‘한 가족 두 타이거’ 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 소녀 소녀들까지 징집해갔다. 기본 3개월, 특수훈련까지 총 6개월이던 군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제대로 훈련 받지도, 싸울 의지도 없는 소년, 소녀 병사들이 뒹굴던 전장은 결국 비참한 끝을 봤다.

“우린 (장애인 전사들) 블랙 타이거 – 자살 공격조 – 와 함께 제 2선에 포진해 있었다. 5월 15일부터 전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열해졌다.  1선이 무너지고 나와 팀을 이뤘던 동지마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이송 팀 (타밀 호랑이는 부상입은 동료나 전사자들을 현장에 방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정부군에 의한 시체 훼손이나 부상자 현장사살, 강간의 우려때문이다. – 필자 ) 에 연락했지만 아무도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수간디 자신이 부상 동지를 끌고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지점까지 갔다. 반군 민간인 할 것 없이 부상자들과 시체더미로 넘쳐나는 현장을 담당하던 현장을 담당하는 동료는 수간디에게  그냥  정부군쪽으로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다음 날 수간디는 포탄이 날아드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었지…와뚜와깔루 다리에 도착하니 정부군이 보였다. 그들은 외다리인 나를 보자마자 반군이라고 몰아붙였다. 동행한 난민들이 그냥 부상입은 거라 말해줬고, 나도 계속 부인했다.”

그러나  19일 도착한 오만따이  검문소에서 그녀는 결국 난민들과 분리되어 반군 포로 수용소 (이하반군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오만따이 검문소 스피커는 자수 안내 방송을 계속했다.

“단 하루라도 반군활동을 한 자는 자수 바란다. 이름만 등록하면 보내 주겠다. 길어야 3개월 조사하고 풀어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두려워 자수를 택했다. 다수는 부모들의 설득에 의해서였다. 사하이에 라니(43)의 아들도 그렇게 자수했다. 하지만 아들은 와우니아 팜바이마두 수용소에 1년 반 넘게 수감 중이다. 3개월 안에 풀려난 이는 아무도 없다.

“아들이 (반군에) 징집된 게 2007년 4월이고 다음 해 초 도망쳐 나왔어. 그놈을 숨기느라 지하벙커에서 2년동안 똥 오줌 다 받아냈는데…”

어머니는 결국 눈물 두 줄기를 쏘옥 뽑아내고 말았다.

자수 끝에 수용소로

길어야 3개월이라던 정부가 반군 포로를 석방하기 시작한 건 11개월이 지난 올해 4월 10일, 장이앤들을 먼저 내보내면서 부터다. 한달 후에는 565명의 미성년 병사들을 석방했다. 이 미성년들은 처음부터 별도 관리를 받아왔고, 유니세프의 독립적 모니터를 허용하는 등 긍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수간디는 1300명의 장애인 병사와 함께 4월에 풀려났다. 이번에는 그녀의 외다리가 석방에 도움이 되었다.

“석방되기 직전까지 심문당했다.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내 차례가 돌아왔고, 각기 다른 정보국 직원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수간디에 따르면 군은 타밀 호랑이 내부 정보 화일대로 아주 상세히 물었다. 부서이동은 어떻게 했는지, 몇번의 전투를 치뤘는지, 언제 어떤 전투에서 싸웠는지, 몇 시에 전투에 나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까지까지. 수간디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허용되던 샤워 시간을 어기면 여군이 몽둥이로 팔뚝을 세차게 때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구타가 심했던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에겐 심각한 고문은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수감되었던 ‘ㅁ’ 수용소  A 블럭에는 샤워 시설이 없어 군의 인도하에 D 블럭 우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장에 가리개도 없다. 있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고 아무도 손 볼 생각을 안했다”.

석방 후에도 그녀는 자유롭지 않다. 정보국 직원이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집에 없을 때는 가족들에게 행방을 묻기도 한다. 반군 조직에서 익힌 컴퓨터 기술과 행정 능력 덕에 최근 새 일터를 구하고 거주지를 옮긴 그녀에게 군은 ‘재직 증명서’와 거주지 등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 종전 선언 1년 뒤에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는 준전시 같은 검문이 계속된다. (Photo by Yu K. Lee)

샅샅이 추려진 반군들, 체포와 감시는 계속된다

“수용소(detention center) 가 아니다. 전(前) 반군들은 지금 사회복귀훈련 (Rehabilitation Center) 센터에서 교육받고 있다.”

반군 수용소 총 책임자 수단따 라나싱헤 준장은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수용소’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전 반군들과 군인들이 1년 넘게 함께 하며 얼마나 사이가 좋아졌는지 ‘와서보라’ 는 빈말도 했다. 공식적으로도 그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의 책임자다. “반군 활동에 개입한 기간과 개입정도 그리고 사회복귀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나 성과에 따라 석방 순위를 정한다” 는 게 그가 설명하는 석방 기준이다.

수감자들은 ‘애국의례’ 로 아침을 연다. 그들이 거부해 온 싱할라어 국가를 불러야 하고, 부르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 “한 소년은 국가를 부르지 않아 땡볕에서 무릎끓고 하루종일 벌을 섰고, 또 다른 소년은 국가를 부르는 동안 기침을 했다고 군화발로 채였다” 지난 4월 ‘ㅁ’ 캠프에서 석방된 카란(38, 가명)의 말이다. 캠프안 모든 전달사항은 싱할라어로 이루어진다. 싱할라어를 말하줄 아는 수감자가 소 그룹의 대표노릇을 했고 그를 통해 모든 사항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해체하라는 명령을 못알아듣고 자리에 계속 남아 있던 40대 쯤 되보이는 이가 군화발에 채여  쓰러졌다…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난 해 12월에는 30대 초반의 한 수감자가 몸이 아주 좋지 않아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허가가 안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 사망한 일도 있었다고 카란은 말했다. 수용소 안에는 전문 의사를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 대신 반군 중에서 군의관 노릇을 하던 (일부는 진짜 의사) 수감자가 전체 수감자들의 진료를 담당했지만, 의약품이 허술해 가족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잦았다. 반군 수용소에 대한 가족들의 방문은 허용되었지만 교통비 문제로 방문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많았다. 10-20분 가량 허용된 면담은 두 세명의 군인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아울러, 당국의 허가를 받은 카톨릭 신부들이 주도하는 일요일 미사가 허용되고 있다.

지난 4월 10일, 다리 하나가 불편한 카란 역시 장애인 석방 당시 풀려났다. 그 한 주 전 4월 2일 그의 캠프에서 차출된 107명의 수감자들이 인근의 한 학교 건물로 먼저 이송되었다.

“거기서 우리가 곧 석방될 거라 들었다. 그러나 한 명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6명은 테러리스트조사국(TID) 에서 데려갔다. 6명 중 한 명은 두눈 장님, 두명은 한눈을 잃었고, 또 다른 한명은 눈 하나와 두 손을, 그리고 한 명은 다리 하나가 없다. 나머지 하나는…기억이 잘 안나는데…그들을 왜, 어디로 데려 갔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 여섯 명이 다른 캠프로 이송되었는지, 강제 실종의 희생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제 실종의 역사가 깊은 스리랑카에서 기록없는 이송은 강제 실종과 법외 사살 우려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카란이 전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 역시 이런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 하루는 3명의 수감자들이 아침 조례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군은 ‘그들은 간밤에 도망갔다’고 말했다는 것.

“캠프는 이중 망으로 철통같이 쌓여 있고, 사방에 무장 군이 배치되어 있다. 도망가면 바로 사살당한다고 처음부터 세뇌 받아왔다. 누구라도 도망갈 환경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카란의 말이다.

강제 실종, 법외 사살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

이 반군 수용소에 대해 인권단체들의 우려는 대단히 높다. 우선, 국제적십자사를 포함 독립적 기구의 방문과 모니터가 전혀 허용되고 있지 않아 수감인원과 감호 상태, 더 나아가 생사 여부에 대한 정보까지 투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지난 9월 ‘법적 구속을 넘어 : 스리랑카의 타밀호랑이 혐의자 대량구금’ 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국제법률가협회 (ICJ)는 이들 수용소를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부운영 집단 수용소’ 라 표현했다.  국제법률가협회는 정부가 공식적 혹은 비공식으로 발표해 온 수감자 인원부터 불규칙한 점을 꼬집었다.

ICJ가 정리한 오락가락 수치를 보자. 수용소 책임 준장이 지난 해 11월 공식적으로 밝힌 ‘10,992명의 투항자’ 와 비공식적으로 밝힌 ‘12,000명 수감자’ 두 개의 버전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유엔대표부는 “12,700명의 반군이 피난민들 사이에서 반군으로 추려졌다”고 말했다. 이후 언론에는 10,732 라는 숫자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 2월 이래 반군 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된 라나싱헤 준장이 9월 29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밝힌 수치는 10,970 명이다. 그는 “현재까지 3580명이 석방되어  7390명이 남아 있고, 내일(9월 30일)  400명이 더 석방되면 대략 6900명 가량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다시, 정부소유 일간지 <데일리 뉴스>는 10월 26일자 보도에서 11,696명중 5,819명이 석방되었다는 ‘사회복귀 및 교도소 개혁부’ 장관 구네세카라 (D E W Gunesekara)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렇게 수감자 수치가 둘쭉날쭉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불규칙하게 계속된 추가 검거다 지난 해 중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의 잇단 탈출 드라마가 펼쳐지던 시절  (<한겨레 21> 797 기사 참조) 캠프내에서는  검거 열풍이 불었다고 난민들은 전했다. 아울러,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난민 석방 과정에서 일부 난민들은 재정착지가 아닌 반군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서너달 돈있는 사람들이 캠프를 탈출하고, 군은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대거 잡아갔다. 우선 17 – 25 살 사이의 소년들을 잡아갔고, 하룬가 이틀후에 소녀들을 잡아갔다. 한 가정에서 두 명이상  잡혀간 경우도 있는데 부모들이 통곡 하고 반발하면 한 두명 풀어주기도 했다. 군은 도망치지 않은 젊은이들이 반군이기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 떠나지 못했다는 짐작으로 잡아갔다.”

‘존 4’  피난민 캠프 난민 아노자(20대, 가명)의 증언이다. 그녀는 올해 8월 말께, 정부 에이전트가  (Government Agent  : ‘구청장 되는 공무원으로 중앙정부가 임명필자주) 난민들에게 중간 캠프로 이동해 한 두달 지내면 고향으로 재정착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난민들이 거부한데도 이 점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젊은 아들 딸이 있는 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새로운 캠프로 이동하면 또 등록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반군 추린다는 명목으로 젊은 이들을 또 잡아갈 것 아닌가”

‘존 2’  피난민 캠프에 갇혀 있다 지난 해 8월 가족들이 모두 석방되었던 카란의 경우도 재정착길 향하는 버스에 오르다 다시 붙들려 피난민 캠프에 홀로 남았고 심문과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 연행된 8월 부터 11월 반군 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존 2’ 피난민 캠프내 자리잡은 군 초소로 열 다섯 번 정도 호출받아 불려갔다. 처음 4-5번은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나같은 사례는 많다. 나는 자동자 정비소에서 일했지 반군이 아니었다”

군은 카란에게 반군이 아닌 걸 증명하라 다그치며 크리켓 스틱으로 구타했다. 그 후유증으로 카란은 지금 숨쉬는데 어려움이 크다고 말한다. 카란처럼 심문받던 작은 소년 하나는 눈에 심한 구타를 당하고 병원치료도 허용되지 않아 결국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도 반군 캠프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시력 상실 때문에 불구자들과 풀려났다. 50살 넘은 한 남성은 구타가 심해 기절하기도 했다. 카란은 그가 타밀 호랑이 행정조직에서 월급 받고 일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타밀 호랑이는 자체 법원, 은행, 경찰서 등 여러 기관과 부서를 운영해왔고 그에 딸린 고용인원이 적지 않았 – 필자 주).

한편, 반군이었던 수간디가 석방되는 나기 직전까지 심문을 당했다면, 카란은 그렇게 이송된 반군 캠프에서 별다른 심문이 없었고 대신 ‘중노동’을 했다고 말한다.

“반군이 아님을 증명하라”

반군 수용소의 수감자 수치가 모호한 두번째 이유는 ‘사회복귀훈련 센터’ (대략 10여개로 추정) 에서 또 다른 형태의 수용소로 이송된 수감자들이 적지 않아  ‘반군 수용소’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수감자들은 수감 생활 중간에 ‘사회복귀훈련 센터’ 에 속하지 않는 ‘웰리칸다’나  ‘오만따이’ 혹은 콜롬보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부사 군캠프’ 등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사 캠프를 꾸준히 방문해온 국제적십자사가 그곳으로 이송된 수감자 정보에 따라 실종된 아들을 찾던 부디마 (30대, 가명) 의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고 방문을 도와준 것도 이 점 때문에 가능했다. 부디마의 남편은 그러나 타밀 호랑이 대원이 아닌  타밀구호기구(TRO)의 직원이었다. TRO는 친 반군 타밀 구호기구로 쯔나미 재난 당시와 지난 해 전쟁 막판까지 전장에서 유일하게 구호작업을 했던 구호단체다.

“국제적십자사는 경찰 감호소, 부사 군 캠프를 포함 기존에 우리가 꾸준히 방문해왔던 다양한 형태의 수십개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후 투항한 반군들이 주로 수용되어 있는 ‘투항 캠프’ (‘사회복귀훈련센터’를 말함) 에 대해서는 지난 해 7월 이래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사  스리랑카 대변인 사라신 웨자라트나의 말이다. 국제적십자사는 수용소 방문에 관한 사항을 정부와 양자간의 의제로만 풀 뿐 비밀 정책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구호단체 일꾼도 반군으로 몰려 수감

국제법률가협회를 비롯 인권단체들은 재판도, 뚜렷한 혐의도 없는 이 구금행태가 국제인도주의법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스리랑카 정부군이 생포된 타밀 반군을 알몸으로 벗긴 후 사살하는 비디오와 반군 포로를 고문하다 결국 죽이는 듯한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반군 수감자에 대한 우려는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두 사례는, 병원폭격과 식량 배급줄 폭격 그리고 전쟁 막바지 백기 들고 투항하던 타밀 호랑이 정치국 지도자 나데샨 등 수백 명의 투항자들을 모두 학살 했던 이른 바 ‘백기 투항 학살’ 사례와 더불어 스리랑카 전쟁 범죄의 증거들로 거론되고 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는 또 다른 ‘백기 투항’이 ‘학살’ 이 될 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한 30대 남성의 증언이다.

“5월 17일 늦은 오후였다. 총성은 멈춘 듯 했고, 타밀 호랑이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어린이 연장자들과 한 벙커에 있었다. 인근 벙커에 있던 신부님 하나가 ‘정부군을 봤다.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치며 모두들 백기 들고 투항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린 백기를 보이며 벙커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군은 총을 쏘았다. 잠시 후 밖이 조용해진 듯 해서 우린 (어린이, 연로자 포함) 다시 백기를 보이며 랜턴도 들고 군인들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는데 군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등을 돌려 다시 벙커 방향으로 걸어가자 군은 총을 쏘았다. 모두들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고, 벙커로 다시 기어들어 왔다. 다음날 아침 군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병원과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고 백기 투항하는 민간인들까지 학살과 생존의 갈림길을 오가야 했던 이 전쟁터가 과연 재판대에 오를 수 있을까? 굼뜨던 유엔 사무총장의 스리랑카 전범 자문위원회가 이제 막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타밀호랑이’와 ‘전쟁범죄’ 두 단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단어이자 가장 민감한 이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논쟁도 그리고 증언도 강제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쟁범죄를 조사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교훈과 화해위원회’(LLRC)라는 기구를 구성했지만 이 위원회가 교훈과 화해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스리랑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관련기사: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8322.html

* 아래는 전반군 대변인 인터뷰 기사.

인터뷰 : 다야 마스터 (55, 타밀 호랑이 전 대변인)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다야마스터 (전 타밀호랑이 대변인)

본명 벨라이우탐 다야니디. ‘다야 마스터’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타밀 호랑이 대변인을 지냈고, 기자들에게 친근한 인물이었다. 2009년 종전 한달 전인 4월 정부군에 투항한 후 정부소유 방송국 토크쇼에 출연하여 타밀 호랑이 (LTTE) 반군을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 북부 자프나에 사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하였다.

질> 반군 대변인을 하던 당신은 지금 친정부 방송국 (Dan TV) 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가 임명한 건가?

답> 내가 선택한 일이다. ‘친정부’ 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린 북부지역 개발 이슈 등 골고루 다룬다.

질>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답> 자프나에서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인이 자유롭다. 콜롬보 상황은 잘 모른다.

질> 사는 환경은 어떤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나?

답>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석방된 모든 반군 대원들이 다 자유롭다.

질> 재정착 지역이나 피난민 캠프 난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 이동의 자유를 완벽히 누린다면서 왜 그런 곳은 둘러보지 않나?

답> 곧 방문할 에정이다. 안다, 난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걸.

질> 북부의 군사화, 식민화가 심각하다. 불교도가 없지만 볼교 사원도 짓고 있는데

답> (불교도) 군인들이 있으니 사원을 지을 수도 있지…

질> 반군 대변인까지 지낸 당신은 그렇게 자유로운데, 투항한 반군사병들 다수가 여전히 수감 중이다. 국제적십자사의 접근까지 봉쇄되고 있다.

답> 그건…. 그들도 서서히 석방될 것이라 본다.

질> 재판없이 1년 반 넘게 구금 중이다. 국제인도주의법 위반이다.

답> 코멘트 하고 싶지 않다. 내 신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질> 지난 해 투항할 때 정확한 상황은 뭔가? 일각에선 당신이 그냥 병원에 있었고 그 지역이 군에 함락된 것이라는데

답> 푸투마딸란에 있었고 군이 진격해 왔다. 그리고 내가 투항한 거 맞다.

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건가? 아님 그동안 싸워온 신념과 가치를 다 버린건가?

답> …

질> 일부는 당신을 배신자라고 한다. 투항 직후 정부 운영 방송국 토크쇼에 나와 타밀 호랑이를 비판했는데…

답> 내가 4월에 투항했고, 5월 18일 정치국 지도부도 투항했고 (백기 투항건을 말함) 다른 전투병들도 결국 투항하지 않았나!

질> 타밀 호랑이가 강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뭐가 잘못되기 시작했나?

답> 2005, 2006년부터 무기 공급에 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해군이 영해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인도 정보국의 작업으로 무기를 적절하게 들여오지 못했다.

콜롬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아시아의 얼굴, 아시아의 투쟁 – 집속탄/Portraits of Asia – Legacy of cluster bombs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은 라오스 남부의 사바나켓 지방과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떨어진 지역이다. 집속탄을 포함하여 그 폭탄 다수는 오늘날까지 불발탄으로 남아 현지인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구자를 양산하고 있다. 레바논, 이라크, 아프간, 조지아…등 집속탄, 불발탄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이 많지만, 그 어느 나라도 라오스를 능가하지 못한다.

라오스의 집속탄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이 치른 비밀전쟁의 후유증이다. CIA가 주도한 비밀전쟁기간 미 공군기는 2억 7천만개의 집속탄 알갱이를 포함하여 2백만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9년동안 8분당 한 번꼴로 폭탄이 떨어졌다. 라오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집속탄은 불발율 30%에 이르는 ‘BLU-26′, 그 집속탄 알갱이들이 종전 후 약 35년간 1만 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이며 1만 1천 500명의 신체를 훼손한 주범이다. 일부 엔지오 단체와 라오스 정부가 90년대 중반부터 불발탄 제거작업을 시작하였고, 지난 15년간 제거된 불발탄은 1% 미만이다. 현재의 속도와 기술로는 천년은 족히 걸린다고 불발탄 제거팀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급기야 이 ‘대량살상무기’ 집속탄을 국제사회가 규제하고 나섰다. 2008년 12월 3일, 집속탄 금지 협약 (Convention on Cluster Munitions)이 체결되었고, 2010년 8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 108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이 협약에는 그러나 중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미국 그리고 두 코리아는 참여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의 풍산과 한화 두 기업은 2008년 초, 규제협약이 한창 논의중이던 시절, 파키스탄에 집속탄을 수출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한 제보가 필자로 하여금 집속탄 취재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아래 사진은 2008년 11월 집속탄 최대 피해국 라오스에서 찍은 것들이다.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is one of the heaviest bombed place in the world along with the country’s southern province Savanakhet. The country itself is the worst affected by UXO and cluster munitions. No country on the earth could be able to compete Laos by the actual number of Unexploded Ordnance (UXO), including cluster munitions. Half of victims of cluster munitions are reportedly from Laos.

During the CIA waged-Secret War from 1964 till 1973, American airplanes had dropped 2 million tons of bombs, among which were 270 millions of cluster bomblets (or ‘bombies’ as locals call), that have been the main cause of 10,500 of death and 11,500 of injury for 35 years since the war ended. This appalling legacy is witnessed even ‘today’.

Children and farmers are particularly vulnerable to bombies, because bombies are usually found in farm fields and it is often invisible under the ground. Experts say that one CBU (or Cluster Bombs Unit) of ‘BLU 26’, the most common cluster munitions in Laos with 30% dud rate, could devastate three foot ball fields.

Since the mid of 1990s, some international NGOs and Laos government have launched clearance operation of UXOs. The UXOs have been cleared approximately between 0.5% – 0.9% for the past 14-15 years. Thus, it may take well over a thousand year to root out all remains, unless dramatic progress is made in clearance technology.

Meanwhile, the Convention on Cluster Munitions comes into effect on August 1, prohibiting 108 signatory countries from using, producing or transferring the munitions. Laos has been one of the leading signatories of the Convention. The other signatories include Briton, France, Germany and Japan, but not China, Israel, India, the US – the biggest producer – and South Korea, my home country. South Korea takes an excuse of its foe North Korea, which is also producing the deadly munitions.

The following pcitures were taken from Laos dated back in 2008 November just before the Convention was signed.

'USA' 마크가 선명히 보이는 폭탄의 잔해들은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A pile of scrap metals of Unexploded Ordnance (or UXO) - with 'USA' mark at times- are easily found in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Photo @ Yu K. Lee)

집속탄의 일종인 'BLU26'가 투하되는 장면을 모형화 해놓은 것. CIA의 라오스 비밀전쟁(19641973) 동안 집중 사용된 이 집속탄은 한 유닛에 670개의 작은 포탄이 들어있다. A NGO in Vientiane, the capital in Laos, makes model of air-dropping 'BLU-26' cluster bombs (Photo @ Yu K. Lee)

이게 바로 ‘BLU-26’ 집속탄. 라오스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불발탄이자,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집속탄 종류다. 사진에서 보듯 한 집속탄 모탄에 670 개의 작은 자탄이 들어 있고, 각각의 자탄은 200-300 개의 파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파편 하나는 약 300 미터까지 날라가 사망과 부상을 야기할 수 있다. / ‘BLU-26’ Cluster bombs are the most common in Xieng Khong province and elsewhere in Laos. One CBU (or Cluster Bombs Unit) contains 670 bomblets (or bombie) and each bomblet has 200-300 fragments, which can be scattered some 300 meters further to cause death or injury. (Photo @ Yu K. Lee)

이 집속탄은 'BLU-3'탄이다. 길다란 모탄안에 노란빛 자탄이 들어 있다. 흔히 '파인애플탄'으로도 불리며, 색깔이 고와 아이들이 찾아다니는 위험성을 지닌 집속탄이다. / ‘BLU-3’ Cluster bombs is often called ‘pineapple bomblet’ for its yellow color. Many children are said to search for them as this type of cluster munitions appear to be ‘pretty’ and can be sold in 'good money' in a market. (Photo @ Yu K. Lee)

폭탄의 잔해들은 고물장터에서 '좋은 가격'에 거래된다. 1 kg 당 2만 낍 (약 3천원) 이다. 빈곤한 농민들과 어린이들이 숲속에서 잔해를 찾아다니는 이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발탄을 건드려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Some villagers collect scraps to sell them in a market, from where scraps are said to be transferred to Vietnam. The prices are varied, but the normal price of one kg of scraps would be 20,000 Kip (apprx. 2.5 USD), which is good amount to poor farmer. The authority and INGOs have educated villagers that it’s dangerous to search out UXO to sell, which could be exploded during transferring. But some villagers still take a life risks for it. (Photo @ Yu K. Lee)

폭탄의 잔해들은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A pile of scrap metals of Unexploded Ordnance, or UXO are easily found in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Photo @ Yu K. Lee)

폭탄의 잔해들은 가옥받침대나 화분 등 여러 용도로 쓰인다. / Scrap metals of Unexploded Ordnance, or UXO have been used as pillars of house in villages of the northern province Xieng Khong in Laos.(Photo @ Yu K. Lee)

샹쾅지방에 사는 톰미 실람판(19)은 10여년 전 대나무 죽순을 캐다가 땅속 깊이 박힌 집속탄 알갱이가 터져 왼손을 잃었다. / Tommy Silamphan (19) from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has got injured to lose one hand when he mistakenly hit the ‘bombie’ while searching boomboo shoot for eating. (Photo @ Yu K. Lee)

분미 비자르(28)는 10년 전 연못을 파다가 1m 깊이에 도사리고 있던 집속탄 알갱이, 밤비(bombie)가 터지면서 팔 하나를 잃었다. “집속탄이 위험하다는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깊은 곳에 터지지 않은 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 Bunmy Bizzar (28) has lost one arm as he hit the bombie 10 years ago when he digged ground to make a fish pond. “The bombie was found somewhere one meter below” he said. According to the UXO clearance agency, the best detector (made in Germany) that they have been using can detect bombie upto 10 cm below from the ground. The team worry that they would miss deep hidden-bombie that could cause casualty. “We need better equipment”, they said. (Photo @ Yu K. Lee)

불발탄 제거팀이 산속으로 가져가 폭파시킬 불발탄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다. / The team of UXO Lao, the government sponsored UXO clearance agency in Laos, is moving UXOs that will be exploded deep in the mountains. (Photo @ Yu K. Lee)

불발탄 제거팀원이 산속으로 이송한 불발탄 위에 TNT라는 폭발물질을 바르고 있다. / A staff of the local clearance agency UXO Lao, pastes TNT - chemical explosives - on UXOs. The team is going to blow off UXOs along with TNT by detonator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에서 불발탄 제거팀이 폭탄 탐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 / The staffs of UXO Lao, the government-sponsored UXO clearance agency in Laos, are detecting UXO in Phongsavan in the country’s northern province Xieng Khong. (Photo @ Yu K. Lee)

불발탄 제거팀이 폭발물 TNT 바르는 작업을 마친 후 마을 주민들에게 폭발예고를 하고 있다. / A staff of the local clearance team UXO Lao announces villagers as a warning that the agency will detonate UXOs nearby therefore none of villagers should pass the area (Photo @ Yu K. Lee)

불발탄 제거팀 총 책임자가 폭탄이 터지는 마지막 순간을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 A field chief of UXO Lao, the local clearance agency, is nervously looking at explosion of six bombies (Photo @ Yu K. Lee)

정교하고 위험한 작업을 거쳐 마침내 불발탄이 터지고 있다. 밥비 (Bombie, 집속탄 알갱이) 6개가 날아가는 순간이다./ At last step of clearance of UXOs, six bombies were finally gone with explosion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어린이들. 60-70년대 CIA의 비밀전쟁이 남긴, 불발탄 집속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지역이다. 피해자 다수는 농민과 어린이들이다. / Children of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As the province is one of the heaviest bombed area in the world, children have been vulnerable to UXOs, particularly cluster bomblets (or ‘bombie’ as locals call). As those bomblets are small ball-like, often invisible under the ground, or having beautiful color, children touch them easily or by accident. It is said that some children have tried to search war scraps in forest to sell them for their family’s income. NGO workers warn the portion of children victims has been increasing in recent years.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지방 몽족 어린이가 집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CIA는 비밀전쟁당시 몽족을 용병으로 이용하였다. 전쟁후 미국이 '버리고 간' 몽족은 오늘날 미국에 부역한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는 라오 공산 정부에 의해 쫓기며 정글에서 비참하게 숨어 지내거나 마을에서도 극심한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다. / A hmong girl is cooking at her home in Xieng Khong province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주민들. 샹쾅 지방은 남부 사바나켓과 함께 CIA 비밀전쟁의 끔찍한 전설, 불발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 People in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in Laos have been suffered from poverty, which has been intensified thanks to remains of the CIA-waged secret war (1964-1973), particularly cluster munitions. As many farm lands are still contaminated by UXOs, livelihood of people has been affected. (Photo @ Yu K. Lee)

한 승려가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탐뷰(ThanPieu) 동굴 학살 추모제 기간 동굴을 방문하고 있다. 이 동굴은 1968년 11월 24일, 미 공군기는 집속탄을 포함하여 포탄을 이 동굴에 투하하여 내부에 피신해 있던 37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비밀전쟁 당시 9년동안 8분에 한번 꼴로 떨어지던 폭탄을 피하기 위해 동굴은 최대한 기능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 Monks visit in ‘ThamPieu’ cave in the northern province of Xieng Khong province in Laos on the occasion of the ‘ThamPieu Massacre’, which was happening in November 24 of 1968. American airplane droped bombs (including cluster bombs) on the Cave, killing all 374 people, who had taken refugees being escaped from the ongoing bombing during the secret war. People in the province today remember the victims this time of every year. (Photo @ Yu K. Lee)

60-70년대 빠떼트라오 (라오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몽족 남성이 비밀전쟁 기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주민들이 동굴안에서 살아야 했으며 하루에 한두번 정도 먹을거리를 모으기 위해 동굴밖을 나왔다.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불발탄이 숨어 있는 논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일하고 있다. 어린이와 농부들은 불발탄의 최대 희생자들이다. / A Hmong man recounts his experience during the secret war, in which American plane had dropped 2 million tons of bombs including more than 270 million cluster bomblets or bombie (as locals call). He said most of people were forced to live inside the cave or bunker for years. People went out of the cave only once or twice a day to collect foods to eat, he said. He, as a farmer, now takes his life risky when he works in a farming field, where cluster bomblets have been hidden.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 몽족 마을에서 몽족 어린이들이 전쟁 놀이를 하고 있다. 60-70년대 CIA의 비밀전쟁 기간 몽족은 미국의 용병 노릇을 했다. 전쟁 후 미국이 '버리고' 간 그들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라오스에서 정권의 탄압에 쫒기고, 억압받고 있다. / Hmong children are playing ‘war game’ in a village of the northern province in Laos. The minority ethnic Hmong in Laos were recruited by CIA during the 9 years CIA-waged secret war. Ironically, Hmong people are all but victims of the cluster bomblets that had been dropped by the then American airplanes. Besides, reports have revealed that Hmong people have been persecuted by Laos authority in jungle areas for their former collaboration with America in a period of secret war. (Photo @ Yu K. Lee)

라오스 북부 샹쾅 지방에 사는 몽족 여인 니아 플리아총(64)은 집속탄 알갱이 '밤비'에 아들을 잃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비밀전쟁 기간 CIA 용병이었고, 가족은 호세월을 누렸다. 그녀는 "몽족은 아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한숨짓는다. The Hmong woman named Nia Pliachong (64) has lost her son as he was killed by a ‘bombie’ while he was working in farming field decades ago. She is one of a number of Hmong ethnics who had lived in the ‘secret city’ Long Chien, where CIA agents and army based in during the 9 years bombing mission. Hmong men including her husband, who passed away years ago, were recruited by CIA then. In return, they’ve got money, foods, house and all necessary stuffs provided. She now condemns the USA’s war, however, as she lost her son by a bombie which was dropped by the USA. “In our Hmong custom, you’re nothing if you don’t have son”, she sighs. (Photo @ Yu K. Lee)


아시아의 얼굴,아시아의 투쟁/ Portraits of Asia – Burma

58년 군부독재, 60여년 내전. ‘버.마.’

풍부한 자원과 고등인력으로 한 때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망한 국가였다는 버마의 오늘은 ‘참’ 참담하다. 군부 독재가 말아먹은 정치와 인권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싶고. 교육, 의료, 경제 등 기본생존권과 최저생활은 정말 많이 망가졌다.

88 랑군항쟁 이후 버마를 빠져나온 젊은이들과 민주세력들의 상황도 못지 않게 괴롭다. 타이-버마 국경 정글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생계에 허덕이는 게릴들은 조금씩 잃어가는 정글 터전을 부여잡고 있다. 그 정글을, 여전히 버마를 탈출하는 이들과 난민들이 헤쳐 지나가고 있다.  2007년 승려들이 몰고온 일말의 시위바람이 잠시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유혈진압당한 ‘샤프란 혁명’ 역시 동트는 새벽을 기다리기 보다는 또 다른 탈출로 이어졌다. 탈출한 일부 승려들은 이미 난민 정착 프로그램을 타고 유럽이나 미국으로 떠났고, 일부는 타이 국경 도시 메솟이나, 이동의 자유가 없는 난민캠프에서 지내고 있다.

2010년 버마의 정치는 더더욱 술렁이고 있다. 90년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NLD) 압승을 인정치 않고 권력을 쥐고 있던 군부정권 (SPDC)은 2010년 말에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총선이 90년 총선 이후 별다르게 한 것 없이 세월을 보낸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NLD) 은 물론 여러 민주 진영을 더더욱 갈라 놓고 있다. 우선, NLD는 선거 보이콧을 천명함에 따라 강제 해산당했다. 그리고 당원 일부는 탈당하여 ‘민족민주세력’ (National Democratic Forces) 라는 신당을 창당해 총선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88세대’ 등이 주도한 ’88세대 학생당’ (88 Generation Student Youths) 도 선거 참여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가 버마에 민주주의라는 지푸라기를 가져다줄거라는 기대나 분석은 기대하지 마시라. 되려 ‘민’ 동반한 영구집권을 노리는 것으로 분석된다. 권력은 여전히 군부들의 손에 있으며, 군부가 ‘길러낸’ 민간 사병 조직들이 버마의 일상에 박혀버린 오늘이다.

2004년 여름 처음 취재한 버마는 나의 안테나를 수시로 건드린다. 불법일수 밖에 없는 버마 내부 취재, ‘사실상 불법’일 수 밖에 없는  타이-버마국경 취재 등으로 담은 사진들 중 몇 장 추려 올린다.

랑군 시내 민족민주동맹(NLD) 본부 (Burma, 2007 / Photo @ Yu K. Lee)

2008년 6월 19일 아웅산 수치의 생일 잔치를 치르던 민족민주동맹 (NLD) 당사 본부에 친정부 행동대원들이 출동했다. 생일잔치는 옥외시위로 번졌고 당원들은 스크럼을 짜고 당사를 지켰다. 그리고 사복경찰과 친정부 행동대원들은 당원 몇 명을 잡아갔다. (Burma, 2008 / Photo @ Yu K. Lee)

랑군 강을 건너는 주민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랑군 쉐다곤 파고다를 한 승려가 걷고 있다. 2007년 승려들이 주도한 '샤프란 혁명' 이 거세게 일던 사원이기도 하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흔히 '티 숍' (Tea Shop) 이라 불리는 거리 까페는 랑군 시민들, 젊은이들이 사회관계를 맺는 주요 공간이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인레는 아름답다. 버마 중북부의 샨주에 위치한 인레 호숫가에는 발로 배를 젓는 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버마 중북부 도시 만달레이 야시장에서 한 승려가 헌책들을 들쳐보고 있다. 2007년 9월 ‘샤프란 혁명’을 주도한 버마의 승려들은 정치적이고 사회변화에 관심이 많다. 정식 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는 버마에서 사원은 교육 기관이자, 무료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수양처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 배경을 지닌 이들은 종교적 귀의목적이 아니더라도 승려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사진속 여인은 2008년 5월 버마를 강타한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피해자이다. 최소 13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재난을 눈앞에 두고 버마 군부는 긴급 구호를 수월히 하기 보다는 막기에 급급했다. “처음엔 정부가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라며 야속한 정부에 대해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의 가족은 남폄을 포함해 일곱 식구가 모두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가족 총수입은 하루 평균 3천 차트 (3달러 미만)이다. (Burma, 2008 / Photo @ Yu K. Lee)

2009년 9월 타이 버마 국경 정글에서 카렌반군 (KNU) 와 버마학생민주전선 (ABSDF) 의 공동 순찰이 진행 중이다. 그해 6월 제 5여단으로 지정된 이 구역이 버마군의 대대적 공격을 받았고, 9월 공격설이 도는 가운데 반군들도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타이-버마 국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대원이 타이-버마 국경을 가르는 살윈강을 배로 건너고 있다. 멀찌감치 보이는 가게로 ‘쇼핑’을 가는 길이다. 랑군의 봄. 버마의 88 민중항쟁 후 정글로 쏟아진 이들이 결성한 버마학생민주전선은 그러나 자금줄이 급격히 차단되면서 심각한 생계난을 겪고 있다.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버마학생민주전선 (ABSDF) 신입대원. 그는 2007년 샤프란 혁명으로 불리는 시위가 유혈진압당하자, 무장투쟁에 동참하겠다며 정글로 왔다. 그러나 그가 직면한 건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배고픈 게릴라 조직이다. 그의 모습 뒤로 보이는 어린이 사진은, 난민정착 프로그램으로 미국으로 떠난 전 대원의 어린 시절, 또 하나는 비폭력 저항의 예찬론자인 아웅산 수치.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툰툰윙(28)은 버마 88항쟁 이후 타이-버마 국경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대원이다. 버마군이 마을주민들을 포터(군사물자를 실어나르는 강제 노동)로 이용하는 걸 보며 자란 그는 1998년 집을 몰래 빠져나와 정글로 왔고 버마군과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2007년, 마을에 보급투쟁을 나갔다가 버마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었다. 총상 입은 환자를 누인 나무평상을 어깨에 들고 동료들은 3주 동안 험한 정글을 탔다. 국경을 넘어 타이 북부 치앙마이 병원까지 실려온 그는 그러나 한달 치료 후 팔을 절단해야 했다. 오른 팔을 잃은 그는 왼팔로 쉴새 없이 담배를 핀다. 2004년 처음 민주전선을 취재할 때 그는 두팔 지닌 게릴라였다. 2009년 다시 찾아간 정글에서 긴옷 속에 묻힌 잃어버린 팔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버마 군으로 복무하다 반군 통치영토로 넘어온 버마군 탈영병사 (오른쪽 두 명)들이 카렌 반군 (왼쪽 두명)의 ‘보호’아래 지내고 있다. 강제 모집과 납치 등에 의존하는 버마군의 모집 방식때문에 버마군을 탈영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주로 반군 지역으로 넘어와 반군이 되어 싸우거나, 국경넘어 타이 북부로 넘어와 불법 이주노동자로 살아간다.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이 남성은 버마 군에 의해 포터로 이용되다 반군인 카렌해방군 영토로 넘어왔다. 배가 고프고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해 탈출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타이-버마 국경과 맞닿은 이투타 피난민(IDPs : Internally Displaced Persons) 캠프의 어린이들. 이투타 캠프는 2006년부터 강화된 버마 군의 군사 작전으로 쫓겨온 카렌 난민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다. (Thai-Burma border EiTuTha IDPs camp, 2009 / Photo @ Yu K. Lee)

타이-버마 국경과 맞닿은 이투타 피난민 (IDPs : Internally Displaced Persons) 캠프의 병원에서 폐렴 환자가 누워있다. 이 정글 병원에는 말라리아 환자가 가장 많다. (Thai-Burma border EiTuTha IDPs camp, 2009 / Photo @ Yu K. Lee)

우틴쉐 (72)는 승려로 살아간다. 그의 사원은 타이-버마 국경 웨지의 버마학생민주전선 본부 근처 정글 한가운데 있다. 카렌족인 그는 1962년 부터 78년까지 버마 군이었다. 군 생활을 그만 둔 뒤 10 년간 자신의 고향에서 카렌 반군의 첩자노릇을 했다. 그리고 88 년 랑군의 봄을 거치며 정글로 도망친 그는 버마학생민주전선 (ABSDF) 게릴라가 되었다. 나이가 너무 들어 게릴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그는 2002년 이래 정글 사원의 승려로 살아가고 있는 게다. (Thai-Burma border, 2009 / Photo @ Yu K. Lee)

“마을이 있긴 어딨나. 피난처에서 왔지. 2년간 먹을 것도 없이 헤매다가…” 어느 마을출신인지 묻자 그렇게 답하는 사진 속 노인은 버마 소수민족인 카렌족, 이름은 소우 텔리 75세. 60년 넘게 세계 최장기 내전을 벌이고 있는 버마-타이 국경 부근 카렌주에서 노인은 1975년부터 피난처 찾아다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버마-타이 국경과 맞닿은 정글 내전 지역에서 버마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소수민족 여성들을 강간하고, 주민들을 포터로 강제 동원하거나 총살하고 있다. (Thai-Burma border EiTuTha IDPs camp, 2009 / Photo @ Yu K. Lee)

누비스 승려들이 버마 중북부 포코쿠의 한 사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포코쿠는 2007년 승려들이 주도한 '샤프란 혁명'이 시작된 지역 중 하나다. (Burma, 2007 / Photo @ Yu K. Lee)

버마 승려 킹 제로 (32, 본명 우이에따리야) 는 2007년 9월 ‘샤프란 혁명’을 이끌었던 전버마승려연합(ABMA)의 주역이다. 시위가 무력진압된 후 1년여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2008년 10월 초 국경을 넘어 타이 북부 매솟으로 와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동료 우 감비라 (30)는 2008년 11월 초 체포된 후 63년형을 받고 복역중이다. (Mesot in Northern Thailand, 2009 / Photo @ Yu K. Lee)


아시아의 얼굴, 아시아의 투쟁 / Portraits of Asia – Nepal

2008년 4월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카브리 지방 사무실은 선거준비로 바빴다. 2006년 네팔의 제 2 민중항쟁으로 봉건왕정을 무너뜨린 후 2년 만에 실시되는 제헌의회선거는 10년 무장투쟁을 접고 하산한 마오이스트 공산당에게 중요한 시험대였다. ‘제헌의회선거’는 바로 그들이 목숨 걸고 쌓워온 주 의제였기 때문이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 제헌의회선거에서 당선된 마오이스트 여성지도자 히실라 라미(당시 48세)가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젋은 시절 이래 줄곧 공산주의 운동과 산악반군지대에서 보내온 그녀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연방공화국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Nepal).

2006년 4월, 주류정치권의 야당과 산악지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마오이스트 공산당이 연대한 ‘제 2 민중항쟁’을 거쳐 238년 힌두 왕국은 마침내 공화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공공의 적, 왕정주의자들이 힘이 꺼진 공화국의 정당들은 이제 그들간의 정책과 권력다툼으로 여전히 불안한 시국을 유지하고 있다. 2008년 4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제 1당으로 깜짝 등장한 마오이스트 공산당 의장이자 총리직을 맡고 있던 푸슈파 카말 다할 (일명 ‘프라찬다 동지’)은 계속되는 보수정당들의 ‘반란’ 에 대한 항의표시로 2009년 5월 총리직을 사임했다. 2008 제헌의회선거 당시 자신의 강력 지지기반인 수도 카트만두에서  마오이스트 후보에게 패배하는 치욕을 경험한 네팔공산당(맑스-레닌연합) 사무총장 마다브 쿠마르 네팔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도 2010년 6월말 사임했다. 새 정부 구성을 두고 다시 몸살을 앓고 있는 네팔의 얼굴을 2006년 제 2민중항쟁, 그리고 2008년 제헌의회 선거 취재를 바탕으로  올린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시장풍경. 네팔은 가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박하고 쾌활하며 외향적이고 정치에 관심도 많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최고 사령관 프라찬다 동지. 본명 푸슈파 카말 다할, 전직 교사. 10년 내전으로 네팔을 붉게 물들인 프라찬다는 2008년 제헌 의회 선거결과 마오이스트가 제 1당이 된 후 네팔 공화국의 총리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항의 표시로 자진사퇴했다. 2008년 5월 28일 공화국으로 선포된 네팔은 그러나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정치 혼란을 겪고 있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 수도 카트만두 북부에 자리잡은 어둑한 건물안에는 마약 중독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합숙하고 있다. 마오이스트 산하 청년공산당연맹(YCL)이 운영하는 소위 ‘사회교화소’이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대원이 벨기에산 박격포를 챙기고 있다. 1996년2월, 농기구와 사제폭탄으로 ‘인민전쟁’을 시작한 마오이스트의 무기는 해를 거듭할 수록 진화했다. 네팔 왕실군 (현 ‘네팔 군’) 이 잃고 간 미국산, 영국산, 벨기에산…산…산 무기들이 마오이스트 반군의 손으로 넘어왔다. (네팔, 2006) 마오이스트는 1만 3천명의 희생을 낳은 10년 무장투쟁을 접고 2006년 하반기 주류정치권으로 들어왔다. (Nepal, 2006 / Photo @ Yu K. Lee)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인민해방군(PLA) 여성대원이 산골마을 집회에 도착하며 모여든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Nepal, 2006 / Photo @ Yu K. Lee)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인민해방군(PLA) 여성대원이 산골마을 집회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Nepal, 2006 / Photo @ Yu K. Lee)

마오이스트 문화선전단이 마을 정치집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문화선전단은 마오이스트 인민해방군 부대와 늘 동행하며 마을을 방문하고 정치집회를 연다. (Photo @ Yu K. Lee)

네팔 마오이스트 대원. 무장 투쟁 당시 (1996-2006) 그들은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Nepal, 2006 / Photo @ Yu K. Lee)

마오이스트 대원이 네팔 중부 람중 지방 산악지대에서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과 조우하고 있다. (Photo @ Yu K. Lee)

무장투쟁 시절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 2006년 봉건왕정을 무너뜨린 제 2의 민중항쟁을 계기로 무장투쟁을 접고 주류 정치권으로 들어와 있다 (Nepal, 2006 / Photo @ Yu K. Lee)

네팔 마오이스트 공산당 인민해방군 (PLA)에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최소 1/3은 여성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Photo @ Yu K. Lee)

힌두왕국에서 ‘인민공화국’으로 가는 길이 쉬울리 없다. 2006년 힘을 모아 봉건왕정을 무너뜨린 네팔의 피플파워는 그러나 2008년 제헌의회 선거과정에서 급진, 진보, 보수 정당간에 폭력과 비방전이 그늘을 드리웠다. 소위 주류정당들은 마오이스트를 폭력과 협박을 일삼는다며 맹비난했지만, 마오이스트 역시 폭력사태의 모자라지 않은 피해자였다. 사진은 당시 선거 폭력 사태로 사망한 마오이스트의 장례식 장면. (Nepal, 2008 / Photo @ Yu K. Lee)

2008년 4월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수도 카트만두 인근 카브리 지역의 버스정류장에는 마오이스트들의 선전물로 도배되어 있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네팔공산당 (맑스-레닌연합) - CPN (UML) - 카트만두 집회 모습. 마오이스트 보다는 온건하고, 의회당보다는 좌편향적인 이당은 수도와 지식인 층에 지지층이 많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한 네팔 여성이 2008년 제헌 의회 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 2006년 제 2민중항쟁으로 봉건왕정을 무너뜨린 네팔은 2년 후 치뤄진 제헌 의회 선거를 거치며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라라 (G.P. Koirala)는 의회당 대표이자 네팔 주류정치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2010년 3월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Nepal, 2008 / Photo @ Yu K. Lee)


한국군 파병과 아프간 딜레마

최근 저는 <미디어 오늘>과 아프간 파병을 주제로 서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화로 보충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아래 인터뷰 기사 링크입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840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제 인터뷰 기사에는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오류와 왜곡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악의적인 왜곡이나 오보가 아닌 ‘실수’였다고 굳게 믿습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한 대학생 잡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발행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서른살까지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섰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호호호) 기자의 상상력이 너무 깊었던 거겠죠. 아무튼 제 3류 배경으로 그 문을 두드릴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파악한 데다, 동의하기 어려운 언론고시 체계에 몸과 정신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던 제가 민언련과 함께 했던 20대의 역사는 그 기사 한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프간 파병을 다룬 이번 <미디어 오늘> 인터뷰 기사에는 큰 컴플레인 없습니다. 다양한 여론 형성을 시도하기 위한 <미디어 오늘>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한가지 찝찝한 건 ‘국익’에 대한 방점이 너무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댓글도 ’국수주의적 시각’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일부 마쵸들의 댓글이 아니라면 – 물론 저와 인터뷰한 내용을 기자의 언론 모니터와 엮어 쓴 기사라 기자의 시각을 중심으로 기술했을 거라 이해하며…

이 참에 파병에 대한 저의 소견을 짧게 나마 보충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군 파병문제의 기준을 ‘국익’으로 따져보는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습니다. 저는 해외 파병은 무조건 안된다는 감성주의적 평화주의자도 아니며 해외 파병을 전부 제국주의적 개입으로만 보는 극좌파도 혹은 민족주의적 좌파도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99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군의 횡포와 인도네시아 군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의 끔찍한 폭력으로 불바다가 되고 있을 때 동티모르인들은 다국적군의 파병을, 국제사회의 개입을 절절히 요청했지요. 호주의 ‘극좌’ 조직들은 파병을 무조건 반대했고, ’건설적’ 좌파 조직들은 파병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수의 생명을 살리고, 약자 혹은 소수 커뮤니티에 대한 학살을 막으며 인도주의적 임무와 재건 임무를 수행하는 파병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 없다고 봅니다.

물론 ‘군복’들의 파병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평화유지군이 점령군 행세를 해왔던 비꼬인 역사도 적지 않습니다. 평화유지군이 현지 여성을 강간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2007년 아이티에 파견된 스리랑카 사례인데, 뉴스를 접하고 버릇 못준다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많은 타밀족 여성들이 스리랑카 정부군의 강간에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죠. 관련 기사 : http://news.bbc.co.uk/2/hi/south_asia/7076284.stm )

아울러 구호물자와 구호 활동과 국가재건이 필요한 곳이라면 군복보다는 민간복을 파견하는게 훨씬 더 방점을 두어야 할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전후 혹은 전쟁 중인 국가 대부분이 절실하게 필요한 ‘국.제.사.회.’는 바로 이런 구.호.영.역.입니다. 아프간이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구호가 절절하게 필요한 상황이지요. 그러나 아프간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 80%가 군과 무기 쏟아부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9만 군대 중 단 한개의 여단도 독립적인 작전을 펴기 어려운 수준이라니! 대단한 실패 아닙니까?  그중 70%가 문맹이라 정밀 무기 사용에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여, 오늘 날 아프간의 실패는 첫 단추를 잘못 낀데서 온 예고 된 것이기도  하지만, 설상가상 구호활동과 국가재건의 실패와 일관된 정책 부재까지 겹쳐 작금의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잘못끼어 들어간 단추들을 읊어볼까요?

1)       2001년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탈레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면 전쟁 범죄자급 북부 동맹 군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북부 동맹 군벌들은 인도, 터키,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국가들, 이란 등등 주변 국들의 지원을 받으며 90년대 초반 ‘무장권력투쟁’을 벌여 아프간을 초토화시킨 장본인들입니다. 이런 무법천지 쑥대밭 상황이 탈레반이라는 종교광신주의 정치집단의 탄생을 야기하였지요. 결국 2001년 벌인 대 탈레반 전쟁은 ‘파시스트’ 정권을 ‘전범’정권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90년대 군벌들이 만들었던 쑥대밭은,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래 ‘다시 돌아온 군벌들’ 에 의해 ‘아편밭’이 되었습니다. (아래 관련 기사)

http://www.hani.co.kr/section-021027000/2007/05/021027000200705170660012.html

2)      아프간 의회, 정부, 지방정부, 마을 구석구석을 이 끔찍하고도 부패한 범죄자들이 주무르는 바람에 민간인들은 숨죽여 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군벌들의 폭력에 진짜 숨을 죽여왔습니다. 여성들은 이런 군벌들의 강간위협에 시달립니다. (아래 관련 비디오)

http://www.youtube.com/watch?v=9yFiHkhv-UE

http://www.youtube.com/watch?v=Z3A8stwELJU

3)     미국과 동맹국들은 부르카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주겠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들이대며 대 탈레반 전쟁을 벌였지요.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한 인도작가 아룬다티 로티는 이 부르카 해방 전쟁을 두고 “미 해병대가 페미니스트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며 시원하게 비꼬아 준적이 있습니다. 그 페미니스트미션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들은 여전히 부르카를 두룹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다소 어이없게도 동냥할 때 쪽팔림을 막기 위해서 두룹니다. 구호와 재건 실패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그림이죠. (아래 관련 기사)

http://penseur21.wordpress.com/2009/04/09/%e2%80%98%eb%b6%80%eb%a5%b4%ec%b9%b4%e2%80%99%eb%a1%9c%eb%b6%80%ed%84%b0%ec%9d%98-%ed%95%b4%eb%b0%a9/

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302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030658061.html

반면 아프간에 넘치고 넘치는 (한 때는 천개가 넘었다는데, 제가 취재하던 2007년 기준으로 보면 ‘수백 개’) 엔지오들은 카불의 가장 비싼 ’동네’에서 벽 높은 빌딩을 짓고 빌딩 안에서 온갖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안전을 이유로 현장 활동을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 물론 값진 구호사업을 벌여온 엔지오들이 전무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2년 전 한국인 23명 납치 사건 정국으로 시끄러울 당시, 제가 한국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던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시내의 ‘힐라 병원’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도 이런 관점에서입니다. 현지인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의료사업을 하고 있었으니깐요. 그들이 뒷마당에서는 선교를 하네마네 꿍꿍이를 따져 묻는 언론들이 잇었지만 제게는 그게 언론의 ‘먹물 근성’으로 보였습니다.

4)      외국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 증가는 아프간 정책 실패의 결정적인 폭탄입니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7/05/021019000200705170660055.html

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307

아래는 제가 미디어 오늘에 보냈던 서면 인터뷰 내용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아프간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한국군 파병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 그리고 ‘내용있는 파병 반대운동’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Penseur21 – 갱

===========================

미디어 오늘 (이하 ‘미’) > 한국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정부는 내년 7월 지방재건팀(PRF)를 보호할 320명 내외의 병력을 2년6개월 간 치안상태가 비교적 안정적인 아프간 파르완주에 보내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정부의 이번 결정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갱 : 어리석고 뜬금없다. 아프간의 치안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부패한 관료들과 ‘인권침해의 챔피온’ 군벌들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 국제 사회의 정책 혼선과 전략 부재, 다국적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등등으로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에 반해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고 있는 (아프간) 탈레반 세력은 날로 확장되고 있다. 공신력있는 정보에 따르면 아프간 전체 34개 지방 중 11개 지방이 탈레반 통치하에 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도 물론 탈레반이 출몰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제대로 된 논의나 검증 한 번 거치지 않고 2년 반이라는 장기 파병을, 그것도 재 파병을 하는 것 아닌가. 현장 실사는 얼마나 꼼꼼히 했는지, 아프간 정세에 대해서는 얼마나 깊이있게 파악하고 있는 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외부의 압력이 그리 거세게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다, 철군이 대세인 국제 여론을 고려해보면 뜬금없다.

그리고 모순적이다. 2년전 탈레반의 한국인 대량 납치 사건 직후 한국 정부는 ‘한국인 전원’ 철수 방침아래 군대는 물론 기자, 교민 등등 철수시켰다. 그리고 아프간을 여행 금지국으로 설정하여 기자들의 취재길, 구호기관들의 활동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프간 처럼 국제 뉴스의 핵이 폭발하는 현장을 정부의 조치때문에 가지 못가는 기자는 한국기자밖에 없을 거이며, 아프간처럼 구호가 절실한 나라에 구호인력을 파견하지 못하는 나라도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상대적 안전 운운’하며 군대만 보내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그 군대 파병이 한국인의 신변을 위험헤 빠뜨리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요소 아닌가.

미 :  파르완주의 치안이 안전한 지 궁금합니다. 아프간 다른 지역은 안전합니까.

갱 : 기본적으로 아프간에 안전지대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물론 어디가 ‘덜 위험한가’ 정도의 차이가 과거에는 유효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카불 공항까지 공격하고 (9월 8일), ISAF 본부는 물론 (8월 17알) 유엔 게스트 하우스 (10월 28일) 까지 공격하는 판에 이제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란 무의미 해 보인다. 지금 예로 든 세 곳은 치안이 철통 같은 곳이다. 게다가 몇 년전까지만 해도 탈레반 세가 없던 북부 쿤두주 지방 (독일군 주둔)에서도 탈레반이 심심찮게 출몰하고 있다.

그리고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아프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게 탈레반 세력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악명 높은 군벌인 굴부딘 헤크메따아르의 무장 세력도, 하카니라는 인물이 이끄는 ‘하카니 네트워크’도 카불 정부와 외국 군대를 심심찮게 공격하고 있다. 물론 알카에다도 있다. 그리고 아프간 전역은 다양한 파벌로 나뉜 무장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들도 외국인을 포함한 납치, 폭력 사태에 연루되는 이들이다.

미 : 탈레반이 지난 9일 데페아(dpa) 통신 등 외신들에 전자우편으로 성명을 보내 “한국 정부가 아프간에 병력을 보낸다면 나쁜 결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안전대책을 철저히 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탈레반의 경고, 실현가능성 있습니까.

갱 : 당연!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실패하길 바라지만, 가능성은 제법 높다고 본다.

미 : 당시 (2007년) 아프간 취재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취재 뒤 어떤 점을 느끼셨습니까.

아프간은 뉴스 거리가 무궁무진한 곳이며 외신을 취재하는 기자라면 누구나 ‘매력적’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현장이다. 버마나 스리랑카처럼 기자들을 옥죄는 환경도 거의 없다. 안전이 가장 문제인데, 철저한 정보수집과 위험을 어느 정도 감수 할 마음의 준비만 한다면 취재하기 나쁘지 않다. 취재 후 느낀 점은 2001년 미국과 동맹국들이 ‘부르카로부터 해방’ 을 내걸고 벌인 전쟁이 얼마나 실패했는가를 부르카를 두르고 동냥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미 :  아프간 현지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한 정서는 어떻습니까.

갱 : 2007년만 해도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치안이 상대적으로 낳은 카불은 다국적군을 ‘필요악’정도로 봤고, 탈레반 강성 지역인 남부는 반미, 반 외세 정서가 강하다. 한국군에 대한 정서를 특별히 파본적은 없어 잘 모르겠다. 여러 정황과 보도로 볼때 지금은 외국군대에 대한 정서가 의심의 여지없이 더 나빠졌다.

미 : 한국 언론 보도를 챙겨보시는 지 궁금합니다. 하신다면 최근 정부의 아프간 파병 결정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의 문제점은 없었습니까?

갱 : 한국 언론 국제 보도를 최대한 챙겨보는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특파원 조차 외신 의존도가 높아 별로 참고할 만한 게 없다. 이런 흐름이 기본이고 대세인데, 불현듯 나 버린 파병결정에 불현듯 깊이와 전문성 있는 기사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익을 위한 파병’ 같은 ‘국가주의적’ 의제외에는 별다른 의제 설정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뭐 좀 분석해보려는 노력하는 언론정도가 ‘중동 전문가’ 를 활용하는데, 아프간은 중동이 아니다. ‘아프간 탈레반’은 중동,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세를 키우는 알카에다하고도 연결망이 있지만, 아프간 영토가 역사적으로 뿜어온 특유의 민족주의적 저항 색채와 종교적 광신주의를 기반으로 한 파시스트적 성격이 결합된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현장발 보도가 아니라는 전 언론의 공통점을 감안한다면 한겨레가 상황에 대한 이해나 전문가적 식견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미 : 미국의 아프간 추가 파병 결정을 해외 언론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갱 : 해외 언론도 다양할 터인데, 공신력있는 분석과 보도에 기준으로 본다면 오바마 행정부의 대 아프간 전략이 현실성 없음을 지적하거나 의구심을 표하는 분위기다. 이라크에서 철군을 명한 오바마가 아프간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실험 정도로 관찰하는 것 같다. 오바마는 3만명 파병을 발표하며 이미 2011년 7월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군 시작을 언급했다. 이들 언론은 향후 18개월간 아프간 군과 경찰이 급격히 개선되지 않는 한 미군이 떠난 자리를 그들이 제대로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대화는 파슈툰의 전통”

아래 인터뷰 역시 2008년 2월에 진행한 것입니다

- Penseur21 갱 –

아스판디아르 왈리 (아와미 민족정당 대표) 인터뷰

대화는 파슈툰의 전통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모두 방어에 나설 -

이슬라마바드=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아와미 민족 정당은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에 비폭력 노선을 표방는 파슈툰 세속정당이다. 파키스탄을 모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당의 창시자 압둘 가파르 칸의 무덤은 현재의 파키스탄 영토가 아닌 아프간 동부 중심 도시 잘랄라바드에 있을 정도다. 파슈툰 족이 두루 걸쳐 사는 파키스탄북서부와 아프간 동남부의 지리적 반경을 고려하면 ‘국경없는’ 파슈툰 민족지형을 잘 보여주는 사항이다.  소비에트의 아프간 점령 시절에는 파키스탄의 국가정책과 달리 친소 입장을 지니기도 했고 당의 비폭력 노선은 인도의 간디이즘에 기반하고 있어 인도의 의회당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족지대의 탈레반화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북서 변경주의 지방 정부를 이끌 당 대표, 아스판디아르 왈리 칸을 이슬라마바드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2008년 2월말). 창시자 가파르 칸의 손자인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조부의 ‘자주노선’은 ‘과거지사’라 일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파키스탄 헌법 개정을 통해 파슈툰 지역의 ‘자치’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탈레반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화만이 해결책이라고 강변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질> 불안한 치안상황때문에 책임감도 크고 할 일도 많을 것 같다.

답> 산더미다. 그동안 국제사회는 파슈툰족이 모두 근본주의자이고, 테러리스트인양 이미지를 씌워왔지만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 걸 이번 선거가 잘 보여주었다. 우리 선거 캠페인의 기조는 우리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스판디아르 왈리 칸 (아와미 민족정당 대표)은 파슈툰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거부하는 세속주의 정치인이다. 소수민족 자치 문제와 이슬람 근본주의 문제가 심각한 현안한 파키스탄에서는 아와미 정당과 같은 '민족주의+세속주의' 정치 세력들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2008년 인터뷰 당시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아스판디아르 왈리 칸 (아와미 민족정당 대표)은 파슈툰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거부하는 세속주의 정치인이다. 소수민족 자치 문제와 이슬람 근본주의 문제가 심각한 현안한 파키스탄에서는 아와미 정당과 같은 '민족주의+세속주의' 정치 세력들이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2008년 인터뷰 당시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질> 이번 선거에서는 그게 먹혔지만 과거를 들춰보면 좀 다른 것 같다. 2002년 선거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한)  종교 정당 연합(MMA)이 집권할 수 있었고, 또 탈레반 무장 세력이 파슈툰 족에 기반한 건 사실아닌가. 그 점때문에 파슈툰 족의 이미지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비춰진 것 같다.

답> 누가 탈레반을 키웠는가? 우리가 아니다. 그걸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

질> 얼마전 파키스탄 주재 미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요구했는데, 그 전쟁에 대한 당의 구체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답>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지난 60년간 부족지대를 봐라. 파타(FATA) 지역민 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는가? 정치 개혁이라곤 없었고, 영국 식민지 시절의 통치  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왔다. 당신이 억울하게  종신형을 받아도 항소할 법이 없다. 이게 정의인가?  당신 부족에서 다른 누군가 범죄를 행하고 당신이 그 죄값을 치른다면 그게 정의인가?  정당, 정치대표자들이 그 지역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그 지역에 정치 개혁이 있어야 하고, 경제 개발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적 개발이 오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누군가 지나치게 배가 고프다면, 그는 자신의 하는 짓이 민주적이건 반 민주적이건 ,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 상관하지 않게 된다. 그 지역민들의 박탈감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질> 문제를 군사적이 아니라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해결…

답> (말을 막으며) 당신 한국에서 왔다고 했는데 북한과 남한이 몇 년간이나 갈라져 있었는가?

질> 60년이 넘는다.

답> 그러나 양측이 대화를 추진하는가 하지 않는가?

질> 대화 중이다.

답> 봐라. 군사적 방식으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치적 방식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북한과 남한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질> 그렇다면 군사적 방식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하나?

답> 대화를 시도나 해봤나. 기회를 주란 말이다.

질>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전혀 없다는 얘긴가?

답> 우린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다. 파슈툰 사회에서 우린 대화하는 그 모임을 ‘지르가’(Jirga : 원로 부족회의)라고 부른다. 지르가는 같은 의견을 가진 두 집단이 대화하는 게 아니다. 한 집단과 의견이 다른 또 다른 집단이 대화하는 것이다.  부족지대를 보면 탈레반도 아니고, 기성집단도 아닌 지역민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우선 대화 상대로 유용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과의 대화는 시도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대화’라는 건 전쟁중인 탈레반 세력과 정부측 사이의 전유물이었다. 그건 파슈툰의 전통이 아니다.

질> 하지만, 최근 탈레반 사령관 베이툴라 메수드 대변인은 대화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답> 그 지역에는 세 가지의 무장 세력이 있다. 알카에다, 아프간 탈레반, 그리고 지역 탈레반. 우린 이들 세 세력의 차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지역(파키스탄) 탈레반과의 대화를 먼저 시도해야 한다. 이들이 지역민들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통제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그 지역민들이 이슬람 무장 세력을 지원하는 것부터 막고 그리고 나서 지역 탈레반과 대화를 하는 거다.

지역민들의 탈레반 지원라인을 끊는 대화 단계

질>  미국과 서방동맹들은 알카에다 소탕 등을 이유로 군사작전을 거듭 강조하는 분위기다.

답> 불가능한 얘기다. 심지어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 조차 아프간 탈레반과의 대화를 얘기하고 있다.

질> 미 대선 후보 오바마는 (가끔 부인하기도 하지만) 파키스탄 트라이벌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꾸준히 언급하는데 어떻게 보나?

답> 만일 파키스탄에 군사적으로 공격이 가해지면 우린 전부 방어에 나설 것이다.

질> 이번 선거 직후 지역 탈레반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답> 그들은 선거 결과를 환영했다. 그리고 (당신이 언급한대로) 대화를 희망하고 있고.

질> 최근 당신은 당신당에서 주 장관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답> 민주주의는 다수당이 지배하는 것 아닌가?

질> 하지만, 과거 당신 당이 제 1당일 때도 주 장관은 인민당(PPP)이나 나와즈 샤리프 당(PML-N)에서 나왔다. 그땐 왜 그랬나?

답>코멘트하고 싶지 않다.

질> 당신은 또 외교, 국방, 화폐를 제외한 영역에 대해서는 대폭적인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답> 그렇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우선 헌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고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의회 2/3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자치가 우리의 요구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질>  분리 독립을 위한 수순으로 이해해도 되나? ‘파슈투니스탄’같은…

답> 그건 아니다. 파키스탄 연방안에서의 자치,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  ‘파슈투니스탄’은 과거 이슈다.

질> 당 창시자인 당신의 조부는 (‘분리독립’에 대한 입장이 ) 분명하지 않았나?

답> 과거지사다. 현재에 집중하자.

질> 당신당의 비폭력주의 노선은 인도 간디이즘에 매우 가깝다. 인도와 상당한 밀착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답> 독립운동 당시 우리 당은 그 운동의 파트너였던 게 사실이다. 지금도 인도정부, 의회당(집권정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질> 여성 이슈에 대해 얘기해보자. 나 자신을 포함하여 파슈툰 문화가 여성들에게 보수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동의하는지?

답> 당신 이미 폐샤와르를 다녀왔고 우리 당의 지역 부의장 (여성)을 만나지 않았나? 그녀가 보수적이던가?

질> 그녀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정치에 진출한 예외적인 경우 아닌가.

답> 예외 아니다. 우린 분명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있다. 그러나 당신 말대로 부족지역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 맞다. 문제는 과연 과거 정부가 부족지대 여성 교육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써왔는가 하는 점이다.  학교가 없는데 어떻게 교육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나?

질> 학교가 적절히 있었더라도 보수적 가정에서 (딸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면 별 소용 없지 않나?

답> 폐샤와르에 얼마나 많은 학교가 있는지 여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지 봐라. 나만해도 큰 딸은 의사이고…

질> 당신 역시 상위계층의 예외성을 갖고 있지 않나?

답> (다소 언성을 높이며) ‘예외’가 아니라니까.  다음에 폐샤와르 다시 가서 여학교를 반드시 방문해 봐라.

질> (파슈툰 족에 기반을 둔) 탈레반이 여학교를 불태우고 하는 건 파슈툰 전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답> 나는 지금 탈레반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왜 당신은 탈레반이 파슈툰 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니까! 오해다. 탈레반은 파슈툰 사회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 탈레반은 “당신이 누군지 아는 그들이” (미국과 서방을 암시) 창조한 것 아닌가?  왜 다른 누군가 한 것을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

질> 많은 이들은 파슈툰 전통이 탈레반의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답>  당신이 파슈툰 전통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파슈툰 마을에 가봐라.  여성이 남성과 함께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보수적인 전통인가? 당신들 외국 언론의 문제는 이슬라마바드에 와서 거기 사람들하고만 얘기하고, 기껏해야 폐샤와르 가서 그냥 몇 명 사람과 얘기하는 것으로 취재를 다했다며 쓰는 것이다. 시골 마을로 가서 보란 말이다.

질> 진짜로 진짜로 그러고 싶은데, 외신기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폐샤와르도 사실 허가 구역이 아니다.  말 나온 김에 새로 들어설 정부가 취재 제한을 대폭 줄여주길 바란다.


파키스탄 ‘언더 파이어’

파키스탄이 또 다시 불타고 있습니다. 10월 5일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유엔세계식량계획 (WFP) 사무소가 폭탄 공격을 받아 5명이 사망한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15일 하루에만 5건의 연쇄 공격이 발생했고 이를 정신없이 진단하던 외신은 정신차릴 틈도 없이 오늘 (16일) 다시 북서변경주 폐샤와르에서 발생한 자살 공격 소식을 전합니다. 최소 12명이 사망했다고. 연이은 소식에 2년전 베나지르 부토 암살 전후의 파키스탄이 떠오는군요. 2007년 12월 부토 전 총리 암살 전후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폭탄 정국’이었습니다. 뉴스위크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이라크 보다는) 파키스탄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머릿 속에 두 개의 기사가 떠올라 화일을 뒤졌습니다. 그때의 ‘폭탄 정국’에 이어 치뤄진 2008년 2월 총선 취재 당시, 총선 취재를 마치고 북부로 올라가 비자가 허락하는 시간만큼 쥐어짰던 기록들입니다. 하나는 파키스탄 북부의 ‘탈레반화’에 대한 기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와 관련한 인터뷰 입니다.

시간대를 맞추지 못해 세상에 내밀지 못한 1년 8개월 묵은 글이지만 작금의 불타는 파키스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리라 자족하며 거친 원고 두 개를 연이어 신고합니다.

- Penseur21 갱 -

========================================

‘무법지대’에  ‘햇볕정책’을

라호르, 이슬라마바드, 라왈핀디, 폐샤와르 = 이유경 penseur21@hotmail.com

흔히들 그곳을 ‘무법지대’라 부른다. ‘아프간 탈레반’을 포함하여  ‘지역 탈레반’ (혹은 파키스탄 탈레반), 그리고 알카에다 세력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훈련받는 아프간- 파키스탄 국경지대.

파키스탄 헌법이 자국 영토로 규정한 네 개 지방(펀잡, 신드, 북서변경주, 발로치스탄)에 속하지 않은 채 ‘부족 자치지대’ 로 남아있는 와지르스탄 중심의 파타(FATA:Federally Administrative Tribal Area)지역, 소수민족 발로치들의 분리투쟁공간이면서도 아프간 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2001년 후퇴한 아프간 탈레반의 재건 본부가 되어 버린 퀘타시 주도(州都)의 발로치스탄주 그리고 최근 ‘지역 탈레반’과 파키스탄 군이 탈환과 재 탈환을 반복하는 스왓 계곡이 속한 폐샤와르 주도(州都)의 북서변경주(NWFP). 이들 지역이 대체로 ‘무법지대’에 속한다. 이중 파타(FATA)와 북서 변경주 일부 지역은 여성도 이따금 사고 판다는 부족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 통상 ‘부족지대’로도 불린다. 물론 지방 정부가 운용되는 폐샤와르 같은 대 도시는 부족자치지역은 아니다.

“이 지역 전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두개의 전선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남부 발로치스탄을 거점으로 아프간 탈레반이 나토군 중심의 외국군대와 대치한 전선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국에서 유입된 알카에다 세력이 지역 탈레반, 아프간 탈레반 일부와 함께 미군 중심의 외국군대와 대치한 동부(파키스탄쪽에서 보면 서부) 전선이다”

아프간 수도 카불의 차량 폭탄 현장에 사설 경비업체 보안직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출동했다. 아프간 탈레반이 급성장해온 남부가 나토 중심의 ISAF 연합군의 몫이라면, 사진 속 경비업체 '보안군'들을 포함 미국의 특수 부대 등은 아프간 동부(파키스탄 서부) 알카에다 색출 작전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런 이중 전선의 성격을 잘 파악해온 파키스탄이 수년간 벌여온 이중 플레이로 인해 아프간동부-파키스탄 서부의 국경 지대는 알카에다의 여전한 거점과 지역 탈레반화 가속화를 보고 있다  (2007년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아프간 수도 카불의 차량 폭탄 현장에 사설 경비업체 보안직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출동했다. 아프간 탈레반이 급성장해온 남부가 나토 중심의 ISAF 연합군의 몫이라면, 사진 속 경비업체 '보안군'들을 포함 미국의 특수 부대 등은 아프간 동부(파키스탄 서부) 알카에다 색출 작전에 주력해왔다. 물론 남부전선에서도 이 사설 '보안군'들에 의한 인권침해가 발생한다 (2007년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탈레반’의 세계적 대가이자 ‘탈레반’의 저자인 아흐마드 라쉬드(60 )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2001년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몰락한 후 미국은 서방 세계에 더 위협적인 동(서)부 전선에 몰두한 반면, 아프간과 남아시아 지역에 더 위협적인 남부전선은 방치해왔다. 바로 이점이 파키스탄의 이중 플레이를 가능하게 했다. 즉 파키스탄은 남부 탈레반은 지원하는 반면, 동서부에서는 대 탈레반 군사작전까지 벌이면서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하는 듯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으로서는 숙적 인도에 맞설 장기적 전략지대로 아프간에 친 파키스탄 정권을 심어야 한다는 해묵은 국가이익이 있다. 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 그랬듯 미국이 ‘언젠가는 아프간을 버리고 떠날 것’이라는 게 파키스탄의 전망이라고 라쉬드는 분석한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아프간만 버린게 아니다.  파키스탄도 버린 적이 있다. 70년대에는 상대도 않던 군부 독재자 지아울 학(Zia-ul-Haq) 정부를, 미국은 80년대 들어 대폭 지원했다. 아프간에서 벌인 ‘대소 대리전’ 10년간 약 300억 달러 가량을 옆나라 파키스탄의 독재자에게 퍼부으며 소위 ‘무자히딘 전사’들을 무한대로 길러냈다. 오늘 날 지구촌을 숨막히게 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씨앗은 이때 왕창 뿌려졌다. 그러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 등을 이유로 원조도 단절하고 경제 제재로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또 다시 왔다. 9.11 이후다 대 탈레반, 대 알카에다 전쟁을 위해 전쟁 파트너 파키스탄이 필요했기에. 그러나 미국과 ‘배신’ 혹은 ‘전쟁 파트너십’ 관계를 반복하며 쓰라린 경험을 해온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독자적인 이익을 견지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테러 전쟁에 호흡을 맞추는 능구렁이가 되었다. “(아프간) 남부 탈레반을 지원하는 건 파키스탄의 ‘국가정책’이다” 라고 라쉬드는 못 박는다.

‘전쟁 파트너쉽’으로 나고 자란 이슬람 근본주의

그런데 문제는, 방치된 남부는 그렇다 치고 ‘신경써 온’ 동(서부) 전선에서도 탈레반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80년대 지아울학 군부 독재 기간 급성장을 보여온 이슬람 무장 세력은 9.11 이후 무샤라프 군부 독재 기간 ‘제2기 급성장’ 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파트너로 삼은 두 군부 독재 하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이 특히나 잘 자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2기’를 보자.

두 명의 파키스탄 여성이 얼굴까지 가린 히잡을 두른 채 라호르 시내를 걷고 있다. 비교적 안전하고, 개방적인 문화의 도시로 명성을 이어가던 라호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급성장으로 더이상 폭탄 공격의 예외지역이 아니다. (2008년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두 명의 파키스탄 여성이 얼굴까지 가린 히잡을 두른 채 라호르 시내를 걷고 있다. 비교적 안전하고, '개방적인' 문화의 도시로 이름을 유지하던 라호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급성장에 영향 받으며 더이상 '폭탄 예외지역'이 아니다. (2008년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2002년 7월, 파키스탄 10만 대군은 국가 탄생 60년만에 처음으로 ‘부족지대’에 진입했다. 그리고 천 명 이상의 희생을 낳도록 지역탈레반, 알카에다와 교전을 벌여왔지만 결과는 탈레반화의 가속화였다. 관광지에서 교전지로 돌변한 스왓 계곡(북서 변경주) 은 아주 좋은 보기이다. 또 2월 18일 총선 전후로는 탈레반 사령관들이 폐사와르 인근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후보들을 협박해하기도 했다.

“우린 이슬람 율법을 지지하고 그 율법 하에서 평화롭게 살아왔다. 파키스탄 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상황이 엉망이 됐다”

스왓 지역 에서 총알장사도 하고 운전도 한다는 카이르 울 바샤르(43, 가명 )는 파키스탄 군이 군사작전을 벌이기 전만 해도 스왓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한 평화적인 자치지대였다”고 말한다. 그는 “파키스탄군이 우리를 전쟁으로 몰았다”며 평화롭게 이슬람 율법이 도입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스왓 계곡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수피 모하마드라는 인물이 이슬람 율법을 도입하고 그에 따라 통치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던 지역이다. 수피는 2001년 아프간 전쟁터로 향하던 길에 구속되었다. 그리고 3년전(20005)부터는 종교 지도자 마울라나 파주룰라라는 인물이 FM 라디오를 개국하여 이슬람 율법 통치와, 반미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부족지대에 대한 파키스탄 군의 군사 작전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더 즈음이다.

그 와중에 설교에 불붙인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된다. 2006년 10월 30일, 부족지대인 바주르 지역 마드라사(이슬람 종교학교)가 아프간 동부에 위치한 미군기지에서 쏜 것으로 추정되는 공습을 받았다. 이 공습으로 80여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희생자 대부분은 마드라사 학생들이었다. 이 공습으로 동생을 잃은 FM 방송의 파주룰라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라며 설교톤을 한층 높여갔다. 그리고 주민들은 ‘탈레반 설교’에 흠뻑 젖어들어갔다.

스왓계곡이 결정적으로 탈레반 점령으로 들어간 계기는 지난 해(2007년) 10월 라마단 기간 발생한 납치범 처벌 사건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세 건의 납치 사건 피고들이 ‘파주룰라 법원’ 앞으로 끌려나오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쇠철 몽둥이 태형’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고 파주룰라 부대에 의해 죽지 않을 만큼 얻어 맞았다. 이 사건이 바로 스왓계곡에 대한 정부의 군사작전을 불러들였다. 파키스탄 법체계에 도전한 괘씸 죄의 모양새였다. 이에 파주룰라의 FM 설교는 더더욱 톤을 높여갔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무샤라프 정권이 이슬람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슬람을 보호하고 싶으면 나를 지지하라!”

이 지역 출신 주민 아낄(가명, 44) 에 따르면, 파주룰라의 이런 선동적 FM설교에 지역민들은 늘 준비된 총을 들고 파키스탄 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내 고향인 이맘 바리 마을 주민들도 전부 (파키스탄 군에) 맞서 싸웠다. 우린 지하드를 통해 이슬람을 지킨다” 아낄의 말이다. 그리고 11월 초, 파키스탄 군경은 스왓계곡을 떠났고 이곳은 결국 탈레반 점령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최근 파키스탄 군이 재 탈환했다고 주장하며 기자들을 실어날라 현장을 보여주긴 했지만 글쎄다. 스왓은 여전히 피로 물들고 있다.

2월 29일, 그 전 한달 간 소문으로만 떠돌던 정부측과 지역 탈레반간의 협상이 북부 와지르스탄 한 관료에 의해 ‘확인’되던 바로 그날이었다. 스왓에서는 오전 자살 공격으로 숨진 경찰관의 오후 장례식에서 또 다른 자살 공격이 발생했다. 장례식에 참여한 조문객 중 44명 가량이 사망했다. 선거 전 날인 2월 17일에도 군 건물이 공격 받아 최소 10여명이 죽었지만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현장을 유일하게 취재한 사진기자 아민울 무굴(로이터/EPA 소속)에 따르면 십여명은 거뜬히 넘을 만한 사고 였지만 군이 입을 굳게 닫았다고 했다. 3월 2일에는 다라아담켈이라는 부족 지대에서 10대 소년이 알카에다와 탈레반 세력 소탕을 논의하던 마을 원로들의 모임을 공격하여 43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도 발생했다.

현재 파주룰라는 당국의 수배를 받아 지하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FM 설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레반 설교는 ‘FM’을 타고

이처럼 부족 지대의 탈레반화 이면을 뜯어보면 우선, 이슬람 율법통치를 환영하는 주민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섣부른 군사 작전으로 이반된 민심이 탈레반화의 제법 큰 동력이 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각종 탈레반 사령관들이 이런 민심을 이용하여 세력을 넓혀가고 있고 우즈베키스탄 출신 등 알카에다 세력 역시 현지 주민들(특히 남부 와지르스탄)의 ‘신세’를 몇 년째 지고 있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자살폭탄과 전쟁에 지친 주민들이 최근 세속주의(비종교주의) 정당에 더 많은 표를 준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율법을 도입하는 ‘탈레반식’ 정치에 대한 호감이 완전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도 탈레반이다. 싸우는 탈레반이 아니라 가난한 학생들이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마드라사의 수많은 학생들처럼 나는 그 순수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념을 신봉한다”

바주르 지역 출신 무하마드 쿠르시드는 ‘탈레반’의 이념적 틀에 동의하는 자신을 기꺼이 ‘탈레반’이라 부른다.  필자는 무하마드 쿠르시드와 같은 ‘나도 탈레반’ 정서를 지난 해(2007) 봄께 아프간 남부 탈레반 태생지 인 칸다하르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탈레반의 기자 납치 사건에 누구보다 분노했던 기자 파르잔 (당시 30세) 조차 ‘탈레반의 이념’만은 고결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정서는 정치권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6년간 북서변경주 지방 정부를 운용해온 ‘종교근본주의 정당연정(MMA)’ 소속 ‘자마떼 이슬라미’. 이 정당은 민족주의(주로 소수민족) 운동그룹, 좌파 그룹 등과 손잡고 이번 선거를 보이콧했다. 자마떼 이슬라미의 북서 변경주 사무총장 샤비르 아흐마드 칸의 말을 들어보자.

“이번 선거에서 종교정당들이 낮은 득표를 얻은 건 “종교정당들의 패배가 아니라 자마떼 울레마이 이슬람(JUI)’(선거에 유일하게 참여한 종교 정당으로 ‘자마떼 이슬라미’와 경쟁당이다)의 패배다.”

이슬람 근본주의 자체는 건재하다고 간접적으로 항변한 것이다. “파슈툰족은 전통적으로 아주 신실한 종교인들이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물론 폐샤와르 시내 도심으로 나오면 분위기는 조금 ‘다양해진다’

폐사와르 중심가에서 영화와 음악 CD를 파는 이프티카르 아흐마드(38)는 종교정당연정이 폐샤와르를 주도로 한 북서 변경주 지방 정부로 있을 당시를 '암흑의 시기'였다고 표현한다. 2008년 총선에서 종교정당은 패배했지만 탈레반화는 파키스탄 전역에서 급진전되고 있다. (2008년 촬영/Photo by Lee Yu Kyung)

폐사와르 중심가에서 영화와 음악 CD를 파는 이프티카르 아흐마드(38)는 종교정당연정이 폐샤와르를 주도로 한 북서 변경주 지방 정부로 있을 당시를 '암흑의 시기'였다고 표현한다. 2008년 총선에서 종교정당은 패배했지만 탈레반화는 파키스탄 전역에서 급진전되고 있다. (2008년 촬영/Photo by Lee Yu Kyung)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던 2년전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음악, 영화 씨디들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폐샤와르 발 사진이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를 탔다. 2월 말 다시 찾은 폐샤와르는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아와미 민족정당이 압승한 선거 결과 때문인지 생각만큼 테러 공포가 감돌진 않았고 시장도 활기찼다.

“암흑의 시대였다. 수십만 루피를 잃었다”

드라마 PD이자 폐샤와르 시내에서 음악, 영화 씨디 가게를 운영하는 이프티카르 아흐마드(38)는 탈레반 등 이슬람 무장세력과 호형호제 해온 종교 근본주의 정당연정(MMA)통치시절에 대해 묻자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역시 2월 초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가게 문을 닫지 않으면 우리가 철거해버릴테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도 무슬림이다. 이슬람이 음악을 금지한 걸 잘 안다. 어느 종교든 나름대로 금지하는 것들이 다 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지구촌 시대 아닌가?!” 그의 항변이다.

반면 니아즈 칸(무역업, 40)같은 이는 이 지역 탈레반들의 싸움은 외세에 대한 독립 저항 투쟁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파슈툰 족 출신의 악명 높은 군벌이자 아프간 동부 전선에 여전히 민병대를 가동중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90년대 초 아프간 무자히딘 정부 기간 총리 역임) 를 파슈툰 족 사이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지도자로 꼽았다.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지만 누구도 우리 파슈툰족을 정복하지 못했다. 가장 평화롭던 스왓계곡 사람들조차 싸우는 걸 봐라”이 지역에선 보기 드물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이 깔끔한 비즈니스 맨은 “전쟁에 올인한 미국은 이제 경제적으로 망할 것”이라며 달러 하강을 예로 들기도 했다.

‘붉은 사원’ 이후 도심으로 뻗은 자살공격

이제 탈레반화의 여파는 부족지대과 폐샤와르 같은 지방도시를 넘어 수도 이슬라마바드, 군사 행정 도시 라왈핀디, 심지어는 비교적 안전하던 문화의 도시 라호르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토의 귀국길 자살공격에다 이미 종파 폭력(시아파와 수니파의 폭력적 갈등)으로 유명한 남부 도시 카라치는 말할 것도 없다.

2월 25일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라왈핀디 몰거리에서 발생한 자살공격은 도심공격의 아찔함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냈다. 군의관 무샤탘 베이르 중장을 비롯한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공격이 군본부와 대통령 관저에서 도보로 10분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위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이었다. 그리고 3월 4일에는 라호르 시내 해군학교가 또 다른 자살 공격을 만나 5명의 목숨을 잃었다.

G_BombBlast.Pindi_080225 118_SM

2월 25일 라왈핀디 몰거리에서 발생한 자살공격 이후 파키스탄 경찰이 통행자들을 통제하고 있다. 이날의 공격은 군본부와 대통령 관저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치안 경계지역에서 발생했다 (2008년 촬영 / Photo by Lee Yu Kyung)

이전에는 좀 처럼 볼 수 없었던 자살공격의 도심진출은 지난 해 7월 3일 발생한 붉은 사원 사건이 터진 이후 급증한 현상이다. 이슬라마바드 ‘G6 섹터’ , 악명 높은 정보국 ISI와도 근접해 있는 붉은 사원과 인근 마드라사는 도심과 부족지대의 무장 세력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시민사회와 치안 전문가들이  ‘수’를 써야 한다고 정부를 향해 끝없이 조언해왔지만 무샤라프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그러던 정부가 마사지 센터 중국 여성들이 마드라사 여학생들에 의해 ‘매춘 혐의’로 납치된 이후에야 무자비한 폭격으로 맞선 것이다. 사원안에 있던 어린이 여성을 포함하여 2천 명 가량(시민단체 추정)의 목숨을 앗아 간 엄청난 규모였다 (정부와 미디어 발표는 1백 여명). 최근 암살당한 베나지르 부토 역시 “군사작전 외에는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자극적 성명으로 군사작전을 변호해 시민사회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그날 이후 파키스탄 전역은 피로 물들고 있다. 붉은 사원 폭격 당시 사망한 붉은 사원의 물라(Mullah) 압둘 라쉬드 가지의 ‘보복예언’대로다.

그래도 군사개입을 원하는가

군사 작전과 강공책이 부추긴 파키스탄 서부 전선 (혹은 아프간 동부전선)의 탈레반화 현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알카에다 은신처로 추정되는 부족지대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간헐적으로 흘리고 있는 듯하다.

부족지대 무장세력과 싸우는 파키스탄 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22명의 교관을 조만간 파병하겠다는 미국의 최근 입장은 이런 맥락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미국의 발표가 나온 지 하루 만인 3월 5일 이번에는 영국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교관을 파병을 검토중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민주당 미 대선 후보인 오바마는 “파키스탄이 안하면 우리가한다”는 입장으로 이 지역에 대한 대 작전을 직간접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현지 주민, 전문가 그룹, 정당 등 누구라도 할 것없이 이런 군사적 개입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두손 들고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미 자국 군대의 개입조차 심한 부작용을 야기한 데다 ‘반 무샤라프 감정’과 연계된  반미 감정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외국군대의 개입이 가져올 결과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부족지대 주민들의 박탈감이 크다. 박탈감을 치유해 주면서 무장세력에 대한 협조부터 끊어야 탈레반화를 막을 수 있다”

이슬라마바드 주재 독립적 띵크탱크 그룹인 ‘파키스탄평화연구소’ (PIPS) 소장 아미르 라나(34 )는”최후 수단이어야 할 군사 작전이 그 동안 첫 번째 수단이었다”며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탈레반 세력과 대화가 가능하긴 한가?”고 묻자 “아주 가능하다. 베이둘라 메수드(부토 암살범으로 지목된 탈레반 사령관. 2009년 8월 미군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조차도 대화가 가능한 인물”이라고 강변했다.

실제로 지난 3-4년간 이 지역의 휴전과정을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아 보인다. 2004년 4월 정부와 남 와지르스탄 사령관 넥 무하마드 와지르간의 첫번째 휴전은 두 달 후 미국이 발사한 헬파이어 미사일로 와지르 사령관이 죽으면서 깨졌다. 휴전 협상 대표를 죽이면 휴전이 깨진다는 건 ‘휴전선’의 상식이다. 그리고 최근 2005년 2월 합의된 남 와지르스탄 휴전도, 2006년9월 북 와지르스탄에서 합의된 휴전도 앞서 언급한 붉은 사원 사건 이후 모두 깨졌다. 결국 ‘미제 미사일’과 ‘붉은 사원 폭격’이 아니었다면 휴전은 유지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2월 18일 총선이후 제 1당이 된 인민당과 예상외로 선전한 나와즈 샤리프의 파키스탄 무슬림 리그(PML-N) 등 주요 정당들 조차 너나 없이 대화를 입에 올리고 있다. 특히 북서 변경주를 집권하게 될 아와미 정당의 입장은 남다르다.  북서변경주 부의장인 시따라 임란(여, 38)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처음부터 군사 작전을 반대해왔다. 군사작전이 뭘 해결했나? 우린 파슈툰 족을 잘 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가 필요하다”

수세기 전쟁에 지쳤지만 언제든 싸울 준비 된 부족 지대 사람들. 한편으론 탈레반화에 쉽사리 휩쓸리면서도 또 다른 한편 자살폭탄에 지쳐 ‘평화로운 이슬람 율법’을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총을 영원히 사장시킬 그 날은 정말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스리랑카에 첫 한국어학교 설립된다”는 기사를 읽고

“스리랑카에 첫 한국어 학교가 세워진다”는 아래 기사를 보고 고개를 마구 마구 가로 젓습니다.  

‘아니 무슨, 지금 스리랑카에 절대적으로 시급한 건 ’한국어 학교’ 보다는 북동부 타밀 난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인데…’ 하는 생각이 우선 머리를 쳤고,

기사를 계속 읽어 내려가자니 한국 학교 세운다고 홍보하는 <지구촌나눔운동>의 ‘상황인식’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난데 없는 감도 있지만 한국어 학교를 왜 세우냐고 따져 묻는 건 아닙니다. 외국인 노동자 고용과 곤련하여 실시되는 고용허가제에 따라 이주노동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한국어 시험 등 일련의 과정을 고려하면 이주 노동의 욕구가 높은 스리랑카에서 예비 노동자들에게 한국어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건 명분이 있습니다. 그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해온 <지구촌 나눔운동>이 그에 ‘기여’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스리랑카 정부입장에서 보면, 북동부 타밀난민들은 굶어 죽든 말든 관심없을 터이지만, 남부 주류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를 받들자면 자국 노동자들의 외화벌이에 도움이 될 조치들을 지원하는 건 당연합니다. 참고로 ‘관련일화’ 하나 전하면, 스리랑카 정부는 그들이 ‘대 타밀반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이용해온 친정부 타밀 민병대 TMVP 대원들에게 ”한국에 보내주겠다” 고 구슬리며 이용해 온 모양입니다. 지난 3월 인터뷰 당시 그 대장이 그러더군요, ”정부가 우리 애들을 한국에 취업시켜주겠다고 했는데…소식이 없네…” 한국기자인 제게 ‘주파’를 던진 거지요. 순진한 대장 같으니라구.     

스리랑카 정부는 수 만명 소수타밀족을 학살을 댓가로 5월 19일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마감 선언하였으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피난민 캠프에 대한 구호 단체의 진입을 제약하는 악랄하고 희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 기간 중 전투 지역에 갇힌 민간인들, 특히 어린이들 상황에 대해 심각함을 경고했던 유니세프 대변인을 최근 쫓아냈습니다. (아래 관련 기사)

http://penseur21.wordpress.com/2009/09/07/colombo-evicts-unicef-official/

“스리랑카의 민주주의를 위한 기자들” 이 폭로한 비디오에 따르면, 전쟁포로인지 민간인인지 발가벗긴 채 뒤로 묶인 비무장 인간을 현장사살하고 킥킥 웃는 게 스리랑카 정부군입니다. (물론 ‘일부’이길 간절히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아래 CNN 보도에 관련 영상이 잠깐 등장 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Oo7WD_dQMw&feature=related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온 그들은 지금 전범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아래 글을 클릭하시면 약간의 상황이라도 감지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스리랑카 인권운동가이자 ‘지학순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 운동가의 편지를 일전에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http://penseur21.wordpress.com/2009/09/06/%e2%80%9c%ec%a0%84%ec%9f%81%ec%9d%80-%eb%81%9d%eb%82%98%ec%a7%80-%ec%95%8a%ec%95%98%ec%8a%b5%eb%8b%88%eb%8b%a4%e2%80%9d/ 

그런데 소위 ‘나눔 운동’을 한다는 단체에서 발언한 것으로 인용된 아래 문구는 도대체 무슨 오묘한 뜻을 담고자 한 겁니까?         

“지난 26년 동안 정부군과 타밀반군 간에 진행된 내전이 5월 종식됐으나 여전히 외국 비정부기구(NGO)의 진입과 활동이 제약을 받는 스리랑카에서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모두가 제약받고 있지만 우리는 스리랑카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얼마큼 깊다는 것인지요? 정작 지원받아야 하지만 막힌 피난민 캠프의 상황은 아래와 같이 비참합니다.   

http://penseur21.wordpress.com/2009/10/03/channel-4-footage-reveals-sri-lanka-internment-camp-conditions/

곧 우기가 시작됩니다. 피난민 캠프에 끔찌한 질병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지구촌 나눔운동>은 보다 더 시급한 ‘나눔’을 위해 북동부에 인도주의적 지원활동을 벌이겠다고 스리랑카 정부에 ‘푸쉬’ 해본 적이 있는지요?

‘진정성 떨어지는 인도주의적’ 소식을 다룬 이 ‘애국적’ 보도에 민망할 따름입니다. 

아래는 해당기사입니다. 인터넷 한겨레에서 퍼 온 연합 뉴스의 기사이며 연합 뉴스 외에도 몇 몇 언론이 보도자료 옮기듯 유사하게 썼습니다.

- Penseur21 갱 -

====================

<스리랑카에 첫 한국어 학교 설립된다>

현지정부 부지 무상제공 등 전폭 지원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것을 계기로 `한글 세계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스리랑카에도 ‘한국어학교’가 설립된다.

시민단체 지구촌사랑나눔은 저개발국에 `학교세우기’ 운동을 벌이는 손광운 변호사와 함께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인근에 현지인들을 위한 한국어학교 등을 세우기로 스리랑카 정부와 합의했다고 8일 밝혔다.

지구촌사랑나눔의 실무 책임자와 손 변호사는 11월21일 현지로 떠나 스리랑카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키로 한 학교 부지를 실사하고 정부 관계자와 만나 착공시기와 규모 등 구체적인 설립 계획을 협의할 예정이다.

지구촌사랑나눔은 부지가 확정되면 초등학교, 한국어학교, 컴퓨터 교육시설, 소규모 병원 등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스리랑카에는 그동안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봉사단을 현지 학교에 파견해 한국어 교육을 해 왔으나 민간 차원에서 한국어학교가 설립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구촌사랑나눔 관계자는 “지난 26년 동안 정부군과 타밀반군 간에 진행된 내전이 5월 종식됐으나 여전히 외국 비정부기구(NGO)의 진입과 활동이 제약을 받는 스리랑카에서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특히 국내 이주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해 활동해온 이 단체와 10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마힌다 자라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은 학교 부지의 무상 제공과 행정적인 편의를 약속하는 등 학교 설립에 각별한 관심을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 회원이자 외국인 인권운동가인 손 변호사는 지난 2006년 파키스탄 대지진 때 현지에서 구호활동을 벌인 것을 계기로 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서 `학교세우기 운동(Korea Wish School Project)’을 벌여오다 이번 사업에 동참하게 됐다.

이 단체 관계자는 “스리랑카에는 한국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망이 대단히 높다”며 “이번 한국어학교 설립이 양국의 우호관계 증진은 물론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성훈 기자 cielo78@yna.co.kr (서울=연합뉴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스리랑카 인권운동가로부터 온 편지 (8월 1일, 2009) -

아래 편지는 스리랑카 인권운동가이자 2009년 ‘지학순 정의 평화상’ 수상자인 루키 페르난도 님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소수 타밀족은 물론 (인종을 불문하고) 반 정부 인사에게 가해지는 정권의 살인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루키님은 스리랑카 내전으로 인한 인권 침해 실상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국제사회에 알려온 인물입니다. 아래 편지는, 정부군이 선포한 내전 ‘종식’ 이후의 스리랑카 상황을 요약 하면서 국제사회, 특히 한국  시민사회가 행동에 나서줄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국내 일부 언론과 운동가들께서도 편지를 받으셨을 줄 압니다만, 늦게나마 한글로 번역하여 보다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자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8월 1일 받은 편지인데 ‘인터넷이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을 떠난 지금에서야 올리는군요. 님들이 속한 조직과 까페 동무들에게 널리 퍼뜨려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

- Penseur21 갱 -

————————-

5월 중순,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 타밀 타이거(LTTE)의 패배를 선포하고, 타이거의 군사 및 정치 최고 지도자들의 죽음과 그들이 7년간 통치하던 영토를 수복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싱할라 커뮤니티 (스리랑카 다수족)는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였습니다. 눈여겨 볼 대목은 타밀 커뮤니티(스리랑카 소수민족) 사이에서는 이런 축하행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타밀 타이거에 대한 동정과 지지가 없는 나의 타밀 친구들조차도 종전을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타밀 타이거의 손에 고통 받은 경험이 있거나 심지어 타밀 타이거에 매우 비판적인 이들인데도 말입니다.

싱할라족의 축하행사는 수 많은 타밀인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부상자들과 함께 비참하게 울부짖는 와중에 벌어졌습니다. 280만명 이상의 타밀족들은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음식도, 물도, 거처도, 의료시설도 그리고 친구나 친지를 자유롭게 만날 자유조차 박탈 당한 채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난민캠프에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있습니다. 하여, 나의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엔지오 일꾼들, 불교도, 크리스챤 성직자들까지도 (다수족들의) 종전 축하에 참여하는 걸 보며 저는 비탄을 금할 길 없습니다. 이건 마치 한 누이의 장례식이 뒷방에서 치뤄지는 동안, 같은 집 앞방에서는 또 다른 누이의 결혼식이나 생일축하 파티를 여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두 행사를 동시에 말입니다! 축하 분위기가 일정하게 수그러들긴 했지만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 많은 관심들이 북쪽 (최후까지 교전이 벌어진 지역) 에 맞추어져 있는 동안, (2년전 전투가 종료된) 동부 지역 피난민들은 아직도 기본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살해로, 실종으로, 정부군과 동맹한 무장 세력(주로 타밀 민병대)에 의한 어린이 병사 모집 등으로 말입니다. 동부 피난민들은 그들이 돌아가기 두려워하는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습니다. 피난민들과 (강제 이주 후) 재 정착한 이들을 위한 생필품 부족현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부지역과 수도 콜롬보 그리고 여타 다른 지역에서 검문소 수치는 줄어들었고, 고기잡이에 대한 제약조치도 완화되었지만 말입니다.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 어부들의 고기잡이 조치를 번번히 제한해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어왔음 – 역자 주)

반 정부 인사에 대한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타밀 타이거와의 종전 이후 되려 새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콜롬보 외곽과 지방선거가 예정되었던 북부지역에서는 저명한 기자가 납치 되고 구타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북부지역에서는 신문들이 불타고 미디어 조직들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법조인과 인권운동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위협과 협박 조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야당의원들은 경찰에 심문당하고 유효한 비자를 소지한 외국 국회의원(카나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 그나마 유일하고도 미미하게 구호활동을 벌이던) 국제적십자사(ICRC)는 정부로부터 활동 폭을 줄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일꾼들과 기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표현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감금당하고 있습니다. 전투 지역에서 극단적인 어려움과 위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부상자 치료를 감행했던 의사들 역시 감금중입니다. 그 전투 지역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민간인들과 함께 남아 그들을 돌보던 여섯 명의 신부들과 수녀들도 마찬가지로 감금 중입니다. 또 다른 카톨릭 신부는 군 검문소에서 보인 모습을 마지막으로 실종상태입니다. 최근 킬리노치 지구 (Kilinochchi : 타밀 타이거 통치 구역의 수도이며, 올해 1월 2일 정부군에 의해 재 점령된 지역)의 정부 집행관(Government Agent : 스리랑카 각 주마다 배치된 공무원 수장을 일컬음)이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의사도 구속되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비록 정부는 가장 잔인한 테러리스트 조직과 그 지도부를 패배시켰다고 주장하지만, 2006년 이래 벌어진 수많은 인권침해에 대해서 그들은 단한 번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위에 열거한 최근의 사례들을 포함하여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에는 국회의원, 구호단체요원, 기자, 신부에 대한 암살도 포함됩니다. 인권운동가, 유엔 그리고 일부 외국 정부 (한국정부는 제외입니다) 가 스리랑카 전쟁 기간 국제법을 위반한 사례에 대한 국제적 규모의 수사를 하자고 요구해왔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이런 요구를 묵살하고 있습니다.

지학순 평화상 수상이후 저는 태국과 캄보디아, 프랑스, 스위스, 말레이시아 그리고 다시 한 번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방문길에 저는 스리랑카민간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언론과, 시민사회 그리고 정부 관료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시켰습니다. 그리고 4개월 이상 떠나 있던 스리랑카로 돌아온 게 약 한달 전입니다.

스리랑카로 돌아온 이후 저는 인권운동가들, 저널리스트, 교회 일꾼, 그리고 부상을 입거나, 감금되고, 위협에 놓인 이들을 지원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금된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법정에 참석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다른 이들을 조직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인도 뉴델리에 가서 기자회견을 열고 스리랑카 인권운동가들이 직면한 탄압상황에 대해 알렸습니다. 또한 타밀 피난민들이 이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며 캠페인을 벌이는 시민단체와 야당을 지지하는 활동도 한 바 있습니다. 저는 또한 북동부(타밀족 거주 지역) 친구들과 동료들과의 연락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일부와는 콜롬보에서 만났습니다. 동부를 방문하였고, 북부도 곧 방문할 예정입니다. 제가 운영하던 인턴쉽 프로그램도 재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부 출신 타밀인들은 인턴에서 제외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단체의) 마지막 타밀 인턴이 연행되어 두달간 감금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학순 평화상의 파급력에 대해

한국 정부는 2009년 5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 특별회의소집을 지지하였습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지지한 국가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또한 이 특별회의의 최종 결의안에서 스리랑카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투표에서는 기권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정부가 스리랑카 정부의 입장에 호의적인 결의안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길 바랬지만, 그나마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한국과 일본정부가 그 안에 찬성 투표하지 않은 건 다행입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지학순 평화상을 수상한 뒤 한국의 외무부 장관과 만났던 점, 그리고 스리랑카 상황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 저의 인터뷰 등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평화상 수상뉴스는 스리랑카 카톨릭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다른 조직들과 뉴스 웹사이트들도 나의 수상 소감을 보도해주었고, 스리랑카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을 야기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 수상 소감은 불어로도 번역되어 온라인에 올려졌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밝힌대로, 저는 제가 받은 상금을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인권운동가와 그 가족들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상금 중 큰 부분을 떼어 위협과 감금에 시달리던 한 인권운동가 (그는 북쪽 출신 타밀입니다)와 그의 가족이 이 나라 밖으로 피신하는데 썼습니다. 또 16개월째 감금 중인 기자의 아내에게도 큰 몫을 기부했고, 전투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환자들을 치료하다 감금된 의사들 (5명) 중 한 명의 가족에게 식비로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감금 중인 또 다른 기자의 안경 구입을 위해서도 제 상금이 쓰여졌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십시오

대 타밀 타이거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되었지만 타밀 민간인들과 정부 비판자들 (인권운동가, 기자, 법조인, 교회 지도자 그리고 국회의원들)에 대한 전쟁과 탄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제 수상소감에서 밝힌 호소를 이 글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바입니다.

“제게 이 상을 수여하고 축하해 주고자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 단순히 이 자리 참석하는 데 그치지 말아 주십시오. 한국 국민들, 종교(교회) 지도자들, 정부 지도자들, 또다른 영향력 있는 이들과 단체들을 동원하여 탄압받는 스리랑카 국민들과 인권운동가들을 지지해주십시오. 우리는 권리와, 존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실천방안을 제안합니다.

첫째, 스리랑카의 민간인들과 인권운동가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인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업데이트 해주십시오. 한국정부가 스리랑카 정부와의 양자회담에서 이런 이슈들을 다루도록 압력을 넣어 주십시오. 더 나아가 한국 정부가 IMF, 세계은행, 아시안 개발은행 등 스리랑카에 기부하는 기관들과도 만나 스리랑카 문제를 의논하도록 요구하십시오.

둘째, 한국 언론에 스리랑카 인권운동가와 민간인이 탄압받는 실상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고, 한국 언론이 스리랑카 정부에 대한 우려의 표시를 하는 보도를 하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문제제기와 우려의 표시는 유엔회의 (제네바와 뉴욕)에서 의제화될 수 있습니다.

셋째, 위혐과 협박에 처한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역시 필요합니다. 만일 – 정부가 아닌 – 한국 국민들로부터 그런 지원이 온다면 대단히 큰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한국 시민사회와 교회, 종교 단체들을 조직하여 인권운동가와 민간인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을 벌이는 스리랑카 정부에 항의 하는 시위와 행동을 보여주십시오. 이 행동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Follow

Get every new post delivered to your Inbox.